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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 강세화
초저녁 뜨는 별을 헤아리듯이
오월 해 질 무렵 냉이꽃을 읽는다.
열린 들판에 총총히 불을 켜고
눈에 밟히는 냉이꽃을 읽는다.
멀어져 버린 인심을 묻지 않고
돋보기 너머로 콩 줍듯이 냉이꽃을 읽는다.
봄날의 사정 들추기 민망하여
몸을 낮추고 냉이꽃을 읽는다.
허기져 목말랐던 시절을 생각해서
모른 체하지 못하는 냉이꽃을 읽는다.
속내도 까닭도 모르고 피는 꽃이 아니라
올차게 눈을 치뜨는 냉이꽃을 읽는다.
저 꽃 / 강세환
돌담 아래 등 붙이고 앉아
한 줌 햇살 외엔 다 필요 없는
더 갖고 싶은 것도 없고
더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저 노인!
더 피지도 않고 더 지지도 않을
환한 웃음!
꽃, 상징사전 / 강신애(1961~ )
조향사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
봉오리에 영근 향이 폭발하는
찰나의 입회,
천연의 몽환을 포집하기 위해
늘 백지다
향은
태양이 물 주어 기른 지상의 기호사전
엉킨 실마리 찾아
꽃에 묶인 상징의 색인을 펼쳐내고
후각의 팔레트에 비비고 섞으며
녹음 어우러진 재스민과 은방울꽃 골짜기,
국화꽃 비탈을 헤매인다
손톱꽃 / 강은교
고모가 잡풀을 뽑네
곁에서 나도 잡풀을 뽑네
잡풀을 뽑다가 원추리 떡잎도 같이 뽑네
고모도 1센티쯤 자란 채송화를 뽑았다고 한숨을 쉬네
뽑힌 그것들을 다시 묻어주고
함께 기도하네
살려주십사, 살아주십사, 살려주십사, 살아주십사
한 기도는 내 기도이고
또 한 기도는 고모의 기도이네
고모가 잡풀을 뽑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핀 그것들
차마 뽑지 못하네
내가, 내가 잡풀을 뽑네
잡풀이 들고 있는
손톱만한 바람을 보고
차마 머리칼을 심장가로 쓸어버리지 못하네
잡풀아 잡풀아
하늘을 들고 있는 잡풀아
바람을 들고 있는 잡풀아
힘들면 내려놓으렴
숨들면 내려놓으렴
고모가 호미를 던져버리네
고모여/ 고모여/ 당고마기 고모여
고모가 잡풀을 다시 심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핀 그것들
차마 뽑지 못하고
다시 심네
마당에 손톱꽃이 가득, 가득, 가득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 강은진
나는 너의 말로 말을 하고
너의 얼굴로 잠든다
내일, 이라고 적힌 글자들을 삼키며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울지 않는 밤이 다시 찾아온다면
너의 흙 묻은 신발을 오래오래 껴안고 있을 거야
어린 감나무를 심어 놓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연하디연한 살갗에 뺨을 대며
붉은 열매들이 나비처럼 꿈꾸는 상상을 할 거야
나는 너의 손으로 꿀벌의 투명한 날개를 쓰다듬고
너의 생채기로 선혈을 흘린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고요 속에서
아마 나는 네가 붙잡았을 최후의 기억
그때 웃고 있었다고 믿을 거야
분명히 그랬다고 믿을 거야
봄은 바싹 마른 입술처럼 바스락거렸지만
살아있는 것들 중
침수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가을에 태어났고
네가 없는 날 죽었다
-원추리 1914-1917, 캔버스에 유화 150*140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시들지 말아라 원추리꽃 /강인한
백 년 전에도 너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층 전시실에서
발뒤꿈치의 시간을 뜯어내고 내려온
모네의 원추리꽃
시들지 말아라 여인이여
해 뜨면 하늘 푸르러지고
죽었던 짐승도 노래 속에 다시 살아난다
내가 돌아볼 때까지 눈물을 닦고
거기 서 있어라 길고도 슬픈 목을 세우고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살그머니 돌층계에 앉는 바람
당신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 한 잔
우리들 사랑도 이처럼 쓰고 또한 달콤했거니
세월이 가도 시들지 말아라
꽃이여 내 여인이여
아직은 당신의 이름 불러줄 사람
저 어두운 지하철역 출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시들지 말아라 오랜 옛날에도 아름다웠던 사랑
오늘 다시 네 앞에 꽃피울 사람 있으니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09년 올해의 좋은 시
꽃의 말씀 / 강인한
가까이 오세요
한 발만 더 가까이 오세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여인의 귓속말을
드릴게요
좀더 가까이 오세요
한 발만 더 가까이 오세요
꽃의
맨 처음 피어난 빛깔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가까이 오세요
어지럼증이랑 가슴엣피 같은 것도
다 잊을 수 있게 씻은 듯이
가라앉는
한 옛날의 서러운 사람
향기로운 눈물로 닦아드릴게요
받아들일게요
내가 바치는
이 질그릇에 온전히
소중한 당신의
당신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
*고속도로 휴게소 남자화장실에 붙여진 표어.
꽃과 다비(茶毘) / 강인한
산다화(山茶花)
꽃잎 속에 길이 열린다.
유황의 길이다.
그대가 가고 있다.
한 생(生)의
동아줄이 타듯
그대의 길이 타고 있다.
산다화
꽃잎 속에 불이 번진다.
아수라(阿修羅)의 불이다.
육합(六合)을 번져 간다.
