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86
11월26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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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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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4SSWkMRQD8
[의정부교구 윤성흠 베르노 신부님 집전(호원동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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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잠시라는 것을 망각하고, 남용하거나 오용할 때,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나와는 무관한 축일이네,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주신 탈렌트와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될 신앙 여정의 종착점인 죽음, 곧 새로운 시작,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입니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에서 확연한 진리, 곧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큰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진실로 믿고 있는가?
위대한 우리의 성인성녀들께서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그 진리,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백 퍼센트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지금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면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죽음과 심판 때, 그런 태도를 바꾸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언제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궁극적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국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세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입니다.
무료 급식소에서 정기적으로 행하는 작은 봉사, 주말에 한번 소년원이나 교도소 천주교반에 이루어지는 작은 봉사가 우리의 구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임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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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2)하느님 오른 편에 당당히 서기 위해>
교회력으로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반복되는 복음 말씀은 최후 심판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되는 세상 마지막 날의 때로 참혹하고, 때로 끔찍한 모습에 살짝 걱정도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경우만 해도, 그날이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니 제 개인적으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위협이나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격려와 자극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영광스럽게도 만왕의 왕 예수님 오른 쪽에 서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특별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더군요. 하느님 오른 편에 서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변장해서 찾아오시는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을 환대한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요. 역 주변을 떠도는 노숙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지 않고 한 형제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사랑의 밥 나눔’ 봉사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쌀 모으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강도 높은 영업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이지만 팔다 남은 빵을 들고 기쁜 얼굴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나서는 사랑의 빵장수들입니다.
갈 곳 없어 떠도는 사람들을 내 집에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매년 1000명 이상의 우리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그 아이 중 하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입양해 내 자녀처럼 키우는 사람은 100% 오른 편에 설 사람입니다.
옷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는 쌩쌩한 옷들로 꽉 차있습니다. 과감하게 정리해서 꼭 필요한 곳에 택배로 보내는 사람, 하루 온 종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무료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시립 무료 병원 환자들을 찾아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춥고 음산한 담장 안의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매주말 김밥을 싸고 반찬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 모두 당당하게 예수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마지막 날 앞에서 두려워한다거나 부들부들 떨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 남았군요.
마지막 날에 가서는 우리가 그간 이웃들에게 행한 사랑의 봉사는 모두 인류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공경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입니다. 인간과의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당당하게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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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rTNdV9BX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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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가 받게 될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은 함께 살 부류끼리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 것들의 차이는 바로 사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기와 인간을 묶어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이요 심판관으로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여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었으며 병든 이를 찾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준이 선행의 행위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십계명을 잘 지키면 선행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어떤 아버지가 불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모른다면 그래도 뛰어들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체성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요,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는 한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져 자신과 같은 인간을 배신할 수 있다는 줄거리를 가집니다.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에 유혹받습니다. 칼렙은 에이바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네이든을 싫어합니다. 에이바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칼렙은 네이든을 배신하고 에이바를 풀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네이든은 에이바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만약 아기와 개, 두 대상 중에 자신과 평생 살 대상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주님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심판하십니다. 칼렙처럼 행동만으로 심판하려다가는 사람처럼 똑똑한 개를 선택하고 아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달려오는데 여러분의 반려동물과 한 범죄자가 그 차에 치이기 직전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여러분이 어느 무리와 살 자격이 있는 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모든 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형욱 조련사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까요? 같은 인간끼리는 같은 욕망을 추구하여 ‘경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는 잘만 조련하면 모두 좋은 개를 만들 수 있어 모든 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더 높은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라고 하십니다. 이때문에 아기가 동료 아기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애벌레끼리는 경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모든 애벌레 안에서 나비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애벌레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모든 인간을 자비의 눈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게 됩니다.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자신이 에사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체성의 변화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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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회의 전례는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연중 마지막 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2023년을 돌아보며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2023년 한 해가가 저물어갑니다. 여러분 살림살이는 좀 좋아지셨습니까? 원하는 일들은 잘 이루어지셨습니까? 신앙의 열매는 많이 맺었습니까?” 제게 2023년은 ‘성지순례’로 시작한 1년이었습니다. 1월에는 이스라엘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2월에는 LA 라파엘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3월에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7월에는 쿠르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8월에는 LA 아그네스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9월에는 뉴욕에 머물렀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와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11월에는 LA 프란치스코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시편 23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장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어 먼 길 무탈하게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공동생활하고, 함께 기도하고, 미사 봉헌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한 학기에 두 번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입니다. 강론 없는 미사는 언제든지 좋아하는 것처럼 시험 없는 신학교생활은 천국과 같습니다. 하지만 강론 없는 미사는 없는 것처럼 시험 없는 신학교생활도 없습니다. 중간고사를 마치면 학사대표가 ‘노란봉투’를 나누어 주곤 합니다. 노란봉투는 월급봉투가 아니고, 성적이 70점 미만인 학생들에게 주는 ‘경고편지’입니다.