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집(金禧集)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니 현감(縣監) 사중(思重)의 서손(庶孫)이요, 신씨(申氏)는 본관이 평산(平山)이니 사인(士人) 덕빈(德彬)의 서녀(庶女)이다. 희집은 나이 28세이고 신씨는 나이 21세인데, 모두 재주 있고 어질지만 심히 가난하므로 사람들이 혼인하지 않았다.
금상(今上.정조) 15년(1791)년 봄 2월에 주상이, 사서(士庶)가 빈궁(貧窮)하여 남녀의 혼인이 혹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칙명(勅命)하게 하였다. 혼기가 먼 자는 앞당기게 하여 관가에서 자장(資裝)으로 돈 5백과 포목 두 끗을 도와 주게 하고 달마다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희집은 심씨(沈氏)와 약혼하고 신씨는 이씨(李氏)와 약혼하여 관자(官資)는 받았으나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다. 5월 그믐날 한성판윤(漢城判尹) 구익(具㢞)이 아뢰기를,
“5부 사람이 가난하여 혼기를 어긴 자를 지금 모두 권하여 성혼하였습니다. 오직 서부(西部) 신덕빈은 비록 관자가 있었으나 또한 혼구를 판비하기 어렵고 또 택일에 6월을 꺼리어 시기가 맹추(孟秋)에 있으며, 김희집은 처음에 약혼한 자가 ‘문지(門地)가 상등하지 않다.’고 핑계하여 부끄럽게 여기어 딸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하였다. 6월 초2일에 주상이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오부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혼인하게 권한 자가 무려 백 수십 인이 되는데 오직 서부(西部)의 두 사람이 예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천화(天和)를 인도하고 물성(物性)에 화합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일은 시초를 정제하는 것이 귀하고 정사는 끝을 잘 맺는 것을 기약하는 것이다. 덕빈을 권하여 다시 길기(吉期)를 정하고 희집은 급히 아름다운 짝을 구하게 하며, 호조와 혜청(惠廳)은 모름지기 각각 보조하여 주는 것을 전보다 풍성하고 넉넉하게 하여 좋은 일을 완성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서부령(西部令) 이승훈(李承薰)이 한성부(漢城府)에 달려가니 주부(主簿) 윤형(尹瑩)이 말하기를,
“이씨가 신씨를 배반하고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하니, 승훈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지금 주상의 유지를 받들었는데 신씨의 혼기를 재촉할 곳이 없게 되었다. 전일에 아뢴 것이 이렇게 어긋났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이다.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판윤(判尹) 이하가 서로 보기만 하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때 승훈이 말하기를,
“하관(下官)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희집은 경림 상공(慶林相公)의 후손이요, 신씨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후예이니 모두 훌륭한 문벌(門閥)이고 또 그 나이가 상적하며 가난한 것도 같고 만난 처지도 마침 서로 비슷하다. 하물며 또 같은 날에 이름과 성을 임금께서 보시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정한 것이다. 어찌 서로 더불어 통혼하여 배필을 이루지 않겠는가?”
