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극장을 다녔다는 그녀. 김수지라는 예쁜 이름을 두고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 사람’ 이란 뜻의 심영섭이란 필명을 쓸 만큼 영화를 사랑한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한양대 신경정신과에서 인턴을, 백병원 신경정신과에서 레지던트를 마쳤다. 98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을 계기로 평론가의 길로 들어선 후 날카로운 20자평과 정신분석을 도입한 영화해석으로 일약 스타 평론가가 되었다. 영화와 글쓰기,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시너지로 ‘시네마테라피’라는 소명을 깨달은 그녀는 영화를 통해 영혼의 고통을 치료하는 상담센터이자 연구소인 ‘사이’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대구사이버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여전히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는 평론집 <영화, 내 영혼의 순례> <심영섭의 시네마싸이콜로지>와 에세이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 등이 있다.
Apple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면서 또 영상치료센터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영상치료는 선생님이 갖고 있는 영화와 심리학이라는 자본을 사회로 환원하는 셈인가요?
Shim 예, 저는 원래 여자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글을 쓰고 있고요. 제가 쓰는 글들을 실제 삶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면 이 연구소가 그 고민의 결실일 거예요. 찾아오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근데 대개는 다 여자들이에요. 그만큼 힘든 여성들이 많다는 거겠죠?
Apple 나무로 만든 창가의 인테리어가 참 특이하네요. <br>Shim 나무가 많으면 상담할 때 도움이 된다고 제 친구가 인테리어를 해줬어요. 화분을 잘 못 키우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각목 같은 걸 세로로 세워 분위기 있게 연출해줬어요. 나무가 있으면 마음이 훨씬 더 차분해진대요. 상담할 때 물 같은 것도 옆에 두면 좋다고 하더라구요.
Apple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심리학과 영화치료를 접목하셨는데요.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Shim 맨땅에 해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때도 있었어요. 5년 전쯤, 영화 정신분석 검색하다가 인터넷에 ‘시네마테라피’라는 게 떴어요. 그 순간 제 마음에 등이 하나 딱 켜지는 것처럼 바로 이거다, 이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한테 영화도 하?심리학도 하게 했나보다 라는 어떤 소명의식 같은 걸 느꼈어요. 근데 막상 하려니까 너무 답답했어요. 처음에는 목록식 접근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상담으로 영화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구요. 박사학위를 이걸로 한다고 했을 때 다행히 지도 교수님이 지지를 해주셨어요. 안 그랬으면 못 했을지 몰라요. 국내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너무 낯선 분야인데다 전세계적으로도 예술치료 중에서 영화는 가장 나중에 연구되었으니까요. 지도 교수님RP서 이 논문이 날개가 될 거니까 열심히 해보라고 해서 한 2년 정도 영화치료 검증을 했고, 학위가 끝나자마자 운 좋게 대학 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Apple 외국유학은 안 가신 건가요?
Shim 전 외국에서 공부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임상심리학은 외국에서 공부한 사례가 드물어요. 석사 끝나니까 현장에 나가야 했고, 현장에 나가 레지던트하고 자격증 따다보니까 그 다음에 국내에서 학위를 따게 되고 그랬어요. 언어 장벽 문제도 있고 해서 상담과 임상 쪽은 외국에 별로 안 나가요.
Apple 영화 평론 쪽에는 유학파가 많잖아요?
Shim 네 맞아요. 저희 남편도 그래요. 영화를 하니까 언어가 중요하더라구요. 그래서 영어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직까진 서바이벌 잉글리시로 버티고 있습니다.
Apple 소명의식이라고 하셨는데요. 종교가 있으신가요?
Shim 예전에 가톨릭 신자였어요. 사실은 이혼할 때 그 종교가 굉장히 억압적인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특히 여성의 삶에 있어서요. 만약에 여자교황이 선출되면 그때 다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에요.
