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학교 부학장까지 역임하였던 철학자 朴庸坤 씨는 황장엽 선생과도 친한 주체사상 전문가였다. 황 선생이 한국으로 탈출한 이후 그도 조총련과의 관계를 끊고 의미 있는 폭로를 하고 있다. 그는 1972년 조선대학교에 재직할 때 북한노동당 정권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대학생 200명을 김일성 환갑 생일 선물로 북송한 사실을 고백한 적도 있다. 이하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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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으로 끌려간 200여 명의 朝大 학생들(조선대학교 연구, 산케이신문)
여성 영화감독 양영희 씨의 12세 연상의 오빠(당시 朝大 1학년)도 북송자로 지명되어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자전적 영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번역/김필재(金泌材)
제5장
<북송된 200명의 朝大학생>
朝大의 전 부학장인 박용곤 씨가 2007년 NHK 방송에 출연하여 1972년 북한의 지시에 따라 朝大생 200명을 김일성의 환갑 축하 대표단으로 북한으로 귀국시킨 사실을 처음 공개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다.
당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는 朝大에도 전해져 온다. 정경학부에서는 스스로 참여를 희망했던 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리스트에 올라간 200명은 총련 간부나 유력 상공인 자녀가 많았다. 돈을 뜯어내고 함부로 언행을 못하게 하려는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박 씨는 북한행을 꺼리는 朝大생과 학부모를 열심히 설득했다. 그는 “축하대표단으로 귀국을 하게 되면 김일성 종합대학에 들어가 졸업 후에는 사회주의 건설의 지도자로서 공헌할 수 있다. 외국으로 가서 활약할 수도 있다. 그냥 일본에 있으면 취업도 못하고 활동 무대도 좁지 않느냐”면서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박 씨는 그때까지 북한에 간 적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지상낙원’이라는 거짓선전 문구를 믿었다고 한다. ‘조공’으로 보낸 朝大생 200명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총련과 朝大의 공식기록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총련과 朝大가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던 비밀이었다.
그는 왜 이 사실을 공개했을까?
“참회다. 내가 저지른 죄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할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정말로 말하고 싶었다. 처분을 받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계 바늘을 되돌리고 싶다. 김일성이 60세 생일을 맞은 것은 1972년 4월15일이다. 총련에서는 그 전년부터 전 조직을 가동하여 회갑연을 준비했다. 여기에 앞장 선 인물이 ‘김일성 절대화’의 흐름에 힘을 빌려 한덕수를 대체하려 했던 김병식이었다.
김병식은 김일성 저작집의 간행과 황당한 혁명역사연구실 설치, 혹은 회갑연 축하 자전거 릴레이 달리기 등을 산하 단체와 각 사업체에 명령했다. 이와 함께 총액 50억~100억 엔으로 알려진 김일성을 위한 호화선물을 준비하도록 했다. 기계류나 차량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만든 작은 물건까지 준비시켰다. 여성들이 선물을 제작할 때에는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시킬 정도로 성심을 다했다. 산더미 같은 선물 중에는 귀국선을 타고 북한에 상륙하여 평양까지 서둘러 도착한 약 60명의 젊은이와 朝大생 남녀 약 200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국에 대한 충성심을 표출하는 증거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권세를 자랑하던 김병식의 딸도 여기에 동참했다. 1959년에 시작하여 1984년까지 약 9만3000명의 재일한국인, 그리고 배우자와 아이들이 참여한 북한 귀국 사업은 북한과 총련이 주도한 ‘국가적 사기’였다는 사실은 앞서 지적했다. 의식주가 공짜라는 선전을 믿고 全 재산을 총련에 기부하고 배에 탔는데 북한은 ‘지상낙원’은 커녕 주민들의 생활은 가난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다. 일본으로부터의 귀국자라는 것만으로 직업과 결혼, 주거지까지 차별을 받고, 있지도 않은 간첩행위를 의심받아 평생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 귀국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참상과 거짓선전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귀국 사업 참여자는 격감하기 시작했다. 결국 朝大생들은 사업의 부진을 호도하기 위한 ‘조공’으로 취급된 것이다.