하니 만좌가 무릎을 치며 모두 말하기를, “얼마나 다행인가.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하였다. 익(㢞)이 드디어 부령(部令)과 주부(主簿)를 권하여 두 집의 중매가 되게 하였다. 이에 승훈은 반석방(盤石坊.동리 이름) 희집의 집으로 가고 형(瑩)은 반송리(蟠松里) 덕빈의 집으로 가니, 두 집이 모두 문에 사립이 없고 처마가 축 늘어지고 서까래는 비에 젖어 공중을 가리키고 해가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부엌 연기는 쓸쓸하였다. 손과 주인이 땅을 자리삼아 앉아 얘기하는데, 승훈이 주상의 유지를 선포하고 인하여 신씨와 약혼하는 것이 편의함을 말하니, 희집이 머리를 구부리고 한참동안 멈칫하다가 말하기를,
“희집이 장가를 들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없고 가난한 때문이었는데, 다행히 심씨가 허혼을 하기에 삼가 관자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버림을 당했으므로, 스스로 늙어서 흰머리가 되도록 짝이 없는가 여겼고, 또 노모를 봉양할 수 없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지금 가르쳐 주심을 받으니 위로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저쪽에서 혹 따르지 않는다면 곧 희집의 팔자가 기박한 것이오.” 하였다. 형도 덕빈을 보고 승훈과 같이 말하니, 덕빈이 슬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남의 부모가 되어서 딸자식으로 하여금 혼사가 늦어지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또 내가 남과 약혼하였다가 남이 먼저 나를 배반하였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정중하신 성유(聖諭)까지 입고 자장을 넉넉히 주시고 제공(諸公)이 괴로우시게도 몸소 매작을 행하시니, 감격하기 지극하여 실로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김군은 명문의 자손이니 감히 허락하여 사위를 삼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승훈과 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통보하고, 승훈은 곧 부사(部史)를 시켜 경첩(庚帖.혼인하는 자의 성명,연령,본관등을 써서 서로 교환하는 문서)을 덕빈에게 전하고, 형은 덕빈을 권하여 택일을 하여 보니 12일이 좋은 날이었다. 드디어 부(府)에 보고하니 부에서 주상에게 아뢰었다. 주상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한 남자와 한 여자라도 제 곳을 얻는 것이 예전부터 어려운 일인데, 김씨ㆍ신씨 부부처럼 기회가 교묘하게 들어맞아 기쁘고 기이한 것은 있지 않았다.” 하시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정진(趙鼎鎭)ㆍ혜청당상(惠廳堂上)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두 집의 혼례를 두 경(卿)에게 부탁한다. 조경(趙卿)은 희집을 아들같이 보고 이경(李卿)은 신씨를 딸같이 보고, 또한 각각 두 집을 위하여 혼서(婚書)를 대신 지으라. 무릇 채단ㆍ폐백ㆍ관ㆍ신ㆍ비녀ㆍ가락지ㆍ치마ㆍ저고리ㆍ이불ㆍ요ㆍ대우(敦盂)ㆍ반이(盤匜)ㆍ주료(酒醪)ㆍ병이(餠餌)ㆍ역막(帟幕)ㆍ병장(屛障)ㆍ문연(紋筵)ㆍ갑촉(匣燭)ㆍ향해(香孩)ㆍ장렴(粧奩)ㆍ지분(脂粉) 등 세쇄한 것과 안마(鞍馬)ㆍ도례(徒隷)의 호위하는 것과 의식차리는 제구를 모두 하사하니, 왕의 말을 믿게 하자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판비하라.” 하고 인하여 내각검서(內閣檢書) 이덕무(李德懋)에게 명하기를,
“이 같은 기이한 일에 전(傳)이 없을 수 있느냐? 네가 한 통을 기록하여 김씨ㆍ신씨 부부의 전을 만들어서 아뢰라.” 하였다.
12일 새벽에 닭이 운 뒤에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 각각 한 끝을 말아 청 홍실로 가로세로 묶어서 검붉은 함에 넣은 다음 위유쇄(葳蕤鎖.금실로 서로 연결하여 맺은 것)를 붙이어 붉은 보자기로 싸고 보자기 네 귀를 모아 서로 연결하여 맺고 근봉(謹封)이라 써서 신씨에게 보냈다. 그 혼서(婚書)에 이르기를,
“밝은 시대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남(二南.즉 周南과 召南의 교화를 말함)의 교화에 젖었고 길한 날에 백년의 가약을 맺으니 실가(室家)가 마땅하리라. 좋은 배필은 하늘이 정해 주는 것이나 별다른 조화(造化)는 임금의 은혜입니다.
복(僕)의 친속인 아무는 어려서 고자(孤子)가 되고 가난하여 그럭저럭 장성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젊은 홀아비가 없는 성한 시대를 만나 비록 주매씨(周媒氏.중매하는 사람)의 혼인을 주장하는 것이 있었으나, 돌아보건대 이 일찍 부친을 여읜 궁한 사람을 누가 진유자(陳孺子.진평)가 장가들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기듯 하겠습니까? 듣건대 영애(令愛)는 빈한하고 소박한 문호에서 자라서 순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깊은 규중(閨中)에서 길쌈하는 여공을 배워 이미 침상 앞에서 터진 것을 꿰매는 것을 익히었으나, 가난한 집에 장렴(粧奩)의 제구가 없어 아직도 문 안에서 반대(鞶帶)를 베푸는 것이 더디었다 합니다.
