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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묵상글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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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축일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사람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축일입니다.
이는 그럴 계획 그러니까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낼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마리아라는 한 처녀가 너무도 참해 하느님께서 계획을 바꿔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녀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어머니 될 사람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계획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이제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먼저 첫째 독서 이사야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메시아 하느님이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그래서 그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고고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예언합니다.
그리고 둘째 독서 히브리서는 그 하느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시고,
성모 마리아는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을 하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들과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착착 이루어져 가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 얘기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어머니들이 되는 것을 묵상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이미 제시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러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있다고 했을 때
누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당신 어머니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탁월하게 풀이하였지요.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받아 모심으로 말씀을 잉태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그분을 낳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며
마리아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시는데 이것을 보며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를 본받아야 할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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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분야에서의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그 순간에는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것 무시하기의 전문가.”
쓸데없는 것을 무시하는 그 전문성(?)이 자기 예술에 헌신하는 능력을 키울 수가 있었고, 눈앞의 과제나 프로젝트에 자신을 묶어두는 능력을 결합하여 전설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 공부하면서 음악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여기에 텔레비전을 봐도 상관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집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집중에 솔직히 죄송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러다 보니 SNS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전화도 못 받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무시해서 SNS 메시지를 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어떤가요?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면서, 정작 주님을 외면할 때가 너무 많은 우리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들으신 성모님을 보게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인데, 잉태해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이 메시지는 성모님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무조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안 되는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무조건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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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잘 들여다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아름다워집니다(로렌 올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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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 역시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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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라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 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어머니,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어머님
인간으로 볼 때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있겠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천상의 이 말을 듣고나서
당신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이 많았습니까?
남편 요셉에 대한 걱정,
말구유에서 아들의 해산,
이집트로 피난,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십자가가 있었겠습니까?
성총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이란
반드시 지상의 행복이나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님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안락은 물론
정신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지상에서 고통을.
십자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한 당신이
여인 중에 총복을 받으신 당신이.
누구보다 가혹한 십자가를 져야 했고
누구보다 처참한 고통을 받았거늘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배문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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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3월 25일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치면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지낸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루어지는 교회 전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성찰에 따른 교회의 결정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축일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도 마리아라는 처녀의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꺼이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거룩하게 지내는 성주간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당 교우들과 함께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로 이어지는 성모님 발현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발현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모님에게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교회는 성모님을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요한 사도를 아들로 부탁했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기에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복되신 동정녀’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기에 성모님은 동정녀라고 교회의 전승은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성모님의 몸에서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죽음,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동정녀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동정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정을 지키는 사람을 동정녀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정결하게 사는 이들이 동정녀입니다.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무덤에 묻기 전에 성모님은 가슴에 묻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성모님은 힘들 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려울 때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성모님은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당찬 여인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았고, 태중의 아이까지 축복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구름 속에 있는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동정녀이기 전에, 천주의 모친이기 전에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였고, 신앙의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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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어느 노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종착지는 ’받아들임‘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받아들임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이 바로 ’받아들임‘입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임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온전히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입니다. 겸손되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을 뿐 내 자신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이고 신앙인으로서 가장 완벽한 모습을 마리아는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 왜 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일까요? 진짜 그것만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기도의 끝은 ’받아들임‘입니다. 오늘 주님의 탄생을 예고함이 연약한 여인의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졌듯이 우리 기도의 끝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받아들임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친밀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받아들임은 우리를 늘 기쁨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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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빛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색은 빛의 고통이다.
빛이 굴절되고 파장이 불완전해졌을 때 색이 나타납니다.
빛이 부딪히고 깨지고 그래서 그 내부가 요동칠 때 색이 나타납니다.
즉 색은 빛의 고통인것입니다.
우리도 그 나름의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겪었던 고통이 바로 우리의 색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어낸 고통이 우리를 더욱 예쁘게 만들기 바랍니다.
우리를 욱 찬란히 만들기 바랍니다.
고통을 겪고 누군가는 검고 검은 색을 나타낼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람이 우리는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예쁜 색을 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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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종과 비움의 여정과 순교영성
-마리아 성모님의 삶-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로 불렸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 12월25일 9개월전 3월25일이 대축일인데 올해는 이날이 성주간이라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져 오늘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부활시기와 겹쳐 더욱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우선 돋보이는 점은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입니다. 교회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아하즈에 대한 신탁을 예수님 탄생의 예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인내와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인내와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이름이 감명깊게 드러나는 성구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참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 방문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일성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총이 가득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 보속 처방전 말씀을 받았을 때 환호하던 어느 수녀의 응답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제가 참 많이 인용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이와 더불어 독일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살고 계신 현익현 바로톨로메오 신부님의 기발한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재미있어 수 차례 인용했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수도원의 보물이라 하셨을 때 웃으며 즉각적으로 주신 답변입니다.
