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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맹크 |
마티스 |
고흐에 대해 주관적이고 열정적인 감정을 갖고서 그를 찬미했다. |
고갱의 냉정한 그림에 대해 초연한 호감을 보였다. |
블라맹크와 드랭의 궁극적 목표는 局地色(local colour)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들만의 시각체계로 무장하여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
⇒ " 자연을 자유롭게 하며 낡은 이론과 고전주의적 권위로 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전적으로 나의 세계인 그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거대한 충동을 느꼈을 뿐이다."
--- 블라맹크
작품/ 작가:
마티스의 [ 화사함,고요함 쾌락 Luxe, Calme et Volupte](1904) : 야수파가 나아가야 할 진로에 대한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신인상파의 점묘법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더욱 주관적 색채를 사용했을 뿐더러, 누드의 형태를 철저히 단순화시켰고 단지 장식적 기능만을 고려했다. 즉 작품속의 모든 것이 '묘사적'이지 않고 오로지 '장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누드(여체)에 대한 인상이 아닌 주관적으로 묘사된 하나의 형상(Shape) 로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 여백도 채색된 부분만큼 동등한 효과를 지니는 미술의 요소로 인식되었다. 표현의도를 성취하기 위해 선과 색의 본질적 부분만을 구사.
⇒ 이 작품을 통해 마티스가 신뢰했던 미술의 1차적인 장식적기능에 따라 색채화가로서의 상상력에 경도되게 된 것이다.
⇒ 이러한 현실도피적 성향은 멀리는 들라크루아에서 고갱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의 기이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고, 1890~1900년대 화가들을 사로 잡았다.
* 드랭과 더불어 마티스는 고갱이 ① 전통적 원근법을 무시하고, ② 화면을 응축시켜 장식적 단위로 만들었다는 점과,③ 색채선택이 자연적 외양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에 기대어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했던 것이다.
* 블라맹크는 원시적 직관으로 신중하게 작품을 제작, 관례적 사물보기를 무시. 단색판화나 아프리카 조각에서 시각의 원천을 구했다. "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을 하나 하나의 순수색으로 전위시켰다. 어떤 정해진 방법을 기피하고 예술적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을 전달 했던 것이다." -- 블라맹크.
⇒ 블라맹크의 이러한 관심은 찬미하는 차원에서 정지했지만, 피카소는 그림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튜브에서 곧바로 짜낸 임패스토(impasto:두껍게 칠한 안료)의 굽은 선으로 표현. 관람자로 하여금 물감이 회화의 실재적 부분임을 인식시킨 것이다. 이러한 블라맹크의 급진적 그림들은 독일 표현주의,'다리파'에 가까운 양식을 기대하게 된다. 블라맹크에게 중요한 것은 '순수한 색'의 즐거움과 그것의 정서적 힘에 대한 연구이었다. 하지만 그의 급진주의는 화면밖으로 확대되진 않는다. 그의 주제 선택과 구성은 인상파에서 연원한다.
영향:
마티스의 [생의 환희 Joie de Vivre]1906에서는 보들레르가 보여줬던 상상력의 세계, 또는 마음의 상태를 창조해내려는 이러한 시도가 보여진다. 즉 마티스는 당시의 문학사조와 놀랄만큼 밀접해 있었던 것이다. 1906년은 야수파는 앙데팡당展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마티스의 [ 화사함,고요함 쾌락 Luxe, Calme et Volupte](1904)가 보들레르 시에서 영향을 받았듯이,[생의 환희 Joie de Vivre] 는 상징주의 시에서 발견되는 쾌락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 자연을 그대로 복사할 수는 없다. 자연을 해석해서, 그것을 그 그림의 정신에다 예속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 마티스.: 그의 그림은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에서 시각적 해석을 얻은 듯 하다.
마티스의 색채구사는 고갱의 시적인 열망과 쇠라의 준과학적 분석에 근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시각적임과 동시에 분석적이다. 선과 색의 조화로 감각이 가라앉고 한편에서 이러한 조화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마티스가 영향을 받은 것은 결국 세잔이다.: 사물에 대해 전통적인 감각을 전복했다는 점이 그 둘의 공통분모이다.
블라맹크에서 보여지듯이, 야수파는 표현해야 할 회화적 요소를 감소시켰고 비유럽적 요소와 원시 아프리카 조각에서 상상력과 자기 감정의 자유로움을 시각적 원천으로 삼았다. 블라맹크나 드랭의 인상주의에서의 영향은 인상주의의 재연적 반응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성있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재해석(re-interpreted)된 반응을 통해서 이다.
드랭에게도 색채란 그림의 테마였고 재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시도했던 것도 바로 이 색채라는매체를 통해서 인 것이다.
후기:
1907년 야수파의 퇴조(?)에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입체주의가 연구되기 시작한다. 또 드랭도 입체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표현주의( Expressionism )
배경: 위기의 시대란 시대의 불안을 반영하는 예술품을 산출한다.
표현주의의 전범으로 종교 개혁전야의 뒤러, 보슈,등의 표현주의와 20세기 의 묵시적 불안감은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또,극적 명암, 풍부한 색채와 개성적 열정적 터치를 보여준 베네치아파와 엘 그레코의 화풍은 표현주의 적이다.
⇒ 현대 표현주의의 2가지 특징: 포화상태의 회화기법 과 구성적으로 일그러진 조형형태
18세기 계몽주의의 질서 숭배는 19세기 들라크루아와 고야같은 낭만주의자들의 도래로 붕괴되었고 이것은 현대 표현주의의 직접적 기초가 되었다. 이들 모두 자연의 에너지에 대한 애착과 화폭의 색채 에너지에 매료되어 있었다.
즉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우주적 진리를 만들 수 있다는 모순된 신념이 탄생.
카메라의 등장: 엄밀한 자연주의의 일상화를 초래.
아르누보: 장식적인 면은 물론이거니와 형태,색채,선의 표현적 능력을 개척하기 위해 통상적 외양으로 괄목할 만한 해방을 획득.
18세기 독일의 '질풍노도'운동으로 북유럽국가의 지중해적 문화가 붕괴되기 시작.
작가:
고갱: 유럽문명에 대하 거부와 감정적 형태와 색채로 이뤄진 삶에 대한 찬양,
뭉크: 개인적 불행을 대중적 형태로 전이키 위해 환각의 이미지를 사용함.
고호: 강렬한 자연색과 정열적이고 절제된 자연의 변형을 통해 강력한 의사소통 시도.
로댕: 긴장된 외관/형태를 통해 강력하게 감정을 전달.
성격:
표현주의는 정치적 색채를 띠는 작품은 드문데도 불구하고 표현주의에 정치적 항의운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래서 좌익계는 표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精神化를 통해, 영혼으로 충전된 사고로서, 엄밀하게 말해서 표현주의는 반 자연주의적 주관주의 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다리파 ( Die Brücke ) |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 ) |
1905~1913 반 인상적인 성향. 이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젊은과 성급함이었다. " 위장없이 표현하는 모든 사람은 우리와 함께 속해 있다." -- 키르히너. 그들의 목표는 정력적이고 과단성 있게 행동하려는 욕구이다. 세련되고 생기없는 아카데미 예술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밝은 색채와 원시적 형태를 취했다. |
1912 칸딘스키, 마르크,클레등으로 구성. 칸딘스키의 경우, 주제를 배제한 미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전체적 표현성을 강조하고최대의 즉흥성을 얻기위해 즉흥기교를 발전시켰다. 청기사에는 쇤베르크와 베르크, 베베른..등 음악도 첨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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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발덴'의 [폭풍 Der Sturm] 은 독일과 중부 유럽의 전위 동향을 공표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 국제적 모더니즘을 베를린에 소개하는 일을 도맡다. 이러한 활동으로
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은 유럽의 '전위의 주도적 전시장'이 되었다.
빈 양식의 '아르누보'는 도피주의와 퇴폐주의를 옹호하는 경향을 띄었는데, 코코슈카는 그것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
칸딘스키의 생각은 자신의 내부에 깃든 러시아와 희랍정교의 배경은 신비쪽으로 그를 기울어지도록 다양한 창조적 영향력을 흡수하였다. 그는 미래주의나, 구성주의가 택한 길의 반대편을 택했다. 즉, 물질세계에 등을 돌리고 정신세계로 예술의 방향을 돌림으로서 물질 발달에 비중을 두어 생긴 불균형을 없애려는 시도를 했다. 칸딘스키는 미술의 시각적 요소를 인간의 내부의 삶과 직접 관련시키고자 했다. 추상을 통해서 예술가 내부의 정감적, 정신적 충동을 시각화 하고 조율했다. : 1912년 [폭풍]誌에서,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언급함으로서 청기사파에게 구성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면이 있는 국제적 예술운동과 자기 동일시 되도록 했다.