불 속에
떨어지는 그대의 손
전생애(全生涯)를 움켜쥐고 탄다.
산다화
꽃잎 속에 바람이 불고 있다.
이승 저승을 넘어다니는
눈을 다친 바람이다.
떠돌이
떠돌이바람
불타는 그대 미소에 머문다.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 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하므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친절한 인사를 한다 피우다 만 꽃이 더러 마르고 목을 늘인 꽃대가 꽃색을 잃었다 바람과 내통하는 꽃의 비밀을 읽는다
웃을 때 생기는 습관이야 눈시울 붉히는 꽃이 말했다 그는 눈물에 능하다 달콤한 거짓이 참말을 밀치고 저만치 피어있다 눈가가 함부로 붉었다
바람이 간지러워 꽃잎을 뜯었을 뿐이야
웃음이 무성한 꽃밭은 변명의 목소리가 일정하다 지나가던 구름이 바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큰 꽃의 말 / 강 정
길 옆 나무들에
색색의 뱀들이 매달려 혀를 내밀고 있다
기나긴 말의 나선
봉인되었던 천국의 즙액들이 누수된다
나는 길 안쪽에서 그것들과 얘기하기도 하고
길 바깥에서 사투리처럼 머뭇거리기도 한다
길 안이든 바깥이든
결국엔 점이 되거나
그 어떤 뱀의 대가리도 채워 넣지 못할 괄호로
텅 비어버릴 것이다
들여다보면 말없이 죽은 누군가의 해골이거나
한없이 밑으로만 나래를 펼치는
잔뿌리 같은 게
물 속 물고기의 비늘처럼 번득일지도 모른다
나는 텅 빈 채로 움직이고
그때마다 뱀들이 미끄러져 내려와 길을 덮는다
몸 비틀어 진흙을 훑어 새긴 문양들이
그대로 어떤 말이 되고 그림이 된다
나는 길 안에도 바깥에도 존재하고
아무 말도 몸도 없이 유령처럼 떠돌고
뱀들이 부려놓은,
이 세상엔 없는 말이나 그림으로 펄럭이다가
이내 다시 길의 하품으로 끄무러지는 입을 봉한다
길은 결국 수천 마리 뱀들이 몸을 꿰어 연결한
보다 더 큰 뱀의 몸뚱이에 불과하지 않겠나
지구의 낭심을 움켜쥔 채
통째 하늘로 끌어올리는 뱀들의 분란
거대한 침묵의 뿌리를 펼쳐
하늘에서 물고 내려온,
여태 한 번도 지상에선 달려보지 못한 길들이
오래 전 내 몸이었던 세상 속으로 낯선 말들을 깨물고 내달린다
뱀들은 이내 스스로 몸을 직립해
스스로 길이었던 길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스스로 길이었던 길을 허방으로 비운다
길 속에 갇혀있던 풍경이 곧 터져버릴 기포처럼 부푼다
나는 이런 걸 내가 피어나는 순간이라 말하고 싶어 한다
동그랗게 비어있는 얼굴 둘레에
비늘 같은 꽃잎들을 천형인 양 잔뜩 매단 채
모든 길의 입구를 천 갈래 혀로 찢어
몸 안의 암술로 꽂아두려 하는 것이다
나를 꿰뚫어
그 안의 깊은 구멍 속 갓난 지구를 뜨겁게 삼키시라고
꽃의 그림자 / 강정
낮엔 잘 보지 않았다
너무 예뻐서
그 예쁨이 칼 같아서
작은 불빛 아래 길게 누운 밤,
천장에 비친 잠의 그림자
실제보다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움직이기도
표정을 짓기도 한다
소리를 듣기도
속삭이기도 한다
낮 동안 오래 참다
어둠 속에서야 입을 꼬물거리는
스스로 잘라버린 만화(萬化)의 뿌리
빛이 없었다면
안 보였을 것이나
어둠이 아니었다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
꽃은 웃는 척 웃지 않는다
말하는 척 입 열지 않는다
누가 꽃에서 화사함만 보는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밀봉된 입술
누가 그 참혹의 체취를 훔쳐
선의만 치장하려 하는가
긴 침묵의 밤이 무서워
속 깊은 울음을 그림자만 내놓으니
나비 떼를 겁내는 이것은
멸종을 예감한 미래의 유골
긴 사랑의 눈빛이 아직 까맣다
치자꽃 그대 / 강희근
절간 하루의 침묵을 불사르고 핀다
그대가 흰빛 꽃 이파리 뒤에 한 겹 또 한 겹
받치는 시간
내 몸은 그대처럼 부풀고 피가 잘 돌아,
나는 아프고 그대는 피고
그대는 아프고 나는 피고
절간 소신대 옆에 서서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을 지거나
사랑을 이고 있을 뿐이다
경내 침묵은 어제도 오늘도 넉넉하다
이파리 꽃 이파리 겹겹으로 피면서 벙그는
시간
그대
어제도 치자
오늘도 치자, 숨 가빠라 어여쁜 치자꽃이다!
꽃자루에 꽃 하나씩 피는 목련 / 고두현
꽃 피는 데도 순서가 있다는데
네 끝에서 처음 피는 꽃과
내 속에서 마지막 피는 꽃이
물망초처럼 좌우 교대로 피는 순간은 언제일까.
우리 만나고 합치고 꽃 피우느라
이만큼 아래위 앞뒤 서로 부볐으니
이제는 누가 먼저 꽃씨 열매 품었는지
넌지시 속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을라나 몰라.
