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일 | 대표 기도 | 시 기도 | 헌금 기도 | 공동 식사 | 절기/행사/회의 |
8월 2일 | 최형미 | 서선미 | 이신정전도사 | 박연옥 | |
8월 9일 | 서선미 | 안태형 | 공은주 | 이샛별 |
|
8월 16일 | 정명수 | 공은주 | 이신정전도사 | 정명수 | 임원회의 |
8월 23일 | 박연옥 | 정명수 | 이신정전도사 | 서선미 |
|
8월 30일 | 이샛별 | 이란희 | 이신정전도사 | 이신정전도사 |
|
* 말씀요약 및 후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성경에서는 이방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믿음이 없거나 적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신을 섬겼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다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물신 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것,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것, 외모에 집착하는 것 등등이 그렇겠다.
그런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라는 몸의 필요에 대해서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너희 인간은 오로직 하느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라고 한다.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헐벗은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런 의문 속에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더'는 대체 얼마큼일까? 이 비교는 인간에게 진정한 굴레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일화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천사가 어떤 이에게 나타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며, 단 그의 이웃에게는 언제나 두 배로 해주겠다고 하자, 그는 천사에게 자신의 눈을 빼달라고 했다는...'
오늘 우리의 삶은 이웃과의 비교, 차이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목숨을 걸지 않는가.
이것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태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삶에 고유한 목적, 판단 기준이 있다면 이웃이 어떠하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지거나, 이웃이 더 피해가 가기를 바라지 않는가.
물론 예수를 따르던 많은 이들은 삼시세끼 조차 제대로 충족할 수 없는 고통받는 민중이었다.
예수 자신도 이러한 현실 문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통해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주기도 했지만, 예수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마태복음 25장 32절에 쓰여진 바, "너희 하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걸
아신다." 그러니까 이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폐쇄된 현실에 새로운 차원을
여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에서 할 일인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십자가의 하느님이라는 sad ending 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구하다가 굶주리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궁극적으로 목숨 자체를 잃는 그 상황에서 찾아야한다.
그때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인간의 삶은 완성된다.
가장 극단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박탈되었을 때, 예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 삶을 하느님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완성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보증해주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하느님이 주실 것을 믿는 것, 이 믿음 위에서 살다가 가장 극단적 상황에 몰릴 때 조차도 인간의 삶은 완성되었다고 믿는 절대적 믿음!
이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야말로 세계와 생명과 삶의 토대요 근거이다.
첫댓글 예배실 청소담당인데 한달동안 못한것같네요 죄송합니다. 뒷마무리 해준 선미씨와 나머지 교인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루불린 잡곡이라 백미메뉴로 했더니 설익어 오늘 낭패보았습니다 잡곡 넣어 밥하실땐 꼭 잡곡메뉴로 해주세요
영양식단 덕분에 저녁 안 먹었는대도 내내 든든하더군요^^
더운 날씨에 아침부터 가스불 앞에서 땀흘려 수고해 주신 덕분에 거의 완전체 건강밥상 푸짐하게 잘 먹었습니다. 연옥씨 어머님표 깻잎도 잘 먹고 있어요. 감사! / 설교 요약대로라면 '하느님나라'가 좀 슬프고 우울하고 절망스럽게 느껴집니다. 어딘가 좀 어긋났거나 아니면 뭔가 더해질 부분이 있는 듯합니다.^^ / 재봉틀 배우기 재미있었어요. 대표선수 한 명(!)이 수업 잘 들었다가 교회 수선전문가로 나서면 두루두루 재미나고 신나겠습니다. ㅎㅎㅎ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입니다. 예수께서 삶의 물질적인 차원을 나누는 행위를 하느님께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삶의 물질적인 문제를 경시하는 내용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 요약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해를 한다면 저는 큰일날 소리를 한 것입니다. 진정한 희망을 "하느님 나라를 구하다가 굶주리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궁극적으로 목숨 자체를 잃는 그 상황에서 찾아야한다"면 그 희망은 도대체 어떤 희망일까요? 십자가는 삶을 긍정하는 궁극적이며 또 역설적인 행위이지, 죽음 그 자체를 긍정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의 풍요를 위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다만 정의롭고 평화롭지 못한 빈곤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과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며 감옥에 갇히는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꼭 그래야만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삶에서 고통에 빠져있다가 예수와 같이 처참하게 죽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허무와 절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십자가를 부활의 징표로 역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불충분한 설교요약으로 인해 목사님의 풍성한 댓글로 다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게되어 감사드립니다. 이날 말씀을 들으며 진정한 희망은 sad ending에서 찾을수 있다는 게 저에겐 무척 크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위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대한 우려의 말씀이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이겠지만요...외형적으로 절망적이고 답답하며 슬픈 상황들을 목도하다보니 목사님의 그런 말씀이 오히려 저에겐 희망으로 비쳐지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