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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보리도차제
1. 개요
티베트 불교에는 날란다 사원 전통을 계승한 특유의 불교 교육 체계가 있는데 이를 장춥람림(Jangchub lamrim), 한역으로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라고 한다. 이름을 풀이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매겨진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불법에는 완전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드러낸 요의법(了義法)과 방편으로 설한 불요의법(不了義法)이 있다. 광대한 불법의 바다에서 대소승의 요의법만을 모아 간추린 요의법의 왕이 바로 《람림》이라고 할 수 있다.
《람림》에 의지하면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헤매지 않고 수행이 가능하다. 밀교의 매우 깊은 가르침에 의지하여 한 생에 깨달을 수 있는지 여부도 《람림》의 내용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람림》의 내용은 크게 예비수습, 삼사도(三士道), 지관(止觀) 수행으로 구성된다. 《람림》의 구성에 따라 수행 순서도 예비수습 → 하사도 → 중사도 → 상사도 → 샤마타(지止) → 비파샤나(관觀) 순을 따른다.[2]
초펠, 게시 소남,《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개정판)
2. 연원
흔히 《람림》을 '아띠샤'나 '쫑카빠'와 같은 티벳의 카담파(Kadampa) 스승들이 만들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람림》의 가르침이 석가모니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대승 불교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불로부터 유래한 두 갈래 법맥이 있다. 석가모니불-미륵보살-아상가(무착)으로 이어지는 도의 광대한 실천을 중시하는 법맥(갸첸쬐규)과, 석가모니불-문수보살-나가르주나(용수)로 이어지는 공성의 심오한 견해를 중시하는 법맥(상모따규)이다. 달리 말하면 전자는 유식학파, 후자는 중관학파에 해당한다.
인도의 스승 아띠샤가 전자의 법맥은 스승 '쎌링빠'로부터, 후자의 법맥은 스승 '릭빼쿠쥭'으로부터 이어 받아 두 법맥을 통합하여《람림》이라는 하나의 큰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관한 논서로 《보리도등론》이 있다.
아띠샤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지만 이후 담고 있는 분량에 따라서 '경을 자세하고 넓게 공부한 후 경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자(까담슝빠)', '람림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자(까담람림빠)', '핵심적인 내용만 골라서 수행하는 자(까담담악빠)'라고 하는 세 갈래 법맥으로 다시 나뉘었다. 이를 다시 까담 전승의 후계자이자 겔룩의 창시자 쫑카빠가 통합하여 《보리도차제광론》를 저술했다. 이 외에도 《람림》과 관련한 여러 논서가 있다.
하사(下士)는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항상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중사(中士)는 다만 괴로움의 소멸만을 희구할 뿐 즐거움은 희구하지 않으니, 괴로움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상사(上士)는 항상 자신은 괴로워도 다른 이의 안락과 아울러 다른 이의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을 부지런히 추구하니 다른 이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아띠샤 이전 불교 논서들에서도 보리도차제의 맹아(萌芽)를 엿볼 수 있다. 가령 《구사론》, 《유가사지론》〈섭결택분〉, 《보성론석》, 《청정도론》 등의 논서에는 보리도차제의 삼사도(三士道)와 유사한 수행자의 분류가 등장한다. 즉 석가모니 재세시부터 존재하던 차제설법(次第說法)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성문ㆍ연각ㆍ보살 등의 종성(種姓)과 승(乘)으로 분류한 뒤, 최종적으로 구경일승(究竟一乘)의 관점에서 이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수행 체계로 정립한 결과물이 곧 보리도차제라고 할 수 있다.
3. 특징
《보리도차제광론》에 따르면《람림》의 가르침에는 네 가지 큰 이익과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람림》의 네 가지 큰 이익
1) 부처님의 일체 교설에 모순이 없음을 알게 함.
2) 일체 교설을 진정한 가르침(요의법)으로 받아들이게 함.
