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오름 뒤에
그 무슨 의식 치러야 추석명절 맞는다는 듯
우리는 일요일 새벽 서너 명이 모였다
오늘은 오름 셋 건너 으름 따러 가는 날
정오 무렵 당도하는 산마장 길 쇠물통
물뱀도 아랑곳없이 소처럼 물을 마셨다
물속의 돌가시나무 꽃 그렇게 환하더라니깐요
연못에 오줌 갈기고 흙탕물 만들고 간다
숲에 들면 우린 타잔 새소리도 쫒아보고
가끔씩 바나나 같은 청으름도 만져본다
목마름이 절실한가 배고픈 게 절실한가
집으로 오는 길에 다시 들른 쇠물통
밤하늘 으름씨같은 별들만 반짝인다
비양도 빈 항아리
가을햇살에 잘 익은 그 할머니 그 항아리
왜 내가 갈 때마다 갖고 가라 했을까
그 옛날 황포돛배가 팔고 갔단 그 항아리
황포돛대 흘러가듯 어디로 다 흘렀을까
한평생 된장담듯 숨비소리 담가 놓고
어느 땅 그 역마살을 그리워나 했을라
딱지치기
그 형과의 대결은 번번히 내가 졌다
점방하던 아버지 어떻게 알았을까
슬며시 알사탕 주고 찾아주던 아버지
한때 아버지는 뭍나들이 장사하셨다
간혹 선물상자에 보내오던 명절빔
알사탕 두 개와 바꾼 그때 그 딱지 같다
꿩아, 길 비켜다오
우리 아버지 마지막 길에 무슨 시비 거는 거니
인생사 굽이굽이 세상 빚 좀 남았다고?
이눔아 길을 좀 비켜라 털릴만큼 털렸다
천제연
누가 끌고 오다 마을 곁에 숨긴 연못
3단폭포 천제연 칠선녀도 탐났는지
그 때 그 별빛마저도 뵐 것 같은 낮이다
동박새 녹색깃털 온전히 드러낸 못물
밑으로 피었어도 햇빛 한 올 쏟지 않네
사랑은 저런 것이다 죽어도 저런 거다
우리의 연애는 그때부터 시작됐네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돌담장인 아버지
천제연 폭포소리가 동박세 울음 같네
으름꽃 등 올리시네
신물질 발멸했다는 물 건너 아들 목소리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으름꽃 등 올리시네
자배봉 뻐꾸기 소리 뻐꾹뻐꾹 등 올리시네
단풍놀이
5.16도로 남조로 건너 위미 세천포구
방파제따라 앉자마자 단풍길이 열리고
발동선 통통거리며 지귀도도 끌고온다
까짓것 첨대라야 대나무 하나면 되고
내 청춘의 무게가 실린 뽕돌도 달아맨다
물 속에 푸들거리며 달려오는 저 단풍들
고기 샅샅 살펴보면 친구들 별명같다
골생이 맥진풍언 그리고 어랭이까지
오늘은 아내와 함께 단풍놀이 하고 간다
조천 할망
동산에 멀구슬나무 올레처럼 쫙 벌린 가지
여든 살 최정혜 할망 진종일 뭘 기다리나
한송이 돌단풍만 꺼져도 세상은 참 슬퍼라
어느 길인들 한 줄기가 아니었을까
어느 집에선들 그 손맛 잊었을까
멧새똥 떨어진 자리 봄날만 잘도 가네
천여 평 감귤원에 작설차 향 우러나면
학생들도 들꽃들도 줄줄이 호명된다
까우욱 울음 몇 점을 놓고 가는 저 까마귀
북촌 까마귀
이름 없는 까마귀떼로 우는 까마귀떼
아무리 철새라 해도 제 분수는 알아야지
남의 땅 한 구석에서 식량 전쟁 벌이나
어쩌다 시베리아와 제주섬이 인연 맺었나
이밭 저밭 옮길 때마다 저절로 밭갈이 되고
까마귀 너댓 마리면 병아리도 채간다
열차는 밤 12시 시베리아를 달린다
한라산 소주보다 두 배 더 독한 부드카주
북촌 땅 까마귀 저도 몇 잔 술에 취했을까
어머니 벗님네는
아무 때 뵈도 반갑네 어머니 벗님네는
작살차고 수경끼면 아직도 상군해녀
이제는 불러도 좋겠네 어머니라 해도 좋겠네
일년 절반 고향바당 절반은 육지물질
어느새 물밑마저 서늘해진 추석 무렵
오징어 두어 타래에 멸치까지 챙겨든다
거문도와 일출봉 송악산 오가는 뱃길
어느 포구엔들 숨비기꽃 안 피랴
어느 서방 옷섶엔들 술값이야 없으랴
누이야 이제는 가자, 수평선도 끌고 가자
섬 몇 개 사람 몇 해안선 따라 뻗은 숨비소리
한가락 오돌또기로 신명나게 끌고 가자
《시조시학》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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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오름 뒤에 외/ 오승철 시인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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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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