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과목낙제가 되고 2과목 이상이 되면 유급을 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노란봉투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늘 경계선상에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교회사를 가르치셨던 신부님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함께 농구를 하셨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신학생들이 신부님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이 꼭 알아야 할 문제를 5개 정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3개가 시험문제로 출제되었습니다. 복불복(福不福)으로 찍어서 공부만 하지 않으면 신부님께서는 좋은 점수를 주셨습니다. 저도 신부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본당에서 ‘대림, 사순’ 문제 풀이를 할 때면 미리 100문제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25문제를 출제하였습니다. 교우들이 100문제를 열심히 풀면 모두가 100점을 맞을 수 있도록 답도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이 성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교우들이 교리를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 주십니다. 신학생들이 좋아하고 존경했던 신부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친절하게 알려주십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체력이 엄청 좋은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빈부귀천 구별 없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걸 두고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은 죽 먹기, 누워서 떡먹기’라고 합니다. 시험문제는 있는데 제한 시간도 없습니다. 몇 번해야 한다는 기준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시험문제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문제의 답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절망 중에 있는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를 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슬퍼하는 이웃의 슬픔을 함께 공감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잘못한 이웃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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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31-46: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행위-최후의 심판 기준.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하는 그분의 의지이다.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하는 왕권이시다. 에제키엘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 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는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인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이 가장 작은 이들”(40절)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참조: 이사 58,7; 토비 4,16)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 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시는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 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쳐 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1코린 15,21-22 참조)라고 하였다.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 왕권의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죽은 이들의 맏물”(1코린 15,20)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웃 안에서 그분을 뵙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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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말씀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자칫 ‘갑을 관계’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대축일을 기점으로 전례력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을 경청 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각자의 인생 여정을 어떻게 걸어왔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을’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따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최후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굳이 갑을 관계로 따지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을’이 되셨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온 세상에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며 그분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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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사회사목국 부국장)]
<성군(聖君)의 백성답게 살아갑시다>
오늘은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그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이 바로 왕입니다. 왕은 그가 한 말과 행동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군(聖君), 혼군(昏君), 폭군(暴君).
성군(聖君)은 꼭 필요한 왕입니다. 자신의 모범적인 말과 행동으로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길이 기억될 업적을 남기는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왕 밑에 사는 백성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행복이 백성들의 삶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태평성대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예수님 왕은 바로 이런 존재이십니다. 성군이 다스리는 때라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명정대하게 사회 시스템이 돌아가고, 서로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면서 살아가기에 쉽게 극복이 됩니다.
혼군(昏)君은 있으나 마나 한 왕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고 기록이 됩니다. 이런 왕 밑에 사는 백성은 괴롭습니다. 백성들은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 세상을 한 번 뒤집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폭군(暴君)은 왕이 되지 말았어야 할 왕입니다. 그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 말고는 한 게 없다고 기록이 됩니다. 이 왕 밑에 사는 백성은 새날이 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새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차라리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성군 밑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혼군 밑에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폭군 밑에는 폭군 못지않은 악인들이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신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가 모여있는 이 교회 안에는 훌륭한 사람들만 있습니까?
솔직히 아닙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의 힘으로, 공명정대한 시스템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자기 잇속만 챙기고자 하는 사람, 악한 마음만 가득한 사람을 정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군은 궁 밖에 몰래 나가는 야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눈과 귀를 대신할 수 있는 암행어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지켜보았습니다. 우리의 예수님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렇게 오셨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성군의 백성답게 예수님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 삶의 모습을 따르고 있어야 하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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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윤종윤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시편 100,3)>
저는 제주도에서 안식년 프로그램에 참석 중이니다. 여러모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서도 제 마음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서, 내가 바라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시간에서. 이런 저에게 주님 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의인과 불의한 이들을 가르듯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바라던 안식년이고, 무엇하나 부족함 없는 이 시간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저를 꾸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은총을 주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저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보내며 우리 구원자이시고 주님이시며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왕으로 기립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실존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달리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주님을 우리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왕이심을 고백하기 위해,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며 주님 것임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나와 용서 안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였다. 나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나에게 희망을 두고, 나를 바라보며, 내 안에서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너와 함께 있는 이들에 게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왕이시라면, 아니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라면 주님께는 물론이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에게 주님께 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용서하고, 함께하며, 그 들과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며, 지난 한 해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모습마저 주님께 봉헌하며 진정한 주님 백성이 되어, 새로운 전례력 한 해에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우리가 되어 주님의 자랑거리, 주님 것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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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오승수 미카엘 신부님(비룡성당 주임)]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아들의 날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엔 모든 민족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른쪽에 양, 왼쪽에 염소.
이 두 부류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오른쪽에 분류된 양은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게 되지만, 왼쪽의 염소는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는 이처럼 이분법적인 결말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결단이 필요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 어중간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투신해야 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나눈 기준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입니다.