종말/영향:
1차대전 발발로, 미술가들이 그들의 미술을 모더니즘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켜, 안락한 미적 전통으로 되돌아 가게 한 반면, 몇몇 독일미술가들은 미술을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半인상주의적 묘사의 도구로서, 힘찬 다리파의 표현기법과 뒤러시대의 상징적 수단을 채택했다.
전후 독일 미술은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의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가령,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합성사진술은 입체주의보다는 독일표현주의에 가깝다.
1918~1923 독일 극장, 영화관, 무대 스튜디오의 장치는 다른 조형미술보다 표현주의가 득세하는 전성기였다.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바이마르에 바우하우스가 개설(1919). : 현대적 산업과 건축디자인을 가르치고 실습하는 학교로, 근본적으로는 표현주의의 영향아래 존립. 주요인물은 '클레','칸딘스키','파이닝거','이덴'과 같은 표현주의자였는데 그들은 청기사적 건설주의 표현주의자였다.
⇒ 23년이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예술가적 자기표현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디자인과 객관적 참여로 전환하자, '이덴'은 그곳을 떠남.
(* 칸딘스키 [평면으로 나가는 점과 선](1928): 예술가로 하여금 마음대로 표현수단을 통제하고,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색채와 형태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성문화한 책)
2차대전 이후, 구상 및 추상화와 짜임새 있는 구조의 조각들에서 표현주의가 발생.
입체파( Cubism )
1906년 피카소의 [아비뇽 처녀]들로 입체파 시대 개막. : 기존의 미학적 기준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美와 醜의 이분법적 구도를 해방시켰다.⇒ 이것은 20세기초의 가장 큰사건 이었다.
입체주의는 1911년 앙데팡당전에서 자기선언 을 하고 나섰다.
피카소 작업의 원천은, 고갱의 작업과 엘 그레코의 길게 늘어난 형태, 그리스 도기화의 요소들,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과 입체성.
성격:
형식주의적 이며, 회화의 절차와 가치들의 재평가와 재발명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의 현대문학과 유대를 함께 했지만, 문학적 인유(引喩)를 피했다.
사려 깊고 높은 지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반향적 예술이다.
[아비뇽의 처녀]가 영향을 받은 것은, 세잔의 작품을 통해서이다. 또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을 했는데, 이것은 이후 피카소의 행보에도 커다란 모티브가 된다.
全시대의 양식중 가장 세련되고 지성적인 것은 '원시미술'의 원리들이다.⇒ 자연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자신의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 피카소는 '재현적이고 동시에 반 자연주의적 미술'이 아프리카 미술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흑인미술이 입체파에게 넘겨준 유산은 하나의 새로운 미학적 견지를 준 유산, 즉 지적인 힘(intellectual force)이다.
⇒ 결과적으로 그림은 추상화되고 양식화되고 상징적이 되고 만다.
아프리카 미술의 몸체와 두상을 합리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자신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재평가의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았다. : 서구식 접근방법에서 느끼는 회의감과 불만에서 [아비뇽]은 2차원의 '표면'에 3차원적 '양감'을 재현하려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것. ⇒ 르네상스이후 작가의 주관이 거세된 이상주의적 원근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 대상을 180도 관찰하는 듯이 2차원적 평면속에서 입체감을 구현. : 동시적 시각( Simultaneous Vision) ⇒ 대상의 여러가지 모습(面)을 단일한 이미지로 융해하는 결과.
* 입체파는 19세기 이후 화가들이 전체의 통일성에 조바심을 느껴왔다는 점의 결과이다.
* 그들의 관심사는 주제를 주변상황과 통일시킴으로써 전체적 회화적 복합구도가 그 작가가 원래 대면했던 평평한 화폭속에서 항상 끼어들어 있다거나 연관성을 갖을 수 있도록 했다.
작가
피카소: 의식적으로 반원근법적 예술을 지향하여, 그 안에 묘사된 사물 하나 하나가 다양한 시점을 통합시키게 된다.
브라크 :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 피카소가 다양한 시점에서의 대상의 다양한 정보 수집에 앞장선 반면, 브라크는 '텅빈 공간' 즉 사람들이 르네상스 진공(Renaissance vacuum)이라 부른 공간을, 대상과 주제 그 자체만큼 중요하게 취급했다. 이제는 대상 뿐아니라, '공간'이 화두가 된 것이다. ⇒ 피카소가 구사한 복잡 미묘한 면이나, 小角面들에 대한 분석을, 브라크는 대상을 둘러싼 공간들에 적용. ⇒ 둘 다 세잔의 화폭에 내재된 것이었다.
세잔: 고호, 고갱이 색채와 공간을 추상화 했다면 세잔은 형태를 추상화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고체성과 구조의 감각을 성취하려는 노력은 사물을 기본적 형태 즉, '원추, 원통,구'로 환원시키게 되었다. : 대상의 다각도적인 조망을 가능케 한다.
⇒ * 대상의 깊이를 제한하면서 평평한 2차원 화면위로 회화적 공간을 앞축하는 효과를 산출.
입체파가 세잔에 대해 느낀 매력은 세잔의 그림의 대상들이 환각적 방법의 모든 전통적 체제를 무시하면서 고체성에 대해 놀라운 감각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세잔과 흑인조각의 공통점은 눈속임 없이 대상을 설명해주는 힘이다.
세잔 |
입체파 |
세잔은 회화적 왜곡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으며 입체파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식했다. |
세잔은 색을 중시한 반면, 입체파는 색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 단색조를 탰했다. |
브라크는 주변공간을 대상과 혼재시키면서 대상들의 윤곽선을 불분명하게 처리
⇒ 효과: 관람자가 소재들을 자연주의적 총체로서 재구성하여 관람하게 된다. 또 묘사된 대상과 그 대상을 에워싼 공간의 연속성 사이에 일종의 대화가 형성된다.
후기:
입체파의 방법이 더 추상화 되자, 그들은 지적이고 회화적인 일련의 장치들을 구사.
시계줄,머리카락,단추등...표현된 소재의 선택을 통해 관람자에게 재구성의 역할을 부여하며 소재를 보고서 형태를 유추케 했다.⇒ 스텐실 문자.
* 1912년 피카소와 브라크의 업적: 회화적 단서와 스탠실 문자들이 '실재'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 이후 1912년 경, 꼴라쥬를 통해 관람자의 경험의 부분들을 이루는 일상용품을 통해 관람자들의 습관적 지각방식과 예술가들이 제시하는 예술적 사실(artistic fact)사이를 연결시켜주었다.
브라크는 화면을 가로질러 써내려감으로서 문자들 뒤에 존재하는 공간은 환각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물질계내에서 공간이 텅빈 것임을 감촉할 수 있게끔 설계한 화가들의 공간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타블로 오브제 : 1913~14년경 유행. 그림이란 그것 자체의 독립된 생명을 지니고 외부세계를 반향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그 자체로 그것을 재창조하는 하나의 축조되고 구성된 대상이나 실체라는 것.
* 파피에 콜레의 원래 아이디어는 환각적 원근법에 대해 화가들이 처음에 외면해 버린 것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또 파피에 꼴레는 입체파를 그동안 괴롭혔던 색체를 입체파에 도입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준 것이다.
* 추상에서 시작하여 미술가들은 재현을 향해서 전진해 나갔다. '분석적'방식은 '종합적'방식으로 변형되어 성취되었다. : 꼴라쥬는 입체파 미학의 논리적 산물이었다.
피카소는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추상적 형태들을 '모으려는'(assemble)경향이 있었다. 그의 방법은 보다 직접적이었고, 실체적이며 즉각적이었다. 이때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고있었고, 아프리카미술의 조형원리에 대한 분석은 그의 창작과정에 똑같이 공헌하였다.
피카소의 나무,종이,주석등의 구성작품도 같은 모음(아쌍블라쥬:assemblage)의 원리들, 즉 아주 성질이 다른 요소들, 어떤 것은 강한 '기성품(ready-made)'의 특성을 갖는 요소들을 함께 모으고 조작하는 기교에 입각한다.
