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굽는 봉황마을에 여우비 내리고

<옹기 굽는 봉황마을에 여우비 내리고> 구포에 조수는 밀려들고 날은 이미 어두운데, 호롱불 여기저기 별처럼 널린 것을 도깨비불이라고 괴이하다 여기지 마오. 어부들이 밤새우며 고기 잡는 불이라네."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시인은 탐진만 구강포구에 연꽃처럼 둥둥 떠다니는 어화(漁火)를 보며 이렇게 읊었다. 하지만 시인은 벌써 떠났고, 어화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구강포구는 화엄(華嚴)이다. 아홉 골의 물이 저마다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온갖 수행과 만덕을 쌓다가 두루뭉술한 자태로 지긋이 눈감고 가부좌 틀고있는 구강포구는 틀림없이 화엄이다. 구강포구 물결은 마침내 별이 될 것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침 햇귀 퍼지거나 석양 까치놀 피어나는 구강포구에 가보라.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시나브로 부는 바람에 초롱초롱 빛나다 하늘로 일제히 용오름 할 때 당신도 따라 별이 되리니. 조물주가 빚은 위대한 그릇 철 지난 그 바다, 탐진만 구강포구에 여우비 내리고 나는 그들의 음계(音階)에 맞춰 귀엣말로 소곤대는 소리 들으며 내 안의 나를 찾아 바다 품에 안긴다. 탐진만은 보는 사람들의 눈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노래되었다. 문학평론가 김훈은 <풍경과 상처>라는 기행산문집에서 "탐진만의 바다는 요니(女陰)처럼 육지를 파고들어 조붓하고 아늑하였다."고 묘사했다. 시인 박현은 <우리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탐진만을 가리켜 "부러질까 두렵다 강진은 뚝뚝 소리가 나도록 바짝 당긴 활 모양 같기 때문이다. 활의 중심부는 강진읍, 활의 한쪽 부분은 도암면과 신전면, 그 줄기에 만덕산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탐진만을 '요니'나 '바짝 당긴 활'로 비유한 것은 무척 흥미롭다. 특히 탐진만을 '다산 정약용이 이상사회를 향해 잡아당긴 활'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혼란스러운 요즘 세태를 볼 때 대단히 의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몇 해 전에 나는 탐진만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낼 기회가 있었는데, 썰물 때 드러났다가 밀물 때 사라지는 감풀이나 개펄을 지켜보다가 탐진만은 조물주가 빚어낸 위대한 그릇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졸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 이야기>라는 기행산문집에 이렇게 적었다. 오, 탐진만! 그대는 조물주가 빚어낸 위대한 그릇이다. 그대는 태고 적부터 우리의 꿈 과 삶을 담아왔던 영원한 그릇이다. 아홉 골의 물줄기가 하나로 아울러 흐르면서 목마 른 인간과 대지를 넉넉하게 적셔주었던 그 소중한 생명수를 품안에 오롯이 간직하고 있 는 그대는 생명의 그릇이다. 오, 탐진만! 그대는 조물주가 빚어낸 거대한 옹기이며 청자상감운학매병이다. 그대가 청자 빛 바닷물을 소중히 안고 있을 때는 비색(翡色)을 자랑하는 강진 고려청자였고, 그 대의 품에서 날개짓하다가 그대로 각인되어버린 학(鶴)들을 볼 때면 영락없이 청자상감 운학매병이었다. 그대의 품안에 안겨있던 청자 빛 바닷물이 더 낮은 곳으로 임하여 거 무죽죽한 속살을 드러내고, 바다 사람들 모여들어 대합과 바지락을 캘 때면 그대는 우 리네 질펀한 삶을 보듬고 있는 강진 칠량옹기였다. 큰그릇을 위하여 나는 '조물주가 빚어낸 위대한 그릇'인 탐진만을 보며, 그릇에 대한 의미를 헤아려본다. 그릇이란 물건을 담는 기구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릇은 사람의 능력이나 도량을 일컫는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오랜 전통을 이어왔던 칠량 땅 옹기장들은 물건을 담는 질그릇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능력이나 도량이 큰 그릇들도 무수히 만들어냈다. 임진왜란 때 순절했던 퇴은당(退隱堂) 염걸(廉傑)을 비롯하여 동학농민운동 때 불꽃처럼 일어섰다가 스러졌던 수많은 동학도들, 가까이는 5·18 광주민중항쟁 최후의 수배자였던 윤한봉과 미문화원 사건을 주동했던 김현장이 바로 그 민족과 민주라는 이름의 큰그릇이었다. 속담에 '문견(聞見)이 좁으면 국량(局量) 배포도 좁아진다'고 했다. 우리가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은 모름지기 큰그릇이 되기 위함이다. 이젠 우리의 작거나 잘못된 그릇을 과감하게 깨트려야할 때이다. 옹기장이나 청자 도공들은 조금이라도 잘못 구워진 옹기나 청자가 발견되면 용서 없이 깨트린다. 그릇은 깨지는데 그 매력이 있다. 탐진만 구강포구에는 아직도 여우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시인 오세영의 연작시 <그릇>중에서 한 편을 떠올리며 또 하나의 교훈을 배운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理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봉황마을에 봉황은 없다 오 시인의 시구처럼 '부서진 원이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하는' 사금파리를 밟으며 마지막 남은 옹기장을 만나러 봉황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봉황의 상서로운 노래 소리 들려와야 할 이 마을에 사금파리들의 애애한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봉황마을은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마을 뒷산인 경금산이 봉황의 머리이며 본 마을은 몸통 부분이고 덕동 앞산이 날개요 월궁은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문견과 국량 배포가 좁은 탓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봉황은 없다. 