꽃의 지옥 / 고 영
끈끈이주걱 화려한 꽃잎 위에
부전나비가 앉아 있다
끈끈이주걱 흔들리는 만큼
부전나비 흔들린다
부전나비 날갯짓만큼
끈끈이주걱 흔들린다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꽃의 지옥이라도 좋다!
끈끈이주걱 아가리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기꺼이 날개를 접는다
제6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푸른꽃 / 고은강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 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 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이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꽃의 권력 /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꽃의 안부 / 고진하
꽃의 안부부터 물었다 굳이
내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았다
양봉가 이씨는 꽃을 따라 북상 중인데
시방 안산에서 꿀을 받고 있단다
뒷산을 올려다보니
아카시아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곧
쏟아질 꽃비의 후광 속으로
불콰한 얼굴의 이씨가 지나가고
드문 야생벌들이 닝닝거리며 지나가고
산비둘기도 끼룩끼룩 지나가고
지나갈 것들이 환(幻)처럼
지나간 뒤꼍을 서성이며 난
지속가능한 미래를 또 생각해보는 것인데
이 비대한 문명의 광휘 속에서
꽃의 안부부터 묻는 당신
나의 안부, 가족의 안부 따위 묻지 않고
심란한 음성으로
오늘밤 야반도주하듯
아카시아 꽃비 맞으러 갈 거라고
눈부신 꽃비의 후광에 흠뻑 젖으러 갈 거라고
꽃 먹는 소 / 고진하
인도의 소읍, 어느 성인의 탄신을 기리는 축제라던가?
떠들썩 떠들썩한 축제 행렬 막 지나간 길, 꽃으로 가득한 트럭 위에서 사내들이 던진 꽃들 질펀하게 깔려 있네
흠! 흠!
붐비는 재스민 금잔화 향기 맡고 나타났을까, 난데없이 어슬렁거리며 등장한 흑소 몇 마리,
더 넓을 순 없는 여물통, 뜨겁게 끓는 아스팔트에 깔린 꽃들을 우적우적 씹고 있네
갈비뼈 아른아른 비쩍 마른 흑소들, 야윈 신들,
꽃으로 주림을 채우고 있네 오, 공양(供養)? 맞네! 저 석조사원의 죽은 신들보다 죽은 성인들보다
살아있는 신들을 먹여야 하리
무엇보다 꽃으로 먹여야 하리
꽃으로!
사람꽃 / 고형렬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가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꽃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잉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도라지꽃 / 곽재구
대청마루 위
할머니와 손녀
감자 세알이 화안하다
기둥에는 두해 전 세상 떠난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누렇게 바래 붙어 있는데
山山水水無說盡이라 쓰인
문자의 뜻을 아는 이는 이 집에 없다
할머니가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 두알을 붙인 뒤
손녀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마당귀 도라지꽃들이 보고 있다
도라지꽃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온 그날도 그 자리에 머물러 꽃등을 흔들었다
도라지꽃에서는 구들장 위 한데 모여 잠을 자는 식구들의 꿈 냄새가 난다
눈보라가 날리고 얼어붙은 물이 쩡쩡 장독을 깨뜨리는 무서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가야라고 부른다
도라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대청 위 할머니도 손녀도 감자를 담던 사기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주련의 글귀도 사라지고
먼지가 뿌연 마루 위를
도라지꽃들이 바라보고 있다
저녁의 꽃 냄새 / 곽재구
국경 강마을
저물녘 꽃 냄새 물큰하여라
어릴 적 우리 동네 물가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지
동무들 모여 꽃 내음 속에서 말뚝박기하는데
봉숭아빛 불 켜진 조선족 민가에서
엄마 목소리 들리네
웬수야 저녁 먹어라
아들은 강변 갈숲에 앉아
BTS 듣느라 정신없는데
유람선 타고 마실하는 남녘 사람들
비닐봉지에 쪼코파이랑 치약이랑 USB 넣어
강 건너 북녘땅으로 던진다네
개망나니 아베와 시진핑과 트럼프가 함께 악머구리 춤추며
8천만 한반도 들들 볶는데
강변 국경 마을은 저녁 이슬 내려
알전구 불빛들 촉촉하고
물큰한 꽃향기 속 다급한 엄마 목소리 들리네
웬수야 저녁 먹어라
내 웬수야 저녁 먹어라
모과꽃 지는 봄 / 권대웅
저녁의 고요가 나뭇가지 사이로 스민다
적막을 들킬까봐 꼼짝 않던 꽃들이
빗소리에 화들짝 불을 켜자
분홍불 꽃 속으로 들어간 발자국이 보인다
그 사내 빗방울로 걸어와서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은
그 여자 손목 붙들고 들어간
꼿 속으로 구름이 흐르고
수많은 봄이 지나가고
봄비 내리는 저녁이면
어느 알 수 없는 먼 공간에 불이 켜진다
꽃잎은 지고 있는데
빗줄기를 붙잡고 올라간 방
어느 해인가
적막이 더 환해
고요의 희미한 빛에 세 들어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
화무십일홍 / 권대웅
마당 한구석. 윤기 나고 탄력 있는 피부로 자라던 옥잠화 넓은 잎사귀 속에서 쪽찐 머리에 꽂은 옥비녀 같은 꽃이 피었다. 어느 집 규수였을까. 옥잠화 몸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그윽하여 아침마다 모두머리 단장하고 있는 꽃방. 두근거리며 훔쳐보던 그녀의 흰 뒷목. 지난겨울 담장 아래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해바라기가 피어올라와 물끄러미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깜짝 놀라 커튼을 쳤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볼이 두툼한 여자 같았다.
