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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글인 난중일기 가운데
가장 힘든 시절을 겪으신 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충무공은 정유년인 1597년 음력 2월 25일에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고
못난놈인 아수라출신 선조에 의해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실제로 선조는 개쓰레기 인간입니다.
절대로 아수라출신들에게 나라를 맡기면 안됩니다.
큰전쟁은 물론이고 대기근과 일부러 죽인 사람이 무수합니다.
조선의 인구는 반으로 줄었고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 영호남 지식인 가운데
1천여명을 죽여 그지역 지식인들 씨를 말렸다고합니다.)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의 일기 내용을 옮겨봅니다.
이난중일기는 이상한 글인데요.
성중님께 여쭈니 후학을 위해 일부러 남긴신거라고 해요.
이글은 군사 목적이 아닙니다.
충무공의 하루 생활들을 숨김 없이 적은글.
난중일기는 삶의 텍스트입니다.
누구를 위한 글일까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스님을 위해 남기셨다고합니다.
당신은 지장보살의 화현.
뒷날 지장행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남기셨다고 해요.
보살의 화현임에도 겪어야만 하는 이세상의 본모습..
이난중일기를 쓰실 때 충무공은 스스로 보살의 화현인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
지금 힘든 시기를 겪는 님들이 계시다면 충무공의 일기를 잘 보세요..
바로 님 같은 분들을 위해 일부러 남기신겁니다.
이세상이 얼마나 만만치않은지 아시게될거에요.
난중일기를 보실 때는 종교적인 기본틀을 가지고 보시고요..
충무공의 꿈(선몽), 효행, 점(예측), 감성, 거센 세파..
이런 것에 주안점을 두고 보셔야 합니다.
왜??
난중일기는 그걸 가르치기 위한 글이니까요요.
군사용이 아닙니다.
효행은 지장신앙의 기본이자 하늘로 오르는 큰 사다리.
이 일기내용에는 또다른 지장보살의 화현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충무공의 꿈을 통해서요.
그 어른들이 남원성전투의 대학살을 걱정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정유재란의 대학살.
꿈은 음력 5월 6일에 꾸었는데요
남원과 가을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고...
실제로 대학살이 벌어진 남원성전투는 음력 8월 9일 시작해
8월 16일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추석날이 낀 가을이죠.
충무공의 선몽은 이렇게 정확하십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번역자의 스타일입니다.
난중일기는 이렇게 번역하면 안됩니다.
전체적으로는 큰문제가 없지만 일부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에 스님이 새로 번역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충무공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고 진행한 번역.
대개의 난중일기 번역이 그렇습니다.
지장보살의 화현이시니 스님이 번역하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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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로 압송전 전해 11월 부터 이미 일기가 없습니다.
11월기록에없음
12월기록에없음
정유년
1월2월3월기록에없음(2월 말 3월에는 투옥 연관)
정유년 4월 (1597년 4월)
(아래 일기는 지금으로 말하면 해군참모총장(4성장군)에서 해임되어
이등병모다 못한 신분으로 강등시킨 백의종군 시절의 일기입니다.
조사가 진행되던 때에 많은 고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중님께 여쭈니 실제로 큰고문을 당하셨고
선조가 죽이려했답니다.
아수라 출신인 선조는 매우 극악무도한 놈인데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여립의 사건 때
노모를 직접 죽였고 어린 아들 마저 극악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싹슬이 스타일.
그래서 충무공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신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요..
보살의 화현이어서 넘어간 것이고
일반 보살님회상 출신이었다면 백프로 죽었을 거라하십니다.
무시무시한 전생 아수라출신들.)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ㆍ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ㆍ원경(遠卿)과 더 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ㆍ판서 심희수(沈禧壽)ㆍ우의정 김명원(金命元)ㆍ참판 이정형(李廷馨)ㆍ대사헌 노직(盧稷)ㆍ동지 최원(崔遠)ㆍ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4월 2일 [양력 5월 17일]<임술> 종일 비가 내렸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方業)이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 왔다.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4월 3일 [양력 5월 18일]<계해>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李士贇)ㆍ서리 이수영 (李壽永)ㆍ나장 한언향(韓彦香)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의왕시 인덕원)에서 말을 쉬게 하고 조용히 누워서 쉬었다.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서, 경기 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 름하는 병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에서 잤다. 신복룡(愼伏龍) 은 나의 임시로 사는 집에 이르러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순천부사 류영건(柳永健)이 나와서 봤다.
4월 4일 [양력 5월 19일]<갑자> 맑다.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시 태안읍 양산리)아래에 이르니, 반자 (判刺) 조발(趙撥)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 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나 바로 진위구로(평택군 진위 면 봉남리)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했다. 오산에 이르러 황천상(黃天祥)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천상(黃天祥)이라는 사람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 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낸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자는 방이 몹시 좁은 데 따뜻하게 불까지 때어 땀이 흘렀다.
4월 5일 [양력 5월 20일]<을축>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이르렀다. 나무들은 두번이나 들불이 나서 불에 탄 꼴을 차마 볼 수 없 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 다. 저녁이 되어 내려와 외가에 와서 사당에 절했다.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 했다.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물 무렵 우리집에 이르러 장인ㆍ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곧 작은 형님 (堯臣)과 여필(禹臣)의 처 제수의 사당에 다녀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4월 6일 [양력 5월 21일]<병인> 맑다.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푹 풀고 갔다.
4월 7일 [양력 5월 22일]<정묘> 맑다.
금오랑(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오므로, 나는 나가 그윽히 대접했다. 홍찰방ㆍ 이별좌ㆍ 윤효원(尹孝元)이 와서 봤다. 금오랑은 변흥백(卞興伯)의 집에서 잤다.
4월 8일 [양력 5월 23일]<무진> 맑다.
아침에 자리를 깔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저 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강설장(姜楔 長)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므로 나는 가서 문상했다. 그 길로 홍석 견(洪石堅)을 집에 들렀다. 저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금부도사에게 접대했다.
