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놀즈, W.D. - 성경 한글번역 활동.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전주신흥고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학교를 설립.
윌리암 데이비스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가 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한국 이름은 이눌서(李訥瑞)다. 미국 남장로교회(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소속의 선교사로 1892년 조선에 들어온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의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51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어트에서 사망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3년에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첫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다. 1894년에 한국 땅에서 태어난 레이놀즈 선교사의 차남 존 볼링 레이놀즈는 1920년 교육선교사로 한국으로 돌아와 사역하며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70년 76세에 소천한 후 형이 묻힌 양화진에 안장됐다.]
팻시 보링(Patsy Bolling) 선교사
1868년 9월 28일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출생 당년에 사망한 W. D. 레이놀즈는 레이놀즈 부부의 맏아들로 1893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
레이놀즈와 팻시 보링의 둘째 아들로 1894년 9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20년 남장로회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 광주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70년 3월 20일 테네시에서 75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미국은 제2고향이고, 한국이 제1고향”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 평생 김치를 좋아했고, 애국가를 매일아침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지자 양화진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장한 유해를 그의 부인이 연로하여 한국에 올 수 없어 소포로 보내졌다. 우체국 검열과정에서 유해가 ‘화공 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선교사의 헌신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그렇게 외롭게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묻혔다. 하관식에는 원일한(언더우드 3세) 장로 부부 등 몇 분이 참석하였다는 것을 이강필 소장의 증언으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