<북한에서 만난 朝大학생>
60대의 朝大문학부 출신 졸업생은 당시 소동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몇 명의 知人이 직접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에서 지명을 해도 거절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朝大 2학년이었던 후배도 거절했다. 부모가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표단으로서 기개를 갖고 참여했던 학생도 있었다. 한 사람은 북한에서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여성 영화감독 양영희 씨의 12세 연상의 오빠(당시 朝大 1학년)도 북송자로 지명되어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자전적 영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두 오빠가 귀국(북송)하고 난 후 곧이어 조선대학교 1학년생이었던 첫째 오빠가 재일동포 북송단에 지명됐다. 1972년 4월15일 김일성 주석의 60회 생일을 맞이했다. 총련은 김병식 제일부의장의 명령에 따라 왕성하게 북한으로 선물을 보냈다. 당시 60주년 기념선물의 메인(main)이 ‘인간선물’이었다. 위대한 주석님에게 전도유망한 일본의 젊은이들을 헌상하는 것이었다. ‘주석님’의 환갑을 축하하는 ‘충성의 일대 프로젝트’는 ‘애국’, ‘충성’이라는 미명 하에 정치단체 내의 권력파벌을 둘러싼 대리 투쟁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희생된 것은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출처: <가족의 나라>)
양 씨의 부친은 총련 간부였고 어머니는 열성 지지자였다. 그녀 자신도 줄곧 조선학교를 다닌 것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다. 1971년 3명의 오빠 가운데 둘째와 셋째 오빠는 이미 귀국사업에 참여하여 북한으로 갔다. 당시 귀국사업은 북한의 참상이 전해진 후 열기가 식어 참가자가 급감했다.
“조선학교에서는 귀국사업을 둘러싼 악평에 대해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측의 프로파간다라며 속지 말라는 교육이 행해졌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성실하고 단결력이 강했고,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대로 일본에 남아도 조직의 사람이 되거나 재일한국인들이 많은 파칭코 업계라든가 불고기 집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판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런 때였다. 이 때 두 명의 오빠가 ‘귀국하겠다’고 하니 학교에서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도 자랑스러워했다. 사상교육의 성과로 보고까지 했다. 이웃과 학교에서도 송별회가 열렸고 오빠들도 ‘이제 와서 가지 못하겠다’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국선이 니가타에 도착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가지말까’라고 하자 어머니가 ‘아버지 입장도 생각해야지’라며 타일렀다.”
이때 둘째 오빠는 고교생이었고, 셋째 오빠는 아직 중학생이었다. 양 씨의 부모는 3명의 아들 가운데 이미 두 명을 귀국시켜 조국(북한), 조직(총련)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장남은 피하고 다른 형제를 보내면 괜찮을 것이라는 소문도 내부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지명은 자의적이었다. 박용곤 씨가 밝힌 것처럼 총련 간부나 유력 상공인, 反권력자파의 자녀들이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양 씨의 부친은 어떻게든 장남의 참여만은 중단하고 싶어서 열심히 움직였으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큰 오빠도 조직 내에서의 부친 입장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큰 오빠를 보낼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세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미 두 오빠를 북조선에 바쳤으니 장남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문답무용(問答無用)이었다. 나는 정말 놀랐다. 그리고 왜 여태 가만히 있었느냐고 화를 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큰 오빠는 북한에서 병을 얻어 60세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고지식하고 섬세했던 큰 오빠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둘째 오빠로부터 첫째 오빠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그녀는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 첫째 오빠가 죽었대요.”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아이고,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그게 무슨 얘기니. 언제? 왜? 그럴 리 없다. 아이고, 불쌍해라”
어머니는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흐느꼈다.》 (출처: <가족의 나라>)
어머니는 눈물을 멈춘 뒤 총련으로 가서 평양방문 신청을 했다. 딸의 동행도 함께 신청했는데 영화 <디어 평양> 이후 북한 입국이 금지된 양 씨의 북한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큰오빠 死後 양 씨는 오빠의 朝大 재학시절 동급생을 만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가 지명된 이유는 아버님을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조직에 충실했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진상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문제(朝大생 200명의 북송)가 총련과 朝大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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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계 조선대학교 前 부학장의 고백
2017년 08월23일
조대 부학장으로 23년간 근무했던 일본 최고의 ‘주체사상’ 전문가로 알려진 박용곤(89세) 씨.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학자이다. 그는 2017년 3월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어느 재일동포 사회과학자의 산책>을 출판했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1960년대 총련, 조대 내에 몰아쳤던 극심한 권력투쟁 광풍에 휩쓸려 노이로제가 되어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것이다.
