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시입니다 / 모호한 비/ 저 깊은 심연의 계획에게 미리 안부를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모호한 비가 내려요
촉촉하게
저 깊은 심연을
건드리는 비여요
그대도
이
비를
느끼고
있나요 _새싹에게 미리 안부를..._
오늘은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낭독을 하는 날이다. 밋밋하게 공지사진만 투척하기 그렇고 하여 손 가는 대로 시를 썼다. 무엇인가를 건드린다는 것, 터치하는 것에서 접촉은 일어난다. 이 비가 아직 숨 죽이고 있는 저 깊은 곳에 있는 새싹을 건드리고 있는 중일지도. 저 심연의 싹은 무엇이 되어 다시 피어나랴.
어제는 저녁 산책을 했다. 어둑한 밤길, 어느덧 차갑지만은 않은 밤바람, 큰 개 한 마리에 다섯 명의 여자가 빙 둘러서 축구공 물어오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의 여자는 큰 개의 주인 듯하였고 네 명의 여자는 아직 소녀라고 보아야 했다. 어둑한 밤의 시선에서는 다 고만고만한 체격이어서 다섯 명의 여자로 보였던 것이다.
걷는 발걸음 아래서 잔디가 내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 삭삭 잔디가 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더 스러질 잔디가 있었던가. 쿠션 같은 잔디 위에서 축구공을 물어 오라는 소녀의 말에 큰 개는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큰 개 주인도 그 풍경을 보고 웃는다. 나는 속으로 "왜 걸어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큰 개는 순한 눈 속에 약간 멋쩍은 제스처를 담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큰 개였다. 축구공을 물고 입에서 놓지 않은 장면을 저만치서 보았다. 축구공을 던지지 못하도록 할 모양이었다. 뛰어다니기 싫은 모양이다. 운동을 시키고 싶은 주인과 운동하기 싫은 큰 개의 입장 차이였을까.
이런 풍경 속에서 문득 나에게 다른 생각이 솟아올랐다. 나는 갑자기 서서 그 생각을 메모했다.
속 뜻과 겉말의 어감적 대비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이것은 그때 어떤 환희감을 준다. 뜻과 개념어의 불일치는 색상 대비처럼 확연하게 안과 밖을 가른다. 인식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인식을 흔들어 버릴 때 웃음은 피어난다. 웃음은 형이상학적 위안이다. _봉봉 호 짓기 놀이_
놀이에는 '비극'적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인을 영원한 아이'라고 니체는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인이 되지 않는 한 이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상징적 말은 우리가 '정신의 그리스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체의 귀족주의는 '정신의 귀족'이다.
"그리스인은 고상한 자신들의 장난감이 자신들의 손에서 생겨나 장차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에 집중하면 그 순간에 다른 것은 망각한다. 그리스 '비극'도 그랬다. 아이가 자라면 유년의 기억은 망각한다. 문화가 성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유년은 망각된다. 그러나 그 유년의 기억은 언제나 완전하다. 그것이 웃음을 준다. 형이상학적 위로를 받는다. 니체의 정신의 귀족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몸이 무거워, 아니 정신이 무거워 찬바람 쐬러 나갔다가 얻은 느낌.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전복적 깨달음이었다. 연결이었다. 현재에서 하는 것을 뇌는 다르게 연결시킨다. 구체적으로 연결시킨다. 그것이 바로 비유의 세계인 시뮬레이션 현실일 것이다. 무엇이 어디에 구체적으로 연결될지를 우리가 미리 알 수는 없다. 단지 '감'만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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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Hossein z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