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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15.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 경험, 자기화 - 시행착오는 실패가 아니라 연습이다
https://youtu.be/5hGlKT4Ds24?t=2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사위성 녹자모(鹿子母) 강당(講堂)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바라문(婆羅門) 출신 가운데 수학자인 목갈라나 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목련존자가 아니고 이름은 다른데 다른 사람입니다. 이분은 출가(出家)한 스님이 아니고, 바라문 출신 학자(學者)였어요.
그분이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이 강당이 1층, 2층, 3층이지 않습니까. 이 강당의 3층을 오르기 위해서는 1층을 오르고, 2층을 오르고, 3층을 오르듯이.
또 우리 바라문들은 베다를 배울 때, 기초(基礎)를 배우고, 중간(中間)을 배우고, 또 그 뒤를 배웁니다. 또 코끼리를 길들이는 사람도 처음에는 어떻게 길들이고, 두 번째는 어떻게 길들이고, 다음에는 어떻게 길들이고, 이렇게 그 가르침에 순서(順序)와 차례(次例)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이 법(法)과 율(律)에도 그런 차례를 따라 배워서 성취(成就)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물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렇다. 내 법 또 한 차례를 따라 배우고, 성취할 수가 있다.” 이렇게 대답했어요.
“어떤 차례를 따라 가르치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목갈리나여, 바른 주장(主張)이라면 순서대로 차츰차츰 성취하게 될 것이오. 나는 이 법과 계율을 순서(順序)대로 성취하였소. 만약 나이 어린 비구(比丘)가 처음으로 와서 도를 배우고자 하여 법과 계율에 들어오면 나는 먼저 이렇게 가르치오.
너는 와서 목숨을 다해, 몸을 지켜 청정(淸淨)하게 하고 말과 뜻을 지켜 청정하게 하라.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는 다시 그다음을 가르치오.
너는 홀로 멀리 떠나 나무 밑이나 숲속, 혹은 무덤 사이 같은 한적(閑寂)한 곳에 가서 살아라. 그런 곳에 가서 단정(端正)히 앉아 원(願)을 바로 세워 생각이 다른 데로 팔리지 않도록 하여라. 남의 재물(財物)과 가구(家具)를 보더라도 탐심(貪心)을 내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성냄과 수면에도 그렇게 하고, 의심(疑心)을 끊고 미혹(迷惑)을 막아 그 마음을 깨끗이 지켜라.
목갈라나여, 그러나 장로(長老) 비구나 학덕(學德)이 높은 바라문에게는 더 깊은 것을 가르치오. 구경(究竟)에 가서는 모든 번뇌(煩惱)가 다하고 지혜(智惠)를 얻는다고 가르치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하자 “부처님, 그와 같이 가르치고 훈계(訓戒)하면 제자들은 다 구경의 지혜를 얻어 반드시 열반(涅槃)을 얻게 됩니까?” 라고 목갈라나가 묻자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소.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소.”
그러니까 목갈라나가 또 물었어요.
“열반(涅槃)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은 현재(現在)의 그 길을 가르치는 분인데, 어째서 그분은 구경(究竟)의 열반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도 가르침을 순서에 따라, 어린 비구에게는 신참자에게는 어떻게 어떻게 가르치고, 그것을 이루면 다음은 어떻게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가르친다. 또 장로나, 또 학식(學識)이 높고 지혜(智惠) 있는 바라문이 올 때는 어떻게 가르친다. 이렇게 가르침의 순서가 있고 그 가르침을 순서대로 따라 행한다면 열반을 성취할 수가 있다.
여기서 신참자(新參者)에게는 이 내용을 보면, 수행자가 들어오면 뭘 제일 먼저 행해야 된다?
