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18,15-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닥칠 재앙을 본다. 주님께서는 징벌하는 이들을 보내시어 가차 없이 도성의 사람들을 치게 하시지만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죽음의 징벌을 면케 하신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행한 역겨운 짓에 괴로워하고 탄식했던 이들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회개하라는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마음 모아 간절히 청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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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교회란 어떠한 공동체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교회는 서로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처럼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삶을 위하여 교회의 각 구성원은, 서로서로 섬세한 배려로 설득하는 온유한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자세를 ‘단둘이 만나’라는 표현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유부단함이나 감상적 태도, 또는 악습과의 적당한 타협이나 묵인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심판자의 위치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삶이 무엇인지 올곧은 직언을 하는 증인으로의 역할을 피하지 말아야 함을 복음은 일러 줍니다. 병든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치유하는 사랑은 비록 아픔이 따를지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강직함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치유와 회개의 삶은 자신보다 더 큰 진리에 순종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따를 때 비롯됩니다. ‘맺고 푸는’, 주님에게서 받은 교회의 권리와 진리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길을 언제라도 비추어 보고 성찰하게 하는 기준인 진리를 교회가 담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흐려진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머니이자 교사’인 교회에 대한 신뢰는, 진정 진리에 따라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그 빛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쇄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며 주님의 현존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가 쇄신을 갈망하는 공동체,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의 공동체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함께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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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라는 말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말은 곧 공동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정 공동체, 마을 공동체, 교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등.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집단일 따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그분의 정신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선익(공동선)을 해치는 어떤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에서 얼마만큼 주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상처 준 일은 없는지,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참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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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는 것은 여간 용기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해타산이 없는데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십상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가족 안에서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행위 자체가 말씀의 실천이 됩니다. 체념하며 포기해 온 관계라면 더욱 시도해 볼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정으로 시작하면 애정을 만납니다. 사랑으로 출발하면 사랑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끄심인 까닭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으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상대를 바꾸려는 지적이라면 애정은 담기지 않습니다. 상대방으로 말미암아 받은 ‘내 마음의 상처’를 전달할 때 사랑이 함께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의 기도라면 어찌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는지요? 사랑과 애정은 언제라도 밝은 기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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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하면 더 쉽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타이르는 일도 함께하면 더 쉽고 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계산이 달라 함께 뜻을 맞추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뜻을 함께하면 거기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것, 그 자체도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형제님께서 운전하시는 차에 탄 적이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도 많이 하시고, 이름 있는 직장을 다니시는 형제님이셨지요. 그런데 차를 함께 타면서 이제까지 못 봤던 형제님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평소에는 차분하시고 남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 분인데, 운전을 너무나도 급하게 하시면서 화도 잘 내시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차에 대해 화를 많이 내시더군요.
왜 화를 내셨을까요? 그 끼어든 차가 정말로 잘못한 것일까요? 아마 화를 내는 이유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 때나 끼어드는 못된 운전자는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 안 돼.’
‘앞의 운전자는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해서는 안 돼.’
많은 운전수들이 고작 한 번 끼어들기 한 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판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운전하는 사람치고 단 한 번도 끼어들기를 해본 적이 없을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는 되고, 남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이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죄 짓는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즉, 형제를 교정하는 3단계 절차를 말씀하시는데요. 1단계는 형제적 사랑의 권고입니다. 1단계에서 실패하는 경우 2단계로 넘어가는데 여기서는 증언을 통해 공식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번 단계에서도 실패하면,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 교회에 알려 처벌을 하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그마한 머리로 곧바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이기적인 우리들의 모습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3단계에 걸쳐 기회를 주는 진정한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혼자만 하는 신앙을 금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기도를 생각해보세요. 주로 어떤 기도를 바치게 됩니까? 자기에 관한 소원성취에 대한 기도가 빠짐없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즉, 이기심이 발동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둘이 뜻을 모아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바라보게 되는 이웃사랑에 중심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은 버려야 합니다. 대신 진정한 이웃 사랑을 기억하며 교회 안에서 주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 기도하기 보다는 함께 기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나 혼자서 판단하고 단죄하기 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춤에서처럼 삶에서도 우아한 동작은 물집 생긴 발에서 탄생한다(엘리스 아브람스).