Apple 여성문제에 특별히 천착하시는 그럴만한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Shim 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거 같아요. 저희가 3남매였는데 공부를 제가 제일 잘 했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공부하는 걸 반대는 안 하셨지만 그렇다고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밀어주시지도 않았어요. 장학금을 탈 수 있으면 가봐라, 그렇지만 우리가 유학을 보내줄 수는 없다. 그러셨죠. 그런데 제 동생은 유학을 보내주시더군요. 제 동생은 남자였기 때문이겠죠? 그런 일들 경험하면서 많이 아팠어요. 지금은 부모님이 그러시는 거 부모님의 연배에서는 그게 이해가 되는 일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때는 힘들었어요.
Apple 선생님을 뱃속에 임신하고 있을 때부터 극장에 다니실 정도로 생을 즐길 줄 아는 어머니와 아버님이 그런 남녀차별을 하셨다구요?
Shim 그럼요. 사람이 굉장히 다면체인 것이죠. 대학 다닐 때도 제가 홍일점 야구선수였는데 우리 과 남학생들이 ‘너 그렇게 야구 좋아하고 야구 방망이 들고 다니면 쓰리랑 부부의 김미화처럼 된다. 시집 못 간다.’ 그랬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잔디밭에 드러누워 있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 잔디밭에 누워 있는데 지나가던 제 남자친구가 노발대발 화를 내는 거예요.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서 치마 입고 다리 내놓고 왜 누워 있냐고요. 그 좋은 봄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자유, 그런 게 허용이 안 되는 거죠. 여자라서. 제 삶에서 잊혀지지 않는 아픔 같은 거죠. 그런 정서들이 마치 제가 부모님한테 영화에 대한 걸 물려받듯이 제 안에 자생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Apple 상담센터엔 주로 어떤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Shim 여성이나 청소년이나 외국인 노동차처럼 주변부적인 사람들, 또 쉽게 상처받을 수 있거나 또 시스템 안에서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이 와요. 청소년들은 교육제도에,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또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의 편견에 노출되어 고통 받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 십자가가 있는 사람들이죠.
Apple 왠지, 이런 치료는 비쌀 것 같은데요.
Shim 여유가 되는 분들한테는 그렇게 받고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안산프로젝트는 정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요. 상황마다 달라요.
Apple ‘사이’를 오픈하고 정확히 1년이 지났는데요. 이제 자리를 좀 잡았나요?
Shim 영화치료라는 개념이 씨를 뿌리게 된 거 같아요. 많은 이들이 상담할 때 영화를 사용할 수 있다든가, 기업체 연수를 할 때 영화로 한다든가 그런 변화를 많이 보고 있어요. 사실은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기 오기까지가 굉장히 어려운 분들이에요. 많은 여성과 청소년들이 과천, 인천, 일산 등 멀리서부터 찾아와요. 왜 오겠어요? 너무나 절박해서 오는 거죠.
Apple 영상치료효과가 눈에 보일만큼 드러나나요?
Shim 최근에 저희가 안산에서 다문화 가족 프로젝트를 했었어요. 문화장벽이 있고, 가정폭력이 심한 집이었어요. 그분 같은 경우, 치료가 끝나고 다큐를 찍었는데, 저도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편이 많이 바뀌었고, 또 아내도 자기가 바뀌어야 남편이 바뀐다는 걸 알게 됐어요. 폭력적이던 남편이 아이한테 책도 읽어주고 가족 야유회도 가고 그러더군요. 그런 걸 보면 참으로 놀랍죠. 물론 지금 당장 변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상담이라는 씨앗을 통해, 결국 그 사람 마음 안에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그런 거 같아요.
Apple 글도 쓰시고, 각종 매체 인터뷰도 하시고 차분히 남의 형편에 귀 기울이는 게 상황적으로 여의치 않을 것 같아요.
Shim 일들이 요일별로 나누어져 있어요. 학교 가는 날은 학교만 가고, 인터뷰는 또 다른 날, 여기서 상담하는 날은 상담만 해요. 연구소에 다른 연구원들도 있으니까 같이 하고요.
Apple 98년 <씨네21>의 영화평론가 공모전을 위해 밤새워 글 쓰던 그날 밤의 치열함에 대해서 들고 싶어요.