3) 부처님의 견해를 속히 얻게 함.
4) 일체 죄업들이 저절로 소멸됨.[3]
■《람림》의 세 가지 큰 특징
1) 현교와 밀교의 일체 내용을 모두 담고 있음.
2) 마음을 다스리는 순서를 우선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기 매우 쉬움.
3) 용수와 무착의 교의에 정통한 두 스승(릭빼쿠쥭과 쎌링빠)의 비전을 보충하였기에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특별함.
그 밖에 경론에서 말씀하신 도(道)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正道)를 말하며, 그것에 부족함과 과함이 없고 수행 자체에 그 어떤 오류도 없다고 전해진다. 또한 상근기 중생만이 아니라 하근기, 중근기 등 각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람림》을 일체 교설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고 비유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보리도차제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리도차제론》은 반야, 중관, 인명(因明, 불교인식논리학)을 모두 공부한 자가 반야와 중관의 견해를 바탕으로 경론에서 말씀하신 수행 차제(次第)를 한 생애에 집중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므로 우선 이 두 가지의 견해를 알지 못하면 보리도차제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보리도차제를 배울 때에는 반야와 중관의 경론과 《보리도차제론》을 마치 어머니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듯이 항상 함께 하여 배워야 한다."
《보리도차제광론》 1권(개정판) (박은정 譯)
4. 구성
4.1. 예비수습
예비수습에서는 우선 《보리도차제광론》의 근간이 되는 《보리도등론》에 대하여 세 가지 방식으로 소개한다. 이와 같이 세 가지로 법을 설하는 방식은 비끄라마쉴라(Vikramasila) 승원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4]
첫째, 《보리도등론》의 저자인 아띠샤의 공덕 : 저자인 아띠샤의 생애와 공덕을 통해 법의 정통성을 알 수 있다.
둘째, 법의 공덕 : '법의 공덕' 네 가지는 상기한 '《람림》의 네 가지 이익' 항목에서도 언급했다.
부처의 일체 교설에 모순이 없음을 알게 함.
일체 교설을 진정한 가르침(요의법)으로 받아들이게 함.
부처의 견해를 속히 얻게 함.
일체 죄업들이 저절로 소멸됨.[5]
셋째, 그와 같은 법을 설하고 듣는 방법
법을 청문(聽聞)하는 법
청문의 이로움(공덕)
법과 설법자에 대한 공경
청문법의 실제 : 법기(法器)의 세 가지 허물 끊기, 여섯 가지 인식
법을 설하는 법
법을 설하는 공덕
부처와 법에 대한 공경심 일으키기
설법자의 마음가짐과 몸가짐
법을 설해야 할 대상과 설하지 말아야 할 대상 구별
다음으로 본 가르침으로 제자를 인도하는 순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모든 도(道)의 근원인 선지식을 의지하는 법
의지처인 선지식(스승)의 자격
제자의 자격
선지식을 섬기는 방법
선지식을 섬김으로 인한 이익
선지식을 잘못 섬김으로 인한 해악
선지식에 의지하여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
불교 수행을 위한 조건인 팔유가(八有暇) 십원만(十圓萬)의 정의, 가치, 얻기 어려움
보편적인 도의 체계인 삼사도(三士道) 소개
■ 스승과 제자의 자격
마이트레야의 《대승장엄경론(Mahāyānasūtrālaṃkāra)》에서는 선지식의 요건을 10가지로 말하였다.
1) 계학: 자기 자신을 조복함.
2) 정학: 지(止, 샤마타)
3) 혜학: 인무아(人無我)의 지혜
4) 제자보다 뛰어난 공덕
5) 이타(利他)를 좋아하는 정진력
6) 교학: 경율론 삼장에 밝음.
7) 진여의 증득: 법무아(法無我)의 지혜
8) 언변이 좋음.
9) 중생에 대한 자애심: 사랑과 자비로 법을 설함.
