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학자이자 천부적인 문장가,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은 일찍이 경서와 역사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고, 천문 지리와 병법, 농업,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부로 19세 때 벌써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박지원의 일생에 일대 전기가 된 것은 사신의 수행원으로 청에 다녀온 후였다.
그의 책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이다.^^^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하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의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네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하게 하지 못하였소."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하시나요?"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소?"
"그럼 장사는 못하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찌 하오?"
그러자 악에 받친 아낙네가 버락 소리를 질렀다.
"밤낮으로 글만 읽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어떻게 하겠소?'만 배웠단 말씀이요?
장인바치 일도 못한다, 장사도 못한다, 그럼 도둑질이라도 못한단 말씀이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칠 년인 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서도 서로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雲從街)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서울 성 중에서 누가 제일 부자요?"
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장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만 냥을 꾸어 주실 수 있겠소?"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나자빠졌으며, 꾸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조르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 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평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루 아침에 덥썩 만 냥을 그저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요?"
변씨가 대답하였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구구히 늘어놓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얼굴 빛이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행색은 허술하나 말이 자신에 차 있고, 눈빛도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줄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하겠느냐?"
허생은 만 냥을 받고서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한 걸음에 내달렸다.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濟州道)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망건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 중략 -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 냥이 남았다. 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변씨를 만났다.
"나를 알아보시겠소?"
변씨가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 냥을 실패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재물에 의해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 냥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겠소?"
허생은 십만 냥을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 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 냥을 빌렸던게 부끄럽소."
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며 사양하였다. 만 냥에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하였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우물터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고 변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초가가 누구의 집이오?"
"허생원 댁이지요.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지냅지요."
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무엇 때문에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져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의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갔다.
어느 날, 변씨는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허생이 대답하였다.
"그야 가장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천 냥은 적은 돈이라 한 가지 물종(物種)을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면 백냥이 열이라, 또한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물건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 가지 물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利)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장사치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 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며,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될 것이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후략 -
이는 곧 당시의 집권층인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무능을 이야기한 것이며, 실학자 박지원이 구상한 부국강병책을 소설로 나타낸 것이었다.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사회 개조를 위한 이상과 실천 가능한 방법을 예시했던 것이다. 양반계층을 신랄하게 풍자한 '양반전'도 빼놓을 수 없다.
환곡을 1천 석이나 얻어먹고 갚지 못해 투옥될 지경에 몰린 양반이 그 고을 사또의 주선으로 ....
*** 사평35" 문형철님' 게시글"
* 글이 길어 도중/끊기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