아침마다 나팔꽃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들.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꾀어내듯 휙휙 휘파람을 불며 허공으로 뻗어가던 넝쿨들, 낭창낭창하던 것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칠 년 만에 땅 속에서 나와 7일만 살면서 오직 사랑을 찾기 위해 울던 매미. 당신은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을 만났는가.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여름의 눈사람처럼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홍도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꽃에 대하여 / 권선희
칠칠에 사십구
여자 나이 마흔 아홉이믄 말이요
길바닥에 내뻔져놔도 아무도 안 줍어 갈 나인기라요
팔팔에 육십 사
남자 나이 예순 넷캉 같은 기지요
무신소리 하노
내 아는 찬모는 올개 예순 셋인데 애인이 예순 다섯인기라
그란데 마 이틀만 연애로 안하믄
온몸띠에 좀이 쑤시고 열이 화득화득 난다카드라
아고 그기 귀신들이재 사램잉교
뭐시 볼끼 있겠능교
택또 읎는 소리 마소
이보게 동상
삭신이 옥신옥신 한다카믄 하마 오십이요
새북에 비실비실 한다카믄 그기 육십 줄 넘는기고
마눌이 불쌍해지믄 그기 칠십인기라
니가 우예 세월이라카는 기를 알겠노
행님요
벌레벌레 하믄 다 꽃잉교
말씨 솜씨 맴씨 쫀득쫀득하니
찰떡맨키로 찰기가 있어야 그기 꽃이지요
아고 이 답답은 자슥아
세월이 다 데불고 가는 거로 안즉도 모리나
개떡 아니라 찰떡도 세월 앞에서는 심이 읎다
늙으믄 늙은 것들끼리 살포시 눈 맞아가
맴이라도 몸처럼 부비고 살라꼬
조물주가 다 맹글어 놨으이
젊은 니는 쓸담읎는 꽃타령 말고 술이나 퍼묵그라
부추꽃 피던 날 / 권애숙(1954~ )
별 아닌 것들이 별에 기대
별의 흉내를 내는 동안
세상 언저리 어떤 얼룩은
지독한 꽃무늬 심장을 만든다
접히고 접혀서 중심을 알아차린
밤의 깊은 울음으로
제 빛깔의 각을 잡는다
뒤척거리는 너와 나 사이 하얗게
솟아난 지상의 작은 별무리
어떻게 우리는 저 매운 안쪽에 다다를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권혁웅
장마가 들어올린 벽지에 도마뱀이 숨어 있었다
난 네가 흘린 얼룩이야, 습기가 꼬물꼬물
정충들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이 버린 도마뱀이에요,
정충들이 없는 입을 모아 말했다
팔베개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백지 아래 흐르는 실개천은 어느 것이 더 가려울까?
추억은 몸의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폐허를 증거하듯 중언부언이 찾아왔다
도마뱀은 이동할 때에는 폐가 눌려 숨을 멈춘다지?
조그셔틀 돌릴 때처럼
빠르게 걷고 멈춰서 숨 쉬고 다시 걷고
어린 시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급히 고개 돌리듯
언뜻 벽지가 숨 쉬는 것을 본 듯도 하다
도마뱀은 지금 벽지 위의 꽃을 흉내 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너는 화花라고 꽃이라고
어떻게 두 번씩이나 발음했니? 어쩌면 네게도
다 피우지 못한 참화가 있었던 거니?
그것도 꽃이라고 너는
달아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8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형
나무가 자궁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읽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번도 밥을 함께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꽃 이름을 물었네 / 길상호 (1973~ )
이건 무슨 꽃이야?
꽃 이름을 물으면
엄마는 내 손바닥에 구멍을 파고
꽃씨를 하나씩 묻어 주었네
봄맞이꽃, 달개비, 고마리, 각시붓꽃, 쑥부쟁이
그러나 계절이 몇 번씩 지나고 나도
손에선 꽃 한 송이 피지 않았네
지문을 다 갈아엎고 싶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다시 꽃 이름을 물어오네
그제야 다 시든 꽃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그 이름이 궁금했네
엄마는 무슨 꽃이야?
그녀는 젖은 눈동자 하나를 또
나의 손에 꼭 쥐어주었네
꽃 지는 날엔 / 김경미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20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20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곤두서네
비 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기로 하지만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후회가 많아서 운다
세상 살면서 가장 쓸모 있는 건
뉘우침뿐이라고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언어의 꽃 / 김경수
노래를 가지러 산으로 간다.
꽃의 도감에서 걸어나온
패랭이꽃, 꽃창포, 벌노랑이, 금낭화, 코스모스가
허리를 펴고 풍경을 바라본다.
언어들이 꽃으로 피어나도록
삽으로 땅을 파서 언어의 씨를 심는다.
더운 여름의 땅에 물을 준다.
어렵게 하나의 코스모스가 피어났다.
노래가 흘러내렸다.
빈 그릇에 노래를 담는다.
언어에서 향기가 났다.
원래 꽃은 없었고 꽃은 있었다.
고요는 있지만 마음은 없을 수도 있다.
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것을 누가 노래라고 했을까?
색깔의 침묵이라고 하자.
빛의 발자국 소리라고 하자.
이미 노래는 내 손바닥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길 잃은 새가 내 손바닥에 앉아 노래를 쪼아 먹고 있다.
꽃이 피어나는 구름 / 김경수
구름이 자라면 물고기가 될까.
