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8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아담 안에서 눈을 떴으나 속히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망을 가져오는 육신의 생각은 주의 보혈로 막아주시고 생명과 평안을 주는 영의 생각으로 나를 이끄소서.
혹여 육신을 즐겁게 하려는 땅의 지체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 그리고 탐심에 속한 우상숭배는 옛 사람으로 행하는 것들이오니 이 시간 주의 십자가에 다 못 박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서 나의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주의 보혈만 드러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종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저어되오니 이 종을 주의 손으로 장악하여 주옵소서.
날씨가 무척이나 덥습니다.
오늘 이사하는 장로님 권사님을 지켜주시고 무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어느 곳에 있든지 삶의 예배로 주 앞에 서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상황에 지배 받지 않게 하시고 넉넉히 주님 안에서 상황을 초월하여 승리하는 예배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20:12-21
제목 :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1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을 맞은 히스기야의 마음에 교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신들에게 자기의 부함과 유다의 강함을 자랑하였다.
역대하 32:31절에서는 바벨론 사신들이 히스기야를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떠나셨다고 말씀한다.
(대하 32:31)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물론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신 것은 다름 아니라 그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것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부와 귀 곧 받은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험에 실패하고 만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히스기야가 교만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다.
즉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것이며 왕에게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심판을 선포한다.
그 때 히스기야는 그 심판을 ‘옳습니다’ 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자신의 교만과 잘못을 그가 깨닫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19절)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말이다.
(19b)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이 말을 쉬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하였다.
(19b)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에는 평화와 안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당대에는 임하지 않고 후대에 임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안심하는 히스기야의 이기적인 마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도 신학적 해석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죽음에 대한 위기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19절 하반절의 말을 고백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히스기야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리고 그동안 히스기야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생명 연장, 부와 귀를 부어 주신 것 등등)에 대하여 시험하시려고 그를 떠났으며 그 시험에 히스기야는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사야를 보내서 심판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 심판의 선언 앞에서 히스기야는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은 옳습니다’ 하고 받아들인다.
심판의 수용 앞에 하나님은 그 심판을 가리켜 지금은 아니고 잠시 유보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때 히스기야가 19절 하반절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의역하면 이렇다.
“내가 지금 심판을 당하는 것도 지극히 옳습니다. 그런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는 평화와 안정을 주신다고 하시니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히스기야는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위대함이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다윗은 자신의 군대가 강함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요압에게 군대의 숫자를 셀 것을 명한다.
요압이 세지 말 것을 간곡히 요청하나 다윗은 지체없이 계수하라고 하면서 채근한다.
다윗은 지금까지 한 번도 군대의 숫자로 싸우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군대 숫자의 많고 적음, 강하고 약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웠고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군대 숫자의 많음을 든든함으로 여기는 교만 곧 자기 의가 그 안에 자리한 것이다.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어 세 가지 심판 중 한 가지를 택할 것을 명하신다.
이 때 다윗은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선택권을 하나님께 넘긴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심판 중 가장 강력한 심판을 택하신다.
그것은 3일 동안에 전염병을 통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을 전멸하시는 심판이다.
이 심판은 지체 없이 신속하게 임한다.
한 번 내리신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어나갔다.
이것을 본 다윗이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한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어찌하여 백성을 치시느냐고, 제발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시고 자신과 내 아버지 집을 쳐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다.
그 제사는 곧 심판의 제사이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기에 백성이 진멸될 때까지 전염병의 심판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네가 심판의 제사를 드리면 내가 그것을 그 생명 대신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은 값을 주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산 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대상 22: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성전은 심판이 임한 자리에 세워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끊어졌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그 심판을 받아들일 때 의가 세워지며 그곳에 하나님과 함께할 성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그 성소에서 주님과 깊은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화평이 다시 회복된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결국 성전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세워진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하여 죄의 자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 심판은 옳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내게 심판을 내리셨다.
그 심판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옳습니다’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 심판을 피하거나 해결하려고 몸부림 쳤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해결해 달라고 울며 부르짖었다.
이처럼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던 자였다.
정말 부끄럽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일 때 그 심판은 나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무덤에 와 계시는 주님께서 함께 져주신다.
심판의 자리인 무덤 속에 나를 초청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나와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한 성소를 짓기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말씀 앞으로 나아가 거기에 머무르면 된다.
말씀이신 주님이 나를 끌어 안아주시며 주님이 거하실 성소를 지어주신다.
심판을 통하여 의를 세우시고 성전을 지으셔서 그곳에서 평강을 회복해 주시는 주님은 나의 복음이요 또한 생명이다.
나는 나에게 복음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믿는다.
그 분이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원하셨으니 이제 나는 주의 것이다.
내 안에 주께서 사신다.
나는 나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나의 옛 사람과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기주장의지는 못 박아 죽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심판은 어떤 것이라도 항상 옳습니다.
그 진리를 알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나이다.
알지 못하였기에 혼미하며 항상 흔들렸나이다.
주님의 심판은 진멸이 아니라 살리고 회복시키는 징계입니다.
이는 암 환자를 의사가 수술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의사되신 주께서 내가 주를 떠나가는 암에 걸리거든 언제든지 징계의 수술대 위에 눕혀주소서.
종이 달게 받겠나이다.
주의 심판은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내가 남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면서 나는 목이 말라 구원에서 멀어지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을 주소서.
그 샘물이 솟아나는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를 항상 바라보며 그 나라를 살게 하소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도 주의 은혜만을 사모합니다.
은혜의 소낙비를 부어주소서.
그러면 내 영혼이 살겠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