상처 준 이에게 먼저 다가가기
- 상지종 신부-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나누던 사이에서 주고받는 상처는 서로에게 넘지 못할 커다란 벽으로 다가옵니다. 상처받은 이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먼저 다가와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입힌 입장에 선다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죄책감 때문에, 감히 자신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은 친구 앞에 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상처를 입고 피해를 보았다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 친구를 책망하거나 다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친구를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이란 바위를 치워 예전처럼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친구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 주어 새롭게 함께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고, 참된 화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참된 사귐의 길입니다. 하느님께 나 자신을 맡기듯, 내 이웃에게 나의 모든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가난과 사랑의 관상으로 빛나는 여인
-김찬선신부-
오늘은 글라라의 축일. 그대 안에 흠뻑 빠져봅니다. Clara, 라틴말로는 “빛나는”이라는 뜻을 가진 그대 이름. 이름만 그러하지 않고 이름만큼 빛나는 여인, 그대.
그대가 빛나는 여인이 되었던 것은 그대가 발광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빛을 받아 발하는 반사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빛의 반사체가 되었던 것은 어둠에서도 빛을 알아보는 영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고 눈을 현혹하는 이 세상의 온갖 짝퉁들 속에서 보물을 알아보는 관상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영의 눈, 관상의 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대가 가난하였기 때문이고 그대가 정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글라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라면 시입니다.
역사적으로 빛나는 위대한 여인, 오늘날 Feminist들이 자기들의 대모로 여기는 여인이 글라라입니다. 이들은 글라라를 자신들이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중세시대에, 권위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중세시대에, 자기가 추구하던 것들을 성취한 당찬 여인쯤으로 여깁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들과는 시각이 많이 다르지만 온갖 반대와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추구함으로써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여인이라는 면에서는 그 시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가 엄청난 부와 막대한 권력을 쥐고 흔들던 지극히 세속화된 그런 시대를 살았습니다. 빛을 전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어둠이었습니다. 이런 어둠에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이단으로 떨어져 나갈 때 글라라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오늘의 고린토 서가 얘기하는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둠에서 하늘의 빛을 보는 눈, 인간의 죄악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보는 눈을 세속의 화려함 가운데서 하늘나라의 보물을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런 눈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가난하였기 때문이고 탐욕으로 그의 눈이 흐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가 더 큰 탐욕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천상의 것을 욕심내는 사람이 지상의 것에 눈이 차겠습니까?
그러나 가난한 글라라에 대해서만 얘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글라라는 여자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글라라를 女丈夫로 만듭니다. 그러나 글라라는 가난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 여인, 정결하게 사랑한 여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복음 말씀처럼 그녀는 하느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그 사랑의 품안에 한없이 머무른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네스 축일의 찬가로 노래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질 것이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그분은 아주 힘센 분이시며 그 너그러우심은 한량없고 너무나도 멋진 분이시고 그 사랑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모든 거동이 우아하기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대는 이미 그분의 품안에 들었으니, 그분은 그대의 가슴을 보석으로 꾸미셨고, 그대의 귀에 매우 값진 진주 귀걸이를 걸어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한다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한 혼인한 자매님이 조용히 상담을 요청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자매님 딴에는 매우 심각한 고민이었습니다.
자매님은 느닷없이 “봉헌 생활이 어떤 의미에요?”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혼인하기 전에 수녀님이 되고자 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한 번은 성령 세미나에 가서 한 유명한 예언 은사를 받은 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은사를 받은 분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었고 그 분은 그 자매님께, “혼인하기 전해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을 지키세요. 봉헌생활을 하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고 또 자신도 결혼 전에 봉헌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봉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저에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봉헌 생활은 넓은 의미로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랑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사랑하여 그 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봉헌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을 굳이 그 자매에게 하라고 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수도자가 되라는 뜻인데, 그 분은 이미 모 수도회 삼회 회원으로 가정이 있는 분으로서는 최대한 수도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만약 가족을 떠나서 정말 수도자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행한 혼인성사의 의무를 소홀히 하라는 뜻이기 때문에 교회에 어긋나는 것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예언 은사를 지니신 분이 하신 권고는 이 자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이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은 한 평신도라는 것을 알고, 그냥 “무시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꼭 먼저 사제에게 면담을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카리스마(성령의 선물)라고 하더라도 교회 전체에 성령 강림 때 내리신 성령님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가 곧 당신의 권위와 같음을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지금의 주교단입니다.
