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業報)의 진화
김 상 립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나섰다.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짧지만 좋은 산책로가 있다. 언덕 기슭을 따라 좁은 길을 내고 우레탄으로 포장하여 동네 노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길이다. 나는 길 중간쯤 가다가 너무 힘들어 길가에 놓인 장(長) 의자에 앉았다. 길옆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흘깃 보니 누비 두루마기 옷을 입었고 챙이 달린 털 모자를 썼다. 그러나 얼굴도 희고 길게 기른 수염이 꼭 도사 같은 느낌이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한다. “네, 앉으세요.” 그는 내 곁에 앉았고, 나는 다시 눈길을 인도로 향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온다. “요즘 세상이 많이 뒤숭숭하지요?” “예, 눈만 뜨면 아무나 해대는 말 잔치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사방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여대니 우리 같은 노인들은 화가 날만 하지요. 그런데 앞으로 조용하기는 틀렸으니 걱정입니다. 사실은 내가 계룡산에서 수도하고 있는 사람인데, 며칠 전 명상 중에 대신(大 神)을 만났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신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사악한 구업(口業)이 득세하는 시절이라 쉽게 숙지거나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요. 국민 모두가 휘둘리지 않고 잘 견디면 빨리 지나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10년은 갈 것이라 했어요. 업 얘기는 많이 들어 보셨지요?” 한다. “예. 카르마(karma)를 말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어 끝내는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얘기겠지요.”
그는 “사람의 생각과 입과 행동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들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지요. 불교에서도 업보라 하여 모든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각자 뜻을 정하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면 그 결과가 업력(業力)이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업력은 당사자에게 반드시 어떤 결과를 불러 온다고 알려져 있지요.” “업이 어떤 결과로 본인에게 찾아오게 된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 있었습니다. 나쁜 업보가 돌아오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건강문제, 재산문제, 가정문제,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권력이나 명성에 관련된 것들인데, 한 가지 유념할 것은 해당자에게 가장 약점이 될만한 것을 고통스럽게 무너뜨린다 했습니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흔히 우리가 일상에서 전생의 업 운운하기도 하는데 사실 나는 잘 믿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당하기가 일쑤요, 나쁜 짓 하는 놈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사는 이상한 세상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가 말을 이어간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구업이 아주 활성화되어 있는데 오래가지 않아서 앞장서서 설치는 사람들이 많이 정리될 것이라 하십디다. 입으로 짓는 악업에는 남을 협박하는 말, 거짓말, 이간질, 계획적 사기, 욕망 때문에 군중을 선동하는 말 등이 중요한데, 지금 우리사회는 사악한 구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란 게지요.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에 동조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면 복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하더군요.”
얘기는 계속된다. “또 과거에는 업보가 120년을 기본 터울로 넘어간다는 말도 있었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업은 대략 70년을 주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답니다. 이제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업이 더욱 강해지는 경향을 보이니 업보의 순환주기를 50년으로 줄이고 있다 하더군요. 말하자면 업은 지은 자가 자기 생전에 반드시 돌려받도록 해야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는 게 하늘의 뜻이라는 게지요.” 하고 말을 끊는다.
업보에 대해 나도 웬만큼 공부를 했는데 구업이 하늘도 관심을 두는 중요한 업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더구나 하늘의 뜻이 업보가 돌아오는 시기를 자꾸 앞당기고 있다는 얘기에 놀랐다. 업보의 진화다. 나는 눈을 감고 잠깐 숨을 고르고 곁을 보니 이미 그는 가고 없다. 순식간에 사라진 게다. 주소라도 물어볼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일어서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다시 의자에 앉는다. 순간 누가 어르신! 하고 나를 흔들며 “치료 끝났습니다.” 한다. 그때야 간호사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도.
쩔뚝거리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리는 생각으로 복잡하다. 꿈이었구나. 내 앞에 도사는 왜 나타났고 하필이면 업보에 대한 얘기를 하다니. 나는 80이넘어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수 년째 앓고 있다. 조금 차도가 있을라치면 또 다른 병증이 생기곤 한다. 올 3월초에 방안에서 일어나다 뒤로 가볍게 넘어졌는데 엉덩이부터 시작하여 왼쪽다리전체를 당분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다행이 뼈는 다치지는 않았는데 근육내 출혈이 심하여 밤새 통증에 시달리느라 잠도 자지 못하는 처지다.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며 홀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잊어버리자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며칠 사이 부쩍 업보가 자주 떠올랐다.
지난날 내가 남의 것 빼앗지도 않았고, 남 가슴 아프게 하는 일도 피해가며 살았다. 일확천금을 노린 적도 없고, 가능하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려고 나름 애썼다. 그런데도 무슨 모진 업보가 쌓여 나를 이렇게 매몰차게 몰아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업을 저질렀다면 구업 밖에는 없을 듯 하다. 기왕 이런 식으로 내게 찾아왔다면 어떡하겠나? 내 입으로 지은 것이니 끝을 볼 때까지 참아야지 별 수가 없을 터이다. 이미 내 나이 80중반이니 더 이상 나쁜 구업을 지을 일은 없을듯하지만, 그래도 더 조심 해야겠다. 사람 한 생을 살며 못된 구업만 짓지 않았어도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터인데 참 후회스럽다. 날마다 마이크를 붙잡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 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미움에 앞서 짠하다. 업보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2025. 3)
첫댓글 새벽에 운동장에서 기구운동 하는데 할머니 한분이 제게 괜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기구를 그렇게 다루면 고장난다. 혼자 독차지 하고 있다는 둥.
업보는 모르겠지만 저도 이나이가 되니 남한테 싫은 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랜만에 좋은 작품 속으로 빠져봅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참고 또 참고 살겠습니다.
선생님, 속히 낫기를 빕니다.
남평 선생님, 편찮으시다니... 빨리 완쾌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말씀 새기겠습니다.
남평 선생님, 쾌유를 빕니다.
새겨들을 만 합니다.
좋은 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