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꽃 호텔의 초저녁 / 김영찬
튤립 꽃 호텔에 투숙하려고 날개 지친 나비가 나폴나폴 힘겹게 찾아왔다
- 예약번호는요?
리셉션니스트의 엉뚱한 손가락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자 나그네나비는
난감한 상태
그냥 잠깐만 좀 쉬어가면 안 될까요?
- 안 돼요, 빈 방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뒤돌아서는 등 뒤에서 당직메니저의 부드럽고도 그윽한 목소리
- 우선 제 캐빈룸을 쓰십시오!
체크아웃 손님이 나오는 대로 객실에 모시겠노라고
튤립 꽃 호텔의 샹들리에는 호화로운 광채를 풀어 놓는다
황금빛 날개 부전나비의 우아한 자태에 걸맞도록 당당하고도 품위 또한 수준급인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 섹시하고도 강인한
크리스털 빛이 예리하게 꺾여나가도 건방지거나 눈 시리지 않은
튤립 꽃 호텔의 초저녁
꽃 / 김왕노
난 당신의 몇 부 능선에 피었던 꽃인가.
채석강가 채석 위에 핀 꽃은
몇 천 년 제 몸을 공중부양하여 이른 것인가.
내 안에 꽃으로 피었던 당신도
당신 안에 꽃으로 피었던 나도
꽃씨 하나 남기지 않은 불임의 꽃이었구나.
서로의 가슴속을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꽃
척박한 세월이라지만
돌 안에도 돌 꽃이 핀다는데
우리가 이제 우리의 꽃이라 부르며
꽃의 씨방에 들어가 요나처럼 울 꽃은
그리고 난
당신의 몇 부 능선에 다시 피어야 할 꽃인가.
꽃 / 김완하
그대를 추월하려 가속 페달을 밟는다.
그리움에 속력을 내지 않으면 충돌한다.
봄으로 가는 눈빛들 온통 속도를 높이는 중.
천지 사방 붉게 붉게 과열된 동공.
꽃의 고요 / 김인희
자신의 생을 요약한
색과
형태와
향기가
벌레에게 먹히지 않도록
기도해본 적 없다 꽃은
그 몸에 수없이 상처를 입히는 벌레들에게도
항거해 본 적 없다 꽃은
자신을 해석해 줄 모든 해석자들이 사라져도
아파해 본 적 없다
웃기만 하는 꽃
이유 없이 밟히면서도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꽃은
자신의 생에 대한 해석을 원해 본 적이 없다
저 꽃
자신을 피워 준 그 꽃나무 지키며
그냥 그저 그 광야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의 친구로 서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시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 하얗게 웃고 서 있다
꽃은 생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것
자신을 피운 그 꽃나무 밑에
색을 묻고
향기를 묻고
형태를 묻고
그저 고요히 웃고만 서 있다 꽃은
아몬드 꽃나무 / 김윤하
아몬드꽃이 활짝 핀 커피잔 하나를 샀다
푸른 바탕에 꿈틀거리는 나뭇가지의 하얀 꽃
생애 마지막 봄, 정신병원에서 그린
조카 탄생을 위한
고흐의 꽃이다
매화꽃을 닮고 복숭아꽃을 닮은
하얀색과 옅은 분홍색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희망의 나무다
봄의 정령이 꽃샘추위처럼 독한 듯, 따듯한 듯
세상 여기저기 아몬드 꽃비를 내리고 있는 시간
뽀얀 커피잔 속에도 아몬드꽃 한 송이 그려져 있다
오늘은 커피 향 대신 고흐의 꽃향기를 마신다.
꽃 떨어져 밟힐 때 / 김재진
꽃 떨어져 밟히는 그 짧은 사이
한 사람의 생애가 왔다가
간다.
바람은 몸 안에 새소리 하나 심어놓고
살구꽃 진 언덕을
남루뿐인 한 생애가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동안
시간은 잠깐
우물에 비친 바람소리 같다.
