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 해 동안 개봉된 우리 영화 가운데 14편이 멜로 영화였다. 이중 <사랑을 놓치다>, <데이지>, <도마뱀>, <국경의 남쪽>, <사랑하니까, 괜찮아>등이 작품성과 흥행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면서 ‘흥행 보증 수표’ 였던 멜로 영화는 침체 분위기를 보였다. 다만, 원작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400만 관객을 동원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사회 문제와남녀의 감정을 연결시켜 신선한 충격을 준 <가을로>가 주목받았을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하반기에는 사랑을 못하는 남자와 안 하는 여자가 주인공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농촌으로 봉사 활동을 간 대학생과 그곳 도서관 사서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그해 여름>이 개봉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번 시간에는 멜로 영화에서 ‘기억’이 어떤 역할을 하며, 이는 영화의 본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나는 기억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보자면, 인간은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로 본다면 인간은 기억이다. - 프리드리히 퀴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마루에는 지금 거의 쓰지 않는 오래된 테이프가 덩그마니 남겨져 있다. 아들은 그것을 어머니만큼이나 나이 먹은 녹음기에 집어넣는다. ‘월남에 계신 아빠께’로 시작하는 낭랑한 목소리. 어머니는, 다소 수줍은 새댁의 목소리로 남편에게 음성 편지를 써 내려간다. “비싼 고데기열을 가해 머리 모양을 손질할 때 쓰는 기구는 왜 샀어요?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은 정신 지체 때문에 사랑도 꿈도 바람결에 모래알처럼 흩날려 보낸 채 사는 형이, 테이프 속에서는 아직 어린 꼬마다. 꼬마는 씩씩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윽고 과거를 호출하는 기억의 유령이 눈앞에 당도하자, 주인공은 넋이 나갈 듯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변승욱 감독의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2006)에는 사라진 가족의 빈 그림자에 새로운 사랑을 수혈하지 못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아야 하는 여자(김지수 분)는 동대문에서 명품 디자인을 베끼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악다구니처럼 살아 낸다. 한편 약국을 하는 남자(한석규 분)는 걸핏하면 발작을 일으키는 형(이한위 분)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현실의 무게에 치여 사랑을 시작하기조차 버거운 남자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테이프’, 곧 기억은 다시 시작할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잊고 지내던 마음의 중심과 만나게 한다
기억의 호출, 향수, 눈물, 감상적 연민과 자기 회복. 멜로 영화, 특히 한국 멜로 영화에서 기억의 문제는 관객의 숨겨진 심리적 성감대외부 자극으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신체 부위를 건드리는 하나의 뇌관포탄·탄환 따위의 화약을 점화하는데 쓰는 발화용(發火用) 금속관이다. 불발하면 흥행 근처에도 갈 수 없지만, 제대로 터지면 대박의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신파(新派)1 멜로’ <편지>(1997)에 보면, 죽은 남편이 비디오 화면으로 되살아나 홀로 남겨진 아내에게 간절한 바람과 당부를 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작품을 보던 어느 영화 제작자는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관객 100만은 플러스’라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국 멜로 영화에서 ‘회상’은 유용한 서술 전략이다.
기억,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렇다면 돼 기억인가? 영화에서 기억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매체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과연 인간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빵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내가 일어난 이상한 일에 주목하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쌌다. 그 즉시 삶의 부침浮沈, 세력 따위가 융성했다가도 쇠퇴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은 나와 무관해졌고, 삶이라는 재앙은 무해한 것이 되었으며, 삶의 덧없음은 허구의 것이 되었다. …(중략)… 이제 나 자신이 더 이상 평범하고 우발적이며 소멸한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의 대문호 프루스트(M.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2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마들렌카스텔라와 비슷한 작은 조개 모양의 과자를 홍차에 찍어 먹던 주인공 마르셀은 갑자기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 앞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할 단초端初, 실마리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나 회상만이 과거를 끄집어내 주는 시간의 나팔수’ 라는 것. 인간은 누구나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이, 그저 한 번 발을 담글 수 있을 뿐인 도도한 시간의 흐름 앞에 마주 선 단독자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그리스 신화』의 거인 신(神) ‘크로노스’에 비유했다. 아버지 우라노스를 밀어내고 세상을 지배하게 된 크로노스는 자식에게 권력을 빼앗긴다는 신탁(神託)을 두려워하여,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처럼 잔인한 시간 안에서 우리의 삶은 허무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오죽하면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 Vergilius Maro, 기원전70~기원전19)가 『전원시』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 라고 통탄했을까.