양쪽으로 나뉜 사람들은 각각 ‘언제 그렇게 했느냐?' 또는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을 위해 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가장 작은 이들은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을 전부 돕기란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힘쓸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안에 함께 계십니다. 사회적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함께 계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을 위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그리 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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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강대원 즈가르야 신부님(대전교구 홍보국장)]
<“저희가 언제 주님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어느덧 전례력으로 2023넌이라는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잘 지내셨는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아쉬움도 많고 부족함도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에게 그 부족함을 잘 메울 수 있도록 아름다운 시간을 우리에게 다시 선물로 주신 것임을 믿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사람들의 행실에 따라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를 것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을 도와주었는지 도와주지 않았는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이들도 영원한 벌을 받는 이들도 똑같이 임금에게 묻습니다. "저희가 언제 주님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계시며, 특별히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 안에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에게 나의 마음과 노력과 시간을 공유할 때 그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해 드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먼 미래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는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와드리지 못하고 지내는 때도 많습니다. 만일 그렇게 먼 미래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리고, 지금 잘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먼 훗날 언젠가 잘하리라는 다짐만 하고 살아간다면,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2023년의 마지막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내년에는 예수님을 더 잘 사랑해야지.'라는 생각하기보다 '오늘 예수님을 잘 사랑해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시간을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변화할 때 지금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도와드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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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마산》 강론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합천성당 주임)]
<참왕이신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1.32)
오늘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왕(임금) 이심을 기념하는 큰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12월 3일)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나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 중의 왕이시요 온 누리의 왕이신 참왕 임금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참왕의 모습이 세상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창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오늘 두 독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에제 34,16)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만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1코린 15,20-21)
창왕이신 그리스도는 겸손의 왕, 섬김의 왕, 희생과 사랑의 왕, 비움과 죽음의 왕, 공정과 정의 왕'이십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추구하는 왕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바보의 왕'이십니다.
우리 안에 화두(話頭)로 던져져 있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서로가 바보의 왕이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이고, 이 노력이 선행될 때, '함께 가기'라는 '시노달리타스의 참 의미'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25,31~46)인 '최후의 심판기사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참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의 때에 심판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믿는 모든 이들이 참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따랐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이 땅에 많은 사목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사목했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참왕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면서, 예수님처럼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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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이민 미카엘 신부님(밀양성당 주임)]
<우리들의 통치자>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잠시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를 묵상해 볼까 합니다.
'그리스도왕'이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우리들의 통치자' 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것은 우리가 늘 고백해 왔고 익숙한 것이지만 '우리들의 통 치자'란 것은 다소 좀 생소하고 정치적인 느낌이 많이 듭니다. 어릴 때 흑백TV 시절 성탄절이 되면 TV에서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방영하였습니다. 그때 영화의 제목이 '왕중왕'이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그 시절에도 제목이 왜 '왕중왕'일까 하고 좀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TV에 방영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영화의 제목을 일치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데도 우리는 왜 그분을 '우리들의 왕'(통치자)으로서 고백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복음에 기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것과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나라를 성취하셨다는 것에 기인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 앞에,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들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 하느님의 통치를 믿고 받아들이겠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당신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우리의 구원자'(그리스도)가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통치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이나 개인은 그 삶이 매우 고통스럽고 비참해지기까지 합니다. 설사 내 나라가 있고 통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리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하느님의 나라' 가 있고 그 나라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신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도할 때 구원자이신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그 통치자이신 예수님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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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박현민 베드로 신부님(중견사제연수원 영성담당)]
<하느님의 왼편과 오른편>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성경을 보면, 성조들의 가정 안에서도 항상 두 부류의 자녀가 서로 갈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카인과 아벨,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사악, 이사악의 두 아들 쌍둥이 에사우와 야곱, 야곱의 아들인 10명의 형과 막내 요셉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믿음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게 되는 이유는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장자권(상속권)을 쟁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긴 자들을 통해 믿음의 조상에 대한 족보(장자상속)가 이어졌고, 그 족보를 통해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조의 아내들 역시 싸움의 역사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가르,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 그리고 엘카나의 두 여자 한나와 프닌나 역시 서로 갈등합니다. 이 갈등에서 이긴 사람이 곧 믿음의 조상의 대를 잇는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갈등 역사는 성조의 아들들과 아내들이 단순히 서로 싸웠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의 장자권이 이어진 '정통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사실과, 그 정통성은 간단히 주어지는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끊임없는 영적 투쟁의 결과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안에서 보이는 이러한 두 부류의 갈등에 대한 배경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안에서도 이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당신 출생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비유가 아니라, 영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밀과 가라지(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양과 염소(최후의 심판:마태 25,31-46),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주인이 맡긴 탈렌트로 이윤을 남긴 종과 그렇지 못한 종(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그물의 비유:마태 13,47-50), 그리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마태 24,45-51)의 비유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왕이심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선과 악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왼편(염소)이 아닌 오른편(양)에서 있는 사람들로서 이웃을 위한 자선과 사랑에 헌신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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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정철환 타태오 신부님(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장)]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습니까?”>
<연탄 한 장> - 안도현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연탄을 주제로 쓴 <연탄 한 장>과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입니다. 연탄은 자신을 태워서 열을 내고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고, 한 줌의 재로 생을 마칩니다.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고 자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연탄에 한 번 비유해 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다 탄 연탄재를 발로 툭툭 차듯, 십자가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때 침 뱉음의 비난도 다 받으시며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교회는 왕으로 모십니다. 오늘이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왕)은 빌라도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예수님과 유다인을 얕보듯이)라고 물어보는 세속적인 절대권력을 누리고 호의호식하는 그런 왕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 같이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연탄처럼 인간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왕입니다.
