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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창세기 18:1-15 “ 나그네 대접 ”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밑그림이 다 들어있다고 보아도 될 만큼 그 내용이 풍부합니다. 천지의 창조와 타락과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모습이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의 내용을 좀더 확대하고 풍성히 하고 구체화 하는 과정으로 성경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의 역사가 두 줄기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의 특징이 어떤 모습인지 여인의 후손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되는지를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였습니다. 천사인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습니다.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왔으니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도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 아니라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란 언제나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인정이나 동정심 또는 자비심 같은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푼다는 것은 자기가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다는 자기의 자기됨이 나타나집니다. 이름을 드러내든 숨기든 간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눔이나 베품이란 내가 먼저 받은 은혜가 있기에 나누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사람의 공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고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의 나그네 대접이 단지 불우이웃돕기 잘하여 복받았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를 보는 눈입니다.
이웃을 대접하지 않고 죽인 최초의 경우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가인과 아벨에게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시자 가인이 안색이 변하며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구원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고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빠하는지 아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가인은 싫어하여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인을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런 모습으로 하실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바로왕이 자기를 어떻게 하였으며 자기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한 사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약속을 또다시 확인받는 기회가 되고 사라에게까지 확인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이 나그네를 대접한 유일한 사람 롯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롯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그네 대접 잘못한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의인 열명이 없었습니다만 의인이 없었다는 것은 나그네를 대접한 열명이 없었다는 것이고 대접은커녕 상관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그네 대접이 단순히 불우이웃돕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대접, 이웃을 환대하는 법이 율법안에서 제정이 됩니다. 이웃 환대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과 신명기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한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10:18-19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신원하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원이란 그들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너희도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전에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가운데서 아무리 제사를 잘 지내고 번듯한 성전을 건축하고 열성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악을 행한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제사는 받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고 빈익빈 부익부가 생기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상태에서의 모든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앞에 가증한 것이 됩니다.
렘 7:1-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전에 제사하러 오는 무리에게 이곳은 성전 아니다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5-6절에 이웃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웃이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압제를 당한다는 것은 이미 은혜의 땅에 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안에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입어 나왔는데 가난하다고 학벌 없다고 무시하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고아 과부 나그네가 대우를 못받는 나그네가 대접을 못받는 그런 곳은 이미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슥 7:8-14 “봉독” 여기서는 에스겔서보다 더 집중적으로 이웃과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자를 거론합니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는데 소돔 고모라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욕보이려고 하였기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가운데 나그네 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이 되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한번 더 봅시다. 이사야 1:10-17절입니다. “봉독” 10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짐승을 갔다 바쳐보아라 아무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에서 역시 고아와 과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처럼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정죄하는 그 나그네가 도대체 누구라는 것입니까? 눈치가 빠르신 분은 짐작하시겠지요.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신 낯선 하늘의 사랑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을 누가 대접하였습니까? 아무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율법에까지 명시를 해놓았건만 오히려 그 율법을 이용하여 나그네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한 아브라함은 복을 받지만 아니 복을 받았기에 나그네를 대접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나그네를 대접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 그 낯선 나그네를 영접치 아니하고 대접치 아니한 자들의 받을 벌이 어떠한지를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31-46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을 가지고 불우이웃 돕기 잘하면 영생에 잘못하면 영벌에 이렇게 해석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라고 약한 자 편들기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믿어도 불우 이웃돕기만 잘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까?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공적을 잊어버린 자가 영생을 얻고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는 자 언제 우리가 안했습니까? 하는 자는 영벌에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낯선 나그네로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런 자에게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런 자가 누구입니까? 40절입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45절에 역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대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형제된 가운데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려기보다는 대접을 하면 반대급부가 있을 만한 사람에게 대접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잔치를 베풀거든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작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고 나그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대접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오늘 누가 대접하시겠습니까? 신약에서 몇 곳에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곳만 보겠습니다.