4월 9일 [양력 5월 24일]<기사> 맑다.
동네 사람들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해 주므로 정의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니, 매우 취하여서 헤어 졌다. 홍군우(洪君遇)는 노래부르고 이별좌도 노래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쬐끔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잘 마시면서도 실수함이 없었다.
4월 10일 [양력 5월 25일]<경오>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도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홍찰방ㆍ이별좌 형제ㆍ윤효원(尹孝元) 형제가 와서 봤다. 이언길(李彦吉)ㆍ허제(許霽)가 술을 가지고 왔다.
4월 11일 [양력 5월 26일]<신미> 맑다.
새벽 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德)이를 불러서 대충 말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 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 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 갔다.
4월 12일 [양력 5월 27일]<임신> 맑다.
종 태문(太文)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 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해도 초9일에 위ㆍ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서산시 근흥면 안흥)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러 배를 대어 잘 적에 닻이 끌려 떠내려 가서 배에 머물며 엿새나 서로 떨어졌다가 탈없이 만났다고 했다. 아들 울(蔚)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월 13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 (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다."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4월 14일 [양력 5월 29일]<갑술> 맑다.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했다. 관의 재목은 본 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4월 15일 [양력 5월 30일]<을해> 맑다.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吳終壽)가 점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로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관에 따른 것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 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4월 16일 [양력 5월 31일]<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4월 17일 [양력 6월 1일]<정축>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친다.
4월 18일 [양력 6월 2일]<무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今守)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저녁나절에 계 원들 중에서 나 있은 곳에 모여 와서 곗일을 논의하고서 헤어졌다.
4월 19일 [양력 6월 3일]<기묘>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 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앞에 이르니 강정(姜晶) ㆍ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 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 길 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 들 회ㆍ면ㆍ울(蔚), 조카 해ㆍ분(芬)ㆍ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 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 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4월 20일 [양력 6월 4일]<경진> 맑다.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밤을 먹고, 저녁에 니산(공주시 노성 면 읍내리)에 가니, 이 고을 원이 극진하다. 군청 동헌에서 잤다. 김덕장(金德章)이 나의 임시로 거처하는 집에 왔다가 서로 만났다. 금부도사가 와서 봤다.
4월 21일 [양력 6월 5일]<신사> 맑다.
일찍 떠나 은원(논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金翼)이 우 연히 오게 되었다고 한다. 임달영(任達英)이 곡식을 사러 배로 은진포(恩津浦)에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 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 22일 [양력 6월 6일]<임오> 맑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 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ㆍ생강 등을 보내 왔 다.
4월 23일 [양력 6월 7일]<계미>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관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
4월 24일 [양력 6월 8일]<갑신> 맑다.
일찍 떠나 남원 시오리 쯤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나서 남원부 오리 안까지 이르러 우리 일행과는 헤어지고 곧바로 십리 바깥 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희경(李喜慶)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슬픈 회포를 어찌하랴! 어찌하랴!
4월 25일 [양력 6월 9일]<을유> 비가 많이 올 모양이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朴 ) 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한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한)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10일]<병술>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레현 금부 도사가 먼저 와 있었다. (손인필의 집)으로 내려가니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춘)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 하다. 금부도사(이사빈)도 와서 봤다. 나는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라고 원에게 청했더니 원이 아주 대접을 잘했다고 한다. 밤에 앉았으니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4월 27일 [양력 6월 11일]<정해> 맑다.
일찍 떠나, 송치(松峙; 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해발 619m)밑 에 이르니 구례현감이 사람을 보내어 점심을 지어 보냈다. 순 천 송원(松院:순천시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李得宗) ㆍ정선(鄭瑄)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못내 간곡 하다. 저녁에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정사준(鄭思竣)도 와서 원균 (元均)의 망녕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4월 28일 [양력 6월 12일]<무자> 맑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문안하고서 말 하기를,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 오라"고 전했다. 또 말하기를,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여 데리고 가서 돌보라"고 하 는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부사의 소실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4월 29일 [양력 6월 13일]<기축> 맑다.
사과(司果) 신씨와 방응원(方應元)이 와서 봤다. 병마사(이복남)도 원수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여 순천부로 들어왔다고 한다. 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4월 30일 [양력 6월 14일]<경인> 아침에 흐리고 저물 무렵에 비가 내렸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병마사에게 남아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아침밥 먹기도 전에 와서 보며, 원균(元均)에 대한 일을 많이 말했다.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고 군관을 보내여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정유년 5월 (1597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15일]<신묘> 비가 내렸다.
사과 신씨가 머물러서 이야기하였다. 순찰사와 병마사는 원수가 머물고 있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 같이 모여 술을 마시며 무척 즐겁게 논다고 하였다.
5월 2일 [양력 6월 16일]<임진> 저녁나절에 비내렸다.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마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순찰사(박흥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 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진흥국(陳興國)이 좌영에서 와서 눈 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균(元均)의 일을 말했다. 이형복(李亨復)ㆍ 신홍수(申弘壽)도 왔다. 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다고 한다. 또 변유헌(有憲)은 식구를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5월 3일 [양력 6월 17일]<계사> 맑다.
閱 신 사과ㆍ응원(應元)ㆍ진흥국(陳興國)이 돌아갔다. 이기남(李奇 男)이 와서 봤다. 아침에 차남 울(蔚)을 열(荷)로 이름 고쳤다. " 열"자는 소리는 "기쁠 열(悅)"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 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이다. 저녁나절에 강소작지이 와 보고서 곡했다. 오후 네 시쯤에 비가 뿌렸다. 저녁에 부사가 와서 봤다.
5월 4일 [양력 6월 18일]<갑오>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참으랴!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릴 뿐이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 정 사준(鄭思竣)이 오고, 이수원(李壽元)도 왔다.
5월 5일 [양력 6월 19일]<을미> 맑다.