10) 반복되는 설법을 싫어하지 않는 것.
10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계정혜 삼학과 진여의 증득, 중생에 대한 자애심 등 5가지 조건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마저도 찾지 못하면 두어가지 조건이라도 충족하는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아르야데바의 《사백론(Catuḥśataka)》에서는 제자의 조건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치우치지 않는 마음(편견이 없음)
2) 지혜(지성)
3) 구도심(求道心)
제자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마음'[6]과 같은 신심(信心)과 공경심으로 신구의(身口意) 삼문(三門)을 다해 스승을 섬겨야 한다. 선지식 스승을 모시는 법은 마명(馬鳴, Aśvaghoṣa)의《사사오십송(事師五十頌, Gurupañcaśika)》 등 여러 경론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스승을 의지하는 수행법이 제대로 되면, 수행의 큰 문을 연 것과 같다. 이 때부터 제대로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다.
■ 유가구족(有暇具足)
가만(暇滿)의 몸이란 수행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없고 수행에 필요한 조건을 갖춘 귀한 몸을 일컫는다.
팔유가(八有暇)는 수행할 수 없는 장애로부터 벗어나 여덟 가지 여유를 갖춘 것을 말한다.
(1) 지옥에 태어나지 않은 것.
(2) 아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
(3)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4) 오래 사는 신(장수천, 長壽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5) 부처의 가르침을 모르는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
(6) 부처의 존재를 모르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
(7) 감각기관에 장애가 없는 것.
(8) 그룻된 견해를 품지 않은 것.
십구족(十具足, 혹은 십원만十圓滿)은 수행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열 가지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1) 인간으로 태어난 것.
(2) 불법(佛法)이 존재하는 땅에 태어난 것.
(3)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것.
(4)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지 않는 것.
(5) 신심(信心)을 갖춘 것.
(6) 부처가 세간에 존재하는 것.
(7) 정법(正法)이 설해지고 있는 것.
(8) 그 가르침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9) 그 가르침을 받는 것.
(10) 후원자, 시주자 등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
앞의 다섯 가지 내부적인 조건을 자원만(自圓滿), 뒤의 다섯 가지 외부적인 조건을 타원만(他圓滿)이라고 한다.
4.2. 삼사도(三士道)
《람림》에서는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취합하여 불교수행의 순서에 맞추어 하사도(下士道), 중(中)사도, 상(上)사도의 삼사도(三士道)로 정리했다.
1. 하사도 - 다음 생에 인간, 천상과 같은 선취에 태어나는 것이 수행 목표
: 초기 불전에서 석가모니는 전문적인 수행이 어려운 일반 대중을 위해 보시(布施)하고 지계(持戒)하면 생천(生天)한다는 차제법문을 여러 번 설했다. 이처럼 다음 생에 인간, 천상과 같은 선취에 태어나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하사도 수행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제행무상(죽음과 무상 사유), 윤회개고(삼악취[7]의 고통), 인신난득(사람 몸 얻기 어려움)[8], 인과응보(인과에 대한 믿음), 귀의삼보(불ㆍ법ㆍ승 삼보에 귀의함) 등을 익히며 십선법(十善法)을 행하고 십악업(十惡業)을 멀리 한다.
"악업은 그 어떤 것도 짓지 말고, 선업은 원만히 행하라. 자기 마음을 완전히 교화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9]의 가르침처럼,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하사도의 가르침은 모든 수행의 토대가 된다. 또한 그 과보로 증상생(增上生)[10]을 누릴 수 있고, 해탈성불의 결정승(決定勝)[11]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들은 팔유가[12] 십구족[13](八有暇 十具足)같은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
2. 중사도 - 개인의 해탈열반이 수행 목표
: 아라한이 되어 개인의 해탈열반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을 갖춘 상태에서 교법(敎法)인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배우고, 배운 바를 토대로 증법(證法)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수행하여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을 익혀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는다.