* 후앙 그리스(Juan Gris) : 종합적 입체주의가 가장 논리적으로 구현되는 작업을 했다.
그리스의 예술은 훨씬 해설적이고 문법적인 것으로 즉시 결정체화(crystallize)되어 버린다. 그는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저버리지 않고 색채의 구사 또한 더 자연적이 되었다. 그의 미술은 수학적 4차원의 이론과 근접해있는 과학적 입체주의 였다.
후앙 그리스의 콜라쥬: 콜라쥬의 쇄편들이 그에게 주변의 물질계와 접촉을 유지케 해준다는 느낌을 준다. 구체적인 사실적 요소를 끌어들임으로서 자기의 시각을 입증해야 될 필요가 적어졌던 것이다. 그에게 파피에 콜레의 필요성은 매체의 추상적 특성이 보다 큰 형식적 완전성을 가진 예술에 대한 그의 욕망을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리스에게 있어서 회화는 이제 상호작용하지만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1. 건축: 그는 그것을 회화의 추상적 구성이나, 하위구조로 이해,이것을 평평한 채색된 형상들로서 고안했다. 이 '평평하게 채색된 건축'은 '수단'이었다.
2. 캔버스나 그 주제에 대한 재현적 국면이다.: 추상에서 재현으로 가는 이 전재방법을 그는 '연역적'이요, '종합적'이라고 규정
⇒ 분석적 방법과 종합적 방법의 차이를 세잔과 비교해서 설명.
"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환원했고, 나는 원통으로 부터 병을 만들었다.세잔은 건축물을 향해서 작업했고,나는 건축물로 부터 작업해 나온다. "
피카소. 브라크 |
그리스 |
직관을 중시한 입체주의로, 20세기 초기의 원칙을 고수했다. |
지중해식 여유를 갖고서, 종합적 입체주의를 추구하여, 이후 몬드리안, 말레비치 리스츠키의 성향을 예고. |
1925 입체파의 종말이 선언된 해.: 피카소 [세명의 무용수](1925)으로 폭력성과 강박관념적 신경병성 감각으로 피카소는 초현실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그는 신고전주의적 母性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하면서 '부르조아적 순응주의'로 전향한다.
의의:
새로운 종류의 실재(reality)를 생산했다. 독창적이고 반자연주의적인 종류의 구상성(figuration)을 전개 ⇒ 추상과 재현 사이의 인공적 장벽들을 와해시켰다.
순수주의( Purism )
배경:
입체주의 보다 늦은 1918년 시작.
성격:
입체파는 자체의 중요성 혹은 전후 획기적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종식되었다고 주장. 1920~25사이가 전성기였다. 이들의 테마는 '명증성'과 '객관성'이었다.
기능적 균형효과의 아름다움이라거나, 지적인 것에의 편중, 개성적인 것의 무시, 정확성의 강조...등이 이들의 특성이다. 결국 순수주의는 청교도적이며 질서정연한 것이며 '데 슈틸'과 엄밀하게 같은 방식로 '절대적'이었다.
'오장팡'과 '잔느레'를 중심으로 예술에서의 쾌락의 종말과 기쁨의 우위를 설교.
기쁨 |
쾌락 |
균형적이고, 삶 내부의 질서를 위한 요구를 채워주며, 우리안에 내재한 지속적인 것을 만족시켜준다. |
불균형적이고, 식욕을 충족시키고, 순간적 흥취를 채워준다. |
순수주의의 의도는 예술에 하나의 '불변하는 기초'를 세우자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고전주의자다. 그러한 필수적 요인을 위해 숫자(Number)가 동원된다. 즉, 구조의 수적인 분배질서를 통해 '정형화된 순수, 불변의 법칙'에로 예술을 수렴하려 했다.
고전적인 사고와 계급적 사고 그리고 기능주의적 사고의 관점에서는 르네상스의 그것과도 흡사하다. : 균형과 조화를 삶의 진정한 법칙으로 규정했다.
[기계적 선택]: 공학, 건축, 회화에서의 기능주의를 오장팡과 잔느레가 인문적 용어를 풀이한 것. ⇒ '인체'가 화두가 된다. 사람의 몸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질서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간주.
[전형적 오브제]: 그 자체를 위대한 예술품의 주제로서 인간의 모습보다 더 상위에 놓는 일종의 진부성이 있다. 전형적 오브제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 남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입장:
예술은 유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인본주의를 통해 기능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또 인본주의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욕구속에는 예술에 대한 욕구도 포함된다. ⇒ 순수주의자들에게 기계는 중요하다. 기계는 인간의 지속적인 질서욕에 대해 늘 새로운 답을 제공해준다. 반면 예술은 새롭지 않지만 인간욕구의 해답을 제공한다.
일차적 형태적 주제를 상술하는데 그치는 예술은 단지 장식이다. 예술에서 기대되는 것은 '하나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다.
과학 |
예술 |
가변의 지식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계가 새로운 인식을 창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적 차원에 한정되어 있는 한 예술은 아니다. 기계과학은 항구적 가치를 지닐 수 없다. |
예술은 선, 형태, 색 등, 변할 수 없는 시각언어의 요소로 구성되었다. 예술은 지속적이고 불변한다. |
결론: 사물에 대한 순수한 접근방법의 측면에서 '순수주의'는 '데 슈틸'이나 '입체파'와 닮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객관적 기능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열정(Passion)이다. ⇒ '전형적 오브제'는 유지하되, 기능적 효율성과 미적 질서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르피즘 ( Orphism )
배경:
1911~14초 파리에서 발생한 순수주의 회화를 추구하는 경향. 시인 아폴리네르의 순수한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르피즘이란 '오르페우스적 규비즘'으로 불림.
작가:
들로네(Delaunay), 레제(Leger), 피카비아(Picabia), 큐프카(Kupka), 뒤샹...
성격:
의미와 감동을 전달키 위해 '형태'와 '색'에 의존하게 된 하나의 예술을 지칭. 자연주의적 구성양식에 의존하지 않고, 비자연적이고 역동적인 구성법을 통해 그 자체의 내부구조를 갖는 그림이다.
오르피즘은 구성적 예술의 대안을 추구하여, 구상예술이 그들이 초월하고자 하는 개념적 영역에 마음을 묶어둔다고 느꼈다. 그들은 현대의 변화속에서 세상을 정적이고 제한된 공간속에 있는 안정된 물체가 아닌, 역동적 힘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 이런 변화가 의식내부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확신. 그들 자신의 내적 존재와 외부에 대한 관계를 느끼게 해주는 진행과정으로, 바로 그 안에 몰입할 수 있는 회화양식을 발달시키면서 창작행위를 통해 이 같은 의식과 더욱 심오하게 접촉을 시도한다.
오르피즘은 의식의 내부에 몰입함으로서 외부세계의 징후에 무관심해 졌다.
⇒ 재현/모방이 아닌, 線과 色의 격동을 통해, 내부의 모습을 표출했으며 인간의 감동은 희박해졌고, 베르그송 철학에 근거하여, 반 인본주의의 성향을 띄게되었다. 새로운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 중심적 결정론은 와해.
⇒ 오르피즘의 목표는 그림 그리는 행위와, 그림 관람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향: 이들은 동양 신비주의와 神智學(Theosophy), 현대과학에 영향을 받았다.
1914년초, 피카비아는 性的 진행과정과 기계적인 것의 보다 뚜렷한 동일시화에 귀착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초현실주의의 조짐을 예고하게 된다.
미래주의 ( Futurism )
배경: 1909년 밀라노에서, 시인 '마리네티'(Marinetti)가 [미래주의 선언] 발표.
예술이 과거를 파괴하고, 속도와 기계의 동력이 주는 유쾌함을 찬양하길 희망. 이탈리아 문화를 짓누르는 오랜 전통의 부담에서 해방되기를 희구. 자신의 명칭도 스스로 선택한 자기선언에 가까운 선동적 사조이다. 이들은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입체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등이 주는 혼란을 극복키위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려는 요망에서 이런 시도를 모색하였다.
성격: 과학에서 신사조(개념)가 舊 사조를 대체하여 신체제를 구축하듯이, 미래주의의 주장은 과거의 작풍/작품을 청산하고 현재에 충실한 '현재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기술의 신장과 사회/사상의 발전은 참신하고 대담한 예술형식을 요구한다는 것. 양식(Style)보다는 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예술운동이다.
영향: 니체와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에 자극을 받았다.