내가 너를 안을 때
내 안의 우주가 미묘하게 떨리듯
꽃 한 송이 벌어질 때 하늘로 난 창문 하나 열리듯
너는 없지만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울던 사람들이 눈물을 닦고
꽃 떨어져 밟히는 길을 손 모으며 걸어갈 때
자신을 쏜 암살자를 향해 합장하며 쓰러지던
마하트마 간디처럼
세상의 슬픔 속에 우린
따뜻한 미소 하나 심을 수가 있을까?
꽃아, 가자 / 김점용 (1965~ )
꽃아, 가자
네 온 곳으로
검은 부르카를 쓰고
아무도 몰래 왔듯
그렇게 가자
검은 우물 속이었을까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 그 아래였나
푸른 별을 타고
색 묻지 않은 별빛을 타고 돌면서
삼천대계를 돌면서
꽃아, 가자
혼자 싸우듯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몰래
네 온 자리
색 입지 않은 곳
볕 뜨지 않은 곳
가자, 꽃아
꽃의 절벽 / 김정수
아무 날도 아닌데 꽃을 선물 받았다.
당신이 주는 순간
봄날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꽃의 절벽에
오래된 분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기 한 마리에도 날밤을 새운 적 많았다.
첫눈의 무릎이 아플 때까지 당신을 차고 옆에 세워두기도 했다.
다 떠나서, 애들만 생각해요. 몸이
몸을 말리는 창가에서 축축한 당신의
저녁을 보았다. 파문을 만드는 낚싯대의 미늘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같이 묶여 있으되 묶여 있지 않은 날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 받은 스타치스가 벽에 걸려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날들이 쉽게 용서되지 않는
용서였다. 보푸라기 같은 날들이, 툭하면 부풀어 오르던 위태로운 삶이
귓가에 앵앵댔다.
물의 죽음이 꽃을 다 빠져나가는 동안
거꾸로 매달린 꽃이 꽃을 닫아버렸다.
꽃의 자세 / 김정수
속을 꺼내 널자
환멸이 올라왔다
주춤주춤
담장 밖 맴돌던 손이 구름 속을 헤집어
꽃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갇혀 있던 물 번져
길에 방화범을 풀어놓았다
탐스러운 한기(寒氣)로 겨울을 버틴 덩굴장미가
와락, 노란 혀를 내밀었다 트럭이
개처럼 짖으며 달아났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짐을
채소와 과일로 구분하곤 굴러떨어졌다
창백한 뺨이 속도의 기색을 살피고 사라지자
꽃병의 눈금이 달로 기울었다
새로운 종(種)으로 태어난 덩굴장미가
시간 속에 앉아 귀를 물들였다 익숙하지만 그대로인 꽃병이
꽃의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뒤에서 서성거렸다
물을 끌어당기는 것은 조금 진실을 닮았다
오래된 말이 다 익었다
꽃의 신비 / 김정란
꽃, 고요한 침묵으로 너무나 잘 말하는 신비
꽃처럼 무거운 마음
ㅡ2014년 봄
김중일
꿈속에서 밝혀놓은 촛불이 다 타 버리자 해가 떴다 기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달처럼 무거운 마음 내가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마음이 내 정수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다 그 그림자는 잠시 지구를 덮고 내 정수리 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가라앉는다 나의 뇌수를 고요히 헤집자 온갖 기억이 새떼처럼 날아오른다 나의 코끝을 스치자 물양동이 같은 내 얼굴 속에 그득했던 눈물이 출렁이며 넘친다 내 목구멍을 꺽꺽 긁으며 내려가다가 멀미처럼 울컥 솟구치는 마음 다시 내 기도를 막으며 가라앉는 마음 지구 반대편 하늘까지 뻥 뚫린 우물 속에 물양동이처럼 던져진 마음 내 무릎을 꺾고 내 발등을 찧는 돌처럼 무거운 마음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연루됐을 때 온몸이 다 