서민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연탄처럼 예수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왕입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고 고쳐주신 왕입니다.
교회는 전례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며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며 한 해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한 해를 살아왔는지, 예수님의 어떤 점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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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최종복 베드로 신부님(태장1동성당)]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 언제 주님께서?>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육화하시고,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왕으로 잘 고백하고 모셨는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고백하는 내용은 행동으로 표현돼야 하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잘 모셨는지'를 살펴보면 고백한 것이 진정성 있는 신앙이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예수님을 '왕'으로 잘 모셨는지 교회는 '최후의 심판'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 묵상케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잘 모시면 오른쪽의 축복받는 이로, 잘못 모시면 왼쪽의 저주받은 자로 그 운명이 결정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나 저주를 받은 사람들 모두 자기들에게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축복받은 사람들은 "주님 언제 우리가"라며 그들 자신이 주님에게 그런 일을 한 일이 없다고 부정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삶을 돕는 것을 어떤 공로와 연관시키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저주받은 사람들은 "주님, 언제 주님께서"라며 주님께서 그런 일이 있으셨음 당연히 해 드렸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주님과 연관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잘해주었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기회를 주지 않아 못한 것이라고 반응합니다.
예수님인 줄 알고, 왕인 줄 알고도 잘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단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권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가난한 이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궁핍한 이들, 보잘것없은 이들로 대변되는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나누어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인 줄, 왕인 줄 모르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분들을 모시는 것, 그것이 답입니다. 예수님인 줄 알고, 왕인 줄 알고 모시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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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강찬욱 요한세례자 신부님(간석2동성당 보좌)]
<우리의 임금을 따르는 길>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주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가 그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고 느끼는 이유는,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야 하는 일보다. 다른 것에 한눈팔려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기에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한눈팔려 시간에 얽매이면,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은 좁아지게 됩니다. 어느새 내가 듣고 싶은 말만을 듣게 되며, 주변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이는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의 시간을 그곳에 소비해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가 닮아가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우리가 닮아가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 참된 목자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5-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유혹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양 메만을 바라보는 목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양들만을 생각하는 목자가 있어서 양들은 위험에 빠지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따듯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양 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목자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지팡이를 내려놓고, 영광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향해 걸어가 주시는 임금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임금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임금들과는 다르게,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돌보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보낸 시간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어느 임금들도 하지 못한 일. 곧 자신의 몸과 피를 백성들에게 내어주시는 신앙의 신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백성인 우리가 임금님을 위해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시간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목자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임금님으로 고백하며, 임금님의 말씀을 따라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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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김회인 바오로 신부님]
<‘왕’이 아니었으므로 ‘온 누리의 임금’이어라>
인간은 본디 유한(有限)하므로 인식 지평의 한계를 가집니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시선에 따라 세상을 경계로 나누고, '높고 낮음', '넓고 좁음'의 상태 혹은 위치를 판단합니다. 이로 인해 필인적으로 계급 혹은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구조를 형성하는데, 인간의 본성 탓에 '높음'은 언제나 '위'를 향하고, 넓음은 경계의 '밖'을 지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왕(王)'은, 가장 높은 위치(혹은 지위), 가장 넓은 공간을 영유할 힘을 내포하는 한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을 뜻합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이러한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함으로써 '왕'과 '신(神)'을 동일시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란 규정은 하느님에게 무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분으로서 물질과 공간,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고,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는 위와 아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할의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경계의 밖과 안을 나눌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한계를 지닌 인간과의 소통과 공감,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분명코 '낮은 곳'으로 오셨다는 표현은 마땅합니다.
이는 한나라 학자 허신(許)愼의 '왕(王)'에 대한 뜻풀이, '하늘과 사람 사이(二)의 중간에 위치하여(ㅡ) 하늘과 백성을 연결함으로써 하늘의 명으로 만민을 통치하는 존재'라는 해석을 빌림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 중간(-)과 연결(ㅣ)의 선을 결합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십자가(1)의 형상을 살필 수도 있습니다.
분명코 무한한 권능의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낮은 곳에 오심으로써 하늘과 사람이 하느님 본성,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 당 시대뿐 아니라 현재에도 세상 누구와도 함께하시며, 어느 곳에서나 머무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사람의 시선에 의해 분할된 세상 또한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아들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1코린 15,28)입니다.