작가/작품:
보치오니 1911 "우리는 광학적인 또는 분석적인 '인상'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psychical)이고 전체적인 체험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1911년 미래주의 첫 전시가 밀라노에게 개최.(보치오니, 루솔로, 카라) ⇒ 이들은 이후 파리에서 입체파의 영향을 받고, 입체주의식 형태를 단편화 시키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색채 분할주의>를 보충했다.
자코모 발라 Giacomo Balla,[가죽끈에 묶인 개] 1912 : 사진연구를 모방한 대표적 작품으로, 동작의 직관적 평가를 추상적 패턴을 통해 묘사했다.
발라,[사방으로 빛을 발하는 상호침투]1913~4 : 색조와 색채의 광학적 유동성 과 浮動性을 표현 ⇒ 1960년대, 옵아트의 선구격이다.
보치오니 Boccioni : 미래주의의 기본 테마인 '대도시','광선','에너지','기계의 운동''소음'등을 하나의 시각체험에 용해시킴. 가령 정지상태의 대상과 환경을 상호 침투시켰다. 이후 그는 조각으로 전향하여, 1912년 < 미래주의 조각선언 >을 발표.
⇒ 조각, 기념물의 범람과 그 배경인 그리스-미켈란젤로 조각의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 새로운 양식을 추구: 모든 종류의 재료가 조각 제작에 동원. 조각속의 모터장착도 고려.
조각도 회화에서 처럼 이질적 대상의 상호침투를 통해 표현된다.
산텔리아 Sant'Elia, 1914 <미래주의 건축선언> : 새로운 종류의 대도시를 제시. 역사상의 양식을 참고하지 않고, 신속한 수송시대와 인구집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계공학에 역점을 둔 건축양식을 추종.
종말: 1914~18 전쟁으로 미래주의는 종식된다. 마리네티는 파시스트가 된다.
의의: 입체주의와의 연관된 작업을 통해, 입체주의의 확산에 기여. 이후, 런던 소용돌이파, 모스크바 전위미술에 영향을 주며, 활판인쇄술에 영향을 준다.
소용돌이파( Vorticism )
배경: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가 1914년 런던에서 [Blast/돌풍]지 창간호를 발행.
엘 리스츠키 El Lissitzky는 [돌풍]지를 두고, 20~30년대 그래픽 디자인을 혁신한 신활판 인쇄술(New Typogrphy)의 선구자로 추대했다.
* 소용돌이파와 절대주의의 유사점:
그들이 입체파와 미래주의, 사진, 공학기술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유사.
* 소용돌이파와 미래주의가 다른점.
Ezra Pound : " 미래파는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다. 그것은 확장과 표면의 미술인 것이다. 반면 소용돌이파는 집중적인 성격을 띈다. " ⇒ 미래파는 근본적으로 얕은 평면을 가로지르는 연속적 이미지들을 가속화시키지만, 소용돌이파는 그 가속화를 깊이의 방향의 확대로 연관시키고, 돌입하는 듯한 원근감을 창조한다.
정의/성격:
거칠고 역동적 에너지의 표현이 특징이다. 이들이 업적은 서유럽의 기계적 야만성의 무모함과 환경파괴와 인간성 황폐화를 시각화 했다는 점이다. 이점은 입체주의의 이상화된 미술이나, 미래주의의 낭만화된 미술과는 차별되는 독자적 특징이다. 형태를 공간의 깊이속으로 가속화 시킨점은 20세기 미술에 대한 공로이다.
다다 ( DaDa )
배경: 1916년 후고 발(Hugo Ball)은 1차대전발발후, 스위스 취리히로 피난, Marcel Janco, Tristan Tzara, Arp와 함께 다다를 시작.
'다다'란 아이들이 최초로 내는 소리이며, 원시성과 최초의 출발을 의미한다. 예술의 새로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전쟁 종식후,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은 해산하여, 쾰른, 파리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국제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cf.뉴욕에선 뒤샹과 피카비아, 만 레이..가 활동.
작가:
Andre Breton: " 다다는 일종의 정신 상태이다." 전쟁으로 젊은 미술가와 시인은 불만에 새로운 근거와 긴박성이 생기고, 전쟁은 탐욕과 물질주의에 입각한 고통임을 절감했다. 미술가들과 시인은 유산계급과 그 체제를 적敵으로 간주했는데, 자신들이 그들의 유산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예술이 상거래 행위라고 인식하여,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 나려고 탈출선언을 시도 한 것이다.
(* 다다의 역설: 그들 자신은 파멸될 사회에 의존하고, 사회와 예술의 파괴는 미술가 자신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는 다다 자신의 파괴인 것이다.)
피카비아: " 진정 추악한 것은 예술과 반예술이며, 어떤 예술이건 나타나자마자 생명은 사라지고 만다." 피카비아의 다다시절 작품은 본성상 일시적이고 흔히 오락과 전시를 위해 제작되었기에, 公衆을 유인하는 근거가 된다.
⇒ 다다이스트는 진정한 합일점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겐 결코 '양식style'조차 없다.
" 현대 미술품은 작가가 만드는게 아니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의 비우월성은 다다의 기본 관심사였다. : 대상과 창조자 사이의 연관은 사라지고 인간과 기계가 만든 것 사이에 근본적 차이점이 없어진다. 작품 제작상 유일한 인간적 개입이라면 오로지 '선택'정도 이다.
짜라는 1918년 다다선언을 통해서 ,브르통을 매혹시켜, 파리에서 [문학]지에 가입시킴.
아르프 Arp는 우연성을 작품구성에 개입시킨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자동묘사와 공통점을 갖는, '자발적 그림'을 제작한다.⇒ cf. 詩에도 도입되어 문장을 토막내어 논리적 연관성이 상실된 작품이 양산된다.
성격:
① 다다는 낡아빠진 '유미주의'를 대체할 신미술을 추구했으며,
② 피카비아류의 조소/냉소를 파괴의 수단으로 삼고,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동일성에 대해 公衆을 희롱함으로서 그들 자신의 위치마저 교란시키는 아리러니를 이용했다.
* 이들은 인간의 이성적 협잡을 파괴하고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질서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다는 '무감각'을 위해 존재하며 자연을 옹호하고 예술에 반대한다.
* 베를린 다다는 1917년 독일정세와 연관되어, 정치적 색채를 띄었고, 현실에 대한 혹독한 공격적 면모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 John Heartfield의 후기 사진 몽타쥬는 히틀러의 파시즘과 자본주의,군국주의를 고발키위해, 시각적 재료와 우리에겐 친숙한 매체를 사용한 정치적 무기였다.
초현실주의 ( Surrealism )
배경: 다다가 남긴 폐허에서 새로 건설을 시작하려는 긍정적 행동의 열망에서 비롯된다. 다다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서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는 모순에 빠졌다. 이것의 악순환을 극복키 위해서 브르통을 중심으로 이론이 정립되었고, 이것은 다시 피카비아식 허무주의적 다다와 충돌을 하기도 한다.
1922년 브르통은 '현대정신의 방향'을 모색할 목적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하는데, 이 자리에는 입체파, 미래파 뿐 아니라, 다다도 참석하여, 다다는 스스로의 입장을 제도권속에 포함시킨 꼴이 된다.
<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유사점 >
① 유산계급을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② 전통적 형태의 미술장르를 공격하였다.
③ 다다에 속한 작가들이 많이 초현실주의로 전향을 했다. 에른스트의 꼴라쥬는 이미 다다의 꼴라쥬에서 예견된 바이기도 하다.
*근본적 차이점: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무정부주의'를 대체할 이론과 원칙을 설정했다.
1924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 > 을 출판한다. : 자발적 창조행위의 힘을 인정하여, 다다의 예술 거부권과 아카데믹한 태도를 제거했던 것이다. 브르통은 프로이트를 통해 '자동현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발설된 사고( Spoken Thought )의 표현이었다. 자동기술을 통해 의식적 창작물보다는 완벽하게 진정한 개인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이다.
< 초현실주의 선언 >(1924) 의 두가지 큰 가지는, 자동현상과 꿈의 기록이다. 무의식적 표현에 주안을 두었지만 사실상 프로이트의 의도 와는 상반되었다.
⇒ 그 이유는, 차라를 인용하면, 프로이트의'정신분석'이란 정서적 혼동을 치유하여, 유산계급의 질서에 편입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 다다의 강령에 위배된다.
작품 성격:
우연스런 두개의 상반된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예상치 못한 초현실적 이미지의 조형미를 구현한다. 하지만 이런 잠재력은 무의식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서 얻어진다.
