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일 특공대, 한국전 최초로 적 전차 파괴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서 밀리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 군사영어학교, 대장 전역)이 지키고 있던 개성이 이날 아침 떨어졌고, 옹진반도의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 군사영어학교. 중장 전역)도 이날 오전 중에 주요 방어지역을 빼앗겼다. 의정부 방면을 지키고 있던 제7사단 (사단장 유재흥 준장. 군사영어학교. 중장 전역) 정면의 포천도 이날 오전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동두천 함락이 시간 문제였다. 강릉의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 군사영어학교. 소장 전역) 정면에서도 적은 빠른 속도로 진격해 왔다. 적은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군사영어학교. 대장 전역)이 지키고 있는 춘천 방면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왔다. 춘천은 적이 서울과 중부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탈취해야만 할 요충이었다. 춘천 정면의 제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 육사 1기. 소장 전역) 지역에서는 인민군 제2사단이 04시를 전후하여 아군 진지에 치열한 포격을 가한 다음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너 진격해 왔다. 38도선 남쪽 300미터에 위치한 길이 250미터의 모진교(1965년 춘천댐 건설 후 수몰)는 춘천 공략의 길목이며, 이 다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기계화부대가 춘천으로 들어갈 수 없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물이었다. 모진교에서 적의 주공을 저지하지 못한 제7연대 방어선은 순식간에 맥없이 무너졌고, 제7연대 제1선 방어정면을 돌파한 적은 단숨에 춘천을 점령할 속셈으로 SU-76자주포를 앞세우고 5번 도로를 따라 일사천리로 진격하여 25일 09시쯤 춘천이 내려다보이는 역골, 지내리까지 진출하였다.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자 제7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송광보 대위(육사 5기. 대령 전역)는 제2소대장 심일 중위로 하여금 적 전차(한국전 초기 국군 장병들은 소련제 SU-76 자주포를 ‘전차’라고 불렀음)를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중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출동한 심일 중위는 우선 57밀리 대전차포 1문을 이끌고 지내리 남쪽 1.5킬로미터의 도선장 부근 절벽과 S자형 굴곡지점을 이용하여 대전차포를 방열하고 있을 때 적 전차가 나타났다. 첫 발을 발사하여 명중시켰으나 적 전차는 계속 전진해 왔다. 제2탄, 제3탄을 발사해 계속 명중시켰지만 적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고 아군을 향해 접근하면서 76밀리 포를 쏘아댔다. 다급해진 심 중위는 역골 남쪽으로 철수하여 그곳에 대기 중이던 나머지 1문의 대전차포와 합세하였다. 첫 번째 공격에 실패한 심일 중위는 소대원들 가운데 5명을 선발하여 특공대를 편성, 옥산포(일명 무른데미) 북쪽 수문이 있는 도로변 소나무 숲에 대기시키는 한편, 최후 수단인 육박공격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사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57밀리 대전차포 2문을 역골 남쪽에 방열하였다. 09:20쯤, 적은 옥산포-우두산 일대에 집중 포격을 가하면서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진격해 왔다. 그 2, 3킬로 후방에는 7대의 전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심 중위는 될 수 있는 대로 전차를 바싹 유인한 다음 사격하려 하였지만, 아군 공병대가 전방 500미터 지점에서 도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어서 700-800미터의 원거리에서 적 전차에 사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군 대전차포탄 5, 6발이 연속해서 적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적 전차는 잠시 멈칫할 뿐 다시 전진하다가 아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발견하고는 강변 모래밭으로 내려가 춘천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다. 원거리 사격으로는 전차를 파괴할 수 없음을 통감한 심 중위는 지체 없이 2문의 대전차포를 대동하고 특공대가 대기하고 있는 옥산포로 물러났다. 10분 남짓 모래밭에서 춘천을 향해 포격을 가하던 적 전차는 도로 위 장애물에 몇 발의 포탄을 작열시켜 날려버린 뒤 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도로를 따라 진출, 10:00 경 그 선두부대가 옥산포에 밀어 닥쳤다. 이윽고 12:00 적의 주력이 옥산포를 통과하고 그 본대가 넓은 보리밭에 그 측면을 드러내는 순간 제16포병대대(대대장 김성 소령. 육사 5기. 준장 전역) 제2포대(포대장 이금열 중위. 육사 8기. 