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
금강경의 7번째 分은 無得無說이다. 이는 얻은 바가 없으면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無說)는 뜻이다. 결국 다툼이 생기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는 상당히 포용적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방향은 고통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면 논쟁을 피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는 “인간관계”와 “포용”을 매우 중요시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인간관계를 매우 중요시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너희는 먼저”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면 반드시 “너희는 먼저”가 뒤로 밀리게 된다. 즉 하나님을 뒤로 밀어놓게 된다. 하나님을 뒤로 밀어놓는 것, 그것이 휴머니즘이다.
유일신교의 아킬레스건은 다신교다. 다신교는 포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신교가 들어오면 유일신교는 죽는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이 망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영국 교회에 “휴머니즘”과 “종교 다원주의”가 들어오면서 주일 예배 출석률이 3% 미만으로 추락했다. 지금도 계속 추락 중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 속에는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화는 “너희는 먼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화는 목사로 하여금 종교놀이 하는 자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