Max Ernst: 전사 화법(데칼코마니/Decalcomanie)로 암시력에 있어서 추종을 불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Dali : '눈속임 기법'을 남용하였다. 그는 '꿈을 재현하는 기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의도적으로 극화시켰다. 따라서 그 자신의 작품을 이미 해석해줬기 때문에, '무의식에 대한 열쇠'를 마련하지 않았다. 또 달리의 그림은 상징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이고, 해설을 동반하고 있다.
Magritte: 언제나 논쟁적인 작품을 한다. 그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그려진 대상과 실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조건 1.]1933 은 현실의 풍경에 대한 그림의 풍경의 충실도로 인식하는 것과 그것들이 둘다 단지 그려진 가짜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이에서 빗어지는 긴장감을 형성시킴.
종말:
2차대전 종식후, 초현실주의는 해산된다. 이들은 뉴욕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이후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씨를 뿌린다.
초현실주의의 의의와 목적: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과 불능....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이 존재함을 우리는 확증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을 결정하려는 희망이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의 기본 동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꿈과 깨어있는 생활처럼 분명한 모순된 상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저 너머의 상태로 분석하려는 것이다.
절대주의 ( Suprematism )
배경: 1913년 러시아에서 말레비치에 의해 시도.
성격:
실존의 양면성을 반영하는 정신적 태도로서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제를 창조하려는 노력이다. 말레비치는 직선과 기하학을 바탕으로 구성. 직선은 절대적 기본 형태이다. 사각형(squre)을 절대 기본요소로 보며, 외관적 세계와 과거미술을 부정한다. ⇒ 일종의 전능한 형태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 했다.
cf. 사각형의 변형으로서 십자형, 장방형을 통해, 인간기능을 선언하며 기하학적 형태가 물질을 지배한다는, 즉 정신적 우월성을 드러내려 했다. 말레비치도 또한 神智學的 사색에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미술이란 무용한 것이며, 미술가는 창조를 위해 정신적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예술이 기계문명에 맞추어지고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공리적 목적에 적극 반대하는 점에서 '미래주의'나 '구성주의'와는 상반된다.
말레비치의 입장:
진정한 예술이란 시대를 넘는 영원한 가치가 있지만, 과학이나 기술은 일시적이다. 예술품은 잠재의식을 갖고 그것은 의식보다 강력하다. 기하학적 단순화를 통해서 물질적 본질을 반영할 뿐 아니라, 우주의 신비마저 동경하려 했다.
작품:
말레비치 [ 절대주의적 구성: 흰색위에 흰색 ] 1918 : 최후의 해방, 해탈의 상태이며, 절대주의적 의식의 궁극적 진술이다. 사각형(인간의지 혹은 인간 그 자체)은 물질성을 버리고 무한성과 합치하며 남아있는 것은 그것의 존재의 희미한 자취 뿐이다.
데 슈틸 ( De Stijl ) -- 신조형주의의 전개와 소멸 : 1917~31
시기: 1917~31에 이르까지 14년여 동안 활발한 세력으로 존재했으며, 그 주도자는 피에트 몬드리안과 테오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oesburg)와 건축가인 리트펠트(Rietveld)등 3사람의 작업에서 드러난다.
영향/성격:
① 쇤매커스(Schoenmaekers) 박사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② 베를라게(Berlage)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인정된' 건축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쇤매커스의 저서,[세계의 새로운 이미지]에서 직각의 우주적인 탁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지구의 형태를 이루는 두개의 근원적인 정반대 요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수평선과 태양의 중심으로 부터 발생하는 광선의 심원하에 공간적 운동인 수직선이다... (데 슈틸의 원색체계에 대해) 또 주요한 세 개의 색채는 본질적으로 노랑, 파랑, 빨강이다. 이것이 유일한 색인 것이다."
⇒ 수평선과 수직선들로 이뤄진 몬드리안의 최초의 엄격한 후기 입체주의 구성이 출현하는 시기는 1914년 쇤메커스와 접촉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라이트도, 건축에 대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주거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예술품, 조각이나 회화의 어떤 것보다 더 표현적이고 아름다우며, 그것들보다 더 삶에 밀착돼 있는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이것이 현대 미국이 가진 기회이다."라고 쓰고 있다.
< 데 슈틸의 미학적 강령의 3단계 >
1단계: 1916~1921 형성기, 외부의 참여외엔 주로 네델란드가 중심.
2단계: 1921~1925 성숙기, 국제적 운동으로 보급.
3단계: 1925~1931 변화와 궁극적 붕괴의 시기.
1단계: 1916~1921
데 슈틸의 활동을 주로 결정하고 알려주는 것은 회화,조각, 문화에 대한 논쟁이다. 몬드리안은 이 시기, 쇤매커스와 접촉하며, [회화에 있어서의 신조형주의]라는 기본적 이론에 대한 에세이를 집필한다. 1917년 몬드리안은 부유하는 장방형의 색면으로 이뤄진 일련의 구성을 제작하기 시작. 반 데르 레크와 반 되스부르크는 이 시기에 화면 자체의 구성에 관심, 흰색의 화면안에 배열된 좁다란 색채막대들이 이루는 숨겨진 기하학적 질서에 의해 화면을 구성했다.
리트펠트 1917[빨강-파랑의 의자, 모형과 기계학적인 도형] ⇒ 삼차원으로 투영시킨 최초의 기회를 제공한다. 막대와 평면들이 분절되고 변위된 공간 요소임이 인식되었다. 검정 테두리와 원색사용 ⇒ 신조형주의의 색채범주를 수립한 최초의 사람.
⇒ 후기 아르누보 양식의 행위와 질감이 갖는 표현성으로 부터 차단된 작품이었다.
* 리트펠트의 작품을 통해서 신조형주의 건축양식의 발달을 거의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ex. 1. 1917 빨강-파랑 의자 2. 1920 하르톡 박사의 서재 3. 1923 베를린 의자 4.1924 슈뢰더 하우스
특히 23년 베를린 의자는 그가 설계한 최초의 완전한 비대칭적 가구로서 그후 2년간 제작된 완전 비대칭적 가구들를 예고한다.
2단계: 1921~1925
리시츠키와 반 되스부르크의 만남으로 인해, 리시츠키의 기초주의적 관점에 깊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로서 절대주의적 기초주의와 신조형주의적 기초주의가 상봉하게 된다.
새로운 건축은 反입방체(anti-cubic)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폐쇄된 입방체 안에 기능이 다른 작은 공간들을(내물린 평면, 발코니 공간....)동결시켜 놓기보단, 입방체의 중심으로 부터 원심적으로 펼쳐놓은 것이다. 이로서 높이,너비,깊이, 시간은 열린 공간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조형적 표현에 도달한다. 이로서, 건축이 말하자면 자연의 중력 원리에서 대항하는 浮動性을 획득하게 된다.
3단계: 1925~1931
분열이 일어나는 후기 신조형주의 운동기이다. 반 되스부르크가 작품에 '대각선'을 도입하게 되고, 이 때문에 몬드리안과 그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몬드리안은 그룹을 탈퇴한다.
종말:
1930년대 이르러, 불일치와 논쟁으로 말미암아, 보편적 조화의 세계에 대한 신조형주의 이상은 허물어진다. 하나의 이상으로서 그것은 이제 다시 그 출발점인, 추상회화의 영역안에 있는 그것의 원점으로 환원된다.
반 되스부르크의 입장 [ 구체적 예술에 대한 선언 ]1930:" 표현 수단이 모든 특수성으로 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보편적 언어의 실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 하지만 가구,설비등 응용예술의 경우 어떻게 해서 그러한 표현수단이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 진술되어 있질 않다.
구성주의 ( Constructivism )
배경: 1920 비평가들은 현대미술이 무정부주의적이며 공산주의적이고, 외관에 대해 공격적이라고 비아냥거림. 1921년 뉴욕타임즈는 입체주의를 볼세비키적 전복예술로 이해.
정의:
현대미술 사조중, 가장 막시스트적이고, 혁명적 공산주의 기구와 밀착되었던 사조로 러시아에서 발생. 추상양식을 목표하지 않고, 예술자체보다는 기계적 생산, 건축공학, 그래픽,사진을 통해 사회의 물리적 지적 요구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참여예술'의 성격을 띈다. 그들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의 물질적 욕구충족과 그들 감정을 조직화, 체계화시키는 선동적 예술이다. 선전적 성격탓에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실대상을 암시하는 문학적 문맥을 동원하고, 포스터 몽타쥬, 삽화등으로 현실을 환기시킨다.
