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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신자다운 한마음과 한뜻.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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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신자다운 한마음과 한뜻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읽으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너무 아름답게 또 이상적으로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뭣일까도 생각되었습니다.
한통속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걸까요?
우리는 감으로 압니다.
이 말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쁜 쪽으로 하나가 될 때 보통 이렇게 한통속이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고 함은 이런 뜻이 아님은 분명한데
신자들이 서로가 자기 뜻을 꺾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뜻이겠습니까?
이런 뜻이 없지 않지만
이런 한마음과 한뜻은 되기도 쉽지 않지만
될 수 있더라도 오늘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런 것뿐이고 이런 정도라면 신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은 완전한 일치일지라도 신자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한마음과 한뜻은 하느님 뜻과 한마음 한뜻이어야겠지요.
그래서 서로의 뜻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하느님 뜻에
모두 각자가 맞추다 보니 서로도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리고 재물만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아 공동소유가 되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 뜻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추다 보니
공동의 마음과 뜻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합니까?
우리 공동체에서 자주 하느님 뜻을 빼놓고
한마음 한뜻이 되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도 한마음 한뜻이 되는 그런 공동체를 감히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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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탄광촌을 방문한 어느 젊은 신부가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신부는 어둡고 더러운 갱 안의 통로에서 아름답고 하얀 꽃이 자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광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커먼 탄광에서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광부는 “검은 탄가루를 꽃에 부어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그 광부의 말대로 했더니 신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탄가루가 꽃잎에 닿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꽃잎 표면이 너무 매끄러웠기 때문에 탄가루가 꽃잎에 붙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매끄러운 꽃잎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하얀 꽃이 우리 마음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으로 인해서 세상의 모든 악이 들러붙지 않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에 붙어 있는 각종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죄들이 왜 이렇게 계속 남아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똑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었던 죄를 반복해서 짓곤 합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깨끗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죄악의 들러붙었던 것이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자기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길 원한다고 요구하면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니코데모도 알아듣지 못하지요. 세상의 지식만으로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으며, 오로지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온전하게 맡기는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올렸을 때 뱀을 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믿고 바라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자기 힘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똑똑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좀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져서 죄가 더는 들러붙지 않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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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위대한 성과는 힘이 아닌 인내의 산물이다(새뮤얼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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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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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주변의 벚꽃, 조팝나무, 철쭉, 영산홍, 꽃잔디, 민들레꽃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솔잎 꽃도 너무도 이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핀 꽃이지만 곧 다음을 준비하며 시들해질 것입니다.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누구의 인정에 개의치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영양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생기가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성장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밑거름이 부족하고 웃거름만 넘치면 일시적인 효과에 웃자라고 제때에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웃거름은 겉만 다스리지 속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웃거름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 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 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가장 완벽한 기도는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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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의 구조를 바꾸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유와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류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고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달콤한 열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같은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 지고 있습니다. 철학, 문학, 예술, 인문학, 종교라는 인류의 유산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갈매기의 꿈’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갈매기가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갈매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입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사랑하는 갈매기와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갈매기와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매기의 고통, 자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는 갈매기의 고통을 깊이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그런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갈매기입니다. 이 갈매기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공감, 겸손, 회개, 식별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갈매기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소크라테스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매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혁명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처럼 예수님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명성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온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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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과연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 같은데 말로 설명하자니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났고 세상에 나와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태어남이라는 것을 경험했지만 영적인 태어남은 다른 것 같습니다.
세상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영적인 태어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은 세상 것을 걱정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걱정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걱정하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그저 기뻐합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이미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 따라 살려 노력합니다. 물론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하기에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느님 자녀라고 불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선함이 있고 그분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 삶의 방향이 되어주고 그분 선함은 그 방향으로 걸어갈 힘이 되어줍니다.
들어 올려지는 사람은 영예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순명한 사람,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즉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악을 끊어버리고 선함을 심장에 담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힘내십시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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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땅과 말랑한 땅
메마른 땅
건조해 갈라진 땅
딱딱한 땅
그런 땅에는 아무리 물을 부어도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버립니다.
부드러운 땅
뒤집어 놓은 땅
뽀송뽀송 말랑한 땅
그런 땅에 물을 부으면 이내 땅속으로 물은 사라집니다.
오늘 주님께서 물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마음 땅 위에서
그냥 흘러버리지 않기를….
