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를 다녀오고>
염원이었던 광주 여행이 드디어 실현되었다. 10월 12일 저녁, 서울에서 출발한 KTX 차량은 광주 송정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젊었을 때에는 나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난 것에 무관심했다. 나이가 들면서 태어난 곳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고, 가족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젖먹이를 키웠는지 상상하게 되었다.
든든했던 것은 가이드와 통역을 겸한 이양수씨가 동행해 주고 있다는 것. 한 명 더 니시노미야(西宮)에 살고 있는 시민운동가 이노우에 준(井上淳)씨가 동행했는데, 나의 망향(望鄕)의 뜻을 충분히 만끽해 달라는 지원의 말도 얻었다.
처음에 방문한 곳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다. 사전에 연락이 돼 있어서 학예연구실장이 나서서 직접 설명해 주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혼마치(本町, 금남로) 상가의 전시물 속에 ‘동아부인상회’라는 간판이 걸어진 2층 건물의 맵시있는 양품점이 나타난 것.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감동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돌아 온 뒤, 신미나토(新湊)의 소금 건물을 오사카에 싣고, 오사카에서 헌 옷을 구매하는 암거래 장사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몇 년 후 가게를 열게 되었다. 그 가게 이름을 ‘부인상회’로 할 것을 가족에게 제의했더니, 할머니는 아주 기뻐하셨다. 할머니는 광주에서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이용했던 ‘동아부인상회’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1959년 신미나토에 가게를 열면서 분주해져 가족과 친척이 총동원돼 일했다. 선반에서는 상품이 다 팔려 떨어지고, 아버지는 바로 물건을 매입하러 달려갔다. 그 후 10세 연상의 내 누가가 가게를 물려 받았고, 2021년에 문을 닫았다. 생각해 보면 이 가게 덕분에 누나가 사립학교인 야마와키(山脇) 문화복장학원에 다녀 나도 도쿄까지 유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주는 망향에만 잠겨 있는 것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광주는 5.18항쟁에 상징되는 민주와 인권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치게 되었다. 1929년 11월, 일본인 학생들이 통학 도중에 조선 여학생들을 놀린 것이 계기로 되어, 한일 양국의 학생들의 난투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 학생들을 때리고 문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대로 끝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확산해 갔다. 수많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밀 결사 활동을 통해 조직적인 역량도 높아졌다.
통상적인 경비만으로는 무리하다고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철저한 단속으로 탄압 방침을 바꾸었다. 학생 수감자의 수가 격증하여, 광주형무소의 감방 속은 서 있을 여지도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 되었다. 고문도 자행되었다. 곤봉으로 때리는 것은 일상 다반사이고, 장작 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워 그대로 무릎을 꿇게 한 후, 그 위에서 신발을 신은 구두 발로 짓밟거나, 손톱 밑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거나 했다. 또 배가 터질 만큼 물을 마시게 하거나, 고춧가루의 물을 코에 들이 붇거나, 말로 다하기 어려운 정도의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했다.
나를 경악시킨 것은 아버지가 1934년부터 37년까지, 광주형무소의 간수를 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아버지의 기록에 의하며, 약 6000 평의 광대한 부지에, 남자 죄수 600명, 여자 죄수 50명, 소장 이하 8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과연 아버지는 고문에 손을 대고 있었을 것인가? 동행한 두 사람은 간수가 직접 하는 일은 없고, 취조는 특고 경찰이나 헌병들의 역할일 것이 아니냐고 위로해 준다. 그러나 연관될 수밖에 없는 역사와 마주치는 일을 알게 된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순진한 광주의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호소한 것에 경의와 마음속으로부터 사죄를 표한다. 함께 배상도 해야 한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조선인에 대한 보상은 모두 한일 양국 간 사이에서 해결되었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견해는 비열하고, 고식적인 주장이며,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이것을 넘어설 법이 필요하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민주 혁명이 불가결하다. 130만 명이 일어선 촛불혁명을 일본이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라도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매년 광주를 방문하는 것으로 문제를 더 심화시켜 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023년 10월 27일
- 도야마에서 고오다 가쯔시(甲田克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