3. 상사도 - 부처가 되어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여 해탈성불로 이끄는 것이 수행의 목표
: 부처가 되어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여 해탈성불로 이끄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 중사도의 계정혜 삼학을 토대로 보살승을 수행한다. 보살승에는 바라밀승과 금강승 두 가지가 있다. 바라밀승(대승 현교)의 육바라밀(六婆羅蜜) 및 사섭법(四攝法)[14]과 금강승(대승 밀교)의 밀법(密法)을 수행하여 지혜와 방편을 갖춤으로써 부처의 과위(果位)에 이른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를 차례대로 세간도, 나한도, 보살도라고 부를 수 있다. 혹은 인천(人天)승, 성문연각승, 보살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절차에 따라 첫 단계인 하사도부터 수행하여야 한다.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인 중사도 수행에 들어갈 수 있고, 중사도 수행이 무르익어야 그 다음 단계인 상사도를 닦을 수 있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의 심성을 갖추고 있고 상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와 중사도에서 익혔던 심성과 통찰 모두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리도차제의 수행은 누적적(累積的)이다.
김성철,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
김성철,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와 보살도》
김성철, 《체계불학:신념체계로서의 불교학》
자신의 수행 동기가 진정 무엇인지 늘 자문(自問)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수행 동기에 따른 실천이 없다면 진정한 동기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자신이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정신적 행복보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일체 중생을 위한 수행은 커녕 이번 생을 위한 수행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생을 위한 수행은 엄밀히 말해 선업(善業)은 될지언정 불법(佛法)이나 불교 수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음 생을 준비하는 하사도(下士道)부터 비로소 진정한 불법, 불교 수행이 된다. 하사도에서 이번 생은 버려야 할 법, 다음 생은 취해야 할 법으로 이번 생보다는 다음 생을 위해 수행해야 한다. 반면 중사도에 이르면 다음 생 또한 버려야 할 법이 되며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취해야 할 법이 된다. 마지막으로 상사도에서는 자기 자신만의 해탈 역시 버려야 할 법이 되며 일체 중생의 해탈성불이 취해야 할 법이 된다.
성불(成佛)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원만한 이타행(利他行)이 목적이다. 성불하지 않으면 흠결 없이 원만구족한 이타행을 이룰 수 없다.
《보리도차제광론》은 궁극적으로 보리심을 발하여 대승의 상사도에 입문할 것을 권장한다. 하사도, 중사도도 상사도와 무관한 별도의 과정이 아니라, "상사도와 공통적인 도(道)로서의 하사도", "상사도와 공통적인 도로서의 중사도"로서 상사도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보리심을 발하여 대승에 입문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라한(성문승‧독각승)의 경지를 이루어도 궁극에는 대승(구경일승究竟一乘)에 들어가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지혜로운 이들은 처음부터 발보리심(發菩提心)으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마명보살의 《섭바라밀다론(攝波羅密多論)》에서『일체중생의 뜻을 이루는 데 힘없는 두 가지 승(성문승‧독각승)을 완전히 버리고 처음부터 대승의 대자비의 가르침에 따라서 몸과 말과 생각을 번뇌의 허물 하나도 없이 오직 이타를 위하는 한 맛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고,『행복과 불행의 모든 법은 꿈과 같음을 보고(모든 법이 무자성이다. 실체가 없다), 무지(無知)의 허물로 떠돌고 있는 낮은(천한) 중생들을 볼 때 최상의 행인 이타의 기쁨 버리고 자신의 뜻을 위해 어떻게 정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게시 소남 걜첸 譯)
■ 출리심과 보리심은 모순되는가?
