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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책 속으로
고요하게 곁에 있어주는 사랑은 믿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곁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일, 믿어주는 일, 큰소리 않고 기다리는 일. 이런 사랑이 가실 줄 모르는 사랑이고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이고 사라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각자의 불완전함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사랑이며 각자의 난처함과 남루함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정직한 사랑입니다. _22~23쪽
우리는 각자, 이 세계의 부패를, 이 세계의 죽음을, 이 세계의 학살을, 이 세계의 몰락을 증명하는 일부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 스스로 이 세계의 탄생을 증명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_41쪽
우리가 죽음의 일부임을 잊지 않으면서 그 아픔들과 함께 감응하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할 때, 우리는 기꺼이 생명을 키우는 시시포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_41쪽
상처를 알지 못하는 사랑 또한 불가능합니다. 상처와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좋기만 하던 사랑에 연륜이, 깊이가 생깁니다. 상처를 나누는 사랑은 공감과 연대의 너른 바다에 도달하게 합니다. _55쪽
반성을 모르는 정치 대신 시인의 눈이 부끄러움을 일깨웁니다. _66쪽
마음이 새로움에 무디어질 때, 시를 읽습니다. _70쪽
사랑은 수박과도 같아 아삭아삭 청량하고, 토마토 김치와도 같아 맵지 않고 시원하지요. 때로 사랑은 고들빼기와 씀바귀처럼 쓴맛으로 다가와 저를 놀라게도 하고요. 때로 사랑은 냉장고 구석에서 오래 방치된 고깃덩어리의 진물 나는 난처함 같기도 하고요. 택배로 올라온 김장 김치처럼 묵직한 기다림이기도 하고요. 김치냉장고에 넣기 전에 발갛게 버무려진 그 배추가 너무 예뻐 군침 꿀꺽 삼키다 결국 선 채로 밥 한 공기 뚝딱 비우는 갈망이기도 하지요. 그 여러 얼굴 모두가 사랑입니다. _81~82쪽
우리를 눈멀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권력 지향적인 속성으로 거짓을 말하는 언론, 함께 사는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헛된 성공에의 집착, 약자에 대한 돌봄의 철학을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대로 그려 보이지 못해 청년들이 절망하고 떠나는 나라. 그 가운데 우리를 눈 밝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평화에의 갈망,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바르게 난국을 타개해보려는 의지, 힘없고 입 없는 존재들을 우선적으로 품는 사랑의 철학,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눈, 공동의 삶과 공생을 지향하는 정치. _91쪽
품는 힘으로 안기는 힘을, 안기는 힘으로 품는 힘을 서로 당길 때 일방적인 시험이나 원망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 열매 맺습니다. _102쪽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죽음을 알기에 우리는 하루하루 오늘이 소중함을 알고, 상실을 예감하는 만남은 그 자체로 애틋합니다. _127쪽
타인을 위하여 온전히 내 마음을 내어주는 기도가 있기에 이 세계는 그나마 그처럼 무도한 혼란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_146쪽
재난이 지나는 자리에는 배타적인 혐오와 죽음, 공포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재난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매달려온 부와 성장, 문명의 신기루가 삶의 본질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재난의 전선에서 싸우는 분들을 통해 우리는 이 재난이 묶어주는 큰 사랑과 희생, 나눔과 연대의 가능성도 봅니다. 이런 것들이 삶의 본질적인 것들입니다. _171쪽
삶은 늘 이상한 롤러코스터의 리듬과 같고 그 속에는 예기치 못한 선물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_205쪽
내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이 말을 할 때 그 말을 들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을 하고 또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억압된 말, 통제된 말, 하지 못한 말은 반드시 되돌아옵니다. 감춰진 느낌, 억지로 지워진 감정은 다시 되살아납니다. 매일 다치고 부서지는 우리, 그 말들이 다 들리는 소리로 나오지는 않더라도, 부서졌던 마음들이 기도 안에서 제 목소리를 얻는 상상을 해봅니다. _223쪽
출판사 서평
풍부하고 다양한 시의 목록
무뎌졌던 눈을 뜨게 하는 시 읽기
정은귀는 시를 통해 나와 타인, 사회 곳곳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특히 향하는 곳은, 권력이나 명성으로 빛나는 곳이 아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다. 정은귀는 김소연의 시 「학살의 일부 1」을 읽으며 미래에 대해 자신에게 상담하러 왔던 학생을 떠올린다. PD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언론사의 해직 사태를 보며 꿈을 접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학생을 보며,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문제를 절감한다. 청년이 꿈을 꾸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의 모순에 가슴 아파하는 동시에, 일상 속 비극에서 무려 ‘학살’의 조짐을 느낀 김소연 시인의 혜안을 짚어낸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이기에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저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쉼보르스카의 「경이로움」을 읽으면서는 삶의 어느 시절 골몰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꺼내온다. 수많은 생명 중 단 한 명으로 존재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며, 삶의 모든 순간은 경이롭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책에서 언급한 현대 미국 시인들의 면면도 다채로운데, 저자가 직접 한국어판 시집을 번역한 루이즈 글릭,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로버트 하스, 줄리아 달링, 마리 하우 등 한국 독자에게는 아직 낯선 시인의 이름도 눈에 띈다. 로버트 하스의 「판문점, DMZ를 다녀와서」는 시인이 2017년 서울에 왔을 때 국제문학포럼에서 읽은 시로,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의 참상이 건조하게 쓰여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을 먼 과거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던 한국 독자들의 의식을 건드린다. 202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경우, 정은귀가 지금까지 그의 시집 일곱 권을 번역했으며 앞으로 여섯 권을 더 번역할 예정이다. 정은귀는 글릭의 시 「꽃양귀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도하는 영성의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정은귀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많은 부분 영성에서 비롯되며, 특히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에서 안식학기를 보내며 써 내려간 글들은 재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와 관계에 대한 성찰과 이어진다.
지금-여기를 살아가게 하는 시의 힘
시를 읽으며 나와 타인의 마음을 응시하는 정은귀의 시선은,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자각을 품고 나와 타인을 넘나들며 서로를 키워내는 ‘사랑’에 이른다. 서로 연결되어 돌보는 존재로서, ‘품고 안기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눈을 뜨고 오늘 하루를 견디는 힘을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시를 읽으면서 늘 ‘지금-여기’를 살아간다고 말하는 그는,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시의 문장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의 연결을 모색하는 부지런함이 곧 사랑인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추천사를 통해 “인간의 아픔을 근심하고 세상의 건강을 바라는 간절함의 깊이”가 엄숙할 정도로 다정하다고 썼다. 팬데믹이 지나가고 연결과 연대를 생각하는 시대, 시의 힘을 믿는 정은귀의 문장을 통해 나와 타인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사회의 모순은 단호하게 성찰하는 시선을 길러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 | 정은귀 - 교보문고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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