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집안이 바로 그렇다. 이회영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11세 후손이다. 이회영 집안이 한국을 대표하는 경반(京班:서울에 거주하던 양반)으로 알려진 이유는 이항복부터 시작해서 8대동안 계속해서 판서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판서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이다.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사례는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8명의 판서 가운데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이 집안에는 '상신록’(相臣錄)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문집이 있을 정도이다. 재상을 지낸 이들의 행장을 모아 놓은 문집이라는 뜻이다. 재상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집안은 화려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그 화려함은 치열함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그 많던 재산과 목숨을 바치면서 초개처럼 바쳤던 것이다.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에게는 6명의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 첫째 건영(健榮·1853~1940), 둘째 석영(石榮·1855~1934), 셋째 철영(哲榮·1863~1925), 넷째 회영(會榮·1867~1932), 다섯째 시영(始榮·1869~1953), 여섯째 호영(頀榮·1875~1933)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명망가 집안에서 자란 이들 6형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만주 벌판으로 망명을 결행한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이는 조선왕조에서 8대동안 판서를 지낸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방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넷째 아들 이회영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이었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한 집안 60명 전체가 집단 망명을 한 셈이다. 60명 가운데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됐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시영은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김홍집의 사위였던 그는 평안도 관찰사라는 고위 벼슬에 있었다. 그러나 형의 권유에 따라 기득권을 포기하고 풍찬노숙의 망명길에 따라 나섰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재의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명동성당 정면의 오른쪽 편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회영의 아버지인 이유승이 심어 놓은 나무라고 한다. 명동의 터줏대감이 바로 이회영 집안이었던 것이다. 만주로 망명할 때 이 집을 평소 친분이 있던 육당 최남선에게 싼값에 팔고 갔다. 집뿐만 아니라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통째로 망했는데 조상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 둘째였던 이석영의 재산까지 합해졌다. 그는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양자로 입양됐는데, 양아버지였던 이유원의 재산이 자그만치 2만석이었다.
2만석 재산을 상속받았던 이석영은 이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형제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현금이 40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6형제가 집안의 전 재산을 처분한 600억원을 가지고
만주로 가서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관 양성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1년에 만주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가 됐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 동안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만주 일대에서 이 학교에
몰려든 학생들의 수업료와 생활비는 일체 무료였다.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려는 청년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경비는 이회영 집안에서 가져간 돈에서 충당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핵심전투병력으로 참가했다.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받은 정신무장과
훈련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해방후에 이시영이 설립한 신흥대학으로
계승되었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이들 6형제는 만주는 물론이고, 베이징, 텐진, 상하이 일대를 오고가면서
수많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고국에서 가져온 자금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환갑이 넘은 나이로 텐진의 빈민가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이회영을 만난 한 친지는
이렇게 술회했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후손이 딸의 옷까지 팔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6형제 가운데 시영만
제외하고 5형제는 모두 중국에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6형제의 자식들인 규(圭)자
항렬들 대부분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
보충: 6형제중에 이시영을 제외한 5인은 독립운동중 사망합니다, 이시영 선생은 임정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맞이하여 홀로 귀국합니다 그리고 새로 구성된 정부의 부통령에 당선된 뒤 신생공화국의 건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나중에 6.25 전쟁중에 거창양민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분노하여 이승만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부통령직을 사임해버리지요 국회로 보낸 사임서 중의 일부입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하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니,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 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나 이시영은 본시 노치(老齒)인 데다가 무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선량 여러분이 돈독한 중의를 모아 부통령으로 선출해 준 데 대해 과분하고 또 참괴한 일로 생각했으므로 사퇴할까 했으나 외람되게 대임을 맡았던 것이다. 취임 3년 동안에 아무런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를 물러나서 국민 앞에 무위무능함을 사과함이 도리인 줄 생각되어 사표를 내는 것이다. 선량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6형제중에 최후의 생존자였던 이시영 선생도 부통령 사임후 야인으로 물러나 53년에 노환으로 세상을 뜨게됩니다 국내 최고의 재력을 가졌고 또한 편안히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위해 그 엄청난 재산밎 형제 등 모든것을 버려가며 독립에 헌신했으니 진정 우리나라 역사에 몆안되는 진정한 본좌집안입니다
보충2: 최남선에게 헐값에 팔았던 땅은 지금 수백억대의 땅값을 자랑한다 ㅎㄷㄷ 보충3: 이회영 형제들이 고종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려고 햇으나 실패하고 고종황제는 독살당합니다 보충4: 하인들에게도 하오체를 썻던 진보적인 집안이었습니다 보충5: 정말 급하게 재산을 처분해서 그렇지 제대로 값을 받았다면 적어도 현재시가로 1천억은 족히 넘었을겁니다.
이회영의 어록~!!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희망으로 양식을 삼아 먹지 않는 밥에 스스로 배부르고 곤란을 주춧돌로 삼아 집 없는 집을 여기 지어 올리노니 이에 남만주 사양보에 여러 사람의 열띤 마음을 융합해서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고 이름하기를 경학사라 한다. - 만주에 세운 독립운동 학교 경학사 설립문 중에서
"이젠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다. 심부름도 독립을 위한 일인데, 앞으로 노비 때 행색을 하면 엄벌하겠다." - 신흥무관학교에서 원래 종이었던 이를 꾸짖으며
"조국 광복의 큰 계획을 이룬다면서 빈손에 알맹이 없는 얘기만 하면서 북쪽 땅 한 귀퉁이에 모여 있으니 어느 세월에 무슨 기회를 답답하게 앉아 기다린단 말인가? 동지 여러분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몸을 보호하시오. 나는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해 오겠소." -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체포/암살한다는 소식에 망명 계획을 세우는 동지들 앞에서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 반드시 획일성을 요구하지는 않으므로, 그 민족의 습성과 전통 및 문화적·경제적 실정에 맞추면서도 그 기본 원리를 살려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 김종진과 조국의 독립에 관한 대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