1) 계행(戒行)을 청정히 지켜야 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말을 어떻게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한다. 청정한 계행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가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수행자가 되어서 성질난다고 남을 때리고, 죽이고,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두 번째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건이 탐난다고 뺏거나 훔치거나 이래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성적(性的)으로 타인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이렇게 행동으로 남을 해치는 행위, 남을 괴롭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2) 말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해서 남을 괴롭히거나 욕설을 해서 남을 괴롭히거나, 이간(離間)질을 해서 남을 괴롭히거나, 꾸미는 말로 남을 괴롭히거나 이렇게 말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3) 마음이 깨끗해야 된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거나 성내거나 짜증이 가득하거나 어리석음이 있다면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먼저 계행이 청정해지도록 가르쳤습니다.
4)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고요한 숲속에 가서 생활하도록 가르쳤다.
즉, 세상 사람과 잡담하고 이런 혼탁(混濁)한 환경에 있지 말고 좀 떨어져서 (초심자에요.) 떨어져서 한적(閑寂)한 곳에 머무르면서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마음을 얼굴 전면에 딱 집중(集中)을 해서 처음에는 호흡관(呼吸觀),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여기에 깨어있는 수식관(數息觀)을 하고, 이걸 아나빠나라고 그래요.
그래서 아나빠나에 의해서 정신통일(精神統一)이 딱 이루어지면 그다음에 몸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에 깨어있는, 소위 비빠사나(위빠사나)를 행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순서가 있고, 절차(節次)가 있고, 하나를 하게 되면 다음을 하고, 하나를 하게 되면 다음을 하고. 이렇게 해서 차례로 가르침대로 따라 행한다면, 누구나 다 번뇌(煩惱)가 없는 모든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그런 구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설명을 하니까 이 목갈라나가 듣고 기뻐하면서 또 물었어요.
“그러면 요렇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서 수행을 하면 누구나 다 열반(涅槃)에 들 수가 있습니까? 열반을 증득(證得)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부처님께서 “그건 그렇지가 않다. 열반을 성취하는 사람도 있고,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목갈라나가 또 되묻는 거요.
“어째서 부처님께서 잘 가르쳤고, 부처님께서 지금도 행하고 계시고,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성취하고 어떤 사람은 성취를 못합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목갈라나를 보고
“당신은 왕사성 가는 길을 잘 아시오?”하고 물었어요.
지금 대답하고 있는 자리가 사위성이에요.
“예, 잘 압니다.”
“어떻게 잘 아오?”
“저는 그곳으로 장사하러 자주 다니기 때문에 왕사성 가는 길을 훤하게 잘 압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왕사성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잘 가르쳐 줄 수 있소?”
“그럼요, 저는 아주 자세히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어디가면 무슨 일이 있고, 가다가 중간에 일어나는 문제까지 다 일러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길을 물은 사람은 누구나 다 왕사성에 도달(到達)합니까?”
“아닙니다, 부처님.”
“왜 그렇소?”
“왕사성 가는 길을 제가 아무리 일러줘도 그 사람이 게으름을 피우고 안 간다면 그곳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설명만 듣고 가지도 않는 사람도 있고, 가다가 내가 가르친 대로 안 가고 딴 길을 가버린다면 어떻게 그가 도달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당신 책임(責任)이오?”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제 책임입니까?”
“그럼 누구 책임이오?”
“그건 그 사람 책임이지요. 저한테 길을 물어서 저는 자세히 가르쳐줬고, 가고 안 가고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니까 부처님이
“목갈라나여, 나도 그렇소. 나는 스스로 이미 열반(涅槃)의 경지(境地)에 다다랐소. 어떻게 하면 그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지, 나는 자세히 압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그 길을 묻는다면 나는 자세히 가르쳐줄 수가 있습니다. 그 가는 과정(過程)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나는 하나하나 다 일러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반에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하고는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가 게으름을 피워서 가지 않든지, 설령 가다가도 중간에 그만두든지 하는 것은 그의 문제입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었어요. 오늘 많은 사람들은
“저도 불교(佛敎) 믿으면 스님 가르침대로 하면 성불(成佛)합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해.