의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자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미 물려 하는 이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말씀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마태 25,46)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그리스도인 모두가 시작이요 마침인, 즉 알파요 오메가이신 주님께서, 세상이 바라는 '왕'의 모습이 아닌, "온 누리의 임금'으로 오셨음에 환호합시다. 나아가 주님의 통치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서 서로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의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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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광주대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김기량성당)]
<사람이 곧 감실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삼 일 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그분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마지막 설교다. 그러한 만큼 이 설교가 우리에게 비중있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이 설교의 메시지를 세 가지로 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구약성경에서도 심판의 날에 두 부류로 나뉜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을 구분하여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다른 민족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식으로 묘사가 되었다.(에제 39,21-29 참조)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다. 구원을 받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더는 혈연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다. 세상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
두 번째로 생각할 점은 심판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듣게 될 유일한 질문이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버는가?',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 '얼마나 건강한가?' 등의 물음을 자주 접한다.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도, 다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도 이러한 질문들이 기준이다. 그런데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르다. 그분의 질문은 오직 한 가지,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다. 그것이 유일하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 다시 말해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왜 그분은 이러한 마음을 품으셨을까? 비유적으로 우리 몸을 생각해 보자. 몸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아픈 곳이다. 이가 아프면 온 신경이 입 안에 있고, 배가 아프면 배에 신경이 가서 그곳을 어루만지게 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가장 아파하시는 곳에. 당신이 가장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기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분은 몸소 십자가 위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셨다.
미사를 드리던 어느 날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할 때가 있었다. 영성체를 하고 난 뒤에 감실에 성체를 모셔놓고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하게 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곧 감실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내 마음을 후벼 봤다. 감실 앞에서 그렇게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의 물음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실을 바라보는 눈길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 다르고 감실 앞에서 절을 하는 내 모습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내 모습이 뚜렷하게 구분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반성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하고 난 뒤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흘려보낼 때,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험담을 하고 난 뒤에, 나는 감실을 바라보며 감실처럼 그들을 대하지 못한 나를 채근한다. 그들을 항상 즉시 기쁘게 사랑하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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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정영우 요한 세례자 신부님(사무처장)]
<일상을 회개와 선행으로 살면…(마태 25,31~46>
오늘은 연중 제34주일로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우주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길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전례의 마지막 주일에 기념하며 고백한다.
오늘 복음은 최후에 있을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예고한다. 즉, 어떤 누구에게도 절대로 억울한 판결일 수 없는 '심판의 기준'에 대한 말씀이다. 이 세계가 끝날 때 주님은 영광을 떨치며 천사들을 거느리고 세상을 심판하러 내려오실 것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모든 이들은 그 앞에 모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그 과정은 이렇다.
주님은 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따로 갈라 세워 놓으시고 착한 사람들에겐 일찍이 없었던 최대의 축복을 선언하신다.(마태 25,34-36 참조) 이들이 영원한 생명과 축복의 나라에 불림을 받게 된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당신의 가르침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했기 때문이다.(32절)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자기들의 생활로 증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들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주님께 이런 일을 해 드린 일이 없고, 그저 어려운 이웃이나 돕는 조그마한 사랑을 베풀었을 따름이라고 그들이 말하자, 주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참조) 하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그들이 이와 같은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때 우연히 남에게 베푼 일시적 행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베풀어 준 착한 행위들이 이러한 영생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 반대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은 입으로 하느님의 이름만 불렀을 뿐 악을 일삼았고, 이웃을 돌보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나 그때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7,22-23 참조) "나는 그들에게 '너희가 이 사람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25,45 참조)
결론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을 이렇게 미리 보여주신 의도는 우리의 지금 생활이 악을 일삼는 생활이면 어서 빨리 회개하여 죄악에서 손을 떼고 남은 생활만이라도 선행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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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최후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온 세상의 왕으로서, 또 심판관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예수님의 심판은 곧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심판이지만,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이야기는 심판의 전체 상황이 아니라 일부 상황, 즉 신앙인들에 대한 심판 상황 이야기입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따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 ……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32절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라는 말씀과 33절의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은, 누가 양인지, 또 누가 염소인지 심사하는 일은 이미 끝났고, 최종 선고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심판 날’은 무죄와 유죄를 조사하거나 심사하는 날이 아니라, 최종 선고를 하는 날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심리(審理)’ 과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주님의 법정이고,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세속의 법정에서 하는 것과 같은 심리 과정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종 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바리사이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즉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루카 17,20-21)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과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삶’은 ‘최후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 하나하나가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삶 속에서 하는 선택들은, 최후의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대한 선택이 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ㄴㄷ) ‘양들’에게 ‘구원 선고’가 내리는 것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를 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했다는 것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느님의 뜻 실행’을 잘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랑 실천만 잘하면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모두 중요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2)