새벽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도에서 원균(元均)의 못된 짓 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병들이 군무이탈하여 반역질을 하니, 장차 일이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멀리와 천리나 되는 땅의 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고 어머니 영전에 예를 못하고 곡하며 우는 것도 내 뜻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보답을 받는고! 나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누나! 다만 때를 못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6일 [양력 6월 20일]<병신>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 한들 어찌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 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李繼命)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 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흥양의 종 우롬금(禹老音金)ㆍ박수매(朴守每)ㆍ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 윤(李奇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ㆍ송득운(宋得運) 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물(원균?)의 하 는 꼴을 많이 말했다. 또 부찰사(한효순)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 이라 하여 조리한다고 했다.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5월 7일 [양력 6월 21일]<정유> 맑다.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德修)가 와서 미투리를 바쳤다.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재삼 간절히 받으라고 하므로 값을 주어서 보냈다. 미투리를 곧 정원명(鄭元溟)에게 주었다. 저녁나절에 송대기(宋大器)ㆍ 류몽길(柳夢吉)이 와서 봤다. 서산군수 안괄(安适) 도 한산도에서 왔다. 음흉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저 녁에 이기남(李奇男)이 또 왔다. 이원룡(李元龍)은 수영에서 돌아왔다. 안괄(安适)이 구례에 갔을 때 조사겸(趙士謙)의 수절녀를 사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5월 8일 [양력 6월 22일]<무술> 맑다.
아침에 승장(僧將) 수인(守仁)이 밥지을 중 두우(杜宇)를 데리 고 왔다. 종 한경(漢京)이 일이 있어서 보성에 보냈다. 흥양의 종 세충(世忠)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활장이 이지(李 智)가 돌아갔다. 이 날 새벽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서 가죽 을 벗기고 휘둘렀다. 이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조종(趙琮) 이 이름을 연(堧)으로 고치고는 와서 봤다. 조덕수(趙德秀)도 왔 다. 낮에 망아지에 안장을 얹어서 정상명(鄭詳溟)이 타고 갔다. 음흉한 원(元)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한다. 이는 곧 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이경신(李敬信)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元 均)의 흉악한 일을 많이 말했다. 또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 식을 사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놓고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 다. 그러나 그가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처나가 고 래고래 소리쳤다고 했다. 원(元)이란 자는 온갖 꾀로써 나를 모 함하려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말에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길 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 니, 그저 때를 못 만났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9일 [양력 6월 23일]<기해> 흐리다.
아침에 이형립(李亨立)이 와서 봤다. 곧 돌아갔다. 이수원(李壽元) 이 광양에서 돌아왔다. 순천급제 강승훈(姜承勳)이 응모해 왔 다. 순천부사가 좌수영에서 돌아왔다. 종 경(京)이 보성에서 말을 끌고 왔다.
5월 10일 [양력 6월 24일]<경자> 궂은 비 내렸다.
오늘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 날에는 비가 온다 더니, 저녁나절에는 많은 비가 왔다. 박줄생(朴注叱生)이 와서 인사했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들여왔다. 장님 임춘경(任春 景)이 운수를 봐 가지고 왔다. 부찰사도 조문하는 글을 보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은 겸하여 삼 종이(麻紙) 두 가지를 부의로 보내 오고, 전라순찰사는 흰쌀ㆍ중간 쌀 각 열 말과 콩과 소금도 얻어서 군관을 시켜서 보 낸다고 말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25일]<신축> 맑다.
김효성(金孝誠)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었다.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 에 왔던 길에 왔다가 봤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소문이란 것은 모두 흉물이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통지문이 먼저 왔다. 장 위(張渭)가 편지를 보냈다. 정원명(鄭元溟)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 었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와서 운수 본 것을 말했다. 부찰 사가 순천부에 도착했다. 정사립(鄭思立)과 양정언(梁廷彦)이 전 하기를 "부찰사가 와서 만나 보자"고 하는데, 내 몸이 불편하여 만나 보는 것을 거절했다.
5월 12일 [양력 6월 26일]<임인> 맑다.
이원룡(李元龍)이 보내어 부찰사에게 문안했다. 부찰사는 또 김덕 린(金德 )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기남(李奇男)ㆍ기윤 (奇胤)이 와서 보고는 아뢰고 도양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침 에 아들 열을 부찰사에게로 보냈다. 신홍수(申弘壽)가 와서 보고 원영감(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상괘 坎,하괘 震:널 리 형통하지만 기운은 최악으로 험난함)변하여 천풍구(상괘 乾,하 괘 巽:여자가 지나치게 거센 괘로서 흉사를 만나는 확률이 열에 아홉임)가 되니 이 쓰임은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 남 해 원이 조문 편지를 보내고, 또 여러 가지 물건 - 쌀 둘, 참기름 둘, 꿀 다섯, 조 하나, 미역 둘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찰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鄭思立)ㆍ양정언(梁廷彦) 등이 왔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5월 13일 [양력 6월 27일]<계묘> 맑다.
어젯밤에 부찰사의 말이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감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했더라"고 한다. 저녁나절에 정사준(鄭思竣)이 떡을 만 들어 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왔다. 너무 미안하다.
5월 14일 [양력 6월 28일]<갑진>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는 부유(순천시 주 암면 창촌리)로 향했다. 정사준(鄭思竣)ㆍ정사립(鄭思立)ㆍ양정언 (梁廷彦)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길을 떠나 송치(솔티: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밑에 이르러 말을 쉬 게 했다. 혼자 바위 위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곤하게 잤다. 운 봉의 박롱(朴 )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순천시 환전면과 구례 사이의 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의 손인 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5월 15일 [양력 6월 29일]<을사> 개이다 비오다 하다.
주인 집이 너무 낮고 더러워 파리떼가 벌처럼 모여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동헌의 띠풀로 엮은 정자로 옮겨 왔더니 마파람이 바로 들어왔다. 구례현감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그대로 잤다.
5월 16일 [양력 6월 30일]<병오> 맑다.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의 탐후인이 돌아와서 고하되,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거쳐 이 구례현에 들어와 며칠 묵은 뒤에 전주로 갈 것이다."고 했다. 원이 주물상을 무척 융숭하게 차렸다. 몹시 미안했다. 저녁에 정상명(鄭翔溟)이 왔다.