“스님, 스님 시키는 대로 100일 기도하면 성취가 됩니까?”
“스님, 3년 기도하면 제가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집니까?” 그런 말은 온당치가 않습니다.
날짜가 3년이 지난다고, 날짜가 100일이 지난다고 되는 게 아니오. 어떤 분은 또 그럽니다.
“스님, 제가 머리 깎고 출가(出家)해서 스님이 되면 성불(成佛)하겠습니까?”
머리 깍고 스님 한다고 보장(保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그 법에 따라 어떻게 한발 한발 가느냐가 중요한 거요.
그래서 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이 법 따라 수행 정진하라.”
누구든지 다 이 법 따라 부지런히 수행(修行) 정진(精進)한다면 누구나 다 해탈 열반에 오른다. 그것은 이 길 따라 바르게만 간다면 누구나 다 목적지에 이르는 것은 같다. 그러나 그렇게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르친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책임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꾸 데려다주기를 원합니다. 대신(代身)해 주기를 원한다. 자동차 운전을 대신해 줄 수가 없죠. 피아노를 대신 배워 줄 수가 없습니다. 몸에 병이 낫을 때 대신 주사 맞아줄 수가 없습니다. 밥을 대신 먹어줄 수가 없어요.
이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럼 아무것도 대신해 줄 수 없나? 아니에요. 그것을 자세히 일러줄 수는 있어요. 어떻게 자세히 일러줄 수 있느냐? 그걸 경험(經驗)했기 때문에. 그냥 책 보고하는 얘기가 아니고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수행 지도를 할 때도 체험(體驗)을 한 사람하고 이론(理論)만 아는 사람하고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론(理論)만 한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 호흡(呼吸)은 이렇게 해라. 뭐는 이렇게 해라.” 말이 쉽습니다. 진도(進度)도 빨리 나갑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장애(障礙)가 많습니다. 이론대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전화해서
“거기 찾아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예, 이리이리 오시오.” 내가 생각할 때는 너무너무 쉬워. 이거 찾아오는 것은. 그런데 막상 본인이 처음 찾아오면 도대체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되는지 오른쪽으로 가야되는지, 또 묻고 또 묻고 이렇게 되잖아요. 아는 자에게는 쉽지마는 모르는 자에게는 쉽지가 않습니다. 해보면 온갖 난관(難關)이 나타납니다.
“수식관(數息觀)은 어떻게 하는 거냐?”
“호흡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호흡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숨이 들어갈 때는 들어가는 줄 알아차리고, 나올 때는 나오는 줄 알아차린다. 길면 길 줄을 알아차리고 짧으면 짧음을 알아차린다.”
그거는 너무 쉬워. “이거밖에 아닙니까?” 그게 뭐냐 이거야.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해보면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거 그거 알아차리는 게 쉬운 거 같은데, 해보면 다리가 아파서도 집중(集中)이 안 되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끼어서도 집중이 안 되고, 안 되는 거요.
온갖 증상(症狀)이 나타난단 말이오. 그럼 묻죠.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데, 몸에 열이 나는 데” 뭐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한단 말이오. 그럼 책만 본 사람은 그런 얘기는 책에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당황하죠.
그런데 실제로 해본 사람은 그런 수많은 온갖 증상들을 다 겪고, 그것이 공부하는데 큰 장애가 아니다. 다만 호흡만 알아차리면 되지, 그런 일어나는 것들은 일어나는 대로 가만히 놔두면 된다. 그러면 일어났다가는 사라진다.
이렇게 경험을 한 사람은 사람들이 죽겠다고 하면서 질문을 해도 다 겪은 일이니까
“으흠, 조금 더 하면 돼. 괜찮아. 그냥 해봐.”
“부러지겠는데요?” “안 부러져.”
“정말 부러집니다.” “안 부러져.”