그러면 하늘에도 물고기가 유영遊泳하고 비가 오면 간혹 땅으로
파닥이는 물고기가 떨어질까.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의 작은 창문을 통해 구름 속에 숨은 물고기를 찾는다.
구름이 자라면 아침에는 꽃잎을 활짝 여는 연꽃이 될까.
흙탕물 속에서도 깨끗하고 각진 음音이 되어 미소를 짓는 신비로움이
따뜻한 이야기가 되고
풀잎 위에 투명한 진주 같은 이슬을 만드는 표면장력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나게 한다.
이슬 속에 내가 있고 내 가슴 속에 이슬이 산다.
구름이 목적지가 없이 흐른다.
비행기가 구름을 끌고 하늘 그 푸른 피부에 길게 선을 긋는다.
구름 속에서 길을 잃는다.
구름을 계속 헤치고 나아가면 천년왕국에 이르는 문을 찾을 수 있을까
구름 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아 헤맨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붉은 철쭉나무꽃들이 지상을 장식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고기처럼 파닥이고 있고
아파트 단지 안의 분수 속에서는
해를 등진 채 등을 구부리고 무지개가 태어난다.
구름의 폐활량을 늘이면 아코디언이 될까.
폐활량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자기 스스로 가요를 연주하면서
지상으로 신나는 음音을 금화처럼 떨어뜨리며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신발을 신고 지상으로 내려올까.
수제비처럼 뜯겨져 나와 하늘에 던져진 저 작은 구름들은
흰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날아다닐까.
이 세상의 넓은 그늘을 안고 구름이 흘러간다.
구름이 저만치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에는 그 면적만큼의 웃음이 남을 수 잇을까.
구름 위에서 지상의 각종 색깔의 꽃들이 피어난다.
노란색으로 파마를 한 구름이 흘러간다.
분홍색 가슴을 드러낸 구름이 굴러간다.
파란색 지느러미를 단 구름도 헤엄쳐간다.
찔레꽃 아버지 / 김경애
느그 아부지는 학교 댕길 때
공부는 잘했다는디
할 줄 아는 것이 암껏도 없시야
마늘, 양파 밭에 농약 치면서
줄도 제대로 못 잡는다고 화가 난 엄마
딸딸거리는 경운기 몰고 가면서
경운기 시동도 못 거는 양반이라고 흉을 본다
마늘 뽑다가 <동물의 왕국> 본다며
찔레꽃 한 아름 꺾어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는 아버지
내 원수, 사자, 속창시 없는 인간이라고
엄마는 오후 햇살에 대고 말을 한다
한동안 찔레꽃 향기 가득한 방안
무담시 순해지는 성명자 씨
꽃을 / 김경인
꽃을 주세요*
흔들리는 창문을 위해
흰 꽃을 주세요
창문을 그을리며 타오르는 촛불을 위해
꽃더러 보라고
서투른 화가의 자화상을 단숨에 잘라내는 가위의 반짝이는 살기를
흰 꽃더러 보라고
화가의 붓끝에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똑똑 떨어지는 물감의 슬픔을
꽃을 던지세요
검은 계단을 내려가 더 검은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다다른 초록빛 철문 앞에
흰 꽃을 던지세요
더 검은 모퉁이 끝 계단에 앉아 비로소 떠올리는 초록빛 철문의 기억 앞에
초록 철문 앞에서 망설이며 뒤돌아서는 늙은 그림자에게
마치 꽃이라는 듯
안개 속에서만 떠들 줄 아는 물병의 닫히지 않는 마개에게
흰 꽃 아닌 건 모두 잊었다는 듯
그 해 여름, 빨강과 초록이 내민 힘겨운 악수를 위해
꽃을 향해 달려가는 꽃처럼,
여름을 반성하는 영원한 여름을 위해
꽃을 향해 달려가 마침내 사라지는 그 꽃처럼,
심장인 줄만 알고 입 맞추던 너의 차가운 두 발에
기쁨의 첫 페이지에서 흘러내려 귀갓길을 적시는 피 위에
흰 꽃을,
깨어진 거울 앞에서 가장 또렷해지는 절망의 이목구비에게
거울을 꿈꾸다 꿈속의 거울에 갇힌 물고기에게
꽃을,
집을 삼킨 채 비로소 잠잠해진 얼굴에게
얼굴 밖으로 흘러나와 다시 떠들기 시작하는 집 앞에
흰 꽃을,
흉터 위로 또 엎질러지는 끓는 주전자에게
주전자가 몸에 그려준 어여쁜 새 지도에게
보랏빛 바이올렛은 말고
밤물결로 파도치는 나의 심장에게
새빨간 맨드라미는 더 말고
꽃을,
같은 고백을 여러 번 늘어놓은 모노드라마가 끝나듯
내 안의 세계가 문득, 자전을 멈출 때
어둠 속에서 먼지처럼 풀썩거리며 날아오르는 질문들의 빛나는 이마에
흰 꽃을,
칼의 꽃 / 김기덕
생의 반쪽들이 갈고리에 걸려 물구나무를 섰다
0을 가리키는 기울기의 눈금엔
잘려진 시간이 핏물로 고여 있었다
칼을 맞고 일어서는 냉동의 살들,
해체의 의미 속엔 뼈도 눈물도 없었다
세월의 등살에 새겨진 물결무늬는 하루가 풍랑이고 폭풍이었다
푸른 도장을 받기 위해 문자와 글자들의
건초더미를 되씹던 언어의 사체에서 한 근의 채끝살을 바르기 위해
살아서 고뇌 중인데,
죽은 자의 칼이 산자의 살을 바른다
광란의 바람이 이는 ㄱㄴㄷㄹ
