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 Lust
여자나이 스무살... 꽃다운 시절
봉우리가 맺히고 꽃은 피기시작 했지만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중국을 떠나
홍콩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연극을 시작하면서
그 젊은 날
첫사랑과 애국이라는 양면의 칼을 쥐고
세상 속으로 풍덩 발걸음을 들여놓는다.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끝에 죽여버리는
친일파 '개같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여자가 되어야 하는 왕치아즈...
애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건널목에서
그녀는 아쉬움도 없는 서러운 마음으로
하룻밤에 처녀막을 싹뚝 제거하고
건조한 부부생활을 익힌다.
그리고
암살 목적으로
매국노인 그 남자를 유혹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자신도 알지못하는 어떤 힘으로
그를 사로잡는 페로몬을 발산한다.
악날한 친일파 매국노는
심술이 줄줄이 늘어진 불독같은 모습일거라 상상했지만
의외로 그는 예의바르고 핸섬하며 그 깊은 눈매에는 외로움의 빛이 가득하다.
의무적으로 치뤄야하는 그와의 정사
짐승처럼 거칠게 파고드는 그의 몸짓
상처받은 외로운 영혼이 자신의 따스한 자궁 속에서 둥지를 튼다.
수없이 많은 목숨을 죽이고야 살아남은 잔인한 생명체가
한 순간 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숨어들어 평안을 구한다.
암살이라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연극 속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듬어 주는
한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戒, Caution
더러운 이 세상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들숨에 살아남고
날숨에 죽어버리는
이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하루에도 수 십번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그에게 맘에드는 여자를 소유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은밀한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그녀와의 정사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국노
일본놈의 문전을 지키기 위해 동족을 죽이는 개와 같은 존재
그러나 적과 동지의 확실한 경계가 없는 살얼음판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언제 당할지 모르는 암살의 공포 속에서 몸을 사려야 한다.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되며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섹스는
치열한 삶의 표본이자 전쟁터이며
살아남고자하는 강한 의지인 동시에
지긋지긋한 현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고 싶은 망각의 늪이기도 하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치사량에 가까운 고독의 몸부림이
그녀의 몸 안에서 녹아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잠시
아주 잠시 안도의 숨을 내 쉬면서
그는 자신이 지켜야할 엄격한 경계의 줄을 무심히 놓아버린다.
그러나 정작 지켜야할 계戒, Caution 를 놓아버린 것은
이제 스무살 애송이 그녀이다.
마약처럼 몽롱하게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은
이겨낼 수 있었다.
여심을 사로잡은 빛나는 6캐럿 다이아몬드 앞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이 끔찍하지만
그래도 그 남자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마...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는
한 마디에
순결의 댓가와
동기생과의 풋풋한 첫사랑
그리고 끓는 젊은 피가 토해낸 선홍색 애국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해
꽃다운 젊은 날
마땅히 아름다워야 할 생을 마감하는 그녀...
'날 기다리게 하다니... 이건 고문이야...'
그녀와의 은밀한 만남을 기다리던 남자가 내 던진 별 의미없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지독하게 살아 남은 남자에게 슬픈 현실이 되고 만다.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은
냉혈한 그에게 있어
고문 그 이상의 의미일 것이다.
****************************************************************************************
영화 색,계의 역사적인 무대 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이다.
생존의 본능에 충실한 중년의 남자와
젊은피 정열에 충만한 풋풋한 여자의 불같은 사랑이야기...
그들의 모습은 흡사
죽음을 모르면서
그러나
죽음을 느끼면서
기꺼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과 같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 제 삼자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마조히즘'으로 다가온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 중에서 순도 높은 장면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도 낯 뜨거웠지만
결코 추잡해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살아남기 위한 남자와
그를 죽여야 하는 여자가
생의 벼랑끝에서 벌이는 처절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리라
캐릭터 선정에 대한 이안 감독의 캐스팅에 찬사를 보낸다.
감독의 기대 이상으로 역할 소화를 해 낸 양조위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압권이었으며
탕웨이의 그 도발적이고도 청순한 이미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잔잔한 영상으로 남아
마음을 아리게 하였다.
1940년대의 치밀한 무대 구성도 돋보였고
덕분에 나는 오래 전의 기억 속에 잠들었던 루어투어 시앙쯔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의 구리빛 등판과 민머리에서 송글거리며 솟아나던 땀방울
인력거를 끌며 힘차게 내달리던 장단지...
'암살미수'를 주제로 한 '영웅'과 '올빼미의 성'과 같은 작품들이 있지만
色,戒, (Lust, Caution) 역시
단연 그 중에서 손꼽히는 명작으로 남게 되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완성도를 위하여
무삭제 장면을 시도해 준 관계자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런 작품을 두고 외설이니 뭐니 하면서 만일 가위질을 했다면
그 얼마나 깊이를 모르는 문외한의 권력남용이었을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면서
이 영화를 위해 애쓴 모든 영화 관계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보고싶네~~~~
단체관람(?)어떨까요..............
두물머, 멋진 감상 후기에 또 반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