5월 17일 [양력 7월 1일]<정미> 맑다.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돌아와서 전하 여 말하기를, "원수(권율)가 운봉 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을 영접하는 일로 완산(전주)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내 여기 온 것이 헛걸음이라 민망스럽다.
5월 18일 [양력 7월 2일]<무신>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에 김종려(金宗麗) 영감이 남원에서 곧바로 와서 봤다. 충청수영 영리 이엽(李燁)이 한산도에서 왔기로 집안에 편지를 부쳤다. 그러나 아침 술에 취해 미친듯 날뛰니 얄밉기만 하다.
5월 19일 [양력 7월 3일]<기유> 맑다.
체찰사가 이 구례현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 안해서 동문 바깥 장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명협정 에 앉았는데 구례현감(이원준)이 와서 봤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오후 네 시쯤에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후 여 섯 시에 개었다.
5월 20일 [양력 7월 4일]<경술> 맑다.
저녁에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와서 봤다. 또 말하기를 무주 장 박지리의 농토가 아주 좋다고 했다. 옥천에 사는 권치중(權致中) 은 첨지 김경로(金敬老)의 서처남(庶妻男)인데 옥천 양산창 근처 에 있다고 했다. 체찰사(李元翼)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공생(貢生)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李知覺)을 보내 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 다."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저녁에 마땅히 가서 뵙겠다."고 했다. 어둘 무렵에 가서 뵈오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조용 히 일을 의논하고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 야기하는 중에 일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다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흉물의 하 는 짓이 몹시도 그럴 듯하게 속이고 있음에도 하늘이 이를 살피 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나올 때에 남 종사(南從事)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나는 밤이 깊어서 나가 인사하지 못한다고 대답해 보냈다.
5월 21일 [양력 7월 5일]<신해> 맑다.
박천 류해(柳海)가 서울에서 내려와서는 한산도로 가서 공을 세 우겠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은진현(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은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해가 또 말하기를, 죄수의 우두머리 이덕룡(李德龍)을 고소한 사람이 옥 에 갇히어 세 차례나 형장을 맞고 다 죽게 될 판이라고 했다. 놀 랍고도 놀랍다. 또 과천의 좌수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 公)에게 말과 스무살짜리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 나오는 것을 보 고 나갔다고 했다. 안홍제(安弘濟)는 본시 죽을 죄도 아닌데도 여 러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 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려있다고 하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 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5월 22일 [양력 7월 6일]<임자>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손인필(孫仁弼)의 부자가 와서 봤다. 박천 류해(柳海)가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로 간다 하므로, 전라ㆍ경상 두 수 사에게 와 가리포 첨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늦게 체 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이 구례현으로 들어오고 배흥 립(裵興立) 영감도 온다는 개인적인 편지도 왔다. 그 동안의 정 회를 풀 수 있겠다. 다행이다. 혼자 앉았으니 비통하여 견디기가 너무 어렵다. 어두울 무렵 배흥립(裵興立) 동지와 이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와서 봤다.
5월 23일 [양력 7월 7일]<계축>
아침에 정사룡(鄭士龍)ㆍ이사순(李士順)이 와서 봤다. 원공의 일 을 많이 전했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裵興立)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 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내일 초계로 간다고 하면서, 체찰사가 영수증을 주면서 이대백(李大伯)이 모은 쌀 두 섬을 모아서 이를 성밖 주인 장세휘(張世輝)의 집으로 보냈다.
5월 24일 [양력 7월 8일]<갑인> 맑다. 샛바람이 종일 세게 불었다.
아침에 광양의 고응명(高應明)의 아들 고언선(高彦善)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李知覺) 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 나 도리가 없으니, 본 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대강 그려서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왔다.
5월 25일 [양력 7월 9일]<을묘>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려다가 비에 막혀 가지 않다. 혼자 시골집 에 기대어 있으니 회포가 그지없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 하랴!
5월 26일 [양력 7월 10일]<병진>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막 떠나려 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邊翼 星)이 문초받을 일로 체찰사 앞으로 왔는데 이종호(李宗浩)가 잡 아 왔다. 잠시 서로 마주 보고는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 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 붓듯이 쏟아진다. 말을 쉬게 했지 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이 정란(李廷鸞)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 (金德齡)의 아우 김덕린(金德 )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를 대고서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
5월 27일 [양력 7월 11일]<정사> 흐렸다가 개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저녁나절에 떠나 두치 최춘룡(崔春龍)의 집에 이르렀다. 류기룡(柳起龍)이 와서 봤다. 사량만호 이종호(李宗浩)가 먼저 왔었다. 변익성(邊翼星)은 곤장 스무 대를 맞아 꼼짝도 못한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2일]<무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서로 만나 보는 것을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푼다. 또 원(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했다. 변익성(邊翼星)도 왔다.
5월 29일 [양력 7월 13일]<기미> 흐리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신진)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황 생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이가 일흔 살인데 하동에 왔는 데, 일찌기 서울에 있었으나 지금은 떠돌아 다닌다고 했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정유년 5월 (1597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14일]<경신> 비 비가 내렸다.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저물녁에 단성땅과 진주 접경지역에 있는 박호원 (朴好元)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기는 하나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 겨우 밤을 지냈 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유둔 하나, 장지 둘, 백미 하나, 참 깨 다섯, 들깨 셋, 꿀 다섯, 소금 다섯과 미지 다섯은 모두 하동 에서 보낸 것이다.
6월 2일 [양력 7월 15일]<신유> 비오다 개이다 한다.
일찍 떠나 단계 시냇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삼가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산성으로 이미 가버려 빈 관사에서 잤다. 고을 심부름꾼이 밥을 지어 먹어라고 한 것을 먹지 말라고 종들 에게 타일렀다. 삼가현 오 리 밖에 홰나무 정자가 있어 거기 앉아 있는데, 근처에 사는 노순일(盧淳鎰) 형제가 와서 봤다.