소가 환전된 금고를 열면 목 쉰 방울소리가 울렸지
벌판에서 울부짖던 메아리들만 뼈 속을 맴돌았다
난도질 할수록 부드러운 칼의 속삭임
현란한 혀의 놀림에 상처는 깊었다
무덤 속 벌레들의 섬뜩한 미소 같은 하늘을 품고
되새김질 해온 말씀들이 일어나 칼춤을 춘다
헝겊처럼 얇게 썰어지며 리듬을 탄다
해의 시즙이 묻어나는 언덕 위로 밤새 뚝, 뚝 떨어진 꽃무늬들
이글거리는 불꽃 속으로 눈송이들이 몸을 던진다
꽃의 절벽 / 김길나
계단은 언제나 지층 넘어 지하로 내려간다
어둠이 생산해 낸 뿌리가 어둠을 파고드는 곳 거기,
녹은 살이 술처럼 익어 생체로 흘러가는 곳 거기,
생과 사의 사랑 법을 구근이 자동 기술 중인 그곳에서
푸른 길이 올라왔다
거친 경계를 통과한 물이 뇌성으로 치솟았다
당신은 이 곧추서는 줄기를 생의 척추라 했다
기둥이라 했다
그날 이후, 내 척추 뼈에서 이파리가 돋아났다
고층으로 올라온 식물언어학자가 초록 어원을 캐낸
이파리를 들고 잇몸을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탐미를 수호하는 식물언어학자는 초록을 넘지 못한 나를
넘어 네게로 갔다 그리고
초록에서 붉고 노란 글자를 꺼내어 너를 읽어버렸다 꽃이라고,
꽃의 높이에서 너는 실재로 꽃이 되어 피어났다
식물언어학자가 꽃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내부를 외경화해 꽃이 된 꽃의 고백을 받아 적고 있다
절정에서 추락이 완성되는 비장한 절벽을,
황홀한 꽃의 살의를 꽃의 언어로 써 내려가고 있다
꽃이라 불린 네가 고층에서 투신하던 날
식물언어학자는 시집을 들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자결을 숙명으로 태어난 꽃의 투신!
이제, 꽃의 절정과 꽃의 자결은 꽃이 지닌 양 칼날이다
씬냉이꽃 / 김달진(1907∼1989)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꽃의 재발견 / 김 륭
새봄, 누군가 또 이사를 간다
재개발지구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야 코딱지 후비며 고층아파트로 우뚝 서겠지만
개발될 수 없는 가난을 짊어진 양지전파상 金만복씨도 떠나고
흠흠 낡은 가죽소파 하나 버려져 있다
좀더 평수 넓은 집을 궁리하던 궁둥이들이 깨진 화분처럼 올려져 있다
자본주의경제의 작은 밑거름도 될 수 없는 똥 덩어리들
꽃을 먹여 살리는 건 밥이 아니라 똥이어서
공중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머리띠 동여매고 뭉개진 발자국들이
궁둥이 두들겨 꽃을 뱉어낸 거지
언제부터일까 버리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
푹신푹신했던 소파가죽 찢어발기고
툭, 튀어나온 스프링
누군가 버림받은 곳에서만
꽃은 핀다
슬픔이 꽃접시에 담겨 / 김도연
휘영청 보름달 밝은 날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수직으로 벽을 타고 서까래를 오르내린다
느릿느릿 급할 것 하나 없다는 표정
온몸을 밀고 천장에서 지붕으로 그리고 어느새 뒤뜰로
평지에서는 돌연 고개 바짝 쳐들고
공격적인 자세
달빛에 핀 엘레지 꽃을 휩쓸어버릴 태세다
가파른 벽면에 배를 밀착시키다가 최대한 몸을 꼬아
꽈리 트는 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듯 근엄하다
담벼락을 기어오르다가 몸뚱이 길게 늘이면 점잖아지지만
이내 꼿꼿이 몸을 도사려
환상처럼 어여쁜 엘레지 꽃 앞에 멈춘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슬픔도 꽃접시에 담겨 아름다운 법
달의 뒤뜰에 쉼표를 찍고
꽃 한 송이 탐스럽게 가꾸고 싶다
꽃과 별을 기록하는 밥의 생산성 / 김 륭
우는 아이의 입을 무덤으로 틀어막는다.
여자는 아이의 피를 거꾸로 세운다.
울음을 그쳤다, 꽃잎 속으로 파고드는
말벌처럼 아이는 몸을 오그린다.
둥근 울음 바깥으로 불쑥불쑥 팔다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여자가 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숟가락으로 아이의 눈을 파고 울음을 퍼낸다.
목이 멘다, 뱀과 눈을 딱 마주친
개구리처럼 아이는 밥을 먹다 말고 빤히
여자를 쳐다본다.
뱀의 혓바닥으로 목을 휘감은 아이는
몸을 움칠움칠 쉴 새 없이
이빨을 만들어낸다.
마침내 여자는 아이에게 숟가락을 건넨다.
아이가 우두커니 여자를 올려다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쳐다보듯
신기한 얼굴로 쏘아대는 눈빛 가득 피어오르는
연기, 아이는 숟가락을 불끈
몽둥이처럼 움켜쥔다.
아이가 여자를 두들겨 팬다. 젖무덤이
퉁퉁 불어터지도록 여자가 운다.
아이는 여자의 피로 영역을 표시한 다음
꽃으로 여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뼛속 깊숙이 밥물이 스민
여자의 목덜미 위로 뾰족 솟구치는
별, 아이에게 여자는 아무래도
너무 질기다.