그런데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억은 시간이라는 파괴적인 괴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패’ 라며 가슴을 열어젖힌다. 그 순간, 시간은 더 이상 물리적 공간에 뿌리박힌 고정도니 실체가 아니게 된다. 시간은 두 개의 양면 거울처럼 인간 내면의 무의식 속에서 고통의 옷을 벗고, 평온하며 황홀한 행복감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길을 간다.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겹치면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연어의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회상의 힘은 생의 저편으로 사멸(死滅)해 가는 노인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확인된다. 전쟁의 아픔을 겪거도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한 데 대한 자부심, 젊은 시절의 활동적인 행적들, 연애와 결혼,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자녀의 결혼, 손자에 대한 애착 등, 지나온 삶을 적극저긍로 회상하는 노인일수록 신체적으로 건강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 에릭슨(E. H. Erikson, 1902~1994)은 회상이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수용하지 못할 때, 인간에게는 절망만이 남게 된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에게 기억의 호출은 단순히 시간의 정서적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나 하는 차원을 넘어, 지나온 삶을 ‘그 일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는 식으로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멜로 영화, 과거와 현재로 짠 기억의 모자이크
멜로 영화는 바로 이 기억의 문제를 지렛대 삼아 관객에게 가장 ‘달콤 쌉싸름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랑은 변한다고 보는가? 사람의 기억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러브 레터>(1995, 감독 이와이 순지)는 ‘눈’이라는, 가장 아슬아슬하고도 감각적인 이미지로 화답한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 전 겨울, 등반 사고로 약혼자를 떠나보냈다. 빈자리만 남기도 사라진 임에 대한 그리움은 눈이라는 순결한 이미지로 대치된다. 아울러 그녀는 애인과 동명이인이자 중학교 동창인 후지 이츠키라는 여자와 우연한 계기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면서, 훗카이도의 오타루라는 기억과 공간과 조우遭遇, 우연히 서로 만남한다. 이때 눈은 녹아 없어지면 그뿐인 그리움의 기억이다. <러브 레터>의 시작과 끝은 한 소년과 소녀의 마음속에 나아 있는 같은 시간과 공간, 바로 ‘후지 이츠키’라는 이름과 이들을 연결해주는 순백의 기억 그리고 눈으로 뒤덮여 있다. 이제 히로코의 죽은 연인 후지 이츠키는 오타루에 살고 있는 여성 후지 이츠키의 기억 속에서 환생한다. 낯선 이에게서 온 편지 덕분에 한 여성은 죽은 이가 남긴 소외의 공간을 극복하고, 다른 여성은 내면에 숨어 있던 기억의 빛깔을 되찾는다.
결말에 이르면, 모교 도서관을 찾은 여자 후지 이츠키가 책에 꽂힌 도서 대출 카드 뒷면에서 연필로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그린 사람은 바로 동창 후지 이츠키였다. 그녀는 고교 시절 티격태격함녀서 지낸 그가 자신을 많이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처럼 사랑은 회상과 함께 과거의 묻혀진 진실을 현재에 되살려 준다. 자신 역시 그 친구 후지 이츠키를 좋아했다는 것. 그리하여 그녀는 상흔처럼 남아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하고, 그 아픈 기억을 자기 삶 속에 온전히 받아들인다. 병약했던 아버지는 추운 날 감기에 걸려 죽었지만, 자신은 그 체질을 물려받기는 했어도 결코 그렇게 죽지 않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녀가 도??관에서 발견한 책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사실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똑같이 황홀한 기억의 부활, 그리고 기억이 가져다주는 진실의 순간을 그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러브 레터>느 어떤 점에서 다를까? 먼저, 영화는 시간을 조작하고 편집을 거쳐 현실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현재에서 과거를 ‘되찾아 가는’ 여행이라면, <러브 레터>는 한 공간에서 관객에게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하는’ 시간을 보여 준다.