6월 3일 [양력 7월 16일]<임술> 비가 내렸다.
아침에 떠나려다가 비가 이토록 오니 웅크리고 앉아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을 적에 도원수의 군관 류홍(柳泓)이 흥양에서 왔다. 그와 같이 길 사정을 이야기했다. 비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그대로 묵었다. 아침에 고을 사람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매를 때리고 밥쌀을 도로 주었다.
6월 4일 [양력 7월 17일]<계해> 맑다.
일찍 떠나려는 데, 삼가현감(신효업)이 문안의 글을 보내면서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땅에 이르러 고을에서 십 리쯤 떨 어진 홰나무 정자가 있는 곳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너무 더워서 한참 동안 말을 쉬게 하고, 오 리쯤 가니, 길이 쌍갈래이다. 한 길은 곧바로 합천군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또 한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4Km) 쯤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바라 보였다.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개를 끼고 넘어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 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 겠다. 모여곡이다.
6월 5일 [양력 7월 18일]<갑자>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급히 달려왔다. 곧 그를 불러 이야기했다. 식 사를 한 뒤에, 중군 이덕필(李德弼)도 달려 왔으므로 옛 이야기를 했다. 조금 있으니, 심준(沈俊)이 와서 보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잠자는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승서(李承緖)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이 도피했던 일을 말했다. 이 날 아침에 구례 사람과 하동현 감이 보내온 종과 말을 아울러 되돌려 보냈다.
6월 6일 [양력 7월 19일]<을축> 맑다.
잠자는 방을 다시 발랐다. 군관이 쉴 마루 두 칸을 만들었다. 저 녁나절에 모여곡 주인 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尹鑑)ㆍ문익신 (文益新)이 와서 봤다. 종 경(京)을 이대백(李大伯)에게 보냈더니 담당 아전이 나가고 없어서 받지 못하고 그냥 왔다고 한다. 어두워서 집에 들어갔는데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
6월 7일 [양력 7월 20일]<병인> 맑다. 몹시 더웠다.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朴應泗)와 류홍(柳洪)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잤다.
6월 8일 [양력 7월 21일]<정묘> 맑다.
아침에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이덕필(李德弼)과 심준(沈俊)이 와서 봤다. 고을 원과 그 아우가 와서 봤다. 원수를 마중 갔는데 원수 일행 여나믄 명 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오후에 원수(권율)가 진에 오 므로 나도 나가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 앞에 있었고 원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원수가 박성(朴惺)이 써 올린 사직서 초고를 보여 주는데, 박성(朴惺)이 원수의 처사가 소탈 하다고 진술하니, 원수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아 체찰사(이원익) 에게 글을 올렸다. 또 복병에 관한 일들을 낱낱이 아뢴 것을 보았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매우 불편하므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6월 9일 [양력 7월 22일]<무진> 개이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정상명(鄭翔溟)을 원수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다음에 종사관에게 문안했다. 처음으로 노마료(보수)를 받았다. 숫돌을 캐어 왔는데 질이 연일석(경북 영일에 나는 고운 돌)보다 좋다고 했다. 윤감(尹鑑)ㆍ문익신(文益新)ㆍ문보 등이 와서 봤다. 이 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수루터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어떻겠노!
6월 10일 [양력 7월 23일]<기사> 맑다.
아침에 가라말ㆍ가라워라말ㆍ간자짐말ㆍ유짐말 등의 네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다. 원수의 종사관이 삼척의 홍연해(洪 漣海)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좀 늦게 와서 보겠다고 한다. 홍연해 (洪漣海)는 홍견(洪堅)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고우 서철 (徐徹)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 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봤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徐乫朴只)인데 밥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조용히 말하는 사이에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지 않 는 것이 없고,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 탄과 당면한 토벌ㆍ방비에 관한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하는 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돌아갈 것을 잊고서 이야기했다. 또 말하기를 내일은 원수가 산성을 살펴보러 간다고 했다.
6월 11일 [양력 7월 24일]<경오> 맑다.
중복날이라 쇠를 녹이고 구슬을 녹일 것처럼 땅이 찌는 듯하다. 저녁나절에 명나라 차관 경략군문(唐差官軍略軍門) 이문경(李 文卿)이 와서 보므로,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엊저녁에 종사관과 이야기 할 때, 변홍백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어머 니의 영연이 편한 줄은 알겠으나, 쓰라린 회포를 어찌 다 말하 랴! 다만, 변흥백(卞興伯)이 나를 만나볼 일로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갔다고 하니, 참으로 한이 된다. 이 날 아침에 편 지를 써서 변흥백(卞興伯)에게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 록 신음했다. 지짐 굽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 날 아침에 한산도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썼다. 경의 모친이 편지를 보냈는데 지내기가 몹시 어렵다고 했다.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했다. 작은 워라말이 먹지 않으니 이것은 더위를 먹은 것이다.
6월 12일 [양력 7월 25일]<신미> 맑다.
종 경(京)과 종 인(仁)을 한산도 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ㆍ 충청수사(최호)ㆍ 경상수사(배설)ㆍ 가리포첨사(이응표)ㆍ 녹도만호(송여종)ㆍ 여도만호(김인영)ㆍ 사도첨사(황세득)ㆍ 동지 배흥립 (裵興立)ㆍ 조방장 김완(金浣)ㆍ 거제현령(안위)ㆍ 영등포만호(조계종)ㆍ 남해현감(박대남)ㆍ 하동현감(신진)ㆍ 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했다. 저녁나절에 승장 처영(處英)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 므로,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또 적의 사정을 말하고 또 원공 (원균)의 일도 말했다.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갔다고 한다. 어떤 일인지 몰랐는데, 원수(권율)에게 가 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했다. 복병군 을 보내어 길을 막고 적에게 위세를 뽐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일이 있어 원수에게 뵈러 왔다. 나도 원수를 보았다. 새벽 일찌기 돌아왔다.
