지금 내 아들 또래의 청년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수석을 다투었던 그 22세 청년은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접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졌다.
아들은 “빨리 군대 갔다 와서 돈벌어 편히 모시겠다”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두 살 아래 여동생이 있었다. 늘 오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여동생이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자마자 20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다. 적금 만기는 오빠가 제대하고 돌아오는 때로 맞췄다. 오빠 대학 등록금이었다.
아들은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건 형체도 알 수 없이 불타버린 시신이었다.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에서 숨진 경찰관 6명 중 한 명인 모성태 수경이었다. 모 수경을 포함해 6명 중 5명은 20대 초반의,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청년들이었다.
또 한 어머니가 있었다. 동의대 사태 직후 연행됐다 곧바로 풀려난 1학년 학생의 어머니였다. 아들의 손을 잡고 분향소를 찾은 어머니는 통곡했다.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어머니는 “네가 어떻게 행동했건 결국 사람들을 죽인 결과를 빚게 된 것 아니냐. 앞으로 그 ‘죄갚음’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며 넋을 놓았다.
부산 동의대 참사 당시 취재하고, 송고했던 신문기사들을 찾아보니 가물가물하던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니,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어머니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취재기자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청년들의 부모인 것처럼 슬픔과 분노가 새삼 솟구친다.
20년이 지나 또 다른 ‘어머니들’이 나타났다. 그중 한 어머니가 아들의 ‘민주화 운동 공적’을 무너뜨리려 한다며 국회의원에게 백주 폭력을 휘둘렀다. 국회의원은 동의대 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한 김대중 정부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재심 법안을 준비 중이었다.
거창한 얘기는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국회의원은 폭행을 당한 직후 “대한민국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 이건 나라도 아니다”라고 울먹였지만, 나는 ‘죄갚음’ 대신 욕지거리와 폭력을 선택한 그 어머니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20년이 흘렀으니 ‘죄갚음의 공소시효’도 끝났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흉통(胸痛)이 밀려온다.
공소시효를 둬서는 안 될 일이 또 있다. 당시 경찰지휘부의 무지(無知)한 진압방식이다. 선배는 이런 취재 후기를 남겼다.
“사건 현장인 동의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머리에 떠오른 것은 철없는 학생들의 행동과는 별개로 ‘경찰의 무모한 진압이 빚은 결과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날 작전에 동원된 경찰관들은 부산시경(경찰청)으로 몰려가 시경국장의 퇴진을 주장하고, 분향소에 세워져있던 국무총리와 장관의 조화를 짓밟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권위주의 시대 경찰 조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한 경찰간부는 “학생들의 희생 없이 사건이 이 정도로 끝난 게 오히려 다행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만큼 무모하고, 무지했다.
어느 순간, 이런 얘기들은 ‘불편한 진실’이 돼버렸다. 돌이켜보면 용산 참사가 빚어진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첫댓글 저녀옥국괘 위원도 자식을 키운다면 그아들이 그럿켓 당햇다면 입장 바궈 생각좀해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