처음에는 진정한 보리심을 내기 힘들지만 단계별 수행을 통해 세속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출리심(出離心)[15]과 자비심(慈悲心)을 증장하면서 점차 진정한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 언뜻 생각하기엔 윤회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과 일체중생을 위해 윤회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리심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진정으로 윤회의 고통을 인식하고 윤회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 후 다른 이들을 돌아보면, 그들이 겪을 윤회의 고통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즉 보리심은 달리 표현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체 중생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자비심을 발하여 출리심을 확충(擴充)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주요 종교, 사상들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법칙인 황금률의 실천이기도 하다.
출리심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보리심의 대상은 타인이기 때문에 출리심과 보리심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보살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윤회에 대한 집착이 조금도 없지만, 다른 이를 위해서라면 윤회지(輪廻地)는 물론 지옥과 같은 악도(惡道)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스로 윤회에서 벗어나겠다는 출리심이 없다면 다른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자비심도 생길 수 없다. 마치 의사가 스스로 병을 싫어하지 않으면,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 보살은 윤회하는가?
보살은 크게 범부(凡夫)보살과 성자(聖者)보살로 나뉜다. 범부보살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도에 입문했지만 아직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지 못한 자량도, 가행도의 보살을 가리키며, 성자보살은 공성을 현량으로 인식한 견도 이상의 보살을 가리킨다.
범부보살의 경우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의 힘 뿐 아니라 업과 번뇌의 타력(他力)에 의해서도 윤회지(輪廻地)에 머물게 된다. 이와 달리 성자보살은 업과 번뇌의 힘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16] 별도의 발원이나 서원도 요구받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윤회지를 머물고 나올 수 있다. 이들 성자보살은 중생과 인연이 있는 곳에 화신(化身)을 나투어 중생을 제도한다.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은 업과 번뇌의 타력으로 인한 윤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승만경》에서는 그들이 받는 죽음을 윤회 내에서 범부 중생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죽음과 구별하여 ‘부사의변역(不思議變易, acintya-pāriṇāmikī)'이라고 표현하였다. 흔히 전자를 분단생사(分段生死), 후자를 변역생사(變易生死)로 칭하기도 한다.
■ 무여열반과 유여열반
소승학파와 대승학파의 무여열반(無餘涅槃), 유여열반(有餘涅槃)의 정의가 서로 다르다.
소승은 오온의 몸(=물질+정신)을 기준으로
① 번뇌를 모두 소멸했지만 과거 업과 번뇌로 인한 몸은 남아있는 유여열반과
② 번뇌와 몸 둘 다 아무것도 없는 경지(회신멸지灰身滅智)에 든 무여열반으로 나눈다
대승의 중관학파는 공성을 깨달은 지혜를 기준으로 아래 둘로 나눈다.
① 근본지根本智(무여열반) → ② 후득지後得智(유여열반)
여기서 '여(餘)'='남은 것'이란 자성(自性)으로 현현하는 것,[17]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二元的) 모습을 가리킨다. 중관학파에서는 공성삼매에서 모든 차별상이 사라지고 근본지로 오직 공성만을 인식하는 것을 무여열반, 삼매에서 나와 후득지를 통해 자성으로 현현함을 인식하는 것을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소승 유부(有部)의 경우 무여열반에 들면 의식의 흐름(心相續)은 단절된다고 본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육십송여리론》에서 오온의 소멸이 곧 열반이라는 소승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 발생과 소멸 등의 개념으로 대상화(objectify)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無生無滅) 그러한 일체법의 실상(實相), 즉 공성을 깨달을 때 비로소 열반에 든다고 말했다. 또한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만약 유부의 주장대로 의식이 단절된다면, 사람이 성취할 것으로 무여열반을 세우지 못하는 모순이 있게 된다. 즉, 사람에게 무여열반이 존재하지 않고, 무여열반을 증득할 때는 사람이 없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제14대 달라이라마,《달라이라마의 보리도등론》(양승규 譯)
유부에서도 열반은 마음/의식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열반을 얻었을 때 의식이 사라진다면 의식의 특성인 열반도 있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교리에도 모순된다. '의식의 특성으로서의 열반'이 있을 수 없는 '회신멸지(灰身滅智)'가 열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르마끼르띠는 《석량론》에서 의식의 흐름이 단절될 수 없음에 대해 논증했다. 의식 자체의 연속성에 의해 이전 찰나의 의식이 조건이 되어 다음 찰나의 의식이 발생하는 식으로 매 찰나의 의식들이 발생하며, 의식이 없는 물질이 의식을 대치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열반 이후에도 번뇌와 대치하는 청정한 의식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 구경삼승과 구경일승
중관학파에서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최종적으로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되어 번뇌장(煩惱障) 뿐만 아니라 소지장(所知障)까지 제거하고 부처를 이룬다고 본다. 모든 중생은 동일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 등의 경전에 의거한 이러한 견해를 구경일승(究竟一乘)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해심밀경》 등의 경전에 의거하여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수행자들의 종성(種姓)이 각각 다르고, 한 번 얻은 과위(果位)는 바뀔 수 없다고 보는 견해를 구경삼승(究竟三乘)이라고 한다.