아름답다! 우리 임금이 정사를 발하여 인덕을 베푸시니 유사가 명을 받아 가취(嫁娶)를 권하였습니다. 성왕(聖王)이 가취를 제정하였으니 정사에 마땅히 먼저 하여야 하고 남녀가 가실(家室)이 있기를 원하니 때를 잃을 수 없습니다. 오부의 혼매(婚媒)가 끝날 때에 미치어 홀로 두 집의 자녀가 시기를 어기었습니다. 얼음 위의 예전 꿈(중매하는 일)이 화합하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시기가 기다림이 있고, 달 아래의 기이한 연분이 따로 있으니 좋은 배우자를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습니까? 늦어진 시기도 서로 같고 빈한한 가문도 서로 대등합니다. 은혜가 왕명에서 나왔으니, 두 아름다움을 꼭 이루게 하나, 궁하여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으니 어떻게 만사를 다 갖출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임금께서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베푸시어 두 신하로 하여금 혼인을 주장하게 하시었습니다. 자기 아들과 같이 하였으니 아들처럼 기르는 뜻을 체인(體認)하였고, 타인을 아비라고 하니 궁하여 의지할 데 없는 몸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성한 은택은 한 세상에 듣기 드문 일이고 기이한 제우(際遇)는 백대에도 특이한 일이 되었습니다. 교배하는 술잔은 태화 기운을 빚었으니 아름다운 상서 인도해 맞았고, 잔치하는 자리에는 수운(需雲)의 사(私)를 배불리하여(음식으로 잔치하는 것) 성덕을 노래합니다. 기쁘게 이날을 만났으니 나라는 만년의 아름다움에 응하고 밝은 때를 만나 사녀(士女)는 두 성(姓)이 합하였습니다.
삼가 여피(儷皮)의 예에 따라 전안(奠雁)하는 아침을 기다립니다.” 하였고, 답혼서(答婚書)에 이르기를,
“한 지아비, 한 지어미가 제 처소를 얻었으니 만물이 뜻을 이루고 비파를 타고 거문고를 쳐서 즐기고 또 화합하니 이성(二姓)이 좋게 합합니다. 모두가 조화(造化)의 힘이니 부모의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복(僕)의 딸이 봉비(葑菲)의 바탕(훌륭하지는 못하나 취할것이 있음)으로 표매(摽梅)의 시기(혼기)가 지났습니다.
집은 가난하여 네 벽만 남았으니 자봉(紫鳳)의 무늬가 전도되었고(해진옷을 기워 입음), 계(笄.15세에 하는 예절)의 나이에서 다시 일곱 해를 넘겼으니 용을 타는 기쁨(훌륭한 사위를 얻는것)이 늦어졌습니다. 다행히 주 문왕(周文王)의 덕화에 힘입어서 주진(朱陳)의 인연을 얻게 되었습니다. 혼인이 때를 잃는 것을 걱정하여 낙양령(洛陽令.여기서는 한성판윤을 말함)에게 조력하라고 명령하였고, 자장(資裝)을 갖추지 못하므로 경조윤(京兆尹.한성 판윤을 말함)이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화기가 양을 매는 데에 두루하였으니, 어떤 것인들 임금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빛나는 아침에 전안(奠雁)이 늦었으니, 내가 가난한 것을 무어 혐의하겠습니까? 바야흐로 성인이 종시(終始)의 은혜로 진념하시는데, 마침 두 집에서 중매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왕명이 정중하시므로 시기를 맞춰 늦추지 않으려 하고, 문채가 빛나고 화려하니 예가 심히 아름답게 갖추어졌습니다. 전미(錢米)ㆍ포백(布帛)을 호조(戶曹)와 혜국(惠局)에서 다투어 실어 오니 띠[鞶]ㆍ수건[帨]ㆍ비녀[釵]ㆍ반지[鐶]는 고문(高門)ㆍ성족(盛族)도 이보다 지나지 못합니다. 빈부가 잠깐 동안에 바뀌었으니 이때가 무슨 때입니까? 자나깨나 송축의 정성이 맺혔으니 천세 만세 수하소서.