땅에서 매고 푸는 하늘나라 열쇠란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쫓아내신 것도 하느님이고 다시 받아들일 권한이 있으신 분도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의 권한을 바로 베드로와 주교단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일치하는 사도들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교황과 일치된 각 지역교회의 주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제가 ‘강론정지’를 당했다고 하여 주교가 사제의 고유권한인 강론을 정지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제의 모든 권한은 주교로부터 오고 주교의 모든 권한은 교황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권한이나 고해성사를 거행할 권한을 포함하여 모든 권한을 그 지역의 주교가 제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지닌 ‘고유권한’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열쇠를 단 한 명 베드로에게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든 혼자 찾아가서 이야기 해 주고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려가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마지막으로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거든 이방인으로 취급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가 가장 최종적인 최고권위임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면 당신이 꼭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교회, 즉 ‘믿는 이들의 모임’이 개인의 영성보다 항상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인들의 영성이 옳다고 주장하여 얼마나 많은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도 세상에 오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결코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혼자 계실 때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니 그 분은 결코 혼자가 아니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있으니 결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닙니다. 나라가 홀로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곧 믿는 이들의 집단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영성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께서 세워 놓으신 당신의 대리자, 교회와 함께 끝까지 가야겠습니다. 교회는 가장 안전한 구원의 통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까지 도달하셨던 영성의 대가 아빌라의 데레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저는 항상 기억합니다.
“저는 교회의 한 딸로 죽는 것이 행복합니다.”
어느 날 개구리들이 높이 오르기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착점은 아주 높은 석탑의 맨 꼭대기였지요. 선수들이 선발되었고, 선발되지 못한 개구리들은 옆에서 열심히 응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했습니다. 저 높은 곳까지 오르는 개구리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너무 높은 것은 물론이고 경사가 가팔라서 보통의 개구리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도저히 오를 수가 없을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많은 개구리들이 힘이 빠져서 포기를 했습니다. 물론 이 말에 오기가 생겨서 악착같이 올라가는 개구리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개구리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에 부쳐서 결국은 포기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구리들이 결국은 이 석탑의 맨 꼭대기에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 단 한 마리의 개구리가 조금도 힘들지 않는다는 듯이 탑 위로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이 개구리만이 혼자 탑의 정상까지 기어 올라갔지요.
다른 개구리들은 승리한 이 개구리가 어떻게 끝까지 올라갔는지가 궁급해졌습니다. 그리고 한 개구리가 대표로 다가가 승리의 비결을 물어보다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지요. 글쎄 그 개구리는 귀머거리였던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산산조각 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을 들을 바에는 차라리 귀를 막고서 아무 말도 듣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힘을 실어주는 말인 긍정적이고 사랑가득한 말은 나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주며,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 사람이란 어떻게 모인 것을 말할까요?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이고 힘 빠지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말할까요? 아니지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만을 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서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끊임없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안 되면 다른 사람도 안 되어야 한다는 놀부 심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을 때가 참으로 얼마나 많은지요.
앞서 긍정적이고 사랑가득한 말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또 어떤 말을 하면서 생활해야 할까요?
긍정적이고 사랑가득한 말을 합시다.