전통적 예술에서의 서술적 묘사에 의존치 않고, 명료성과 상징주의를 전달한다.
새로운 공업재료와 기계, 그 자체에 '특유의 美'가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목적: 과거예술의 사색적 활동이 아닌, 사회적 편의도모와 공리적 기능을 추구. 과학에 근거한 생산이 구성주의의 1원칙이었다. ⇒ 새로운 사회질서는 새로운 표현형태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구성주의는 실재를 그대로 재현,해석하는 부르조아식 사고방식을 배척했다. ⇒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인하고 유물주의적 노선에 준한 구조와 물질의 가치를 반영하는 작업을 했다.
작가: 리시츠키는 활판인쇄 원칙에 충실. 예술가는 과학자, 공학자와 어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미래주의와 유사하다.
로드첸코(Rodchenko),리시츠키, 타틀린..등 이들은 산업디자인, 연극무대, 활판인쇄, 포스터 잡지...등에 관여.
* 구성주의적 사실주의: 평면과 환각적 표현방식(건축도면, 디자인도면)에서 출발하여 3차원의 모형을 제작후, 마지막으로 실용적 물건을 생산한다는 단계적 방식.
⇒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생산된 실용적인 물건 자체에 그 가치를 두었다.
* Tatlin [ Monument to the 3rd International ] 1919 :
회화, 건축, 조각, 국가의 홍보, 선전기구의 통합이 집약된 대표적인 종합예술이다.
움직이는 건축의 최초의 발상이며, 공산주의에 대한 엄청난 신앙선언의 성격을 띈다.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도면과 모형으로만 남았는데, 마치 이뤄지지 못한 공산혁명에 대한 상징물과도 같다. ⇒ * 실제로 구성주의 시대엔 단지 도면상으로 남은 작품이 많다.
1918 러시아에서 <브쿠테마스> 설립 :
비숙련적인 러시아의 과학적 기술의 보완책으로 설립된 기술학교로, '나움 가보'등이 참여했으며, 구성주의의 초기이념을 교육하려는 교육장이며, 이것이 이후 독일 Bauhaus의 청사진이 된다. 교과과정이 지나치게 기술생산에만 역점이 두어지고, 창의력을 간과하였기에 칸딘스키는 망명을 한다.
키네틱 아트 ( Kinetic art )
발생 배경/ 영향: 1910년 미래주의 선언: "운동과 빛은 물체의 물질성을 파괴한다." 라고 공언. ⇒ 하지만 미래주의는 '운동의 美'를 찬미하지만, 운동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 미래주의 의 2가지 경향.
① Balla [끈에 묵인 개] 처럼 움직임의 순간들을 종합해서 운동감을 재현하는 것.
② 움직이는 관찰자(여러각도에서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점)의 시점들을 종합해서 운동감을 재현하는 방식 : 세잔의 작품이나, 입체주의에 명시된 이념을 발전 시킨것. 하지만 이들 또한 운동을 '재현'한 것이지, 운동 그 자체가 작품구성에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즉, 기술적 의미에서 이것은 키네틱 아트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키네틱 아트의 이념을 최초로 구현한 것은 1차대전후의 러시아 미술가들에 의해서이다.
⇒ Tatin, Rodchenko, Gabo, Pevsner... 특히, 가보와 페브스너는 1920년 [사실주의 선언]에서 미래주의에 대해, 오로지 운동을 재현만 한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 " 일련의 '포착된'운동의 순간적인 장면들을 단순히 도식적으로 기록해서는 운동 그 자체를 재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화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요소, 즉 동적인 리듬이 실재적인 시간에 대한 우리 감정의 기본적인 형태임을 증언한다."
⇒ 과거 미술을 탄핵하고 역동적인 리듬의 예술을 지지하고 나섰다.
성격:
운동에 의해 '공간'에서 하나의 '형태'를 창조해낸다. ⇒ 움직이는 물체가 공간의 어떤 영역을 윤곽짓고 규정지을 것. '운동의 한 결과로서' 어떤 형태나 영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의 요소를 통해서 운동의 정확한 반복으로 인한 단조로움을 극복시킨다.
초기작가: 1930년대, Laszlo Moholy-Nagy [광선 기계]를 발명. 가보는 광선이 '동적구성'의 조각적 효과를 배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기, 역시 동적구성에 있어서 '빛'의 효과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 '움직이는 부분'이 공간의 영역을 윤곽짓고, 규정하는 것처럼 '빛'은 공간을 쓸어내고 껴안는다. 빛은 환경을 포위한다. : 빛의 조각적 사용과 환경미술에 대한 착안을 제안 하였다는 것은 키네틱 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공헌이다.
* 모흘리 나기: 관람자의 수동성을 거절하고, 관람자를 '자발적으로 추진되는 힘을 지닌' 능동적 참여자로 규정했다. 관람자는 스스로 구성을 집합하고 조성한다.
본격적 시작/작가: Alexander Calder : 원동력의 문제를 해결 ⇒ 공기의 유동을 통해, 작품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30년대초, 그는 'mobile'을 제작한다. 장남감 제조의 원리로 동적 미술을 착안하였고, 몬드리안으로 부터 원색사용을, 금속판의 형태는 호앙 미로로 부터 얻어냈다.
키네틱의 종류:
① 움직이는 작품: 20년대이후,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해, 미술가들은 전기동력을 쉽게 작품에 응용할 수 가 있었다.
② 관람자의 움직임으로 '동적 효과'를 얻게된 '정적 작품': '소토'의 일련의 작품[진동하는 구조]나,[변태]등. 작품의 요소로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그 요소들의 결합이 낳는 효과는 신비롭고 복합적이다. 소토: " 나의 목표는 음악만큼 자유롭게 될 때까지 물질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뜻하는 음악이란 선율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관계성이라는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 소토의 작품은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운동의 한 결과로서 생기는 '시각요소의 관계성'이다. 소토의 말처럼, " 그것은 순수하게 시각적이며 물질적 실체가 없다."
<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의 차이점 >
옵아트 Op Art |
키네틱 아트 Kinetic Art |
옵은 '착각에 의한 운동감'을 창출한다. 회화적 수단 즉, 색채 선등의 상호작용에 의존하여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
키네틱은 옵과는 반대로, '운동에 의한 착각'을 보여준다. 변형시키는 요소로서의 운동에 의존한다. |
⇒ 옵아트도 운동감이 있으나, 작품이나, 관람자측에서 실제운동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즉 '운동에 의한 공간의 어떤 형태, 영상의 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③ 빛을 수반하는 작품: 빛이란, 예술가의 재량에 맡겨진 모든 요소들중 가장 '비물질적'인 것이다. 빛은 그 자체로 '비물질'일 뿐아니라, 빛이 접촉하는 물질은 '비물질화'되는 효과도 가져온다.
④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는 작품: 가령, 1963 모렐레, 가르시아-로시는 파리에서 [시각예술 탐구 그룹 Groupe de Recherche d'Art Visuel ]를 만든다.: " 관람자와 작품사이의 거리를 제거하여 작품자체의 흥미를 증가시키고, 반면 작가의 개성을 감소시킨다."
⇒ 관람자가 작품제작의 협력자가 되어, 작품과의 친근한 관계를 유지한다. 작가는 완성된 작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집합, 하나의 프로그램, 하나의 상태를 제공한다.
종식: 1967년 파리 [빛과 운동]展 : 키네틱 아트가 절정에 달하지만, 1970년 테이트 화랑의 전시를 기점으로 쇠퇴한다. 이후, 이들은 환경미술과 다방면에 걸친 선언발표에 참가한다.
팝아트 (Pop Art)
배경: 1956년 화이트 채플 아트갤러리, [ This is Tomorrow 이것이 내일이다.]展에서 영국작가 Hamilton의 꼴라쥬,[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ling?]
그리고, 1961년 [청년 현대작가전]의 Hockney, Boshier, Allen Jones, Kitaj...참가.
미국의 경우, 팝아트 작가들이 여전히 드 쿠닝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55년도에는 Rauschenberg, Jasper Jones가 뉴욕예술계에 등단한다.
Mario Amaya: " 팝아트는 미국이 성취한 것 전부를 창밖으로 차버리는 것 같다."
팝아트는 비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고, 대중에게 침투했으며 수집가들의 수집대상이 된다.