그처럼 믿음 없는 사랑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이(마태 5,46) ‘믿음 없는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의인들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되고, 죄인들에게는 회개하라고 타이르는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요한 3,17) 지금 잘하고 있다면 ‘끝까지’ 변함없이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말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심판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준비해 놓으신’(34절)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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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교회력은 단지 달력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신앙의 길라잡이와 같습니다. 위령성월의 연중 마지막 주일은 한 해 동안의 삶을 주님의 시선으로 돌아보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다가오는 대림절과 성탄을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찾는 주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그분은 성화나 상본에 나오는 고정된 이미지로 오시는 분도 아니고, 당신의 이름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시는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으로 나와의 만남을 계획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로,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먼 곳에서, 친근하게 혹은 담담하게, 내가 만난 사람들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열심한 구둣방 노인이 매일 한 가지 소원을 빌며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어느 날 할아버지는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일 할아버지를 찾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서두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저녁이 왔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불쌍한 거지 청년과 과일을 쏟아 당황하는 상인, 그리고 굶주린 모자가 그 구둣방을 방문하였을 뿐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우 실망한 채 잠자리에 들고, 다시 꿈을 꾸게 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다시 꿈에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웃으면서 당신이 오늘 세 번이나 할아버지를 찾아갔노라고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구둣방을 방문했던 불쌍한 거지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불쌍한 모자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시작한 예수님의 활동은 이제 ‘최후의 심판’으로 끝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25,3 31~32)
팔레스타인에서는 양과 염소를 함께 초원에 방목하다가 밤이 되면 목자가, 따뜻한 곳이 필요로 하는 염소를 양과 갈라놓습니다. 심판은 이렇듯 하나의 구분 작업입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 역시 이런 구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당신이 정하신 기준에 따라 판결 내리십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한 이들의 현실에 동참해 주길 바라십니다. 재물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비로운 마음을 원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25,40)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순명하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뒤에, 곁에, 안에 서 계십니다.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도움을 청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한 사람, 가난하고 힘든 이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계시는 예수님 덕분에 인간은 존엄한 품위를 지녔고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일(=육화)의 이유이며, 그 사랑의 절정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25,34) 예수님이 오른편에 세운 이들은 열린 눈과 마음으로 자비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곤경에 처했기 때문에 그를 도왔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도움의 대가가 무엇인지, 돌아올 이익이 어느 정도인지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북돋아 준 그들의 노력은, 삶의 가치와 무가치를 결정하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세워진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추방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25,41) ‘영원한 불’이란 하느님의 축복과 생명에서 제외되어 겪는 고통입니다. 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좌절과 증오에 가득 찬 이들로 이루어진 무리에 떨어집니다. 이러한 결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이 됩니다.
본문 전체에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자선 행위는 결코 영웅주의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남을 도울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내세우고 싶은 마음, 봉사를 통해 자기 허물을 메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베풀더라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나 봅니다. 도움이란 도움 받는 이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품위를 발견하도록 일으켜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에 계속 관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이자 도전입니다. 물론 모두를 돕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우리 네 삶의 언저리에서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을 형제와 자매로 존중하는 것이 이웃사랑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언제 지나쳤는지 하느님 앞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앞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심판은 모든 것의 정체를 벗기고 본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심판은 진실만을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산해야 할 때를 맞이합니다. 심판은 개인적인 결산의 때이며 또한 온 인류가 함께 겪어야 할 결산의 시간입니다. 그 결산의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보시고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참된 삶을 살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하여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 길이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하기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것들이어서 놀랍기만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25,40) 사랑은 복잡한 기교나 현란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진실입니다. 여기 내 삶 속에 주어진 현실이 사랑의 터전이며,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 곧, ‘가장 중요한 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만이 사랑을 낳듯이 우리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을 때마다 사랑해야 할 일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가를 것이다.”(25,31.32 참조)고 분명히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으며, 이에 걸맞은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니 늘 깨어 살면서 그날과 그 시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수녀가 보낸 「기도」라는 글을 여러분들과 나누면서,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 되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맑게 흐르는 강물이 되게 하소서. 위선보다 진실을 위해 지혜로운 진실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 라도 악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님이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낮아지고 깨어져도 겸허한 내가 되게 하소서.』(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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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최후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세상의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미리 준비하도록 안배하시며 마침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십니다. 천상의 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실력을 점검하고 발휘할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움을 갖게 마련입니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을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후 심판은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이 지상 삶의 마감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천상의 길을 걷기 위해 세상의 험한 곳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알려 주셨기에 그 기준에 따라 준비하면 그날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하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그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리 9,27)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고린5,10)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1고린 3,13)
로마서 2장 6절에서 8절에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5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단호한 선언이자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약속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심판대 앞에서의 판결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 헐벗은 이들 등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가 심판의 잣대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선포와 고통을 받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흑이냐 백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을 안 만큼 그에 걸맞은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답을 알려주었는데도 준비하지 않고 엉뚱하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구둣방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는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을 한 번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라.”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부산하게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루가 다 가도록 오신다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가 동량 나왔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도 지나가고, 굶주린 어린아이도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몇몇 손님이 다녀갔어요.