침묵 -김호균 신부-
마태오 복음 18장은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의 연설문입니다.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겸손한 공동체, 둘째가 헐벗은 사람을 보살피는 공동체, 셋째가 충고하는 공동체, 넷째가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러한 부분이 잘 반영된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공동체를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느 공동체건 모난 사람, 부족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집안이 화목한데…”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동네 살 만한데…”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성당 다닐 만한데…” “저 인간 때문에 죄 짓는다”며 불평하면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자신 있게 그 사람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있다가 뒤에서 수군거리고, 비아냥대고, 헐뜯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야 입 꾹 다물고 묵묵히 자신을 닦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음 모으기 -남궁영미 수녀-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그 정성에 답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간절한 마음으로 무언가 구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시험을 보거나 직장을 구할 때 또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병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형편이나 관계가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사회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그 간절한 바람이 이기적일 때도 있지만 간절하게 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은 귀 기울여 들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청원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신원입니다. 우리는 청원하는 사람이고 그 청원을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데, 때론 그 간절함이 집착과 욕심이 되어 내가 주도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럴 땐 쉽게 절망하고 분노하며 어둠에 질식해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구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신원을 잊지 않습니다. 간절함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구하되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일하심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모으되 그 결과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촛불 문화제!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모으고 촛불을 모아 청하는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서 귀 기울여 듣고 계심을 믿습니다. 불확실한 내일이지만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건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듣고 계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순과 죄 그리고 연루된 세상의 모순과 죄로 인한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도 우리가 아직 희망할 수 있는 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를 넘어선 간절한 마음을 모아 청하는 이 자리가 이미 새 세상임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느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오늘도 간절한 마음을 모아 하루를 시작합니다. 조금 더 사랑에 찬 삶을 살 수 있기를, 우리의 신앙이 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하고 따뜻하게 할 수 있기를,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며 천천히 작은 것 하나부터….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양승국신부-
<사랑의 기술>
수도회 입회하기 전, 돌아보니 참으로 순진했습니다. 저는 수도공동체가 그야말로 ‘천상 예루살렘’ 공동체인줄 알았습니다. 언제나 형제애로 충만한 곳, 아침저녁으로 감미로운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 곳, 완벽한 평화가 존재하는 곳, 더 이상 미움도, 분쟁도, 불화도 없는 곳...
그러나 그런 제 생각은 사흘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깨졌습니다. 제가 꿈꾸고 있었던 공동체상은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거짓된 공동체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도공동체도 엄연히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부조리와 미성숙과 불협화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본당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내 여러 공동체들 역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 이런 생각들 많이 하실 것입니다.
“신자들이 뭐 저래?”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괜히 세례 받는 것 같아! 이거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을까?”
혹시라도 이런 느낌 받으셨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근본적인 속성상 어쩔 수 없이 부족합니다. 죄인들의 집합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도우심에 힘입어 서로를 격려하며 조금씩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순례의 공동체가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오늘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갖은 모순과 불일치, 불협화음 가운데서도 조화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한 ‘사랑의 기술’을 쌓아나가는 노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기술’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를 상세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맺음 방식, 대화방식, 삶의 양식 안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구성원들의 심각한 결함이나 약점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공동체 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맞닥트려야 할 과제 가운데 한 가지가 사사건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문제입니다. 구성원의 심각한 결핍, 잘못 앞에 어떻게 권고해야 하나,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큰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차근차근, 하나하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형제의 잘못을 사방팔방으로 떠들고 다니지 말고, 단둘이 만나 조용히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최대한의 배려, 예의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용기를 가지고 현실에 직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또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 역시 또 한 번 크게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라면, 그제야 공식적으로 교회 공동체에 알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 역시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대한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오늘 우리의 모습, 노력도 해보지 않고 관계를 단절하고 마는 오늘 우리의 모습에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정의 단계들 -김찬선신부-