“책임질 거요?” “으흠, 책임지지.”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거요. 왜? 경험(經驗)을 다 해봤기 때문에.
그래서 이 실천(實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가는 길을 지도(指導)받지 못하고 자기가 혼자서 간다. 부지런히 간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 길을 알고 가느냐? 모르고 가느냐? 안내(案內) 받고 가느냐? 그냥 가느냐? 큰 차이(差異)입니다.
경전(經典)은 뭐하고 같아요? 길 찾아가는 지도(地圖)와 같습니다. 지도를 잘 보면 얼마나 길 찾기가 쉽습니까? 지도 안 보고 그냥 막 가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수도 없이 헤맵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죠.
그런데 실제(實際)로 가보면 지도 갖고 잘 찾아질 때도 있지만 헷갈릴 때도 많아. 군데군데. 그래서 지도를 갖고 가도 가끔은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차를 세우고 물어봐야 돼. 그런데 지도 덮어놓고 계속(繼續) 묻기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찾아가기는 가요. 피곤하고 힘이 많이 들죠.
그래서 우리가 경전을 잘 읽어야 하며, 그래서 경전은 지도와 같은 거요. 그러나 경험 있는 스승으로부터 지도(指導)를 받아야 됩니다. 지도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가면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 자세히 물어야 돼.
“스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지는 않고 계속 묻기만 해요. 그럼 또 공부가 안 됩니다. 반드시 하면서 물어야 돼. 하기만 하고 묻지도 않는 사람이 있고, 묻기만 하고 안 하는 사람이 있어. 둘 다 어렵습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동차 운전을 어떻게 하는가? 자동차는 이렇게 생겼고, 이러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이렇게 움직입니다. 라고 내가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아, 그럼 되겠구나.” 하고 가서 해보면 됩니까? 안 됩니까? 잘 안되지.
그러면 다시 와서 “이렇게 하니 잘 안되던데요.”
“야, 내가 이렇게 하라고 그랬지 언제 이렇게 하라고 그랬냐, 그러니까 이렇게 해봐.”
그래서 가보니 “어, 되네.”
다시 또 안 되어서 “에이. 그렇게 해도 안 되던데요.”
이렇게 하면 똑같은 얘기를 해줘도 매일매일 그게 달라요.
그런데 실제로 가서 안 해보고 와서 들으면 어떻겠어요? 결국은 저 스님은 어제 한 얘기 오늘 또 하죠? 오늘 한 얘기 내일 또 해. 세 번만 들으면 어때요?
“아이고, 그거 들을 필요 없어. 맨 똑같은 얘기 하더라.”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런데 실천(實踐)을 하면 어떠냐? 똑같은 얘기가 절대 아니에요.
실천을 안 하면 똑같은 얘기가 돼. 그래서 이것이 지식(知識)과 차이(差異)가 나는 거요.
지식이라는 것은 경험 없이 그냥 ‘어떻게 한다’ 하는 이론만 갖고 있는 거요. 그런데 실제로 경험해보면 거기 오차(誤差)가 생기고 미스가 자꾸 생겨. 그걸 따지고 묻게 되면, 그러니까 여러분이 책을 처음에 읽어보면 책대로 하면 다 될 거 같지? 가서 해보면 안 되지. 그럼 다시 와서 책을 보면 어때요?
“아, 내가 이걸 잘못 이해(理解)했구나.” 책은 똑같아. 책은 똑같은데, 해보면 안 되서 와서 또 뒤져보면 책의 내용이 매일매일 새로운 거 같아.
그래서 똑같은 법문(法門)도 자기 경험이 쌓이는 만큼 법문이 새로 들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와서 그래요.
“스님, 제가 그때 부처님의 일생 들었는데, 그때 금강경 들었는데, 그때 법문하고 요새 법문 하고 많이 틀립니까?”
“왜 그렇게 묻소?”