* 팝아트가 유독 미국에 뿌리내리게 연유.
전후, 미국회화는 민족적이었고, 유럽미술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팝아트는 미국의 도시환경을 포착하기 위한 이상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 원초적 뿌리 >
다다에서 찾아질 수 있다. 뒤샹: " New realism, Pop Art, Assemblage..등으로 불리우는 이 New dada는,손쉬운 출구이며, 다다가 해놓은 것으로 살아간다. 내가 레디 메이디를 발견했을때, 나는 미학을 좌절시키려고 했다. 신다다에서 그들은 나의 기성품(레디 메이드)들을 가지고 거기에서 심미적인 미를 찾아내었다. 나의 도전을 그들은 심미적인 관점에서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 Da Da |
팝아트 Pop Art |
반미술, 즉 기성의 상황들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 |
다다의 반발의 몸짓속에서 긍정적인 어떤 것, 쌓아올릴 수 있는 어떤 토대를 발견하려는 것으로, 자의식이 강한 운동이다. |
성격:
" 팝아트는 소비자 환경과 그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추한 것이 아름다움이 된다." 팝아트는 양식이라는 개념이 해체되었으며, 비양식의 예술이고, 비계열화된 예술이다.
화가들이 반영하는 것은 현대의 거대도시와 대다수의 삶, 도시속의 인간이다. 팝아트의 발생에 필수적 요건은 '팝적인 생활방식'이다.
(* 팝문화란, 산업혁명과 더불어 일어난 일련의 기술공학의 혁명의 산물이다. 팝문화는 '유행'과 '민주주의'와 '기계'를 한데 합쳐 놓았을 때 생겨나는 결과의 일부분이다.
팝문화는 기계의 대량 생산과 유행을 통해 계속 발전해 나갈 경제적 과정이다. 유행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은 정교함이 아니라, 새로움과 충격이다.⇒ 해밀튼의 예술의 성질을 정의한 것과 유사. )
따라서 팝아트는 팝 문화의 생활 방식이 낳은 우연한 하나의 부산물이며, 하나의 결정체이다. 팝아트에서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자신이 행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를 둘러싼 환경의 논리를 수락하는 것이다.
팝 아티스트는 재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영상들, 가공 처리된 영상들을 임의로 '선택'한다. 작가들의 흥미는 대상들의 '전형화'에 있다.
팝아트는 일종의 동결된 사건이다.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며, 목적을 달성시키는 일회용이다. 일회용 예술의 또 다른 사례로 해프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주어진 장치나 상황속에서 인간과 사물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예술장르이다. 해프닝의 창시자는 뉴욕의 팝아티스트로, '짐 다인'과 '올덴버그'이다. 그들의 의도는 일종의 '정서적 전후관계'를 만드는 것이고, '감정 정화'의 기능이 끝나서 예술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예술은 사라진다고 믿었다. )
『 팝의 추상성 』
① Jasper Jones : [ Flags ] [ Targets ]연작을 통해, 드 쿠닝의 작품처럼, 물감을 그 무엇을 묘사하기 위한 재료로서가 아닌, '물감 그 자체'를 중요시 했으며, 물감 스스로 그 무엇이 되도록 유도했다.
② Rauschenberg : 다양한 이미지를 구사하지만, 추상적 이야기의 중간에 인용문과 삽화로서의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 시각에 직접 포착되는 대상이 아닌, 스쳐가는 물감의 흐름속에서 이야기를 구성.
『 팝 조각 Pop sculpture 』
미국: 일부의 조각만이 팝운동에 참가해서 동화되었다. 올덴버그의 오브제을 조각으로 봐야할 지 아닌지의 논의가 분분했다. 시걸의 환경예술이나, 키엔홀츠의 작품도 같은 논의들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소위, '팝 오브제'를 제작했고, 돈 주드는 '일차적 구조'라고 이름하는 경향의 작품을 한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팝 조각은 자연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는 조각을 만들어냈다.
종식:
팝아트는 폐용화(廢用化)에 대한 집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제부터의 모든 예술은 팝과 같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진술과 다름아닌 것이다.
옵 아트 ( Op Art )
배경/출발: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Moholy-Nagy, Josef Albers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경향이다. 1965년 뉴욕에서 [ Responsive Eye ]展 은 지각반응을 발생케 하는 것으로 그것이 눈의 실제구조에서 일어나는 형식이거나, 두뇌 자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거나 간에 관객에게 환각적 영상과 감흥을 일으키는 역동성을 그 본질로 한다.
* 근본적 뿌리: 옵아트는 지각적 예술이라는 점에서 '후기 인상파'의 점묘주의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즉 눈 스스로가 순수한 색점들을 혼합하여, 색조와 색채의 광학적 혼합을 표현방법으로 삼았고, 이로서 스스로 그림의 형태가 드러나게 했다.
* 점묘주의와 옵아트의 차이점: 1880년 점묘주의의 시냑, 쇠라, 피사로는 점묘법이 단지 창조적 접근방법에 불과했지만, 옵아트에서 기술적인 양싱이 사실상 주제인 동시에 회화의 유일한 내용이라는 현대회화의 친숙한 개념에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특질들 즉, 기술과 주제는 전혀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성격:
눈의 환각을 탐구하며, 모든 옵아트가 추상이라는 점과 형식적이고 정확하다는 것. 그것은 구성주의와 말레비치가 추구한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각력의 우월성'으로 부터 발전되어 나올 것이다.
* 환각: 환각은 과거경험에 의거함으로서 마음의 눈에서 이미지로 완성시키는 관객의 능력에 의존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캔버스의 2차원의 논리를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 옵아트의 환상은 눈속임을 통해, 정상적인 보는 과정이 의심스럽게 되는 과정이다.
옵아트란 용어는 흑백의 대담한 무늬의 직물이나, 창문의 장식, 일상용품등에 쓰였다.
⇒ 이처럼 2가지의 극단적 분야( 비의적 분야와 대중적 분야)에서 동시에 수용되었다.
* 곰브리치는 옵아트를 기타등등의 원리(etcetera principle)이라 명함: 어떤 물리적 상태를 조성함으로서 정신이 착각을 일으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보게 되는 상태.
옵아트는 지적인 탐구와는 무관하다. 옵아트의 특징은 감각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충격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특이한 경험인 것이다.
작가:
바자렐리는 1935년이래, 흑백의 시각 자극물 작품을 꾸준히 제작했다.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시각적 모호성과 혼란을 이용해왔다. 흑백작품과 색채작품,그리고 근래의 3차원의 구성작품들은 작품과 관객의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를 시사하는 것이다. 바자렐리는 예술가의 행위를 비개인화 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될 수 있어야 하고 유일성을 버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분야를 시네틱 아트 (cinetic art)락 명했다.
미니멀리즘 ( Minimalism )
배경: 1913년 말레비치(Malevich): "예술이 그 자체로서 단독으로 다른 물건들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공리적인 목적들로 부터 이탈하고 관념적인 재현기능이 제거된 세속적인 예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절대주의는 1920년대 러시아에서 엄격한 추상예술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구성주의 처럼, 합리주의와 수학적 사고방식을 찬양한다.
Tatlin: "진정한 공간과 진정한 재료들을 양성하라."는 말은, 60년대 미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조각의 근원이 되었다. 이 조각은 실제적 재료, 실제적 색채, 실제적 공간의 특수한 힘을 갖고 있다. 타틀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술을 심미화시켰다.
댄 플라빈(Dan Flavin) [타틀린을 위한 기념물]1964년 :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구부리지도 구성하지도 않은 네온 튜브들을 단순히 집합시켜 놓은 것으로 어떠한 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깊은 주관성과 암시적 주정(主情)주의의 노선을 지키는 추상표현주의가 50년대 미국미술을 장악했지만, 그것은 곧 '싱거운'것이 되었다. 즉흥창작, 자발성등, 추상표현주의가 내세운 동작 그 자체의 의미부여와 예술가의 주관적 자유는 미니멀리스트에 의해 대체되었다.
성격:
미니멀리스트들은 몬드리안 처럼, 예술은 제작실시 이전에 정신에 의해 완전히 고안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예술은 힘이며, 그 힘에 의해 정신이 그것의 합리적인 질서를 물건에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예술이 결정적으로 '아니었던'것은 미니멀리스트에 따르면 자기표현이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이론은, 명백함, 개념상의 엄격함, 꼼꼼함, 단순성에 대한 전념들이다. 그들은 예술을 보다 정확하고 엄밀하며 체계적인 방법론 쪽으로 대신 방향을 돌리기를 바랬다. 그들은 그 이전 세대인 추상표현주의의 가치를 전복하려 했다. 추상표현주의에선 조각양식을 개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니멀리스트들은 조각을 일련의 새로운 시각적 기준을 가진것으로 대치 하려는 목표를 전개한다. 대다수의 미니멀리스트들은 3차원적 물체를 구성하는데 관심을 갖었다.