“나는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자산 둘이 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하는데 가톨릭 수도원 역시 노목과 노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승이 고승(高僧)이 되면 더 바랄나위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느 사찰이나 수도원을 찾든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노목과 노승 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를 찾아온 하느님의 겸손이 놀랍습니다. 임마누엘 탄생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동안 기다려온 하느님이요, 희망이 있을 때 비로서 가능한 한없는 기다림입니다. 언젠가의 마리아의 출현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온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기다림하니 해마다 파스카의 봄철이면 놀라운 신비로 와닿은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몇날 동안 피고자 일년 열두달을 꼬박 기다리며 인내해온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입니다. 이 감격을 노래한 “기다림”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만남있으랴
언제나 거기 그자리
꼬박 일년 기다렸다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이다
꼭 일년만의 만남이구나!
산수유, 개나리, 매화, 매실, 벚꽃, 수선화, 민들레...
모든 봄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4
참으로 장구한 세월 인내하며 기다렸다 마리아를 발견한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눈밝고 귀밝은 하느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마리아의 깊은 믿음은 침묵과 경청의 관상으로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흡사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임마누엘 탄생의 신탁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하느님에게서 마리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의 재차 물음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명쾌하게 자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지막 천사의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 때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전 존재가 담긴 답변입니다. 인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터닝포인트;turning point)이 되는 시점(時點)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설득이 주효했고 깊이 침묵중에 경청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혼자서는 일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순종의 믿음의 응답을 필요로 했던 하느님이요,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누리가 쥐죽은 듯 침묵에 잠겨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부분에 관한 주석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응답에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에 하느님 역시 참 초조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무조건적 “예스(Yes)”,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이런 자발적 순종의 응답에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무려 두 차례 반복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님 삶의 본질이요 핵심이자 우리 믿는 이들 역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둔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한 여인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되도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루가11,28)
그대로 성모님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게세마니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간절히 바쳤던 예수님의 기도도 생각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절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남김없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중에 자신을 완전히 비운후의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라는 고백이며 바로 이 말씀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모전자전, 어머니 성모님의 순종과 비움의 여정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잉태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실 때까지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성모님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분에게 다시 새롭게 배우는 순종과 비움의 여정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비움의 순교영성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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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하는 기쁨>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어
나를
기쁘게 하시니
내가
주님과 함께
있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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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0-33)
어머니이시나 동정이신 분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요한 1,13)이 아니라
하늘의 불이 그를 낳습니다.
흠 없는 처녀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잉태하여
성령께서 그 태 안에서 숨 쉬십니다.
이 탄생의 신비가,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요
성령으로 한 처녀가 결혼했지만
그 몸에 아무 흠이 없었고,
배 속의 아이나 바깥의 손길에
그의 순결이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그 순수한 토양에서 빛났으며,
어머니면서 처녀요
남자를 모르는 어머니셨다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다져 줍니다.
의심하는 자여, 어째서 어리석은
머리를 가로젓는가?
천사가 거룩한 입으로 이를 알려 준다.
그대는 천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양인가?
동정녀께서는 하늘의 눈부신 전령을 찬양하고
그를 믿었기에
당신 몸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오시고
믿음과 경배를 망설이는 자들은 내치십니다.
곧바로 믿은 처녀는
그리스도를 당신 태에 모시어
그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지키셨습니다.
-프루덴티우스 <그리스도의 신성>-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이따금 나는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이 우정을 더 자주 요구하고,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나 자신을 더 많이 내주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나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우정을 베풀 것입니다.”
사람마다 우정을 요구하는 정도가 다르지만, 우리는 우정을 똑같이 베풀어야 한다. 엑카르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라고 촉구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인간만을 똑같이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과 우주의 모든 존재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우리에게 우주적 의식과 우주적 사랑을 촉구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은총에 푹 잠겨 있는 창조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같은 엑카르트의 외향적인 자세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의 외향적인 자세는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신비가들이 단순히 하느님과 개인의 은밀한 관계로만 보았던 한 성서 구절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신비가들은 감상주의 냄새를 풍겼건만, 엑카르트는 그러한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엑카르트는 우주를 향해 손을 뻗는 창조중심 영성의 빛에서 아래 구절을 해석한다. 아래 성서 말씀은 엑카르트가 본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구절이다.
“이제 나는 잠시 동안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곧 나를 찾게 될 터인데,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 없다’고 말한 대로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도 말합니다.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3-35).(15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3,11-26
베드로가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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