잘못한 사람에게 가장 잘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무관심하여 아무 말 하지 않는 것, 알면서도 안 좋은 감정 관계에 휘말리기 싫어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임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제 다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잘못이 잘못한 것을 뒤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서 잘못을 꾸짖는 것은 양반 축에 드는 것이고 겸손하게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은 사랑 중에서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교정해주는 단계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1대1 직접적인 교정입니다. 사실 누가 잘못하면 직접 얘기해 주어야하는데 보통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직접 얘기해주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참고 참다가 화가 나서 얘기하거나 벼르고 벼르다 한 번 얘기를 하지만 아주 힘들게, 그리고 아주 어색하게 얘기해 주고 상대방도 불편한 마음으로 얘기를 받아들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잘못을 봐야 하는데 그렇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선입견이나 감정이 없이 보기에 잘못을 직선적으로 얘기하고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도 판단 없이 따듯하게 잘못을 보기에 일반적인 얘기를 하듯 잘못에 대해 얘기해줍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같은 형제의 같은 잘못인데도 어떤 때는 화가 나서 그 잘못을 참을 수 없지만 어떤 때는 “잘못하고 있구먼!”하고 감정 없이 보고 “그건 잘못이야!”하고 서슴없이 그러나 따듯하게 얘기해줍니다. 그러니 1대1 교정에서 나도 어렵지 않게 얘기하고 상대방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비결은 마음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탈 때 쓰러지지 않으려고 반대 방향으로 몸에 힘을 주면 오히려 쓰러지지만 기우는 방향을 자연스럽게 타면 쓰러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방향을 타는 것, 이것이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잘못을 보는 것이고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얘기해주는 것이며 마음에 힘을 빼고 잘못을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고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교정을 겸손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세 번째 단계를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충고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에게는 더 큰 겸손과 더 지극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능력으로는 부족하구나 생각하고 다른 형제들의 지혜와 사랑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많이 알지 못하도록 처음에는 두 세 사람에게 지혜와 사랑을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공동체 전체의 지혜와 사랑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 단계를 다 거쳤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인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단히 결함이 있는 사람이기에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교정의 대상 밖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랑을 거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는 교정의 대상 밖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 교정의 대상으로 내어 놓는 것이고 하느님께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둘이나 셋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독서> : 이마에 새겨진 구원의 표 -경규봉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종류의 우상으로 인해 더럽혀져 있었다. 예언자는 이렇게 더럽혀진 성전이 파괴되고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 백성이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한다. 남자 여섯이 손에 망치를 들고 북쪽 높은 문으로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사제의 옷을 입고 있었고 필기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한다(창세 4,15의 카인의 표; 출애 12,7.13의 이스라엘 집의 표, 묵시 7,3. 14,1의 이마의 표 참조).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표가 없는 이들에게는 재앙을 내린다(출애 12,23; 2사무 24,16; 묵시 7,1-3 참조). 이리하여 성전은 부정한 시체로 더럽혀지고(레위 21,1; 민수 19,11)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난다.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멸하시는 환상을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새롭게 태어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백성을 멸망시키시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도시라고 믿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멸망당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사람이 그럴진대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유다 백성을 멸하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죽하시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백성을 선택하는 기준을 만드셨는데, 그것은 이마에 하는 표였다. 묵시록(7,2이하 참조)에서 하느님의 종들에게 도장을 찍는 것처럼 천사들은 하느님 백성의 이마에 표를 하였다. 그래서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았지만,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은 모두가 죽었다. 노인도, 장정도, 처녀나 부인도, 심지어 어린이까지도 죽음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이마에 찍힌 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한 사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 표는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을 뜻한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뜻하며, 우상숭배를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을 뜻한다. 즉, 멸망의 기준은 하느님 백성에 속했는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루가 17,34-35) 하고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는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 옆에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갔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예수님 옆에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랐는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는가? 다른 어떤 것, 세상 것이나 우상이나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지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맡겼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오늘 과연 나는 하느님의 표를 이마에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자.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주님처럼,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형제의 잘못을 일깨워주는 방법 -김경욱 신부-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던 복음말씀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나와 남이 다른 이유를 말할 때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 내가하면 구국결단 남이 하면 야합' 등으로 표현하듯이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의 처지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기적인 관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형제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일깨워주는 방법을 나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통된 관점 그리고 교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혼자만의 의견으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신자답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형제가 있으면 나무라고 깨우쳐 주도록 해야합니다.