녹아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때 깊은 밤이 뻗은 힘센 팔이 나를 포옹하듯 꿈속으로 잠깐 끌어당기고, 꿈속에서야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 꿈밖에선 어떤 말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눈코입귀 흔들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마음 꽃잎 없는 꽃처럼 무거운 마음 마음이 걷다가 빠진다는 구름의 크레바스 틈새로 후드득 꽃잎처럼 빨려드는 마음 돌처럼 무거운 질량의 마음 하늘까지 뚝 떨어진 마음 내 발목에 매달려 걸을 때마다 모래 위로 끌리는 마음 날 매달고 바다 속에 산 채로 던져진 마음
온몸이 통째로 마음이 되던 날
찬바람이 붙여놓고 간 촛불로도 밝힐 수 없는 몸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몸
꽃의 사서함 / 김지명
근처 어디에도 내가 없어
들판에서 혼자 그려낸 만큼 피우고 섰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그를 눈에 담기 위해
먼 길 통증도 분홍의 의지로 편입시켰다
나는 손이 시려도 잡을 수 없는 연인일지 모른다
나는 재미없는 정물이라고 풍장됐을지 모른다
익명으로 털올 바람이 배달되고
슬픔으로 자살하지 않을 만큼 배달되고
나는 내 얼굴을 몰라
몸속 깊이 함의한 그가 좋아한 색깔도 몰라
의심의 꽃대궁으로 그를 기다린다
수없이 많은 입술을 훔쳐 건너오는
오해의 여분만큼 그를 이해할 시간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그를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처럼
그가 잠시 빌려온 남의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나침반 없는 시계를 찼으면 좋겠다
내 희망이 바삭 구워지기 전에
매음굴이라는 말로
공작소라는 말로
누군가 내 목을 따 갔다
그건 내 아름다움을 진술한 방식
어느 꽃씨 부족이 발성되는
그가 사는 거울
이팝나무 꽃 피었다 / 김진경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툭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꽃의 웃음에 대한 비밀 / 김충규(1965~2012)
참을 수 없이 웃는 꽃이 가장 진한 빛깔을 낸다
나비가 속삭일 때 그 속삭임마저 참을 수 없는 꽃이
나비가 발가락에 묻혀온 초록물을 살결에 살짝 적실 때
화들짝 놀라 웃음 터진 꽃이
우리가 꺾어온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웃음이다
웃을 때 도드라졌던 꽃의 실핏줄이다
꽃이 웃을 때
나비는 쿡 주삿바늘을 찔러넣어
뇌를 뽑아간다
뇌 없이 웃는 꽃
훅- 실성한 꽃!
꽃을 뱉는 아내 / 김평엽
봄도 되었으니 우리도 남들처럼
도배 좀 하고 삽시다
설거지하다가 뱉어낸 아내의 말이
우수수 꽃잎으로 떨어진다
겨우내 아내 목에 맺혔던 꽃망울이 터졌나
장판 위로 붉은 이파리들 파르르 떤다
언제부터 아내는 그리 많은 꽃눈 숨겨왔을까
울컥 꽃내음, 돌아보니
벽지마다 뭉툭뭉툭 꽃무늬 막 움트고 있다
커튼에도 천장에도 수많은 꽃, 꽃들
아내 등짝까지 앵초꽃 마구 타오르는데
아내 혼자 어깨 들썩여 그 꽃 다 떨구고 있다
땅을 여는 꽃들 / 김형영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보려면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품어보자.
꽃을 안치다 / 김효선
사막은
가도 가도 꽃이었다
밥 대신 꽃을 안쳤다
꽃을 먹다 여러 번 토하기도 했다
당신의 어깨에 쏟은 꽃들
기다림 끝에 당도하는 사람 하나쯤
가져야 한다고
싱싱한 발목을 모래 위에 내놓았다
가도 가도 꽃이었다
흰 꽃들이 무더기로 늘어났다
뜨거운 것들의 내부는 얼마나 차가운지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씹혔다
모래 위에 뱉어낸 꽃들
시들어버린 발목을 숨겼다
가도 가도
너라는 사막을 다 건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