심지어 영화는 회상이라는 장치로 이야기를 꾸미는 데서 더 나아가, 판타지의 프리즘을 통해 아예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 기억의 시간을 현재와 겹쳐 놓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인어 공주>(2004, 감독 박흥식)에서 여주인공 나영(전도연 분)은 가출한 아버지를 찾아 부모의 고향인 남해의 어느 섬에 갔다가, 스무 살 시절의 어머니 연순(전도연 분)을 만난다.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억척스럽기만 한 어머니(고두심 분)도 예전에는 앳되고 청순한 해녀였으며, 무능력하다고 구박받는 아버지 역시 섬마을 우체부로 일하던 젊은 시절에는 성실한 청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생활에 쫓겨 팍팍하게 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누구 못지않게 애틋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영화 속의 기억은 현실을 액자 삼아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한다.
영화, 기억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꿈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고 불완적한 지를 폭로하게 되면, 영화는 곧바로 기억의 신비로움과 아우라aura, 예술 작품에서, 모방할 수 없는 그 작품만의 고고한 분위기를 벗어 버리고 멜로에서 코미디로 180도 방향을 튼다는 사실이다. 홍상수 감독은 <오! 수정>(2000)에서, 나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서로 어긋날 수 있음을 예리하게 풍자한다.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첫 키스의 순간을 서로 다르게 회상한다. 그런가 하면 여자와 단둘이 밤을 보내게 된 결정적 순가에도 남자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이렇듯 기억이란, 시간의 수로(水路)를 통과하는 인간에게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만 가중시킬 수도 있다. 기억이 늘 언어와 불화(不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비단 멜로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영화 장르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대가(大家)들에 이르면 영화는 시간과 기억 그 자체를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내민다.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경우는 시간과 시산의 병렬 내지 충돌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대신, 영화 속에 조각하듯 시간을 아로새긴다. 그는 <이반의 어린시절(Ivanovo Detstvo)>(1963)에서, 소년 병사 이반의 꿈과 현실을 교차시키면서 유년 시절 추억의 편린片鱗, 사물의 극히 작은 일부과 그것을 짓밟은 전쟁, 그 기억들 사이의 절망적 긴장과 영혼의 상흔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예컨대 이반은 밥을 먹다가 벽 전체를 울리는 물소리를 듣고 유년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든다. 그것은 기억이라는 우물이 있는 또 다른 잠의 세계다. 낭하廊下, 복도의 깊디깊은 우물에서 이반은 어머니와 함께 우물 속에 떠 있는 별을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뿐, 현실의 틈입闖入, 기회를 틈타 느닷없이 함부로 들어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면서 우물 ‘안’은 이반이 있던 ‘밖’이 되어 버린다. 이 같은 공간의 전치轉置,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음는 가혹한 현실의 결이 이반의 기억에 침입하면서, 다시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이반의 무의식과 융합하면서 끝나 버린다. 타르코프스키는 개인의 주관적 기억이 현실과 뒤섞이는 지점, 다시 말해 이반이 느끼는 내면의 혼돈과 기억의 틈을 그대로 내보이며 탐색해 간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영화라는 메스로 잘라 낸, 기억이라는 지층의 복잡한 단면을 보게 된다.
이렇듯 ‘시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영화는 ‘기억 그 자체’인 인간과 조우한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는 자서전 『고백록』에서,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라고 했다. 영화는 이들 셋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한눈에 보여 줄 수 있다. 어쩌면 영화 속 기억의 문제는 망각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시간을 매어 두려는, 기억 이라는 거대한 돌을 인간 정신의 정상에 올려 놓으려는 시시포스3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불멸의 기록’에 대한 욕구, 기억을 시간 속에 새겨 놓으려는 지난한지극히 어려운시도야말로 영화의 본질이다.
주 1. 신파 - 1910~1940년대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연극 형태.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일본 신파극을 모방하다가, 점차 고유한 대중적 정서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르’를 뜻한다.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파리의 부르주아 출신의 문학청년 마르셀의 1인칭 고백 형식으로 된 대하소설. 그당시 프랑스 부르주아 귀족 사회의 풍속사이자, 기억으로 인간 내면을 탐색한 ‘시간의 파노라마’다. 작가는 마르셀으 유년 시절, 사교계 생활, 연애 경험 등을 재구성하여, 시간의 흐름 앞에서 눈부신 매력을잃고 풍화(風化)되어 가는 화자와 주위 사람들, 그 뒷면의 사회상을 그려 냈다. 마르셀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하는 것은 바로 감각 속에 남아 있던 ‘기억’의 힘이며, 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
3.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속의 인물로, 그리스의 도시 국가 코린토스의 왕이었다. 교활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죽은 뒤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이르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벌은 영원히 게속되었다.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는 ‘시시포스의 바위’는 여기서 비롯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