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널브러진 말들, 피바다에 누워 있는 수천의 병사들, 성벽에 끼어 우글거리는 양 진영의 군대’. 이 엄청난 장면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금세 창을 맞댄 두 병사 앞에 바짝 붙어 그 처절함을 보여준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십자군이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에게 패배해 물러나는 과정을 한 기사의 눈을 통해 잘 보여준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혹한의 기후가 유럽을 지배한 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온난기가 찾아왔다. 온난한 기후는 사람들의 생활을 여유 있게 만들었다. 풍요한 시대가 닥치면서 사람들은 독실해졌고, 신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높이 치솟은 고딕 성당을 짓고, 성지 순례를 통해 신께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 당시 중동지역을 통일한 셀주크 터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성지 순례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성지 순례의 박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졌고, 이런 정서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한 동기가 됐다.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교황 유게니우스 3세가 2차 십자군을 소집하고, 이슬람에서는 명장 살라딘이 나타나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에서처럼 살라딘은 위대한 아랍의 장군이었다. 그는 1187년 갈릴리 바다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을 전멸시켰다.“왜 신이 주관하는 전쟁에서 이슬람군이 수도 없이 패했는가? 우리는 더운 날씨에 준비가 돼야만 한다. 물이 확보돼야만 하는 것이다. 날씨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전투는 하지 않는다.” 십자군을 공격하면 알라 신이 돕는다는 이슬람 사제의 말에 살라딘이 대답한 말이다. 이에 반해 십자군의 기 드 루지앵 장군은 참모의 건의를 무시하고 물도 없이 뜨거운 싸움터로 병력을 이끌고 나갔다.십자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살라딘은 더위를 이용해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승의 전략을 세웠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이기도 했지만 날씨를 전쟁에 가장 잘 활용한 장군이기도 했다. ‘건기에, 그것도 가장 더운 한낮에 공격을 감행할 것, 물을 충분히 확보할 것, 태양을 등지고 진을 칠 것, 무장을 가벼이 할 것, 전장에 나오기 전 궁기병(弓騎兵)으로 하여금 게릴라전으로 적을 지치게 할 것…’. 한낮의 열기 속에서 살라딘이 지휘하는 사라센군의 최초 공격이 감행됐다. 이슬람군이 태양을 등지고 진을 쳤으므로,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십자군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들은 완전무장을 했고, 물마저 동이 나버렸다. 태양은 점점 뜨거워지고, 열파에 지친 십자군은 결집력을 잃고 말았다. 십자군이 그토록 중시했던 밀집대형은 무너졌다. 후미 경호대와 대부분의 병력이 적의 궁수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십자군은 너무나 허무하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스라엘 지역은 영원히 이슬람 교도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만다. 전투가 벌어졌던 갈릴리 지역의 날씨를 살펴보면, 이 지역은 6월에서 9월까지가 건기철로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다. 낮 최고기온은 45도 전후까지 올라가며, 상대습도 또한 평균 65%로 상당히 높다. 이러한 살인적 무더위 속에서 십자군의 중기병은 방어용 갑옷과 사슬 갑옷·쇠 미늘·투구 등으로 중무장했다. 이에 반해 사라센군은 가볍게 무장했고, 활과 작은 방패와 짧은 창만을 소지했다. 무엇보다 더위에 적응이 돼 있었다. 이 전쟁의 결과는 그야말로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날씨를 아군에게 가장 유리하게 이용했던 뛰어난 전략가의 모습은 현대전에서도 지휘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오늘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