그러나 자칫 우리는 형제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단정짓는 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는 분명히 틀린 일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유가 있을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자세로 형제를 대한다면 분명히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형제를 일깨워주는 방법을 단계별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대일의 대화를 통한 일깨움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방법으로 즉 형제적인 사랑으로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제 3자를 통해서 그 잘못을 알려주곤 합니다. 여론을 형성해서 그가 잘 못되었음을 두루두루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단둘이 형제적 사랑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진실한 자세로 그를 깨우치게 하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의 깨우침을 그가 듣는다면 분명히 그를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조언을 듣지 않을 때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여러 형제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여러사람이 무리를 형성해서 압력을 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자세로 형제를 대하고 형제를 얻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한다는 점이 중요한 뜻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이름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바로 세 번째 방법은 교회 공동체에 그의 잘못을 알리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잘못을 깨우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단계로 공동체에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깨우친다면 분명히 그는 회개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방법과 순서를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누가 잘못했다고 하면 바로 교회에 알리고 그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는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너는 잘못되었다. 인정해라'하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용서와 사랑으로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단죄와 판단으로 갈라짐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심과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요즘 세상은 조그만 잘못도 남이 하면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큰 잘못은 깊은 곳에 감추고 위장하는 세대입니다. 여러 사람 그리고 교회의 입장에서까지 형제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우리가 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지금 이순간 관계가 멀어진 형제들을 사랑과 이해의 마음으로 서로 입장차이를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도록 해야하겠습니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 자신과 멀어진 형제를 찾아가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눈빛이 아름다운 배우로 프랑스의 이자벨 아자니가 선정된 적이 있습니다(저는 솔직히 이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찾아보세요.). 그런데 이 배우의 눈빛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너무나 어이가 없네요. 글쎄 시력이 극도로 나쁘기 때문에 눈빛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즉, 흐리게 보이는 세상을 흐린 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눈빛이 신비롭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랍니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사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안경을 벗고서 물건을 볼 때면 어떤가요? 눈을 찡그리면서 억지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얼굴이 주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흐린 모습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초점이 맞지 않아서 오히려 신비한 눈빛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모네는 말년에 점차 시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그 흐린 시력으로 본 정원을 그대로 받아들여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그렸지요. 그래서 그때 그린 ‘수련’이란 작품은 모네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흐리게 보이는 세상도 있는 그대로 볼 때, 스스로 신비롭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흐리게 보이는 세상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이 점은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친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게 도움이 되는 그 친구의 어떤 면만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내게 도움이 되는 면만을 찾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볼 때 눈을 찡그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이렇게 찡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점점 추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봐주라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용서인 것이지요. 물론 이 용서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나의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불행해질까요? 아니면 세상이 ‘네가 그 사람을 미워하니까 혼내줄게..’. 라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변화되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내 마음의 눈이 찡그려지면서 점점 보기 싫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적합하게 살고 있을까요? 나의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여 봅니다.
화내면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고 하지요?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 않게 합시다.
빠다킹 신부
교회의 역할
-김광태 신부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이란 말로 시작된 권고 내용을 읽으면서 좀 갑갑한 느낌을 받습니다. 문맥을 보아 하니 죄를 짓고서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경우를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고집부리는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본들 결과는 뻔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말을 들으려 하지 않다가 나중에수긍하게 되었다 한들, 그걸 어떻게 진심어린 통회라고 볼 수 있을는지요. 잘못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겠지요. 그런 점에서 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일찍 포기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편하긴 한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 전체가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일이 아니었던가요? 성경의 역사는 인간 안에서 한 일을 주목해서 보면 죄의 역사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바라보면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며 죄를 지었고, 하느님은 그런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사람은 물론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쉽사리 포기해서 안 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죄인인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김흥주 신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병폐 가운데 하나인 철저한 개인주의 현상은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 성당 열심히 다녀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신앙 모습이 만연되어 가는 현실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말이 무색할 따름이다. 분명 구원의 은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하느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도와가면서 함께 차지해야 할 목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며,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짓거든 그를 타일러 주라고 하시면서 혼자서 안 되면 여럿,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 모두가 나서서라도 타일러 주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물론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 혹은 스스럼없는 절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의 죄나 허물에 대해서 타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이웃 형제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해서 타일러 주고 충고해 주어 올바르게 이끈다는 것은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큰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충고해 주고 충고를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바로 참다운 교회 공동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형제 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그런 사랑의 마음이 함께 모여 있는 곳에 예수님, 당신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바로 그런 사랑의 마음을 모아 구하는 것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양승국신부-
<단죄나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
살아가면서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개인에게나 공동체에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는 형제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대체로 정면 돌파하기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직면하기를 두려워봅니다. 대신 뒤에서 수근 거립니다. 그러다보니 때로 본인은 그 심각성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① 먼저 단 둘이 만나 충고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진지함입니다. 애매모호하게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노하지도 말고 적개심을 지니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상대방을 심각한 죄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형제적 사랑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② 개인적인 형제적 충고가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 증인을 데리고 갑니다. 증인을 데리고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명, 혹은 세 명이 가서 충고할 때 때로 먹혀들어갈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식선에서 해결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준비과정이겠습니다.
