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피리소리
렘48.36-47
시 작 기 도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님의 법을 보게 하소서. 내 속에 갖혀 나의 것을 바라보지 않게 하소서. 눈을 들어 주를 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 계시지만 내 안에 찾아오신 주님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소망없는 ‘나’를 보고 괴로워 실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일어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서게 하소서.
본 문 내 용
“모압을 깨뜨려버려서 나의 마음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피리처럼 울고 있다. 그들이 슬피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다가 모압이 이렇게 망하여 통곡하게 되었는가?
나 주가 말한다. 독수리가 날아와서 모압 위에 날개를 펼칠 것이다. 모든 성럼들이 함락될 것이다. 용사들의 마음이 해산하는 여인처럼 될 것이다. 모압이 주를 거슬러 스스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무서운 일, 함정, 올가미가 차례로 기다려서 모두 걸릴 것이다. 내가 벌하는 그 해가 오면 그들이 이렇게 될 것이다. 다른 성벽을 도망하여도 그 성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정수리를 사를 것이다.
모압아, 그모스 신을 믿는 백성아 너에게 화가 미쳤다. 너는 망하여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훗날에 나는 사로잡혀간 모압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렇게 모압을 심판하는 말씀이 그치다.
주 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슬픈 소리를 내는 피리처럼 탄식한다’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는 슬픔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살으라고 하시면서 돌이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겔18.32, 3311).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임박한 파괴와 살상을 내다보시면서(로마 디도장군의 침공) 통곡하셨습니다(눅19.41 너희들이 오늘 평화의 그 일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랴하심). 그리고 탄식하셨습니다(마23.37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돌로 치는구나. 내가 얼마나 너를 품으려 하였는지 모르고 있구나...). 그런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향한 슬픔과 탄식의 소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교만한 나라를 향해서도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백성들이 ‘평화의 그 일’, 십자가 구속과 부활의 생명을 알았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랑을 거부하고 결국은 심판을 받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어쩌다가 모압이 이렇게 망하게 되었는가하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이 최종 목적입니다. 47절, 심판의 말씀은 회복의 선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이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유다에 대한 회복의 예언과 동일한 예언이 선언되고 있습니다(29.14).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되. 회복을 목적으로 심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다른 예언자의 동일한 예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동일하게 모압이 심판받을 것을 예언하고, 또 동시에 모압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6.3-5).
“다윗의 장막에서 왕이 나와 사랑과 신실로 다스릴 것이다. 의를 이룰 것이다.”라고 모압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 헤세드와 에무트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을 향해 사랑과 신실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장막, 주님의 임재에서 나옵니다. 왕이신 주님의 임재로 모든 민족을 사랑과 성실 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성실, 그리고 죄인의 심판을 향한 주님의 슬픈 피리 소리를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 의 묵 상
(비참함)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신실을 몰랐습니다. 나의 죄악으로인한 징계의 심판을 탄식하며 슬퍼하시는 주님의 슬픈 피리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신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시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중 고통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든 심판이든,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도 모르고, 타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도 몰랐습니다. 신앙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고 답이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구원)가려진 나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주님을 향해 걸어가시도록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으시고 장사되신 것, 나를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새 생명을 주신 것을 믿고 보니 그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신실하심입니다. 그리고 내 죄악으로 인한 심판의 슬픔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눈을 떴습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사랑과 신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향한 사랑과 신실, 그들의 심판을 향한 슬픔을 보게 하십니다.
(아버지 품)주님 품에 안겨 살면서 그 마음을 나누는 것이 나의 삶의 모습이요 목적입니다.
기 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모든 민족을 향한 주님의 사랑도 알게 하시고 또한, 그들의 죄악을 인한 심판의 슬픔의 피리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님의 모든 교회들이 모든 민족을 향한 주님의 심판의 슬픈 피리소리를 듣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사랑과 신실을 깨달아 알아서 죽지 않고 살아 주님의 구원을 맛보게 하소서.
생 명 일 기 (8월9일 금)
며칠 간 말씀 묵상이 계속 부담감으로 다가 왔습니다. 예레미야 후반부에서 모든 나라들이 심판을 받는 데 그 심판의 죄목이 이스라엘의 심판의 죄목과 동일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까지도 구원하지 못하고 심판받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악한 사람들의 죄가 바로 내 죄라고 인식되지 않아서, 나는 냉혹한 판단자가 되어 악독한 마음으로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보고 있음이 인식 되어서 괴로웠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죄악의 영향으로 인해 나도 죄악을 품는 결과를 가져오는 그것 때문에 신음하고 그들을 원망하고 책임전가하며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어서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여 포기 방치하지 말겠습니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 승리, 실패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해주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두 가지씩 해결되는 것이 보입니다. 먼저 그들과 같은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