어촌 느티나무 우듬지에 콩새 몇 마리 체신머리없이 까불고, 탐진만 물결 위에 괭이갈매기 대여섯 마리 고양이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뿐이다. 한때 독점(甕店)이라고 했던 이 마을에 오늘은 여우비 내리는 소리만 싸락싸락 쌓이고, 인적마저 끊겨 마치 폐촌에 들어선 듯하다. 한때 30여 가구 대부분이 옹기제작을 업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거의 모두 손을 놓았고 오직 한 가구만이 옹기를 만들고 있었다. 11대째 옹기 업을 이어왔으며, 1996년 노동부로부터 옹기 기능전승자와 후계자로 선정된 정윤석(61)씨와 그의 막내아들 영균(35)씨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정씨 집의 대문은 열려있고, 집도 텅 비어있다. 여우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라서 일손을 놓고 바람처럼 마실이라도 나간 것일까? 십여 년 전, 어떤 옹기마을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지만 '옹기와 비는 찔끔이(상극)'라고 하던데, 비를 핑계삼아 어느 주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주인 허락 없이 동막(옹기를 만드는 작업장)을 기웃거려본다. 주인 없는 발물레가 연거푸 하품하다가 싸락싸락 내리는 여우비 소리 자장가 삼아 오수에 잠기고, 성형 끝난 황토색 옹기들이 잿물 입고 가마 속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대오를 갖추고 있다. 옹기가마도 촉촉이 젖어있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옹기와 불을 품에 안고 인고의 나날을 보냈던 그 기개만큼은 아직도 살아있다. 옹기를 구울 때 완제품을 기대하기가 무척이나 무척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옹기장은 '콩을 굽기 위해 불 속에 넣었다가 다시 콩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옹기뿐만 아니라 청자를 구워내는 일도 무척 어려워서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는 그의 시에서 "푸른색 자기 술잔을 구워 열에서 하나를 얻었다"고 노래했다. 봉황대에 올라 아직 여우비는 그치지 않는다. 출하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옹기들을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마을 동남쪽에 있는 봉황대에 오른다. 선인이 지었다는 건물은 이미 사라졌고, "좁은 언덕 외로운 마을에 비 개이고 외딴 배만 밤을 스치니 강물 위엔 아무것도 없어라…"고 했던 한 편의 시만 시나브로 부는 바람에 실려간다. 발아래 비에 젖은 탐진만과 봉황마을이 추레한 흑백사진처럼 놓여있다. 그 시인은 일찍이 오늘날을 예언하기라도 했던 걸까? 한때 탐진만에는 크고 작은 풍선(風船)들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옹기를 실어 나르는 가장 큰배를 풍선이나 곶배라고 하며 작은 배가 해추선이고 가장 작은 것을 뗀마인데, 이젠 그 모든 배들이 자취를 감춰 탐진만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봉황대에 서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추억의 흑백사진첩을 펼친다. 어머니의 장독대는 늘 반질반질 윤이 났고, 꼭두새벽에 정화수 올려놓고 축원하는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다. 나는 장독대보다 주변에 피어있는 봉숭아며 맨드라미 그리고 키가 멀쑥하게 자란 해바라기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장독대 옹기들을 가족처럼 돌보곤 하셨다. 이제 장독대는 안타깝게도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1970년대 초부터 우리네 생활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전통 옹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플라스틱과 고무 제품들이 그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섰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옹기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있다. 그건 '추억이 아름답다'는 상투적이거나 회고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탁월함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옹기는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명체이다. 그래서 발효식품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에게 옹기만큼 소중한 그릇은 없다. 또한 옹기를 모르고 감히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었던 옹기는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 그릇이며, 각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꿈과 애환 그리고 질펀한 삶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 이제 여우비 그치고 가을 햇살 비치기 시작한다. 우련하게 보이던 탐진만과 봉황마을이 비안개 너울을 벗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을 햇살이란 풍성한 수확을 위해 내리는 은총의 빛이다. 이젠 우산을 접고 가을 햇살 속으로 걸어가야겠다. <월간> 민족 21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