“요번에 법문 들으니까 그때 안 들어본 얘기가 굉장히 많던데요.”
“그건 당신이 생각이 깊어졌다는 뜻이오.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소.”
여러분들이 아마 똑같은 책이나 똑같은 테이프를 두 번 세 번 들어도 지난번에 들을 때 이런 얘기가 있었던가? 스님이 이렇게 설명했던가?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는 거요.
자기 경험(經驗)이 쌓이면 그만큼 새로워지는 거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자기화(自己化) 되어 가면 옛날 것도 자꾸 새로워지는 거요.
그래서 저도 20대 때 읽은 경전 내용하고, 30대 때 읽은 내용하고, 요즘에 읽는 거하고 다릅니다. 요즘 읽으면서 “옛날에 이런 얘기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단 말이오.
자기 눈이 띄어지는 만큼, 자기 귀가 열리는 만큼 새로운 모습이 보이고, 새로운 소리가 들리게 된다.
이런 데서 우리가 자기 공부가 중요하다. 자기 점검이 매우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우리가 열반에 이르고 이르지 못한 것이 부처님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 지도(地圖)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우리가 지도를 잘못 읽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도를 제대로 읽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가서 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아는 것만큼 행동이 안 되죠.
그래서 우리가 계속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해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을 실패(失敗)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연습(鍊習)이라고 생각하셔야 되요. 연습.
자전거를 어떻게 타면 된다. 이거 알아도 타보면 안 되지 않습니까? 딱 한 번 만에 타져야 되는데 실제로는 안 돼요. 여러 번 넘어진단 말이오.
넘어지는 것은 실패냐? 실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넘어지는 것은 타지는 하나의 과정(過程)이예오. 실패가 몇 번 연속(連續)되면서 성공이 따르기 때문에 실패는 성공(成公)의 어머니다.
그럼 어떤 것을 실패라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좌절(挫折)할 때. “에이, 난 안 되나봐.” 하고 그만두면 그건 실패가 됩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10번 넘어지면 11번, 11번 넘어지면 12번, 20번 넘어지면 21번, 이렇게 일어나는 게 필요하죠. 그럼 계속 반복해서 계속하기만 하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안 될 때는 안 되는 원인(原因)을 좀 밝혀야 됩니다.
그래서 안 되면 다시 한다. 단순히 다시 하지 않고, 연구(硏究)해서 다시 한다. “왜 안 됐지?”하고 한 번 연구를 하고 다시 시도(試圖)하고 “오, 이러니 안 되네.” 다시 연구하고 시도하고. 이렇게 해나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 니르바나의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법을 성취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요. 이런 데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사실은 굉장히 겸손하신 말씀이죠.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책임한 말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를 확실하게 보장을 좀 해주지, 보증을 좀 서주지, 담보를 좀 해주지, 왜 무책임하게 길을 가리킬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이 길은 스스로 가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부처님은 우리가 자전거 타다가 넘어지면
“난 안되겠다” 하고 팽개치지도 않으시고, 넘어질까
싶어 계속 자전거를 붙들고 계시는 분도 아니다.
계속 옆에서 잡아주면 어때요? 그 사람 못 타요.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고 계시는 분과 같다.
스스로 탈 수 있도록 늘 지켜보고 계신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이렇게도 말했죠.
또 ‘나의 가르침은 지팡이와도 같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지팡이가 의지처(依地處)가 되죠.
“다리가 나으면 어떻게 합니까?”
“버려야지.” 그런데 다리가 나았는데도 고맙다고 짚고 다니면 다리 병신(病身)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또 ‘어차피 버릴 꺼, 처음부터 짚지 말자.’ 이러면 그것은 다리 아픈 사람이 다리를 빨리 나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삼아. 지팡이 삼아. 안내자(案內者) 삼아 나아가게 되고, 궁극적(窮極的)으로는 우리 스스로 그곳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다만 가르칠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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