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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용기 있고 사내답고 쿨한 성격의 안드레아 사도!
교구 구조 안에는 참사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구장님과 보좌주교님들, 그리고 신부님들 가운데 이런저런 분야에 전문성과 능력과 경험치를 지닌 분들이 몇 분 참여합니다. 그래서 교구 내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합니다.
저희 수도회 안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습니다. 관구평의회입니다. 관구장님을 중심으로 그분에게 여러 측면에서 전문적인 도움을 드리기 위해 구성된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단 안에서도 그런 구조가 있었습니다. 일흔 두 제자단이 있었고, 열 두 제자단이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단 안에서도 핵심 제자단이 있었으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거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중대한 일이 있으면 그들만 따로 모아 의견을 들으셨습니다. 타볼산에 오르실 때도 그 세 사람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사항이 생깁니다.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핵심 제자단에서 제외됩니다.
제가 안드레아였다면 끝도 없이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어떻게 그러실수 있지? 그래도 내가 명색이 첫 제자인데, 나를 쏙 빼놓고 야고보와 요한을 참사회에 넣는 법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안드레아는 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신 예수님 마음이지. 나는 그저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지, 하고 크게 넘겼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이라는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의 사회심리학과 교수인 코리 키스는 자기 수업인 ‘행복의 사회학’ 첫 시간에 학생들은 무엇을 가장 추구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줍니다.
“오늘 오후에 밖에 나가서 행복해지는 일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 행복이 한 시간, 더 나아가 오후 내내 이어지는지 알아보세요.”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과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오후 내내 행복감을 유지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그저 기분 좋은 하루였을 뿐, 한 시간 이상 행복을 느꼈다고 말한 학생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을 한 시간 이상 쭉 느끼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사람이 더 문제 아닐까요? 행복은 ‘나’의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 중에서 하나일 따름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만 쌓여 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분노, 공포, 혐오, 놀람,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있어야 했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부정적 감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행복만 쏙 뽑아서 간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된다면 더 큰 아픔이 자기에게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행복만 주시지 않은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때로는 어렵고 힘든 시간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00% 행복만을 원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형과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에 곧바로 그물을 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이 결코 행복만 있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이 진짜 행복이 되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100% 행복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아프리카 속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13)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한평생
순수하고 성실한
감실이 되어 사는 이라네.
세상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환난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올곧은 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내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떠나게 하면
나는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잡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봉사자를 하대하고 상처를 주는 막말을 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잡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부를 뜻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사람 잡는 어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람 잡는 사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한민국 최고의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우리의 순간순간이
기꺼이 버리고
따라야 할
결단의 여정입니다.
결단이 길을
새롭게 합니다.
버려야 하느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버림이 따름이고
버림이 떠남의
출발지입니다.
버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위해
익숙한 그물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와야
숲을 제대로
볼 수 있듯
버려야 되찾을 수 있는
삶의 참된 기쁨입니다.
버려아 만날 수 있고
버려야 가벼워집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기꺼이 소중한 그물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무엇을 버리며
살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따르기위해 먼저
끊고 버려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19)
'곧바로!'
오늘 복음(마태4,18-22)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생명과도 같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그물 안으로',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이라는 그물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일, 곧 '모든 사람의 구원을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로마10,9-18)는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소명에 응답하는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4-15.17)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제와 너를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도 '곧바로' 그리고 '기쁘게' 응답하는 제자들이 됩시다!
'11월 위령성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오늘 저녁부터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제1주일'이 시작됩니다.
첫 주일미사에 꼭 참례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