기다리다 지친 할아버지는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보잘것없는 노인에게 오실리가 있나? 개꿈이었나 보네.’ 하며 실망했어요. 그날 밤 지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거예요.
예수님을 보자 할아버지가 대뜸 소리를 질렀어요. ‘오신다고 해 놓으시곤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러셨어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았는데. 한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한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한번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를 스쳐 지나가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이 심판의 잣대임을 잊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되는 모든 이는 나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깨어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내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희망의 기다림이 있는 만큼 삶의 자리에서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우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습니다.(1요한 4,16-17)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 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요한13,15 ), 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시며(요한13,34)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왕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왕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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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글쎄 전신마비가 오는 병이었지요. 아이는 점점 화를 냈고, 자신의 힘듦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호전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또 그 부모도 지쳐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말합니다. 친구가 병문안을 왔는데, 프랑스 루르드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멀리 루르드까지 갔는데, 만약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이가 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얼마 뒤, 그래도 아이가 간절하게 원하니 루르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저 대신 저쪽에 앉아 있는 저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프고 고통스럽게 보이잖아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루르드에 와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라는 병이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때부터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짜 기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기를 아프게 하는 모든 병이 치유되어야 기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남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 말로 진짜 기적이었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오늘입니다. 전례력의 끝을 장식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오시어 이루시게 될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선포합니다.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인 양과 ‘저주받은 자’로 불리는 염소라는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류는 하느님께 직접 행한 우리의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잘 보여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드릴 것이 전혀 없으니 결국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그분의 사랑이 이뤄집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을 당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오히려 닫히고 맙니다. 이웃 하나에게도 소홀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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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주님>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우리의 주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먹여드려야 하는
굶주리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축여드려야 하는
목마르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맞아들여야 하는
나그네이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입혀드려야 하는
헐벗으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돌보아드려야 하는
아프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찾아뵈어야 하는
갇히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일으켜드려야 하는
쓰러지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품어드려야 하는
버려지신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살려드려야 하는
죽으시는 주님
우리의 주님
바로 우리가
없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작으신 주님
우리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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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기애인(女己愛人) 여주애인(如主愛人)하는 우리>
그제는 아침에 일어나니 방금 꾼 꿈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악몽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기분을 아주 더럽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선교 협동조합 일이 훌륭하다며 치하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저를 현재 용산이 아닌 청와대로 식사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에 종교 지도자 초청 때 수도자 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초대되어 청와대에서 그 양반과 식사한 적이 있는데 그 격식 차리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식사하지 않겠다고 할 때의 느낌이 꿈에서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내가 그까짓 치하에 감격할 줄 알았냐?’라며 끈질긴 초대를 거절하다가 꿈을 깼는데 꿈을 잘 꾸지 않는 제가, 혹 꾸더라도 생각나지 않는 제가 그 꿈이 생생히 기억나 기분이 무척 나빴습니다.
사실 저는 정치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관심도 적지 않으면서도 정치인들을 나쁜 놈들이라며 많이 무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가장 큰 이유가 저의 독선적인 교만 때문이지만 복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이 심판의 대상에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라고 예외가 없고 오히려 더 혹독합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뜻을 세상의 왕들이 받들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며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받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하시는지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난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헐벗은 이를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처럼 권세가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는 끌어올리시는 주님의 그 사랑과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왕들 뿐 아니고 우리도 그래야 하고, 이 축일을 지내는 더 큰 이유도 실은 이것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왕으로 받들겠다고 하는 우리는, 더더욱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왕직을 수행해야 하겠지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제직과 함께 왕직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왕직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오히려 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을 우리가 지내는 것도
당연히 주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받들겠다고 교회 안팎으로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왕직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봉헌키 위함입니다.
세상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만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 여기애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주애인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애인(女己愛人)이 나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라면 여주애인(如主愛人)이란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가난한 이가 바로 당신이고,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한 것이라는 가르치신 바지요. 이 가르침을 명심하고 이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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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시다>
-“하루하루, 날마다, 늘, 끝까지. 한결같이, 평생을”-
오늘이 흡사 모든 보물을 다 품고 있는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같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33주일이자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며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12,12)라는 주제로 참 멋지고 풍부한 담화도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희망과 기쁨의 왕이시며 이런 주님을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해 성서공부는 필수입니다. 이번 성서주간에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이고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바로 여기 요셉 수도원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바로 어제 생전처음 수도원에 피정 왔다 떠난 개신교 자매님에게 수도원은 “살아 있는 보물창고” 같다며 내년 달력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하여 “보물창고”라는 시를 보내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나무 한 그루 있지
날아드는 새들 따스하게 맞아주고 편히 머물도록 품어주는
늘 거기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있지
나무가 주는 푸르름과 싱그러움
열매와 그늘 사그락 잎사귀 소리마져도 모두 보물이지
늘 한 영혼 기다려주는 나무 한 그루
바로 모든 이의 보물창고”
-2023.11.25. 프란치스코 수사님의 말씀 듣고 염혜영-
더불어 생각나는 26년전 “사랑이란 이런 것”이란 자작시였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이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한 그루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보물창고 같은 수도원이요 제가 소망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제 그 자매에게 “하늘과 산”이라는 시집과 “겨울 나무 예찬”과 더불어 “시가 찾아 왔네!” 이라는 시도 선물했습니다. “시가 찾아왔네!”라는 시 전문도 그리스도왕 대축일 선물로 나눕니다. 그대로 일편단심 사랑해온 그리스도왕께 드리는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기가 그리스도왕이 제정되던 1925년 때와도 흡사한 작금의 세계입니다. 1925년 그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얼마후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해 세상이 중심을 잃고 암흑의 혼돈중에 있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교황 비오 11세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중심이자 왕으로 선포하는 대축일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중심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하다 마침내 1239년 세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9.1.부터 시작되 전쟁은 1945.9.2.까지 무려 만 6년 동안에 세계는 폐허가 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지 78년이지만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전쟁이요 오늘 역시 세계는 중심을 잃고 혼돈중인 참 위태한 상황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을 더욱 필요로 하는 절체절명의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는 지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은 이처럼, 우리를 끝까지 언제나 돌보고 섬기는 착한목자입니다.