소승학파와 대승의 유식학파에서는 구경삼승을 주장한다. 각자의 인연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의 길을 따르며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승의 중관학파에서는 구경일승을 말하기에 모든 중생이 반드시 성불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생마다 각자의 종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다. 만일 성문승의 종성을 가졌더라도 성문승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욱 향상하여 보살승으로 나아가 성불할 수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 구경일승에서 설하는 바이다.
성문의 아라한이나 연각의 벽지불 같은 경지를 추구하여도 구경일승의 교리에 따라 언젠가는 성불할 것이므로 굳이 당장 보리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도(外道)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같은 무색계정(無色界定)을 추구한 결과 수 대겁(大劫) 동안 선정삼매에 드는 것처럼, 아라한이나 벽지불 역시 열반하여 공성(空性) 삼매에 들게 되면 언제 삼매에서 벗어날지 알 수 없으며 그만큼 성불은 미뤄질 뿐이다.[18]
고통받는 중생을 외면하고 홀로 삼매락(三昧樂)을 즐기는 것이 옳지 않음은 성문아라한이나 연각아라한 스스로도 인지하고는 있지만, 삼매의 즐거움이 너무나 강력하여 혼자 힘으로는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다행히 전생에 인연이 있던 부처가 도움을 주면 삼매에서 깨어날 수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 단 한 명의 중생도 구제하지 못한 채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수 대겁 이상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리고 만다. 때문에 대승의 바라밀승과 금강승 법을 만난 매우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발심(발보리심)하여 보살도를 수행해야 한다고 대승의 선지식들은 말한다.
4.3. 샤마타와 비파샤나(止觀)
티베트 불교에서 전승되는 기본적인 수행방법은 산스크리트어로 샤마타(shamatha)와 비파샤나(vipashyana)[19], 즉 지관(止觀) 수행이다. 티베트어로 샤마타는 '평화롭게 머묾'이란 뜻의 시녜(zhi gnas), 비파샤나는 '더 나아가서 봄', '더 뛰어나게 봄'이란 뜻의 학통(lhag mthong)이라고 한다. 지관수행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전승된 가장 보편적인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승지관의 전통은 티베트 불교 외에는 거의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문문화권에서 대승교학은 교학의 이해로만 그치고 실천으로 증험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유식, 중관과 같은 교학은 수습하여 증득하지 않으면 본질을 체득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대승지관의 전통을 다시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승의 정신에 입각한 지관수행은 남방의 위빠사나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승규, 《티벳의 지관 수행 체계 연구》
《보리도차제광론》에서 다루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수행론은 《삼매왕경》과 같은 경전과 《유가사지론》, 《대승장엄경론》같은 유식 논서, 《중론》, 《입중론》 등 중관 논서들의 영향을 받았다.
《성문지》(안성두 譯)
《유가사지론》(안성두, 이영진, 원과, 운산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