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왜국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면 저절로 왕이 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15세~21세까지 7명의 천황들 중에 부자상속은 16세 인덕-17세 이중의 단 한 번 뿐인데, 그것도 17세 이중은 전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왕으로 몇 년 못하고 죽습니다. 이중 재위 시기에도 실권을 가진 왜왕은 18세 반정이었습니다. 반정 자신이 바로 왕이 될 수 없어서 임시로 이중을 왕위에 올린 것입니다.
응신이나 웅략의 경우를 보면 왕의 죽음을 숨기는데, 이는 후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갑자기 죽으면 무력을 가진 실력자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각자의 군대를 동원하여 내란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5세기 일본서기, 구체적으로 15세 응신에서 21세 웅략까지는 다음 2가지 원칙에 의하여 기술됩니다.
1) 백제, 신라, 가야 등 삼한 여러나라를 통치하는 천황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
2) 천황은 공립되어야 한다.
공립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이야기합니다.
1) 공립은 삼한 최강 세력(가능하면 백제)으로부터 왕비를 데려와 이를 여러 후왕들과 백성들로부터 인정받아 혼인동맹을 맺는 것이다. 혼인동맹을 맺으면 한 쪽이 공격을 받았을 때 다른 쪽이 구원군을 파견하여 도와주어야 한다.(예; 비유왕-눌지마립간 혼인으로 개로왕 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에서 구원군이 온다.)
만일 왕비 후보를 데려왔는데 인정을 못 받으면 그 여자는 부정하다는 죄목을 씌워 불태워 죽인다.
[예] 백제 개루왕조 후반기를 다스린 왕이 신라 아찬 길선과 혼인했는데 인정을 못 받아 공립이 안 되자 길선의 딸이 화형의 위기에 처한다. 이를 두고 볼 수 없는 길선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딸이 왕비로 있는 백제로 망명한다(165). 하지만 이로써 왕을 세울 수 없는 한성백제는 멸망하고(166), 목지국 진왕이 한강유역을 10여개 소국으로 나누고 담로주를 임명하는데, 한성백제에 담로주로 임명된 사람이 초고왕이다. 국명도 百濟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10년 후인 175년에 伯濟로 변경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는 297년에 목지국에 멸망하고 기림이사금이라는 허수아비 왕을 정신적/종교적 지도자로 임명한 다음, 10년 째인 307년에 사로국에서 신라로 변경한다(344년에 독립). 김해의 남가야는 227년에 목지국에 멸망한 다음, 10년 후인 237년에 변진구사국으로 국명을 변경하고, 부신의 임나가야는 207년에 목지국에 멸망하고 10년 후인 217년에 변진독로국으로 국명을 변경한다.(임나가야의 국명 회복은 300년이고, 남가야의 국명회복은 407년이다. 따라서 40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내려올 때는 가야제국들 중에 임나가야만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변진한에 26국을 적어놓고 변진한 24국이라고 했는데, 목지국에 망해서 국명을 변경한 나라가 앞의 24국이고, 망하지 않아 국명을 유지하는 나라가 25사로국과 26우유국(울릉도 추정)의 2국이었다. 따라서 변진한을 24국이라고 한 것은 매우 정확한 기록이다.
伯濟에서 百濟로의 국호 회복은 근초고왕이 368년 봄 3월에 신라와 혼인하고 황해도/경기도의 통치자로으로 공립되자 이루어진다. 이때 한강유역 소국들도 일제히 사라지고 근초고왕의 신민이 되었다. 하지만 황해도가 근초고왕의 신민이 되자 고구려 남부통치가 무너져 다음 해인 369년에 고국원왕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공격한다. 이것으로 고구려-백제의 200년 동맹이 깨진다. 근초고왕 재위 30년 중에 앞 약 20년이 기록의 공백인데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엇을 했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가 있다. 신라인에게 "저 사람 20년 동안 뭐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상세히 설명해준다.
2) 왕비는 신분에 따라 '후-비-부인'의 3단계가 있는데, 지위가 높은 '후'는 봄에, 낮은 '비'나 '부인'은 가을에 세운다. '후'를 세우고 공립된 왕은 15응신, 16인덕(찬) , 19윤공(제), 20안강, 21웅략(무) 같은 좋은 시호를 주고, '비'나 '부인'을 왕비로 세워 불완전하게 공립된 왕은 17이중(미)이나 18반정(진)처럼 안 좋은 시호를 준다. 또 후를 세운 왕(응신, 인덕, 윤공)은 재위기간을 대폭 늘려서 기록했으나, 비나 부인을 세운 이중과 반정은 재위기간을 늘려주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다(안강부터는 일본서기 역법이 바뀌어 정상화됨). 후를 세운 왕은 중국 왕조에 책봉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비나 부인을 세운 왕은 책봉으로 왕권을 보완하고자 했다.