Shim 제가 이혼하고 애를 들쳐 업고 집을 나왔는데 직업소개소를 갔더니 학원강사 자리는 없고, 술 따르는 자리는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제가 참 흥미로왔던 게, 여성의 육체가 이렇게 즉각적으로 자본화될 수 있구나 하는 경험을 그때 했어요. 그 경험이 나쁘지 않았어요. 내가 내 힘으로 살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결심을 한 거죠. 그 무렵, 씨네21의 영화평론가 공모전 광고를 봤어요. 상을 받으면 상금이 있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썼죠. 글 쓰는 일 자체가 저한테는 치유였어요.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던 시간에 세상을 잊어버리고 싶었으니까 대단히 치열하게 썼어요. 또 나름대로 목적도 있었어요. 정말 간절히 평론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직업소개소 간 후 몇 달만에 평론이 당선됐었어요. 제가 참 운이 좋은 거죠. 저는 미혼, 기혼, 재혼, 이혼 과정을 다 겪어봤고, 그때마다 첫 결혼에선 동성동본 때문에, 두 번째는 스탭패밀리로서의 어려움을 안고 시작했어요. 제 나름대로 여성이 거칠 수 있는 거의 모든 단계를 거쳤어요. 그거 역시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시련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단계를 거치면서 제가 강해졌고 지혜를 얻었으니까요.
Apple 전공도 안 했는데 공식적인 첫 평론으로 상을 받았잖아요. 선생님께 글쓰기는 어떤 건가요?
Shim 아주 재능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글 쓰는 걸 좋아했고요. 백일장에서 상을 받거나, 일기를 잘 써서 교내에 전시되거나 교지 기자를 한다거나 글과 연관된 일들을 알음알음 했었죠. 어려서부터 책벌레였어요. 책과 영화를 통해 상상하는 게 좋았거든요. 현실을 까먹을 수 있는 일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Apple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것 같은데 굳이 영화나 책 속으로 달아날 이유가 있었나요?
Shim 구체적으로 집이 어때서가 아니였구요. 정신적인 고아 같다고 할까. 집안은 다 이과계통이었구요. 할머니가 그 옛날에 경성사범 나오셨고,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파여서 어려수부터 책이나 영화 같은 거 접하기 쉬운 환경이었지만 부모님은 철학이 분명하셨어요. 대학 가면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한다고 하셨죠. 또 친구들하고 얘기하면 채워지지가 않는 게 있었어요. 저는 사실 어느 떡볶이 집이 맛있는지 아는 게 카리스마의 근원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친구들은 치맛단 접어 입으며 멋 내거나, 선생님을 좋아한다거나 하는데 저는 그런 데 큰 쾌락이 없었죠. 지적인 호기심이 많아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책을 누군가와 맘껏 얘기하고 싶고, 얘기가 좀 더 통했으면 좋겠다는 갈증 같은 게 있었는데 채원지지 않으니까 현실 속에서 고아 같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게다가 집에서 의사가 되라고 해서 대학을 이과에 갔어요. 그러다보니까 더욱더 그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해결이 안 되니까 대학 다닐 때 어느 날 야구반에 든다든가 확 아웃소싱 해버리는 거죠. 결국 오래 돌아서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온 거 같아요. 아마 나한테 다시 공부하라고 하면 문학을 할 거 같아요.
Apple 안 하고도 이미 너무 잘 하시면서... 실제로 그렇게 상상력이 뛰어나고 많은 영화를 봤다면 이젠 직접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으세요?
Shim 사실 제 40의 화두가 그거예요. 세상의 요구와 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요구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 영화보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내 영화를 만들려면 영화 보기를 멈춰야 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Apple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세요?
Shim 세상엔 남자 판타지에 관해서 만든 영화가 많은 것 같아요. 여성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거나 성차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뛰어넘은 그런 영화를 만들거 싶어요.
Apple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제목을 하나 고르라면?
Shim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런 제목이 너무 좋죠. 파스빈더 영화나 브레송 영화도 좋아해요. 다르덴 형제나 초월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가 아름다운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영화일수록 치유적인 것 같아요.
Apple 그런데 그런 영화들이 잘 알려져있지를 않잖아요.
Shim 남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영화는 천 개의 거울이고 그 안에서 어떤 걸 볼 지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죠.