1972년 북조선의 지시로 김일성의 환갑 축하를 위해 조대생 200명을 '조공물'처럼 북으로 보낸 내막이 있다. 그리고 박 씨 자신이 평생을 연구했던 주체사상은 김정일에 의해 왜곡되어 김일성 신격화에 이용됐다.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1960년 조대가 고다이라의 신캠퍼스로 옮긴 이듬해, 정경학부 교원이 되어 학부장, 부학장을 역임했다. 총련 산하 재일본조선사회과학자협회(사협)의 회장직을 10년 지냈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와도 가깝게 지냈다.
무수한 총련 간부가 배출된 조대 정경학부에서 제자는 수천 명으로 총련 중앙의 현 간부들의 경우에도 그의 지도를 받은 자가 많다. 그는 조대의 '만물박사'라 할수 있는 인물이다. 조대의 초대학장으로 이후 종신 명예총장이 된 한덕수로부터는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1948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하여 아이치대에서 경제학을 배운 박 씨는 일본인 아내와 귀국사업으로 북한행을 결심했으나, 1960년 총련 중앙에서 조대 확충을 위해 교원이 될 것을 명령받았다. 담당과목은 조선경제사, 경제원론 등이었다.
“일본에 남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조선의 관습이나 음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총련 중앙의 결정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대 부임을 앞두고 인사차 학교를 갔던 박 씨는 돌연 굴욕적인 세례를 당했다.
<어느 재일동포 사회과학자의 산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대 교무부장은 입을 열자마자 “박용곤 선생을 조직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인 처와는 헤어져야 할 겁니다. 이것은 충고입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에게 대꾸했다. “출세를 위해 아이치대를 그만두고, 조대에 온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학생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에 왔습니다. 아내와 헤어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나는 갑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조대의 초대, 이대, 삼대 학장 모두 일본인이나 백계 러시아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학장이 되기 전에 이혼을 했다.>
같은 입장의 총련간부도 비슷한 조치가 내려졌다. 비슷한 시기 조대의 강사로 근무했던 러시아 문학자 스미 케이코(角圭子)는 총련 중앙 간부였던 남편 정우택(鄭雨澤)과 헤어진 뒤, 조대 강사직도 함께 잃게 됐다. 그녀는 이를 자신의 저서 <정우택의 처: 안녕이라고 말하지마>에 기록을 남겼다.
조대에서는 철저히 '일본과의 관계'가 문제시 되었다. 박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비록 우수한 학생이라도 어머니가 일본인이면 영예의 표시라 할 수 있는 칭호를 받을 수 없다. 간부양성의 정경학부는 특히 엄격했다. 아무리 총련 중앙에 제안을 해도 안 된다. 내 경우도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그러한 학생들을 보는 게 마음 아팠다.”
그 이후에도 박 씨에게는 '일본인 처' 문제가 따라다녔다. 학장 승진 문제가 나오면 아내의 문제와 함께 지역감정의 대립이 심한 '전라도 출신' 문제가 거론됐다. 호남 출신이 조대 학장이 되면 유력 상공인 등이 많은 영남 출신들의 기부금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년을 앞두고 박 씨는 한덕수로부터 '최후의 충고'를 받았다.
“학교 경영의 문제(전라도 출신)는 내 자신(한덕수)이 어떻게든 보조하겠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최고학부인 조대의 학장 부인이 '일본인'이라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즉, 일본인 아내와 이혼하면 총장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씨는 이를 거절했다.
“나는 지금의 상황(부학장)으로 족합니다.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23년 동안 부학장으로 근무하면서 박 씨는 조대 학장이 되는 날은 결국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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