대령 전역) 105밀리 곡사포가 일제히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제7연대 1대대(대대장 김용배 소령, 육사 5기, 1951. 7. 2 전사. 준장 추서)도 일제 사격과 함께 역습을 감행하여 적을 지내리선까지 물리쳤다. 그러나 제1대대가 포 지원 거리 밖으로 벗어나고 측면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연대장의 지시로 다시 주진지로 돌아왔다. 아군의 반격으로 타격을 받은 적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옥산포로 밀려들었다. 대략 14:00 전후로 추산된다. 옥산포로 물러나 대전차포 방열을 마친 심일 중위는 이때 “전차가 나온다. 전차가 나온다!”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놀라 전방을 바라보니 2대의 전차가 눈에 띄었다. 3번 차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전차의 굉음이 귓전을 때리고 드디어 눈앞에 검은 쇳덩어리가 나타나는 순간 대전차포 2문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꽝” “꽝” 57밀리 대전차포의 철갑탄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제1탄이 선두 전차 궤도를 파괴하고 제2탄이 측면을 꿰뚫었다. 그토록 당당해 보이던 적 전차가 기우뚱거리며 정지하고, 포탑 해치가 열리며 적 전차병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 순간, 주낙한 일등병이 속사를 퍼부어 적을 사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심일 소대장을 선두로 특공대원 5명이 2대의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포탑 안으로 밀어 넣고 뛰어내리자, 전차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이때 특공대원 1명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주위 고지에서 손에 땀을 쥐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7연대 장병들은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두산 연대관측소에서 이를 지켜본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후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심 중위가 육박공격으로 전차 2대를 파괴한 사실은 6.25가 난 지 몇 시간이 안 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뒷날에도 많은 전차를 고철로 만들었다.”
2. 자주포냐, 전차냐? 심일 특공대가 옥산포에서 파괴한 것이 적 전차라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자주포라는 이야기도 있다. 전차와 자주포라고 애매하게 표현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제 SU-76 자주포를 파괴한 것이다. 이런 혼선이 야기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SU-76 자주포는 바로 전차를 개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외모는 전차 그대로였던 것이다. 북한군이 남침 초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구사한 무기가 소련제 T-34 탱크와 SU-76 자주포, 그리고 야크 전투기였다.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는 지상 방어선 돌파에, 그리고 야크기는 후방 민심교란에 각각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가운데 T-34형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사용한 주무기였으며, 늪지대에서도 자유롭게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6.25 개전 당시 북한군은 이런 T-34형 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는데, 반해 우리 국군은 전차 한대 없었다. 게다가 국군은 적절한 대전차 수단마져 없었다. 이로 인해 개전 초기 국군 장병들에게 T-34 전차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전차를 앞세운 적의 제1격으로 38선 방어선이 뚫리고 적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참담한 결과가 초래되던 것이다. 탱크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한 것이 SU-76 자주포였다. 적은 이 자주포 176대를 남침에 동원하였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 자주포는 소련군이 제2차대전 초기에 사용하던 T-24전차 차체에 76.2밀리 포를 장착한 것으로 파괴력, 충격력, 기동력 면에서 전차나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개전 초기 국군은 이를 ‘전차’로 부렀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참고로 T-34 전차는 중량이 32톤, 장갑두께(최대) 47밀리에 85밀리 포를 장착했고, SU-76 자주포는 중량이 12.3톤, 장갑두께(최대) 23밀리에 76.2밀리 포를 장착한 것으로 보아 SU-76 자주포는 '미니 탱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탱크 기동이 제한 받는 춘천 정면에 적은 보다 중량이 가벼운 이 자주포를 투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심일 중위가 파괴한 것이 적 전차냐 자주포냐 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전차나 다름없는 자주포였다. 따라서 “심일 특공대가 한국전 최초로 적 전차를 파괴했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적 작전계획 차질 초래한 춘천 방어전