Apple 선생님은 대학에서 영화를 강의하는 남편과 스탭패밀리를 이루신 후에 그 어느때 보다 행복해 하시는 것 같은데요. 댁에서는 영화를 육아에도 활용하시나요?
Shim 참 특별한 질문이네요. 아니에요. 영화도 보여주지만 동화책을 더 강조해요. 큰애는 이과기질이 있는데 제 역심만큼 읽지를 않아요. 저는 잠자기 전에 매일 책을 다섯 권씩 읽어줘요. 저는 아이들에게 갖고 있는 원대한 꿈이 매를 안때리는 거와 책을 많이 읽히는 거 두 가지예요. 매를 안 때리는 건 하겠는데 책을 많이 읽히는 건 어려워요. 책 읽기를 해야 자기를 표현할 수 있고 그래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Apple 어머니가 영화 좋아하는 유전자를 물려주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Shim 저희 어머니는 굉장히 굳세고 명랑하고 쾌활하고 순진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어머니 방식으로 평생 저를 사랑해 오셨고요. 굉장히 헌신적이세요. 어렸을 때 <메리 포핀스>라는 영화를 엄마와 함께 보게 됐는데 그날따라 안경을 안 갖고 간 거예요. 저희 엄마가 두 시간 동안 그 영화 대사를 제 귓속에 다 읊어주셨어요. 상상이 가세요? 그렇게 열정적이셨어요. 지금도 그러시고, 저에게 영화에 대한 뜨거움이 있다면 그건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게 틀림없을 거예요. 제가 5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포대기에 애 들쳐 업고 왔을 때까지, 제가 쓰던 방을 결혼 전 그대로 두신 분이었어요. 책상, 일기, 책들 모두 그대로인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참았던 울음과 마음 밑바다에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물밀듯 밀려왔어요.
Apple 선생님은 워낙 지명도가 높은 평론가라 독립영화를 위한 어떤 제언을 한다면 영향력이 클 것 같아요.
Shim 그렇잖아도 독립영화 살리기 서명운명 하고 있구요. 저희 연구소 회원들한테도 서명해 달라고 보냈어요. 그리고 KBS 독립영화관이란 프로그램이 폐지위기에 있는데 그걸 필사적으로 막아보려고해요. 텔레비전 나가서 이야기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이 자리에서 하고 있어요.
Apple 어떤 인물을 보면 저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나요?
Shim 취약한 사람들에요. 저는 그런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아름다운, 강하거나 권력지향적인 사람들보다는 영혼이 부서져 있거나 맹하거나 어떻게 저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 하는 사람들한테 더 마음이 가요. 그래서 그런가, 전 한 번도 돈 많은 사람을 사귀어본 적이 없어요.
Apple 선생님이 충분히 많으셨던가보죠.
Shim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어요. 영화를 만든다면 그러 사람들에 관하 얘기 만들 거예요.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일이 꼬이고, 그런데 죽어도 미워할 수 없고 한마디로 주변사람들한테 웬수인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거예요.
Apple 왜 그런 데 끌리나요?
Shim 제가 중심게 관한 것들을 떠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Apple 선생님이야말로 한국 평론의 중심 아닌가요?
Shim 최선을 다해 평론가로 살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 내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Apple 마지막으로 2007년도에 계획하고 계신 일들은 무엇인가요?
Shim 영화치료를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한 워크샵이 있을 거구요. 저 자신도 미국에 가서 연수를 받을 거예요. 바르기트 볼츠 선생님 찾아보고 미국 영상치료를 좀 배우고 연대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영화치료 기반을 튼튼히 하고 싶어요. 또 본격적인 연구서를 하나 쓰고 싶어요. 김기덕 감독이나 90년대 한국영화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것 같은 거요. 연구서를 통해 영화에 관해 빚진 걸 갚고 싶어요. 그 후엔 창작활동을 하고 싶은데 그 형태는 아직 모르겠어요. 전 상업영화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셀프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만들게 될 거예요.
Shim 고맙습니다. 앞으로 영화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댓글 와~우!! 울 교수님 넘 멋지시당^^ 방학이 되면 교수님이 쓰신 책을 꼭 좀 봐야겠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