요한 3서 5-8절입니다. “봉독” 사랑하는 자여, 가이오 장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라고 합니다. 나그네란 바울이 형제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형제라고 말하지 않고 사단의 일군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그네란 그 당시에 순회 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순회 전도자들은 이방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기에 이 같은 자들은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3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나그네 대접한 사건을 이곳에서 말씀합니다. 부지중에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천사들을 대접한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하기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복음안에서 형제된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갇히고 학대 받는 경우가 있는 자들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해에 6곳을 십 만원씩 선교헌금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전세 사는 형편에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북한의 형제들을 위하여 또 장애인 선교를 위하여 시골교회 세 곳과 개척교회 한 곳에 보냅니다. 한곳에 60만원을 보내어도 부족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지원이 있을 줄 알고 또 이 곳을 위하여 함께 복음이 전하여 지도록 기도하자는 뜻에서 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나 선교하면 복받는다는 그런 말을 하는 정도는 아니지요.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듯이 이러한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지요. 에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나그네로 사시다가 33년만에 떠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너무 오래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호칭이 붙게 되는데 그것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그네로 오신 것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동일하게 나그네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3절에서 믿음의 조상이란 모두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증거를 남기고 살은 사람입니다. 외국인이 떠날 준비를 하고 살듯이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입니다.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1절에서는 성도를 향하여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17절에서는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여 하나님을 대접한 그 복이 오늘 우리에도 부지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입었기에 우리 형제 중에 작은 자들을 대접하며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27. 창세기 18:1-15 “ 웃음 ”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고 있을 때 그 나그네 중의 한사람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찾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장막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정녕 다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습니다.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웃습니다. 별 실없는 소리도 다한다 싶었겠지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고 웃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자기 남편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여도 사라가 당연한 웃음을 웃은 것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웃었는데 속으로 웃었습니다. 속으로 우스운 것을 감추고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하자 여호와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왜 웃느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함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라의 웃음은 결국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못한 웃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가 두려워서 제가 웃지 않았습니다. 하자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내지 못할 그런 하나님으로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의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도 늙었기에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이 믿을 만한 근거도 없는데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길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근거도 다 제거하시고서 주시는 것이 믿음이란 선물입니다. 그러니 사라뿐만 아니라 먼저 웃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17:15-17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도 속으로 웃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아니라 너와 사라에게서 나올 자녀가 약속의 자녀다 하시면서 이름을 19절에서 이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삭이라는 글자에 붙은 숫자가 5)입니다. 아래에서 보면 웃음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무슨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웃었다는 사실이 그 이름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믿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시면 쉽습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어 내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서 4장에서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만 창세기에서는 분명히 아브라함도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음이라는 표현은 좀 심하지만 허탈한 농담 또는 말도 안되는 소리 앞에서 웃는 그런 웃음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피식 웃고 말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조롱하듯이 웃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인물치고 제대로 대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도 되고 바벨론의 총리도 되지만 그러나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입은 자의 모습은 언제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요셉이 11번째 아들로서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요셉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도 꿈을 가지자 그런 말을 하면 안됩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를 받고서 무엇인지 자기도 잘 모르니 그냥 형들에게 자랑합니다. 나 이런 꿈을 꾸었어요. 그러자 형들이 그를 더욱 미워합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녀석이 그런 꿈 이야기까지 하니 얼마나 미워하였는지 나중에 양치는 곳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때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그러면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를 인한 비웃음과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네가 무언데 그러느냐고 그래서 물 없는 웅덩이에 빠뜨려 굶겨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가서 고생이나 하다가 죽으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모습이 왜 이런 비웃음의 대상으로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죄를 알게 함으로 나중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형제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계시가 떨어지고 그 계시를 받은 자의 모습은 멸시를 받는 비웃음을 당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고 나서 그때에 형제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아버지가 안계시니 원수를 갚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고 자기들이 와서 또 무릎을 끓습니다. 이들이 요셉앞에서 무슨 말을 하였을까요? 그저 살려만 주옵소서 하는 것이지 요셉 우리 무엇을 해다오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엎드린 그 심정이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형들은 그를 멸시 천대하였는데 그를 죽였는데 그는 오히려 형들을 살려내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요셉안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안의 소년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면회를 갑니다. 요셉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때 골리앗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요. 그러자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는 자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잃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녀석을 당장 쳐 죽여야지 하고 있으니 형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7:28절을 봅시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에 대한 형의 태도입니다. 