③ 이런 노력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교회에 알립니다. 교회의 합법적 권위에 이런 문제를 알려서 더 이상 공동체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한 형제의 잘못을 교정하는데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밟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형제에 대한 단죄나 심판을 함에 있어서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입니다.
법적인 절차를 밟기 이전 가급적 인간적, 형제적 방법으로 해결을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 형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개인적으로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종 판단은 하느님의 대리자인 교회 권위에 유보하라는 권고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이 어떠하든 오직 사랑해야할 의무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쉽게 단죄합니다. 판단합니다. 돌아서서 욕합니다. 한 형제를 합법적 권위로부터의 판결을 받기 이전부터 완전히 매장시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기 위해, 그릇된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생명의 길로 건져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의 요지입니다.
잘못한 형제를 향한 충고나 교정, 격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 그래서 삶의 질이 점점 향상되는 공동체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한 모습입니다.
형제적 충고를 열린 마음,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는 공동체, 한 형제가 어두웠던 지난 삶을 접고 새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끝까지 화해하지 않고, 형제적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서로 고소하고, 교회 권위자의 힘까지 빌려야 하고, 결국 함께 법정에까지 서야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지옥의 한 모습입니다.
공동기도의 중요성
-이수철신부-
‘형제’ ‘자매’라는 말 자체가 공동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나 공동체에 속해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깎이고 닦여야 내적 성장과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공동체 체험의 부족으로 인해
점차 사람들도 개인주의화 되고 이기주의화 되는 작금의 현실 같습니다.
가톨릭의 영성은 공동체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 수도공동체만 해도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매일 공동미사와 공동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저절로 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런 끊임없는 공동 수행이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어 줍니다.
오늘 복음도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개인 관계는 물론 공동체를 파괴하는 암세포와도 같은 죄입니다. 우선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죄를 깨우쳐 해결을 시도하되,
이게 안 될 때는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다가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의 말도 듣지 않을 때는
공동체로부터 축출해도 된다 합니다.
1독서의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죄의 결과가 공동체에 얼마나 심각한 손상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죄악이 만연하자
하느님 몸소 징벌을 선언하시며 예루살렘 도성에 개입하지 않습니까?
나라 공동체나 가정공동체, 수도공동체의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밖의 침입으로 보다는
거의 대부분 안에서 죄로 관계가 파괴되고 썩어갈 때 무너집니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도 있듯이,
개인적 감정에서가 아닌 공동체가 내린 결정이라면
그대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공동체의 결정은
그대로 하늘에서도 유효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지혜로운 결정을 위해
공동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
하느님은 공동체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심은 물론,
올바른 결정의 지혜도 주십니다.
새삼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 청원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아멘.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양승국신부-
<당당한 직면>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마음씨 착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가 과연 무슨 일로..."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그들과 대화를 풀어나가다 보면 다들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수감생활의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내심 부족", "한 순간의 실수"입니다.
다들 어찌 의리 있고 듬직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욱" 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지요.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에 하나가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컨트롤해나가던 우리지만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지 않습니까? 평소에 그리도 여유 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 순간에 내적인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기 시작합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 상태는 비정상 상태이지요. 아이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여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못합니다.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게 되고, 주변에 누가 있건 말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템포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 마디로 얍쌉하고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꺼내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혹시 오늘 시간 좀 있으세요?" "오늘 내가 술 한잔 살까?" "내가 커피 한잔 살게."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을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다시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미성숙한 대화기법이나 대화문화로 인해 의외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바로 예수님의 대화기법-가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합니다.