25일 중으로 춘천을 점령하려던 적은 심일 특공대에 의해 전차 2대가 파괴된 데다가 보전협동공격마저 돈좌되자 초조한 나머지 다음 단숨에 춘천을 점령할 기세로 전술원칙도 무시한 채 5번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역골-옥산포-춘천 축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아군도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심일 중위가 지휘하는 대전차포소대는 적 전차를 파괴한 지점에서 아군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옥산포로 물러났다. 이때 제16포병의 105밀리 곡사포 4문과 제7연대 57밀리 대전차포 3문이 불을 뿜었다. 적은 우세한 화력과 병력을 믿고 인해전술로 무조건 정면에서 밀러붙이는 무모한 전법만을 반복해서 구사하였다. 게다가 은폐물이나 차폐물 하나 없이 완전히 노출된 개활지를 통하여 공격해 왔으므로 그 손실은 엄청나게 증가되어 갔다. 결국 적은 소양강까지 불과 500-600미터 거리를 남겨놓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오후 늦게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으나 이번에도 아군의 반격을 받아 많은 피해만 입고 말았다. 38선에서부터 거침없이 진격을 계속해 춘천 북방까지 단 숨에 내달은 인민군 제2사단은 아군의 완강한 저항과 정확한 포격으로 심대한 피해를 입고, 당일 춘천을 점령하려던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은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조바심도 났다. 그는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으로 남침계획 작성을 주관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작성한 남침 작전계획에 따르면, 인민군 제2군단은 개전 당일에 춘천을 점령한 다음 신속히 주력을 장호원-수원으로 진격시키고, 일부는 가평을 거쳐 서울 동남방으로 진격하여 서울을 정면에서 압박해 내려올 그들 제1군단과 합세하여 국군을 한강 이북에서 포위 섬멸한다는 구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국군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그들의 작전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적은 26일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해 왔고, 아군은 포격과 역습으로 격에게 타격을 가했다. 춘천 공략에 나섰던 인민군 제2사단은 이틀 동안 사상자가 40%에 달하는 대 타격을 받았다. 27일 적은 홍천 공략에 나섰던 제12사단 병력의 증원을 받아 대대적인 춘천 공략에 나섰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소양강 북안에 배치하고 포격을 가했다. 이에 심일 중위의 대전차포소대가 응사하여 SU-76 자주포 2대를 또 다시 파괴하고 승무원들을 사살하였다. 오전 11시 경부터 적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한참 동안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 전차가 드디어 소양교를 건넜고. 북한강과 소양강을 도섭한 적이 아군의 후방을 차단할 기세를 보이자 아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적은 춘천을 빼앗으나 그 대가도 지불해야만 했다. 만일 홍천 정면의 인민군 제12사단이 병력을 춘천 정면으로 분산시키지 않고 홍천을 집중 공략해 홍천을 조기에 점령했더라면 춘천 방면의 아군은 퇴로가 차단당했으리라고 가정해 본다면 적은 결과적으로 전술적 실책을 범한 것이 된다. 인민군 주력이 28일 서울을 점령 한 후 3일 동안 서울에 머물러 허송세월한 것이 그들이 6.25전쟁에서 범한 대표적인 실책이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되고 있지만 유력한 이유로 국군 6사단의 선전으로 그들 제2군단의 수원, 서울 동남방 진출이 지연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된다. 북한군은 춘천 공방전에서 한 마디로 졸전을 치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춘천 방면 공략에 나섰던 인민군 제2사단장 김청송 소장과 제12사단장 전우 소장이 춘천 점령 1주일만에 작전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 해임되고, 그 일주일 후에 다시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도 김무정 중장으로 경질되었음은 북한군이 춘천 공략에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증거라 하겠다. 적의 작전계획에 차질을 빚게 한 춘천 방어전의 주역으로 국군 제7연대와 제16포병대대가 있으며, 그 핵심에 적 전차를 파괴하여 그들의 공격기세를 꺾는데 일조를 한 심일 특공대가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심일 특공대가 적 전차를 파괴해 적의 전진을 지연시킴으로써 아군의 작전 전개와 원주의 사단 예비인 제19연대를 증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던 것도 특기할만 하다. 