봄이 모르는 꽃을 신고 / 김 륭
아홉 살 꼬마아가씨가
검정고무신에 꽃을 그려 넣고
나타난다.
예쁘다, 그러니까
예쁘죠? 한다.
봄이 아는 꽃들
바람 꼭 붙들고 볼볼
떨고 있다.
대나무 꽃 / 김명리
장독대 옆의 대나무 두 그루
빗물에 쓸리며 흔덕이며
해 지는 방향으로 이파리를 날리고 있다
아버지 어느덧 돌아가시고
어머니 자꾸만 그쪽으로 돌아누우시고
하필이면 이런 날 비 오는 날
오이지 담그느라
누름돌 삶고 소금물 끓인다
빗물 소금물 눈물, 눈물 빗물 소금물
오는 비 다 맞으며
쥐어박힌 듯이 우는 멧비둘기 울음소리 듣는데
어떤 슬픔은 그 봉우리가 너무 높아서
정상에 다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
이내 자욱한 앞산 산마루는
초저녁부터 어디로 숨었는지
장맛비에 들까부는 댓잎들 사이사이
수천 낱 연무로 희부옇게
보일 듯 말 듯 꽃 피우는 저기 저 대꽃 망울들!
우리나라 꽃들엔 / 김명수 (1945~)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꽃들 / 김명인
낮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꽃소식이 당도해 있다
만선에 실려 오는 꽃나무 한 시절들
그대가 약속을 지키려 근근하듯이
꽃은 제철의 두근거림으로 한 해를 갱신한다
상청 이불 덮고 누웠으니
어디서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한낮
꽃 타래들, 다비에 든 듯 화염 사르는구나!
공손한 꽃아, 피고 지는 건
네 일이지만 나는 너를 빌려 쓰고 내일로 간다
연년 세세로 물든 분홍 새 날개 펴니
거처 없이도 견디는 깃발처럼
혼곤한 신생의 새봄 안간힘으로 울뚝하다
오늘은 오늘 꽃, 수만 송이로 허무는 탑
버림받을 사랑이니 돌보라고
이 환(幻), 나에게 흘려보내는 건 아니겠지?
*울뚝하다:성미가 급하여 참지 못하고 말이나 행동이 우악스럽다(옮기면서).
꽃나무와 아이들 / 김밝은
—이중섭
근심만 올라앉은 어깨를 정오의 그림자가 툭툭 치며 간다 새들의 잔소리가 많아졌다 조금 더 견뎌야 한다
사는 일은 여전히 절벽 앞이다 대문 여닫는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멀리 있는 얼굴들을 허공에 그리면 귤꽃 향기가 났다
보드라운 숨결이 얹어진 그리움을 그리다 더 가난해진 손을 뻗으면 비웃기라도 하듯 세찬 비를 퍼붓고 손바닥만한 은지를 펴다가 퉁퉁 부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바다는 여전히 깊고 아득해서 또 서러웠다
절대적이고 적대적인 세상의 벽 앞에서도 꿈꾸듯 귤나무에 꽃이 피고 손끝에서 아이들은 알몸으로 재잘재잘 오르내린다
만질 수 없는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어 억장이 무너질 때,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향해 꽃향기 날아오른다 뛰어내린다
그토록 다정했던 한 평 반²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더 그리워하며,
1) 이중섭의 그림 제목.
2) 이중섭이 1년여 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제주의 방 크기.
춤추는 꽃의 밀담 / 김사람
허공을 마주하고 얘기하면
나의 말들이
이빨 없는 입술을 만들곤 했다
형상 있는 존재들의 움직임은 왜 그리 여린지
허리 가는 여자
음악이 그녀를 만졌다
나는 죽어
현재를 농락하는 음악이 되었던 적이 있다
영혼의 실체는 음
악기는 영혼의 집
피가 고독한 사람은 영혼을 불러내곤 한다
지금 여기, 나는 살아서
밥을 먹고 구슬을 뱉고
커피를 마시고 꽃을 토하고
이웃집 신혼부부의 교성을 들으며
오래된 별자리를 찾는다
허리 가는 여자의 눈에서
음악이
글썽거렸다
꽃 / 김사인(1955∼ )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옛집 마당에 꽃피다 / 김선태(1960~ )
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민 것인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식구들 웃음소리 들린다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
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꽃들의 전쟁 / 김선태
봄 산에 전쟁이 터졌다
산벚꽃들이 사방팔방에서 펑펑펑 포탄을 쏘아 대자
진달래들이 화염방사기로 화르르 불을 놓으며 일제히 산을 기어오른다
쫓기던 리 노랗게 연막탄을 쏘며 뒷산 너머로 달아나고
부상당한 동백꽃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나뒹굴고 있다
바햐흐로 봄 산은 치열한 교전 중
머잖아 초록이 고지를 점령할 것이다
라일락 꽃 속의 연인들 / 김송이
누가 우주에서 이쪽을 향해 손전등을 켜고 있어
늪으로 푹푹 쏟아지는 빛에 등을 맞댄 채 우리는 젖지도 않고 익사를 맹세했네
그럴 때 우리, 헐렁한 서로의 옷에 핀을 찌르며 웃었지 바짝바짝 꽃이 튀네 붉은 라일락이
맨 등을 문지르고 우리가 뒤집힌 낙하산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빨래줄에 달랑 널어놓은 속옷처럼 들키고 싶었네 배 위로 물뿌리개가 지나는 동안 어둠이 수평선에 휘발유를 부으며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섬은 점점 솟아오르며 멀어져가지 사다리로부터 층계로부터
라일락, 라일락, 빵처럼 부풀던 둥근 밤에
꽃이 친척이다 / 김승희
오늘
시계 없는 시간이 파란 하늘로 흐를 때
뻐꾸기시계 소리가 새 달력 위로 쏟아질 때