6월 13일 [양력 7월 26일]<임신> 맑다.저녁나절에 가랑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저녁나절에 병마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와서 봤다. 한 시간이나 넘도록 서로 이야기했다. 점심을 먹여서 보냈다. 이 날 낮에 왕골을 쪄서 말렸다. 어두울 무렵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의 종 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했다.
6월 14일 [양력 7월 27일]<계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니 영연과 위ㆍ아랫사람들이 두루두루 무사하다고 한다.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 갔다.
6월 15일 [양력 7월 28일]<갑술> 맑고 흐리기가 반반이다.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으니,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다 말하랴! 초계 원이 떡을 마련하여 보냈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군관을 보내 어 말하기를,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했다. 나도 뒤를 따라 가서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로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병이라고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6월 16일 [양력 7월 29일]<을해> 맑다.
혼자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들 열 과 이원룡(李元龍)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저녁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병마사는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변광조(卞光祖)가 와서 봤다. 아들 열 은 정상명(鄭翔溟)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고 왔다.
6월 17일 [양력 7월 30일]<병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이 쓸쓸하다. 밤 경치는 한없이 넓기만 한데 새벽에 앉았으니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 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元均)의 정직하지 못한 짓을 많 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 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元均) 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 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 을 먼저 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 (元)이라는 사람은 전진하려고는 아니하고 오직 안골포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였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개 딴 마음을 품 고 있을 뿐더러 원(元)이라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나가지 않 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원수에게 이희남(李喜男)과 변 존서(卞存緖)ㆍ 윤선각(尹先覺) 등에게 공문을 띄워 독촉하여 오게 했다. 올 때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나의 임시로 사는 집 에 와서 곧 이희남(李喜男)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초계 원을 보았더니 이른바 양심이 없다고 할만하다.
6월 18일 [양력 7월 31일]<정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 절에 윤감(尹鑑)이 떡을 만들어서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葉 威)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 데, 적병 십만 명 이 벌써 사자마(沙自麻)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 ㆍ대구 등지로 옮겨 안동 등지로 갈 것이다."고 했다. 저물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사복 정상명 (鄭翔溟)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수가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고 하였다.
6월 19일 [양력 8월 1일]<무인>
새벽에 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의 진에 이르를 즈음에 동트는 빛이 벌써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 황 여일(黃汝一)이 나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 뵈었더니 원수는 원균(元均)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 데, 통제사(원균)의 하는 일이 말이 아니다. 흉물은 조정에 청하여 안골포와 가덕 도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무슨 뜻이겠소? 질질 끌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에게독촉하겠다. 통 제사(원균)는 이를 지휘할 것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나는 또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원수가 간 뒤에 황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조금 있으니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하면서 초계 원에게 하는 말이 진찬순(陳贊順)에게 심부름시키지 말라고 했더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올 때 사 로잡혔다가 도망해 되돌아온 사람이 나를 따라 왔다. 이 날은 땅 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 풀을 적게 먹었다. 낮에 군사 변덕기(卞德基)ㆍ 변덕장(德章)ㆍ 변경완(卞慶琬)ㆍ 변경남(卞敬男)이 와서 봤다. 진사 이일장(李日章)도 와서 봤다. 밤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6월 20일 [양력 8월 2일]<기묘> 종일 비오더니 밤에는 많이 내렸다.
늦은 아침 늦게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윤감(尹鑑)ㆍ문익신 (文益新)ㆍ문보 등이 와서 봤다. 변유(卞瑜)가 와서 봤다. 오후에 종과 말의 보수를 받아 왔다. 병들었던 말이 조금 나아졌다.
6월 21일 [양력 8월 3일]<경진> 비가 오락가락 하다.
새벽 꿈에 덕과 율온과 대가 꿈에 보였는데, 다들 나를 보고 좋 아하고 뵙고자 하는 기색이 많았다. 아침에 영덕현령 권진경 (權晉慶)이 원수께 뵈러 왔다가 원수가 이미 사천으로 갔으므 로 나에게 와서 보고 좌도의 일을 많이 전했다. 좌병사 군관이 편지를 가져왔다. 곧 회답편지를 써서 보냈다. 종사관 황여일 (黃汝一)이 문안을 보냈다. 저녁에 변주부(卞主簿)ㆍ윤선각(尹 先覺)이 여기와서 들어와서 밤까지 이야기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4일]<신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국(무우ㆍ두부ㆍ다시마ㆍ고기를 맑은 장 에 끓인 국)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기는 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그 처사가 체모 없음을 말하여 뭣하랴! 저녁나절에 이 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우병사의 편지를 전했다. 낮에 정순신 (鄭舜信)ㆍ정사겸(鄭思謙)ㆍ윤감(尹鑑)ㆍ문익신(文益新)ㆍ문보 등 이 와서 봤다. 이선손(李先孫)이 와서 봤다.
6월 23일 [양력 8월 5일]<임오> 비오다가 개다가 하였다.
아침에 대전(大箭)을 다시 다듬었다. 저녁나절에 우병마사(김 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환도(環刀)의 크고 작은 것을 보냈다. 그러나 가지고 오는 사람이 물에 빠뜨려 장식과 칼집 이 결딴나버렸으니 아깝도다. 아침에 나굉(羅宏)의 아들 나재 흥(羅在興)이 그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봤다. 또 쪼들리는 데도 노자까지 보내어 주니 미안스럽다.
6월 24일 [양력 8월 6일]<계미> 이 날은 입추이다.
새벽에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골짜기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 침에 수사 권언경(權彦卿)의 종 세공(世功)ㆍ종 감손(甘孫)이 와 서 무우밭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무우밭을 갈고 씨부침하는 일의 감독관으로 이원룡(李元龍)ㆍ이희남(李喜男)ㆍ정상명(鄭翔 溟)ㆍ문임수(文林守) 등을 정하여 보냈다. 생원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보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합천군수가 조언형(曺彦亨)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더위가 찌는 듯했다.
6월 25일 [양력 8월 7일]<갑신> 맑다.