춘천 방어전은 화랑대인이 주역을 이룬 전투였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육사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출신이고 후일 육사 교장까지 지냈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모교 1기, 제7연대 제2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5기, 제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도 5기이며, 심일 중위는 8기 졸업생이다. 이밖의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도 모두 모교 출신들이기 때문에 춘천 공방전은 실로 육사졸업생들이 치룬 값진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4. 전사와 태극무공훈장 및 소령 추서
춘천 공방전에서 적 전차를 파괴한 심일 중위는 이후 음성지구 전투를 마치고, 1950년 7월 중순 제7사단으로 전출되어갔다. 음성지구 전투란 춘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제7연대가 7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 동안 무극리, 동락리, 생극리 전투 등을 통해 적 사살 2,707명, 포로 170명, 야포 24문, 박격포 31문, 기관총 55정, 소총 1.087정, 장갑차 7대, 차량 65대, 무전기 4대 노획 등 실로 엄청난 전과를 거둔 전투를 지칭한다. 개전 이래 최대의 승전 소식을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 장병들에게 한국전 최초로 전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하였다. 심일 중위도 이때 대위로 특진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아군이 노획한 북한군 장비가 전부 소련제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사주하여 전쟁을 일으켜놓고도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허위 선전하면서 유엔군의 한국 파견을 극력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획물들은 그들의 입을 막는데 좋은 물증이 되었던 것이다. 음성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7연대는 7월 8일 이곳으로 진출한 국군 제1사단에 배속되었다가 3일 후인 10일 배속 해제되었다. 심일 대위가 7월 중순 제7사단으로 전속되어 갔다면 바로 이 무렵일 것으로 판단된다. 제7사단에 전입해 간 심일 대위는 사단 수색중대장으로 보임되어 낙동강 방어전을 수행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대열에 참가해 개천까지 진출했다. 이후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서 적정을 파악하기 위한 기동정찰 중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1951년 1월 26일 오후였다. 그의 나이 28세. 춘천 전투 이후 전사할 때까지 그의 구체적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얼마 없어 무척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최전방에서 정찰활동을 하다가 적의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는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서서 용전분투 하였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가 산화한 이후인 1951년 10월 15일, 옥산포 전투에서 적 전차를 격파한 전공이 인정되어 건군 이래 위관 장교로는 최초로 그에게 태극무공후장이 수여됨과 동시에 육군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심일 소령을 대신해 그의 부친 심기연옹께서 훈장을 받았다. 함남 서천에서 태어나 월남한 그는 서울 사대 2학년에 재학하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제8기로 임관하였다.
이 ‘춘천대첩’은 전차·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리게 했고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국군의 한강 방어선 구축과 유엔군 참전 시간 확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나아가 한반도 전역을 1개월 내에 적화하려던 북측 전략에 결정타를 입혀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존케 한 귀중한 초전 승리였다.
심일 대위는 이후 충주·영천 지역 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으나 다음 해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적군과 교전 중 28세로 장렬히 산화했다.태극무공훈장과 소령 계급이 추서됐고, 2000년 6월25일 춘천의 102보충대 입구에 흉상이 건립됐다.
경찰이던 동생은 전쟁 때 순직했고, 학도병으로 지원한 동생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자식을 그리다 100세를 넘긴 노모는 2005년 마침내 세 아들을 찾아 하늘로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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