길이 생각건대 조그마한 보답은 다만 실가(室家)를 잘 다스려 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백성은 안락하고 해는 풍년드니 함께 어질고 수하는 경지에 오르고, 남편은 화하고 아내는 순하니 길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다스림에 들어갑니다.” 하였다.
해가 한나절이 되매 희집이 소세하고 빗질하고 귀밑털을 걷고 수염을 쓰다듬고 그림자를 돌아보며 모양을 익히고, 섬사포(閃紗袍.비단으로 만든 관복)ㆍ반서대(班犀帶.물소뿔로 꾸민 띠)ㆍ오모(烏帽.검은 비단으로 만든 사모)ㆍ경화(麖韡.신)를 갖추고 백마 누금안(鏤金鞍.금으로 아로새겨 장식한 안장)에 앉아 어깨는 으쓱하고 등은 곧고 얼굴빛은 엄숙하여 한눈을 팔지 않고 천천히 가니, 안부(雁夫)는 앞에 있고 유온(乳媼.유모)은 뒤에 있고, 청사초롱과 홍사초롱 쌍쌍이 앞에서 인도하고 경조(京兆) 오부의 서리(胥吏)ㆍ조례(皁隷)는 좌우에 옹호하여 의절이 엄숙하였다. 신씨 문에 다달아 말에서 내려 전안(奠雁)하고 초례석에 들어서니, 신씨가 선명하게 단장하여 취교(翠翹.물총새의 깃 모양으로 만든 부인의 수식)ㆍ금전(金鈿. 금비녀)ㆍ궤보요(簂步搖.머리나 목에 걸면 흔들리는 장신구)를 갖추고 연꽃 무늬로 수놓은 홍치마를 입고 주락선(珠絡扇)으로 얼굴을 가리고 교배하니 질서 정연함이 있었다.
장파(粧婆.신부의 단장과 시중을 맡은 여자)가 붉은 실을 끌어 교배잔을 세 번 마시게 하고 아름답고 길한 말로 축복하니, 부부가 일어나서 포방(鋪房.사위를 맞으려고 미리 준비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웃 마을까지도 서로 아름답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를,
“김군이 나이가 장성하여 마음 갖기를 더욱 바르게 하여 굳게 지키고, 신씨는 유순하고 용모와 거동이 넉넉하고 복스럽더니 하루아침에 이 팔자를 정해 주시고, 재상이 혼인을 주장하여 엄연히 훌륭한 부부가 되었으니 은혜로운 영광과 기쁜 기운이 가문과 거리에 넘치는도다. 저 언약을 배반한 자는 자멸하는 자취를 남긴 것뿐이니 그것도 역시 천명이다. 대개 그 사는 지명이 반석(盤石)이고 마을 이름이 반송(蟠松)이니 아름다운 징조가 우연이 아니다. 그 수고(壽考)와 복록이 무성하고 공고하기가 돌이 편안한 것 같고 소나무가 굴곡한 것 같을 것이다.” 하였다. 이덕무(李德懋)는 말한다.
옛말에 ‘임금의 마음은 하늘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어찌 그러한 것이 아닌가? 화기가 상서를 부르는데 화로 인도하는 것은 윗사람에게 있다. 어찌 그러한가? 금상(今上)께서 상천(上天)에 응하시어 어두운 것은 밝혀 주고 억울한 것을 풀어 주며, 불쌍히 여겨 덮어 주고 은택으로 적셔 주어 물건마다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 여러 번 징험하건대 이해 봄 여름 사이에 백성들이 비를 바랄 때 한 어진 정사를 베풀면 기우제를 기다리지 않고 비가 곧 내리었다.
대저 김씨ㆍ신씨의 혼인 중매가 정하여지자 비가 즉시 패연(霈然)하게 내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이 빠르다. 그러므로 조야(朝野)가 말하기를 ‘지치(至治)의 세상이다.’ 하였다. 대개 삼대(三代) 적에 하늘에 빌어 천명을 길게 한 것이 또한 화기를 인도하고 앙양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 아름답도다.
註: 신해(1791)년 6월에 시기를 지나 혼인하지 못한 데 대하여 조정의 칙명(勅命)이 있었고, 인하여 김씨ㆍ신씨 두 집의 혼사가 있었다. 이덕무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여 내각 일력(日曆)에 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