초침이 머리칼을 지나 침대 아래로 녹아 떨어질 때
배가 새고 있어요
종잡을 수 없는 부르짖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 때
절벽 위에 핀 꽃들이 경련하며 쏟아질 때
종잡을 수 없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종잡을 수 없게 숲을 흔들어놓고 사라질 때
그 종다리 소리에 피가 뛸 때
갑자기 꽃이 혈연이라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종다리 노랫소리가
땅도 시내도 나무도 산도 쪽빛 바다 갈대숲도
다 흔들어놓을 때
저녁에 산 너머로 뚝뚝 떨어지는 해도
그래, 죽음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가
하늘도 구름도 땅도 바람도 아카시아 라일락 향기도
혈연보다 가까운 나의 일부
꽃이 친척이다, 느껴질 때
종잡을 수 없는 죽음은 종잡을 수 없게 가까이 와 있다
개나리꽃의 일기 / 김승희
최진실의 묘소 근처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최진실은 일기를 쓰던 사람이었다
장미가 피어나던 시간에
장마가 지나가던 시간에
천둥 번개가 지나가던 시간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서 비에 젖어 울고 있던 시간에
머리카락을 말리는 시간에
눈에 별이 반짝이던 사람
이처럼 애틋한 생명
빛을 발하는 기쁨
눈에 기쁨의 빛이 흐트러지고 조각조각 빛났다
일기를 쓰던 사람은 책을 읽던 사람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불편했던 여자
피와 살과 신경이 그렇게 살아있던 여자
그녀는 죽었고 또 살았다
아이들은 그녀의 지푸라기
우울한 날에는 매운 고추장 수제비를 펄펄 끓여서 먹었다네
인생,
누군가 했던 말,
얼굴 속에 꽉 찬 들판이 있었는데 뭐가 있는 줄 알고 바라보았는데
텅 빈 벌판만 있고 아무것도 없어서
얼굴 속에 텅 빈 바람만 들고 가는 길
아무것도 없어도 개나리꽃을 들고 헌화를 놓는 두 손
속에 뼈가 있는 파란 사과
열무꽃 / 김신용
‘만일 열무꽃을 보았다면 처녀 불알도 보았으리’*라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는, 유월 아침이다
밭에 나가니, 하얀 열무꽃이
흰 꽃잎의 테두리에 엷은 보랏빛이 번져 있는, 조그만
열무꽃이, 섬광처럼 피어 있다
열무는 ‘어린 무’여서 꽃이 필 수 없다는, 열무
만일 꽃이 피었다면 손에 장을 지질 일이라는, 열무꽃
그 열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손가락만한, 어린 무처럼 생긴 빈약한 뿌리를 매달고
저리도 애잔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열무라는 채소의 종種이 따로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단순히, 어린 무라고 판단한 사전적 지식이 놓친 열무꽃을 보는 것은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열무는 자신의 부드러움을 지우고
줄기에 질긴 심을 채우는, 열무의 생을 보는 것만큼이나 안쓰러워
생각느니,
우리는 어린 열무의 잎과 줄기를 먹기 위해, 열무가 꽃을 피우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하지만
열무의 바램은, 자신의 부드러운 줄기에 질긴 심을 채워
꽃을 얻어
씨를 영글게 하는 것이거니
보라,
열무라는 어감 속에 짙게 배어 있는 초록의 열망을, 그 강한 母胎를—.
지금 밭에는, 장터에서 구해온 씨앗으로 심은 열무가, 꼿꼿이 꽃대를 세우고
조그마한, 찰나의 섬광 같은 꽃을 하얗게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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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수첩》창간호에 발표된 「詩詩非非」에서.
꽃의 타클라마칸 / 김신용
저곳이,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쓰러져 천년을 견딘다는
나무들의 숲이었다니!
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보고 싶구나
가서, 바람의 목관(木棺)처럼 누워 흐르는 나무들을 보고 싶구나
수천 년 전에는 강물이 흐르고, 초원의 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던 곳, 지금은 푸른 숲과 강과
한때 번성했던 마을의 집들은 사라지고
목비(木碑) 같은, 사람이 살았던 표지(標識) 같은 나무 기둥들만 꽂혀 있는, 모래언덕의 무덤들만 남아 있는 곳
저 사막에 가서, 모래 무덤에 묻힌 목관 하나를 안고 싶구나
이 사막이 숲과 강으로 푸르렀을 적, 강에 띄운 배의 모양을 한 목관
그 목관 속에 지금까지 누워 있는, 속눈썹이 살아 있는 듯 긴
콧날이 유난히 오똑한, 여인 곁에 누워보고 싶구나
누워, 그 인체의 지문을 몸에 새겨보고 싶구나
저 선형(船形)의 관을 만들어 모래의 강에 띄운 사람들의 숨결은
여인의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 속에 썩지 않고 남아 있는 밀의 씨앗처럼
사막의 모래바람에도 묻어 있어, 바람의
목관(木管)에서 흘러나오는 음률은, 그 인체의 눈빛 같아 호흡 같아
오늘은, 저 배의 목관에 누워 모래의 강을 흘러보고 싶구나
모래 위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쓰러져 천년을 견디는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