교만하다 완악하다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의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키가 3미터가 넘으면 이쪽에서 5미터 정도의 사람 나서면 놀리지 못하지요 비웃지 못하지요 그런데 아직도 양이나 몇 마리 돌보아야 하는 군대에 갈 나이도 안된 소년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의 갑옷이 너무 커서 입지를 못하는 그런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힘있는 왕을 원하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큰 사울이 왕으로 되었을 때 좋아라 하든 자들이 이제 정말 키가 키고 힘이 센 골리앗 앞에서 40일을 꼼짝을 못하고 욕만 얻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들이 비웃음을 살만한 아이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건방지다고 교만하다고 완악하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러한 형들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요셉아래 들어간 형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을 멸시한 형들이나 다윗을 멸시한 형들이 나중에 요셉과 다윗에게 무어라고 하였을까요? 자기공로를 주장할까요? 자기의 형됨을 인하여 다른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입을 닫을 뿐입니다. 그리고 살려만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겸손하여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분명히 불신의 웃음이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은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출생합니다. 그때 무어라고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21:1-7절입니다. “봉독” 6절에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불신과 비웃음의 웃음이 참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우리에게도 웃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웃음은 비웃음을 극복 하고서 나온 구원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나타내시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4:17-25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7절 중반에 그의 믿은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서 하나님이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기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만 아니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제공하신 분의 삶이 요셉처럼 다윗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이삭처럼 웃음의 대상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만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나 요셉이나 다윗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의 모습이 얼마나 세상의 비웃음거리였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는지가 성경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과 다윗이 총리도 되고 왕도 되었지 않느냐고 묻지요. 그러나 요셉이 어디에 자기의 해골을 묻어 달라고 하였습니까?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에서의 총리 아무것도 아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됨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보이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대우를 보면 더욱 이 말씀들이 분명하여 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삼년기간동안 당하신 수모를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배척받는 모습으로 사셨는지 그러나 그 절정은 역시 십자가 앞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7:27-4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멸시와 천대 희롱당함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침을 뱉고 눈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서 네가 선지자면 누가 쳤는지 알아 맞쳐 보아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너는 구원 못하는냐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믿어주마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수모와 멸시와 천대가 왜 일어납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저 높아지고 싶고 나의 힘을 축적하고 싶어하고 눈에 보이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이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희생당한 자가 희생시킨 자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앞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내가 이루어 놓았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죄만 말하다 보니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가 나와는 상관없는 그 시대의 나쁜 놈들이 한 일쯤으로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도 끊임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볼품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다른 모습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멋있고 큰 업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게요? 그러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영광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워 지고자 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우리가 속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업적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 생각하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의 가장 큰 싸움이 이러한 싸움입니다. 이삭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받고서 웃었던 그런 웃음을 우리가 받아내는가 요셉이 형들에게 받았던 그런 대접을 받는가 다윗처럼 그런 대접을 받고서도 오히려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심판주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자기 배성들을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르지 아니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세상의 영광을 따라 경쟁하며 사시지 마시고 손해보고 낮아지고 당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구원의 능력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28. 창세기 18:16-33 “ 아브라함의 기도 ”
‘아브라함의 기도’ 하면 우리의 일반적이 생각은 간절히 기도하여 롯을 구원하듯이 우리도 전도할 사람을 정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하자라든가,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하였기에 우리가 의인이 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좀더 나가면 중보기도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중보기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그러면 가장 먼저 정성을 바친 간절한 기도를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빌고 또 빌었는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온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나무에도 돌에도 해와 달에게도 조상에게도 빌고 빌어 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절에서도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 지 아십니까? 40일 기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일 기도 천일기도 범어사 입구의 어느 절에서는 10,000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0,000일을 계속 끊어지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플랭카드를 보았습니다. 10,000일이면 몇 년입니까? 27년하고 한달 보름입니다. 