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은 기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쇼맨십은 한국야구가 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촉매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1939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뒤 한국전쟁 때 월남해 부상 토성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경복고와 성균관대를 거쳐 한국전력(64~66년), 조흥은행(67~68년)에서 주로 2루수로 뛰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대한야구협회 심판(68~70년)을 거쳐 71년 건국대 창단 감독을 맡으며 파란만장한 지도자 시대를 열었다. 공군(74~75년)과 아마추어 롯데(75~77년) 창단 감독, 성균관대(78년)와 한양대(78~81년) 감독을 거치면서 수 차례 우승을 이끌었지만 직선적인 성격과 지옥훈련에 선수들이 반발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항상 화제였다. 건국대 시절 겨울에 최초로 비닐하우스 훈련장을 생각했고, 롯데 시절엔 선수들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구보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82년 해태 창단 감독을 맡으면서 붉은 상의, 검정 바지의 독특한 원정 유니폼을 창안했지만 13경기만에 물러났다. MBC 감독(83, 85~87년)도 역임했다. 95년 펴낸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는 13차례나 감독을 맡은 뒤 해임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다. 프로통산 143승130패12무로 승률 0.523을 기록했다.
스스로를 ‘삼팔따라지’로 부르며 등번호 ‘38’을 고집했고, 팬들에게 매력적인 엉덩이를 보여주기 위해 뒷주머니에 수건을 넣었다. MBC 감독 시절 목발을 짚은 채 심판에게 항의하러 나온 장면은 압권이었다. 프로는 팬들에게 끊임없이 야구 외적인 볼거리도 제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입십이 좋아 81년 MBC 라디오 ‘홈런출발’, MBC-TV ‘김동엽과 함께’를 진행했고 야구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97년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숨진 지 3일 후에 발견됐다.
첫댓글 인간관계가 문제가 되긴 했지만..정열 하나는 진짜 최고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