⇒ 모든 의미와 은유가 배제된 장방형과 입방체, 각 부분의 동등성 , 반복, 그리고 중성적 표면들이다. 그들의 공통된 야심은 최대의 당면성을 가진 작품을 창작하여 그 속에서 전체가 부분들보다 중요하고 단순한 질서체계의 배합을 위하여 관련적인 구성이 배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 Tony Smith의 거대한 검정 암석기둥같은 단일체. Larry Bell의 거울 달린 유리상자들, John McCracken의 눈부시게 채색된 널빤지, Sol LeWitt의 격자 구조물...이들은 강철, 형광등, 철판, 벽돌, 페인트등, 산업용 재료들을 그 특수성을 손상 시키지 않으면서 가능한한 '중립적으로' 사용하였다. 즉 하나의 단순한 형태로서 있는 그대로든지, 또는 일련의 반복되는 동일한 기본 단위들로서든지, 단순하고 획일적이며 기하학 적인 형상들을 선호했다.
* 배제의 미학: Frank Stella는 1959년 [16인의 미국인들]展.에서 단순한 작품 출품.
* 추상표현주의에서의 미니멀 성향: Barnett Newman은 49년 작품,[아브라함]에서 검정색 배경위에 하나의 검정색 줄무늬가 덩그러니 그려진 그림 출품.
Ad Reinhardt의 60년대 대칭적인 단색회화들, Rauschenberg의 52년 꾸밈없는 흰 캔버스, Yves Klein의 전면 청색 단색화...
* 당시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박: Sandler는 미니멀리즘을 기계적이고, 어떤 창조적인 분투가 탐구에 전혀 깜깜한 예술로 봤다. Donald Kuspit은 미니멀리즘의 고정된 형태들이 생체계에 대한 강박적인 부정이므로 이것은 순환적이고 탁상공론적이며, 기계적으로 자기 창조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비난.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와 같은 비난은, 예술가가 어떤 '작품'인가 했다는 아무 증거도 보이지 않고, 따라서 그들은 꽤 진지하게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걸쳐 가지를 뻗은 사기행각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 미니멀리즘과 뒤샹과의 관계 >
작품의 개념을 예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인으로 보는 우리의 심미적 사고에 있어서의 위신에 대해 기성품이 어떻게 도전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뒤샹의 기성예술의 본보기를 통해, 그는 예술적인 공예정신의 가치뿐 아니라, 예술가의 손의 역할도 축소시킨것이다.
⇒ 수공적인 기술의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정신적 선택에 의해서 순전히 기능적인 물체들에 심미적 가치를 할애한 것이다. 즉 그가 제시한 것은 예술 제작이 형태들의 임의적이고 감각이 뛰어난 배치가 아닌 다른 것에 기반을 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가:
미니멀리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 에너지를 지겨운 예술 생산의 수공업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 Moholy-Nagy는 공장에 전화지시로 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화가다.
칼 안드레 : 작품[ 일으키기 Lever ]1966년, 상품화된 137개의 결합되지 않은 내화벽돌들을 바닥에 늘어놓고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그저 브랑쿠시(Brancusi)의 끝없는 기둥을 공중 대신 땅에 놓은 것 뿐이다....이것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지를 따라 달려간다."
Don Judd: 자신의 활동을 회화와 조각의 상례에 대한 대치안으로 간주. 모든 회화는 환각적이었고, 따라서 '신빙성이 없는'것이었다. 공간적인 환상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형체와 배경의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주드는 자신의 작품에서 '실제공간'이 '묘사된 공간'보다 더 힘차고 특정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더 이상 현실을 위한 대역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반영이라기 보다 하나의 현존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새 작품들을 새로운 이름, 특정한 물체들이라고 명명했다.
주드가 동일한 기본 단위들의 반복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종류의 전체성을 원했던 반면, 모리스는 자기자족적인 전체들, 즉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형태들의 개념을 가진 작품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즉 분리된 부분이 없는 물체들을 구성했다.
⇒ 주드와 모리스는 '하나의 작품' 즉,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될 수 있는 단순한 형태로, 입체주의가 만들어낸 연속적이고 관계적이며, 죽 둘러보고 알아내는 종류가 아니라, 동시다발 적인 경험으로서 효과적인 것으로 보여져야 된다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실제로 해낸 것은, '바르바라 로즈'에 따르면, '입체주의적 동시성'을 형태에 기반을 둔 '즉각성'으로 대치시킴으로서 입체주의의 핵심적인 명제를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영향:
미니멀리즘은 회화, 조각뿐 아니라, 음악 무용에도 영향을 준다. Philip Glass와 Steve Reich는 기본 단위적 구조를 가진 음악을 작곡 즉, 반복에 기반을 둔 것.
뉴욕의 Judson Dance Theater는 중립적이고, 비표현적으로 공연하는 무용을 선보였다. 무용수들의 기술적인 묘기가 거의 필요없는 무용이었다. 최소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무용 양식을 발전시켰다.
『 Twelve Technical Rules 』
1. No texture. Texture is naturalistic or mechanical & is vulgar quality especially pigment texture or impasto.
2. No brushwork or calligraphy. Handwriting, handworking & handjerking are personal & in poor taste.
3. No sketching or drawing. Everything, where to begin & where to end, should be worked out in the mind beforehand.
4. No form. THe finest has no form.
5. No design. Design is everywhere.
6. No color. Colors are barbaric, unstable, suggest life can't be completely controlled & surface.
7. No light. No bright or direct light in or over the painting.
8. No space. Space shoud be empty, should not project & should not be flat.
9. No time. There is no ancient or modern, no past or future in art.
10. No size or scale. Breath & depth of thought & feeling on art have no relation to physical size.
11. NO movement. Everything else is on the move. Art should be still.
12. No object, no subject, no matter. No symbol, images, or sign. Neither pleasure nor pain. No chess-playing.
--- Ad Reinhardt 1953.
개념 예술 ( Conceptual Art )
배경: 1960년대 중반기,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예술양식이 확산되어 거의 10년간 계속.
즉, 개념론적이고, 이념 또는 정보예술이 다양한 범주의 행위들--행위예술, 신체예술--을 통해 유행. 전통적인 예술품의 전면적인 포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에 반하여, 이를 대체하는 '이념'에 대한 전대미문의 강조가 일어났다.
성격:
무엇보다, 언어 그 자체에 의해서 보다 적절하게 전달되었다. 그 결과는 그것이 취하는형태와는 상관없이 예술가들과 그 청중들의 정신 속에서 가장 충만되고 가장 복합적인 실존을 지닌 일종의 예술이 탄생하였다. 미술품속에서 구현화는 것을 일축하고, 화랑과 예술계의 시장구조라는 양측의 제한된 공간에 대한 대치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17년 뒤샹에 의해 도입된 이념들이 다시 수용되기 시작. 뒤샹의 기성품이후, 예술은 결코 두 번 다시는 같은 것일 수가 없었다. 창작예술은 초보적인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즉, 예술이 회화와 조각의 상례적인 '인공적' 매체의 범주 밖에서 그리고 취미에 대한 고려 너머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 예술이란 예술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그들이 느낀 미에 대한 것보다도, 그들의 의도에 더 관련 되었다는 것을 입증.
개념과 의미가, 조형적인 형태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고, 20세기는 전위예술의 대안적인 전통이 시작되었다.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전통(예술 지상주의)에 반대하여, 뒤샹은 그의 기성품(이념으로서의 예술)을 선보였다.
운동:
1950년대, Jasper Jones, Robert Rauschenberg, Yves Klein, Manzoni...는 예술에 대한 불순하고 비 형식적인 접근방식으로 Neo- DaDa를 시작한다.
Fluxus의 다중 전달연기와 이에 상대되는, 미국의 Claes Oldenburg, Jim Dine, Allan Kaprow의 해프닝.
뒤샹의 '이념으로서의 예술'은 변화를 일으켜, 철학,정보,언어학,수학,자서전, 사회비판,농담...등으로서 예술 속에 확장되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