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낭독 / 손음 - 어둠 이런 질문을 쥐고 있을 때 어둠이 온다 어둠의 저녁이면 나는 무엇을 잃은 듯 그것이 무엇이든 자꾸 허전한 목덜미를 만지게 된다 저녁의 강보에 싸여 전체가 되는 사물들, 어둠은 무엇이고 어둠은 누구인가 집에서 사무실에서 상점에서 천천히 어둠이 온다 화려한 정원을 가진 집을 지나게 된다 장미가 피어나고 올리브 나무는 단단한 열매를 가지게 될 것이고 불두화는 검은 머릿결을 말고 있다 순하고 단순한 어둠이 움직인다 그들의 시선에서 나도 식물이거나 동물일 것이다 희미하게 조용하게 전체 속으로 들어가는 사물들 이 순간은 반복된다 날마다 조금씩 낯섦을 만들며 모든 것이 된다
- <아토포스> 2025년 겨울호 --------------------------------------
* 손음 시인(본명 손순미)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경성대 국문과 및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7년 《현대시학》등단. 시집『칸나의 저녁』『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고독한 건물』 연구서『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
********************************************************************
빛과 어둠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드러내고 감추는 두 가지 기본요소이다. 존재가 자신을 현전시키는 방식이 빛이라면 존재가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은 어둠이다. 과학에서 어둠은 빛의 결핍으로 설명되지만, 시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둠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영역, 즉 말해지지 않은 것의 심연을 가리키는, 무한한 상상력의 발현이 요구되는 개념이다. 시학에서 어둠은 시각적 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다른 감각을 확장시켜주고, 그러한 감각이 의식이나 무의식과 만나게 해주는 촉매제와도 같은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빛보다는 어둠을 선호하는 것도 어둠의 이러한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손음 시인은 근래에 ‘사물 낭독’이라는 연작시를 통해서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서사적으로 구체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텍스트인 「사물 낭독-어둠」은 어둠을 일종의 사물로 보고 어둠이라는 사물을 활용해 개체적 존재가 전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의 가장 큰 특징은 개별적 존재를 시각적으로 무화시켜 전체 속에 재편성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체라는 어둠 속에 편입시킨 것들은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시의 서두를 보면 어둠은 “질문을 쥐고 있을 때” 온다. 언뜻 보면 질문을 해결해주는 것은 어둠보다는 빛인데, 화자는 오히려 어둠을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어둠은 빛의 부재로 정의되지만 화자는 개별적 존재를 전체로 환원시켜, 전체라는 은폐성 속에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해준다. 어둠으로 인해서 “저녁의 강보에 싸여 전체가 되는 사물들”은 화자가 저녁이라는 어둠의 공간에서 느끼는 허전함이 낳은 것이다. “어둠은 무엇이고 어둠은 누구인가”라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에서 어둠이 주체이며 동시에 사물임을 알게 된다.
이 시에서 어둠은 일상적 공간인 집이나 사무실이나 상점을 지나 특별한 공간인 ‘화려한 정원을 가진 집’을 지나면서 “장미가 피어나고 올리브 나무는 단단한 열매를 가지게 될 것이고 불두화는 검은 머릿결을 말고 있”는 변화를 경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적 사물이 어둠에 듦으로써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이 시의 어둠은 그동안 은폐되었던 것들 속에 내재되어 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시켜주는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어둠은 탈영토화를 통해 재영토화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제인 셈이다. 어둠 속에서는 ‘나’도 “식물이거나 동물”로 탈영토화해서 또 다른 무엇으로 재영토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하게 전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탈영토화의 과정이라면 “날마다 조금씩 낯섦을 만들며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재영토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시전문지 <아토포스> 2025년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