결코 폭압적으로 위압적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독재자 임금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전례기도시 아름답고 감격적인 말마디들도 우리를 기쁨으로 뛰놀게 합니다. 우리 여기 수도자들은 다음 장엄한 초대송 후렴 고백으로 대축일을 활짝 열었습니다.
초대송;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와 시편 두 개의 후렴 노래 역시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찬미가; “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한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 수 있는 임이여”
후렴1; “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
후렴2;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있으소서”
세상이, 우리 삶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은, 두렵고 불안한 것은 삶의 중심이 분명치 않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나라”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길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하는 그리스도왕의 모습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자 일꾼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은혜롭습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새롭게 명명하면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모두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왕의 축일을 최고 등급의 대축일로 격상했고, 이어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3주일에 배치함으로 이날 모든 것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참 좋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착한목자 그리스도왕이시며,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분의 뜻을 자발적 기쁨으로 기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을 통해 착한목자 우리 주 그리스도왕의 마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개한 착한목자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니까? 주님은 곤궁중에 있는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며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듯,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1.굶주린 이들,
2.목마른 이들,
3.나그네들,
4.헐벗은 이들,
5.병든 이들,
6.감옥에 갇힌 이들”
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거론하시며 바로 이것이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못박습니다. 심판의 잣대는 결코 자폐적 자기만족의 전례생활도, 관상생활도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착각의 엉뚱한 짝사랑입니다.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오는 삶의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증발된 전례나 관상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의 참으로 부끄럽고 헛되고 공허한 위선적 신성모독 행위이겠습니다.
전례나 관상의 진위는 반드시 어떤 형태든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참으로 역겨워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결핍된 위선적 거짓 관상, 거짓 거룩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예화는 기존의 제반 종교를 심판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입니까? 혹은 버림 받은 왼쪽의 염소들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인종, 종교, 문화, 언어, 국적,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모두를 내 형제들이라 하며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십니다.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이런 가난한 주님의 형제들인 주님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주변 모두가, 특히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요, “주님의 얼굴”인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 만나는 주님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후자가 빠진 전자의 미사뿐이라면 반쪽의 미사뿐일 것입니다. 미사전례를 통해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이요 온전한 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벌이나 영원한 생명 역시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추호도 온 누리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진리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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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마태25,31.32)
<참왕이신 그리스도!>
오늘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누리의 왕(임금)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 중의 왕이신 참왕(참임금)'이십니다. 그런데 참왕의 모습이 세상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참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오늘 두 독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서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떼를 먹이겠다."(에제34,16)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1코린15,20-21)
참왕이신 그리스도는 겸손의 왕, 섬김의 왕, 희생과 사랑의 왕, 비움과 죽음의 왕, 공정과 정의의 왕이십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추구하는 왕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바보의 왕'이십니다.
우리 안에 화두(話頭)로 던져져 있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서로가 바보의 왕이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이고, 이 노력이 선행될 때, '함께 가기'라는 '시노달리따스의 참의미'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마태25,31-46)인 '최후의 심판 기사'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참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의 때에 심판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믿는 모든 이들이 참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따랐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사목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사목했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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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qq5hqkY0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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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한 해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은
모든 사랑을
다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고
실천할 때
행복해지는
준비된 나라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깨어있는
연중 시기
마지막 주일인
마무리를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구원의
깨달음과
첫발은
언제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고
전개되는
관심의
나라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낳고
무관심은
단절과 불행을
초래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언제나
사랑하는 관심의
오늘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후심판은
참으로 엄숙한
우리들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이웃이
되게하는 길은
다름 아닌
따뜻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마지못해 나누는
실천이 아니라
기쁘게 나누고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삶을 주시기 위해
오늘도 가장
작은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뜨겁게 만납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나라,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신지요.
아집을 버리고
베푸는 나눔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돌아서는 은총의
대축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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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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