다시 무우씨를 부침하도록 시켰다.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군사를 토론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저녁에 종 경(京)이 한 산도에서 돌아왔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놀라워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놀랍고도 애석 하며 놀라와 탄식했다. 한 놈의 적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 수를 잃었으니 통탄하고 한탄할 일이다. 거제도 사람을 보내어 미역을 실어왔다.
6월 26일 [양력 8월 8일]<을유> 맑다.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을 쉰 대 때 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ㆍ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종 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로 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 )과 박몽삼(朴夢三)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ㆍ아랫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했다. 다만 석달이나 가물어서 농사는 틀려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장삿날은 7월 27일이나 또는 8 월 4일중에서 날잡는다고 했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 찌 다 말하랴! 저녁에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이원익) 에게, "아산의 이방(李昉)과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고 말하여, 체찰사 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 성하여 보냈다. 이 날에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버렸다.
6월 27일 [양력 8월 9일]<병술> 맑다.
아침에 어응린(魚應 )ㆍ박몽삼(朴夢三) 등이 돌아갔다. 이 희남(李喜男)과 이방(李昉)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하 였다.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흘러 넘쳤다고 했다.
6월 28일 [양력 8월 10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 (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초계 아전의 편지에,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 날 새벽 꿈이 몹시도 뒤숭숭하였다. 종 경(京)이 물건을 사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6월 29일 [양력 8월 11일]<무자> 맑다.
변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 종 경(京)이 돌아왔다. 이희남(李喜 男)ㆍ이방(李昉) 등이 돌아왔다.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심준 (沈俊)이 와서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잡아가는 데, 총병관 양 원(楊元)이 삼가에 이르러 꽁꽁 묶어 보내더라고 전했다. 문림 수(文林守)가 의령에서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벌써 초계역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로 급제한 량간(梁諫)이 황천상(黃天祥)의 편 지를 가지고 왔다. 변주부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6월 30일 [양력 8월 12일]<기축> 맑다.
새벽에 정상명(鄭翔溟)을 시켜 체찰사에게 문안했다. 이 날 몹시 더워 땅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흥양의 신여량(申汝樑)ㆍ신제 운(申霽雲) 등이 와서, 연해의 땅은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정유년 7월 (1597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3일]<경인>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명나라 사람 세 명이 왔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송대립(宋大 立)과 송득운(宋得運)이함께 왔다. 안각(安珏)도 와서 봤다. 저녁에 서철(徐徹) 및 방덕수(方德壽)와 그 아들이 와서 잤다.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그대로 송득운(宋得運)은 원수의 진에 갔다가 왔는데,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놀랍고 놀랄 일이다. 오늘은 인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양력 8월 14일]<신사> 맑다.
아침에 변덕수(卞德壽)가 돌아왔다. 저녁나절에 신제운(申霽雲)과 평해에 사는 정인서(鄭仁恕)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문안하러 여기 왔다. 오늘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러냐!
7월 3일 [양력 8월 15일]<임오>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李良)ㆍ최언환(崔彦還)ㆍ건손(巾孫)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蔣俊 琬)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吳澐)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 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 왔다. 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4일 [양력 8월 16일]<계미> 맑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방(李芳)과 류황(柳滉)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흥양의 량점(梁霑)ㆍ찬(纘)ㆍ기(紀) 등이 왔다. 변여량(卞汝良)ㆍ 변회보(卞懷寶)ㆍ 황언기(黃彦己) 등이 모두 벼슬했다고 와서 봤다. 변사증(卞師曾)과 변대성(卞大成) 등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뿌렸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봤다. 어두어서 비가 많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5일 [양력 8월 17일]<갑신>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卞德壽)가 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馬訖坊)으로 갔다.
7월 6일 [양력 8월 18일]<을유> 맑다.
꿈에 윤삼빙(尹三聘)을 보았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저녁나 절에 이방이 와서 봤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 변존서 (卞存緖)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각(安珏) 형제도 변흥백(卞興伯)을 따라 왔다. 이 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에다 반죽하여 시렁에 얹었다.
7월 7일 [양력 8월 19일]<병술> 맑다.
오늘은 칠석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균(元均)과 같이 모였다. 내가 원균(元均)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균(元均)이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에서 와서 그 주장의 잘못으로 대신 죄 받으러 원수에게 잡혔다고 했다. 초계 현감이 햇물건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安珏) 형제가 와서 봤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朴應泗)가 와서 봤다. 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의령현감 김전(金銓)이 고령에서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7월 8일 [양력 8월 20일]<정해> 맑다.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 주인 이어해(李魚海)와 최태보(崔台輔)가 와서 봤다. 변덕수 (卞德壽)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宋大立)ㆍ류홍(柳洪)ㆍ박영 남(朴永男)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9일 [양력 8월 21일]<무자> 맑다.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제사에 쓸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봤다. 저녁나절에 윤감(尹鑑)ㆍ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주부 변존서(卞存緖) 등에게 전별하고 돌아 갔다. 이 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았다. 어버이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잤다.
7월 10일 [양력 8월 22일]<기축> 맑다.
열과 변존서(卞存緖)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기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 관 황여일(黃汝一)도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정상명(鄭翔溟)이 싸움터에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종이로써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 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7월 11일 [양력 8월 23일]<경인> 맑다.
열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다. 더위가 너무도 심하여 걱정 뿐이다. 저녁나절에 변홍달(卞弘達)ㆍ신제운(申 霽雲)ㆍ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도 비통하다. 종 태문(太文)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7월 12일 [양력 8월 24일]<신묘> 맑다.
아침에 합천이 햅쌀과 수박을 보냈다. 점심밥을 지을 적에 방응원(方應元)ㆍ 현응진(玄應辰)ㆍ 홍우공(洪禹功)ㆍ 림영립(林英立) 등이 박명현(朴名賢)이 있는 곳에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종평세(平世)는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잘 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슬퍼서 탄식함을 어찌 말로써 하랴! 이희남(李喜男)이 사철쑥(더위지기,생당쑥; 입추때에 베어 말려 냉, 황달,습열,간장염 등의 한약재로 씀)백 묶음을 베어 왔다.