3) 즉위해도 공립이 안 된 왕은 공립될 때까지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해야 한다. 이후 공립되면 '세자'자를 떼고, 공립 전 재위기간도 자신의 재위기간에 포함된다.(예; 칠지도의 백제왕세자(230~ ? ). 동진 진서의 백제왕세자 여휘(381~388), 송서의 왜왕세자 흥(457~461). 하지만 공립이 안되고 퇴위한 왕은 왕력에서 탈락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초반 다루왕-기루왕-개루왕 시기에 많은 통치자가 있었으나 공립된 왕은 단 3명이라 그들에게만 왕호를 주었다. 3명 중에 기루왕은 신라의 파사이사금과, 개루왕은 세자시절 지마이사금과 혼인하여 공립되었다.
4) 공립은 즉위 2년 이내가 원칙이고, 5년째까지 공립이 안 되면 강제 퇴위된다. 공립이 안 되고 5년째 죽은 죽은 토도치랑자태자나 시변압반황자(흥)는 왕의 대수와 시호를 주지 않고 앞이나 뒤의 공립된 왕의 재위기간을 늘려 포함시켰다. 토도치랑자 5년 (404~408) 재위는 응신에게, 시변압반 5년(457~461) 재위는 웅략에게 흡수되었다.
5) 공립된 왕은 이전 왕 중에 한 명의 아들로 입적되는데 왕자 순서가 입적 순서다.(예: 인덕은 자신보다 어린 응신의 아들로 입적되는데 응신의 제4자다. 이는 인덕이 왕력에 네번째 순서로 입적되었다는 뜻이다. 웅략은 윤공의 제5자인데 이는 다섯번째로 입적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자 순서에서 앞으로 갈수록 생물학적 이들인 확률이 높고, 뒤로 갈수록 왕력상의 아들일 확률이 높다.) 따라서 천황으로 기록된 왕은 두 아버지를 가진다.(예: 왜왕 무의 왕력상의 아버지는 제(윤공)고, 생물학적 아버지는 백제 비유왕이다.)
6) 왕의 즉위와 퇴위 연도는 실제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 왕비를 세우고 공립된 연도, 후계자를 황태자로 세운 시점, 즉위 축하사절 방문이나 조문사절 방문 등으로 확인해야 한다. 특히 왕의 죽음은 괴기기록으로 기록한다.(예: 응신 22년(403) 2월 사망, 인덕 58년(425) 5월 사망, 나이가 많아 말년은 아들인 이중이 통치하였음. 웅략 22년(477) 7월 사망.) 왕이 죽으면 3년상이 원칙인데 무령왕릉 지석에서 보듯 웅략은 2년 3개월 후인 479년 10월에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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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를 보면 왜왕 무의 재위 부근으로 추정되는 기간에 왜국 사신이 3번 옵니다.
1) 462년
461년에 흥이 왕세자를 칭하고 사신을 보내 462년에 흥을 왜왕으로 책봉하자, 무가 사신을 보내 흥이 아니라 자신이 왜국 왕이라고 합니다. 이로부터 흥에서 무로의 권력 교체는 461~462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477년
왜국 사신이 왔는데 사신 보낸 사람 이름이 없습니다. 외교는 최고 실권자만이 합니다. 따라서 477년에 왜국에 무는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478년
무의 국서가 왔는데 전체가 비통합니다. 이로부터 전 해인 477년에 사신 보낸 사람이 왜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77년에 무가 죽었던 것입니다.
1. 송서로보면 왜왕 무는 477년에 죽었습니다.
2. 일본서기는 웅략이 477년 7월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3개월(무령왕릉 지석)이 지난 479년 10월에 첫 장사를 지냅니다.
3. 삼국사기를 보면 곤지는 내전이 발생하여 477년 7월에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일본의 곤지신사는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냅니다.
1. 무령왕릉지석과 일본서기를 보면 곤지가 백제 왕실의 여인을 데리고 왜국에 들어간 것이 461년 7월입니다.
2. 일본서기를 보면 웅략이 시변압반황자를 비롯한 지배층을 곤지가 도착한 다음 달부터, 즉 461년 8월~10월 사이에 몰살하고, 461년 11월에 즉위합니다. 462년 3월에 왕후(백제 왕실의 여인)를 세우고 공립되었으며, 4월에 양자강하류 오국에서 즉위 축하사절이 도착합니다. 즉위 5개월 후인데, 가는데 약 2달, 오는데 약 2달 걸리므로 합리적입니다. 이들 오국 사절을 접견하는 것이 웅략이 왕으로서 행한 첫번째 국사입니다. 공립되지 못하고 퇴위한 시변압반황자(흥)의 5년 재위기간(457~461)이 웅략의 재위기간에 흡수되어, 즉위는 461년 11월에서 457년 11월로, 공립은 461년 3월에서 458년 3월로 5년씩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3. 송서로 보면 왜국에서 왜왕세자(공립이 안 됨) 흥에서 왜왕(공립됨) 무로의 권력교체가 461~462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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