가끔 기도라는 삽 들고 호미 들어 우리 마음 마르지 않게 속아놓는다면 주님 주시는 물 이내 우리 속 생명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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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63,2)
오늘 화답송 시편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공통적 진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4월2일 부활 축제 팔일 화요일에 선종한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 노트커 볼프 아빠스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이야말로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회 역사에 전설과 신화가 된 참 걸출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부활 팔일 축제중, 이탈리아에서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일행과 함께 하던 아빠스님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자 급거 귀국,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룻밤을 묵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득 아시아에서의 베네딕도회 모임차 순례 여정에 올랐던 트라피스트회 수도승 토마스 머튼이 방콕의 자신의 방에서 1968년 선종하신 사건이 연상되었습니다. 두분 다 길에서 태어난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니 길이신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분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예수님의 제자답게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다운 삶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순간 아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란 말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었던 노트커 아빠스님의 생애를 일람했을 때 느낌은 정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이셨구나, 매일 하루를 끝낼 때 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고백이 뒤따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노트커 아빠스님은 사부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의 순례 여정중 주님의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선종하신 것입니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에 돌입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아빠스님이요, 아니 이미 살아 생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영생의 삶을 사셨던 아빠스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영적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늘 여기 오늘 지금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요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함을 배웁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에 관해 참 많이 말합니다만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최종 시험에 해당되는 죽음이요 그 시험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짧은 구절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합니다. 이런 죽음의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라틴어 경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라”는 말입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을 보면 하루하루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940년에 태어나 2024년 선종시까지 84세까지, 저보다 9세 연상이셨지만 그 삶의 질이나 삶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3년동안 오틸리엔 수도원은 물론 오틸리엔 연합회를 책임진 최고의 장상이었고, 이어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로 4차례 16년 동안 연임하셨으니, 무려 39년 동안 최고 장상이 되어 한결같은 열정을 쏟으신 것입니다.
아마 아빠스님처럼 선교 여행을 많이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친화력에 참 자유로운 분이셨고,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안에 정주한 베네딕도회의 전형적인 선교 수도승 아빠스였습니다. 아빠스님에 대해 평전이 나온다하면 스토리와 컨텐츠가 참으로 풍성한 대 서사시 같은 한권의 성서같은 평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베드로의 깨달음은 노트커 아빠스님의 깨달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를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수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친교를 나눈 아빠스님이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었고 타고난 선교사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처럼 노트커 아빠스 역시 “보편인(universal man)”이자 “세계적인 수도승(grobal monk)”이었습니다.
수도승들에게 은퇴란 없고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역으로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만이 있을뿐이요 선종시까지 이의 모범을 보여준 영원한 현역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장상직을 내려 놓은 후 고향집같은 오틸리엔 수도원에로 돌아가신후에도 눈부신 활약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모든 공직을 내려놓은후 오틸리아 수도원에 귀원후, 흡사 추도사처럼 생각되는 일부 활동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도원의 미래 계획, 기금 모음, 대중 연설등의 분야에서 수도원에 관여하였으며, 공동체 토론에서 항상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또 강연,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출연, 피정, 전례, 각종 행사등 독일과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상적이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철두철미 자기훈련과 동료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큰 기대감 때문에 때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관리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영감과 기쁨을 주었기에 그의 거대한 프로그램은 항상 그에게 삶의 영약(靈藥)이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가 받은 30개가 넘은 영예와 상 중에서 바이에른 공로 훈장, 독일 연방공화국 대십자 훈장, 바이에르 주 사회 공로 훈장, 두 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그뢰넨 바흐등 여러 명예 시민권등 참으로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고인이 생전에 뿌린 많은 씨앗에 감사드리며, 그의 마지막 위대한 여정이 그가 평생 동안 선포한 그 길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저절로 노트커 아빠스님을 통해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그대로 노트커 아빠스님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노트커야!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립시다.
“주님, 노트커 아빠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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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새로 태어나야지요>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선하거나 악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선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곧거나 굽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곧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따뜻하거나 차갑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따뜻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부드럽거나 거칠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부드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밝거나 어둡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밝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아름답거나 추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아름답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사랑스럽거나 얄밉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사랑스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너그럽거나 게걸스럽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너그럽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참되거나 헛되게
사람이려면
오롯이 참되게
태어나야지요
모든 사람이
늘 새로
태어나지요
하느님을 따르거나 거슬러
사람이려면
오롯이 하느님을 따라
태어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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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시기 전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봉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 시기에 읽었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면서 최고 지도층 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 하늘로 올라간 이”이심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의미는 해당 그리스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노쎈’으로, ‘오래전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도 있으며, ‘처음부터’라는 뜻은 ‘하느님에게서’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에 읽었던 이 내용을 부활 시기에 다시 읽는 이유는, 부활이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은 다릅니다.
‘태어남’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다시 태어남’은 참된 구원을 선택하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이 ‘다시 태어남’의 본보기를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여 줍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을 증언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변에 궁핍한 사람이 없게 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모두 큰 은총을 누립니다.
덜 교만할 때 덜 고집스러워지고, 덜 고집스러울 때 덜 두려워하게 되며, 덜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곧 부활의 삶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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