이렇게 연속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이니 영험한 능력이 있는 곳이니 이곳에 많이 오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생각이 이름과 형식만 바뀌었지 내용은 그대로 유입되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곳만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7:7-11절입니다. “봉독”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그 좋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9-13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이 임함으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의가 없음을 알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정리가 되어 있지 아니하면 자꾸만 엉뚱한 것 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8절입니다. “봉독”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 주었다는 것을 가지고 우리도 끈질기게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결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란 세상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 한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인한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이유가 주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인한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라도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러한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결론을 보지 않고 예를 들은 그 내용만 보아도 과부의 간청이 정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과부가 정당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거나 하였다면 공무집행방해로 가두어 버리면 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기도한다 그러면 우선 누가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기도자의 자격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나 아무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2-4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는 말씀 중에서 앞부분만 따오면 안됩니다. 4절에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오늘 아브라함의 기도 가운데서 기도자의 자격과 기도의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였는데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나갈 때에 여호와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기도할 내용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았기에 그 안에 있는 롯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내용이고 그 마무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선 기도자의 자격입니다. 17절에서 19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기도자의 자격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신 것도 하나님이 언약의 상대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하시리라는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기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가운데서 롯을 구하여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롯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32절까지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시면 되겠습니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 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성을 사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를 티끌과 같은 자임을 인정하면서 또 간구합니다. 45명, 40, 30, 20, 10명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이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한명까지 내려가도 하나님이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더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롯은 의인이 아니냐고 말씀하시겠지만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을 인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창세기 19:29절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롯이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여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는 의로운 롯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의가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주신 의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중보자의 기도입니다. 정말 롯이 그곳을 싫어할 만큼 의인이라면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는 못하고 단지 그 성안에 일어나는 음란한 행실을 보고서 고통하고 그 마음이 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롯을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과 그 마음의 상함이 역시 아브라함의 기도라고, 중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세상의 일들을 보면서 고통이 와야 하고 마음이 상하여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의 중보자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성에서 살면서 고통은 커녕 소돔과 고모라의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 못하여 안달한다면 이것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는 롯의 처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당하는 것을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기도의 자격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이기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중보의 기도를 모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오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들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민족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시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만약 여기서 다 죽여 버리면 하나님이 능력 없어서 가나안에 못들어가고 사막에서 다 죽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중보의 기도를 하는데 백성들을 사하지 아니 하시려면 자기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빼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모세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기에 가능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가지고 오늘 우리도 중보의 기도를 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한 분뿐입니다. 디모데전서 2:5절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는 한 분뿐입니다. 히브리서 8:6절과 9:15절에서는 새언약의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의 중보자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모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지금 새 언약의 시대에 있기에 다른 중보자가 없습니다. 오직 한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중보자의 완전한 중보의 기도 덕분에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음란함과 악을 보고서 마음을 상하고 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아니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 오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우리는 롯처럼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중보자의 기도 효력이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보자의 자격이 아니라 그 중보자의 은혜를 입었기에 한분 중보자 안에 있기에 서로 형제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도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중보자안에 있기에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예수를 믿었기에 이제는 예수님 없이 내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통으로 나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중보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한번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중보자 안에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18절에서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도의 특권을 우리가 받았다면 이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지금 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천사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재촉하여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눈도 열려져야 합니다. 이 불경건한 세상을 향하여 불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 그 주님의 말씀을 믿을진대 지금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오직 한마디 주여 살려주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간구 외에 무슨 간구가 더 필요 하겠습니까? 나를 위하여도, 가족을 위하여도, 교회와 이 땅을 위하여도 기도할 내용이 얼마나 단순해지고 절박하여 집니까?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얼마나 성경에 많은지 아십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을 알게 하옵소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인데 세상을 사랑치 않게 하옵소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오니 돈을 사랑치 않게 하옵소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였는데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게 하옵소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게 하옵소서.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두게 하소서.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에 것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러한 기도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