공동생활 안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상처는 상호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의 활동장소로 선택하십니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박상대신부-
마태오복음 18장이 전하는 공동체설교에는 모두 7개의 교회규범이 들어있다. 그 7개를 차례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②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③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④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 ->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삽입(12-13절), ⑤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15-17절) -> 매고 푸는 권한 확대(18절), ⑥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19-20절), ⑦ "몇 번이고 용서하라"(21-22절) -> 무자비한 종의 비유 삽입(23-35절). 오늘 복음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는 것과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복음의 두 규범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규범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가 단둘이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다. 여기서 "너"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잘못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잘못이다. 물론 한 신자의 모든 잘못은 그것이 공적이건 사적이건 간에 교회 전체와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과 관련이 있다. 잘못을 한 형제가 타이르는 말을 들으면 일단 거기서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말을 듣지 않을 경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복수증인을 택하라는 것이다. 증인을 복수(複數)로 택하라는 지시는 이미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관습이다.(신명 19,15) 죄인이 증인들의 말도 듣지 않을 경우는 3단계로 넘어간다. 즉 교회 앞에 데려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의미하는 지역교회를 말한다. 죄인이 교회당국의 말도 듣지 않으면 최종 단계로 넘어간다. 최종단계는 죄인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 지역교회에서 추방하거나 파문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로마제국을 위한 세리들을 업신여기고 냉대하며, 그들과 절연(絶緣)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였다.(마태 5,46-47; 6,7 참조)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태 11,19) 교회당국이 최종적으로 죄인을 추방하고 파문하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마태 16,19)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오는 이 권한을 제자들 모두에게 확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 전체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18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잘못한 사람을 단죄(斷罪)하는 일은 이미 산상설교를 통해서 금지되었다.(마태 7,1-5) 그 이유는 자신도 단죄 받기 않기 위함이며, 하느님 앞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확대시키는 것은 그 권한을 제한하려는 역설(逆說)이다. 내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매거나 푸실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비록 자신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 죄인을 다루는데 1~3단계의 과정을 제시하고 최종단계로 파문을 지시하고 있지만, 마태오 자신은 공동체 안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을 바로잡아 주라"는 규범은 "둘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과 연결된다. 즉 죄인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19-20절) 따라서 둘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아버지께 청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예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는 의인들과 선인들이 많다. 하지만 지상교회는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공존한다. 누가 죄인인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다. 교회의 의인들은 보통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죄인들뿐이다. 따라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죄인들을 골라 최종적인 처방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인 자신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함께 모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안에 오로지 의인이신 예수께서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꼭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비는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20)
-유 광수신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이 겪게 되는 경우이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나는 어떻게 하는가? 지금까지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 아닌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우선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를 반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보통 나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고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일러주는 말씀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 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형제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그 형제가 상처를 입은 채로 그냥 놔둔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나는 그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먼저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해야지, 내가 먼저 그 형제를 용서해주거나 타일러 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상대방이 와서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할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든지 상처를 받고 있는 상태인데 "나 몰라라."하고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 모릅니다."(코전 13,5. 6-8)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죄를 지음으로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를 다시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 복음에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산에 둔 채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행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18,14) 원치 않으신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기 위해서 나는 가서 그를 타일러 데려와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가 아니면 이웃이 잘못했을 때 타이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공동체가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보다 나은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용서받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일 죄를 지은 형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타일러 데려오지 않으면 그를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를 소외시킴으로서 공동체는 분열되고 미움이 싹트고 형제적 사랑은 메말라갈 것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도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다. 즉 가능하다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이고 존경의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나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그에게 가서 화해하거나 조용히 이야기해서 서로의 오해를 또는 미움을 풀도록 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본인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풀도록 하고 남들에게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들과 만났다하면 다른 사람을 흉보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또 무척 재미있어한다. 참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다. "타 이르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꾸짖으라는 말이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레위 19,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말해야 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좋은 말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타이르러 갔다가 화해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지고 올 때가 있다.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말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말을 하러가기 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타이르러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마음이 진정이 되고 정말 용서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사랑의 언어와 행동으로 타이르도록 하자.
단 둘이 만나서 잘 안될 때 왜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야 하는가? 우리가 혼자 가서 안 될 때 상대방을 잘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든지 아니면 중간에서 서로 오해를 풀게 해줄 사람과 함께 가게 되면 쉽게 용서해줄 수 있고 또 오해를 풀 때가 있다. 또 그렇게라도 안되면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 아니면 교회 법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죄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 하는가? 즉 최선을 다 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풀어주지 않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잃어버린 양은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고 푸는 열쇠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고 풀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나의 몫이다. 아직도 내가 풀어야 할 사람이 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 서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 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보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두십시오."(야고 5,19-20)오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화해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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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