7월 13일 [양력 8월 25일]<임진> 맑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싸움말(戰馬)을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 (李台壽)ㆍ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이 와서 보고, 또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송대립(宋大立)ㆍ장득홍(張得洪)도 왔다. 장득홍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양식 두 말을 내주었다. 이 날 칡을 캐어 왔다. 이방도 와서 봤다. 남해 아전과 심부름꾼 두 명이 왔다.
7월 14일 [양력 8월 26일]<계사> 맑다.
이른 아침에 정상명(鄭翔溟)과 종 평세(平世)ㆍ종 귀인(貴仁)이 짐말 두 필을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말(戰馬)을 끌고 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 문인수가 와가채(모시조개 음식)와 동아선(동아를 기름에 볶아 잣가루를 묻혀 겨자를 찍어 먹는 술안주)을가져 왔다. 방응원(方應元)ㆍ 윤선각(尹先覺)ㆍ 현응진(玄應辰)ㆍ 홍우공(洪 禹功)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엄청 놀랍다. 오전 열시쯤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은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金億)의 편지를 보이는 데, "초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黃汝一) 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 나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하였다.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조금있으니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洪大邦)더러 달려보라고 했더니 잘 달렸다. 날씨가 비올 것 같아 돌아와 집에 이르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밤 열시 쯤에야 맑게 개이니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았다. 쌓이는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
7월 15일 [양력 8월 27일]<갑오> 비가 오락가락 하다.
저녁나절에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과 여기 있는 윤선각(尹先覺)까지 아홉 명을 불러 떡을 차려 먹었다.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李德弼)이 왔다.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에게서 우리 수군 스무 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한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다는 것이다. 어두워서 비가 많이 내렸다.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卞 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李喜男)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世男)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 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 (世男)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世男)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마저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손응남(孫應男)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7일 [양력 8월 29일]<병신> 가끔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을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에게 보내어 세남(世男)의 말을 전했다. 저녁나절에 초계원이 벽견산성에서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ㆍ 류황(柳滉)ㆍ 류홍(柳弘)ㆍ 장득홍(張得弘) 등이 와서 보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卞大獻)ㆍ정운룡(鄭雲龍)ㆍ 득룡(得龍)ㆍ구종(仇從) 등은 초계 아전인데 어머니 쪽의 같은 파 사람들로서 와서 봤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이름을 적지 않은 사령장을 신여길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버린 일로 심문받으러 갔다. 경상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 갔다.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다.
새벽에 이덕필(李德弼)ㆍ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 均)ㆍ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ㆍ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 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ㆍ류황(柳滉)ㆍ윤선각(尹先覺)ㆍ 방응원(方應元)ㆍ 현응진(玄應辰)ㆍ 림영립(林英立)ㆍ 이원룡(李元龍)ㆍ 이희남(李喜男)ㆍ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韓致謙) 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7월 19일 [양력 8월 31일]<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
오는 길에 단성의 동산 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현에서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1일]<기해>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권문임(權文任)의 조카 권이청(權以淸)이 와서 봤다. 단성현감도 와서 봤다. 오정때에 진주 정개산성(定介山城) 아래 강정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봤다. 굴동(옥종면 문암리)의 이희만(李希萬)의 집에서 잤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경자>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ㆍ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나믄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 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싸움말을 서로 바꿀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平世)와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7월 23일 [양력 9월 4일]<임인>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노량에서 했던 공문을 송대립(宋大立)에게 부쳐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 리)에 이르니,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裵興立)도 와서 잤다.
7월 24일 [양력 9월 5일]<계묘> 비가 그침없이 내렸다.
한치겸(韓致謙)ㆍ이안인(李安仁)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과 손씨의 종이 같이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 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方應元)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더라는 것이다. 군량 스무 말, 말 먹이 콩 스무 말, 말 대갈 일곱 벌을 가져 왔다. 이 날 저녁에 조방장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보기에 술로써 위로했다.
7월 25일 [양력 9월 6일]<갑진> 저녁나절에야 맑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 언공이 와서 보고서는 그 길로 원수부로 갔다. 배수립(裵樹立) 이 와서 보고, 이곳 주인 이홍훈(李弘勛)이 와서 봤다. 남해현 령 박대남(朴大男)이 자기의 종 용산(龍山)을 보내어 내일 들 어오겠다고 전했다. 저녁에 가서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 걱정이다. 송득운(宋得運)을 보내어 황종사관에게 문안했다.
7월 26일 [양력 9월 7일]<을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과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8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저녁나절에 동지 이천(李薦)과 판관 정제(鄭霽)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했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7월 28일 [양력 9월 9일]<정미> 비가 내렸다.
이희량(李希良)이 와서 봤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李薦) 및 진주목사와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했다. 밤에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지나서 돌아갔다. 의논한 것은 모두 계책을 돕는 일이었다.
7월 29일 [양력 9월 10일]<무신>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이군거(李君擧:薦의 字) 영감과 함께 밥을 먹고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또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돌아올 때 배 동지와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에게 들려 봤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李蓍慶)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정유년 8월 (1597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11일]<기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쳤다.
저녁나절에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봤다. 조신옥(趙 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8월 초2일 [양력 9월 12일]<경술> 잠시 개었다.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豆恥)로 가는 길로 곧 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했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江亭: 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李元春)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 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孫仁弼)은 바로 와서 볼겸하여 곡식까지 가져 왔다. 손응남(孫應男)은 올감(早柿)을 바쳤다.
8월 4일 [양력 9월 14일]<임술> 맑다.
□□을 보내 왔다. 다시 들어와 관청을 보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압록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고쳤다. 고산현감 최진강(崔鎭剛)이 군인을 교체 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낮에 곡성(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 청(곡성현감:崔忠儉)과 여염집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사람사는 기척이 끊어졌다. 이 일대에는 온통 비어있고 말 먹일 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현청에서 잤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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