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이 명장인건 사실인데, 독단적으로 행동한게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모문룡을 직권으로 처형시킨 사건인데, 물론 썩은 물은 퍼낸다고 그 말이 정답이긴 하지만 이 것을 통해서 모문룡 계열의 군대가 와해되었고(이들을 이용해도 좋았을텐데요) 돈을 받아먹던 고위관료들의 삐짐으로 숭정제에게 고자질 테크로 간 것이 화를 자초한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사실 명나라가 청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기에는 살이호 대전의 대패이후엔 승산이 없다고 보기에(특이하게도 명나라 장기인 화포가 청나라 기마테크에 밟힌 사례니까요, 사실 지휘관의 실책도 컸지만) 원숭환의 영금방어책은 이 패배이후 고안책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원숭환이 청을 잘 막아내는 동안에도 청은 산해관을 감히 넘을 생각을 못했으며, 원숭환 사후에도 산해관을 못넘었지요, 명나라는 내부로 망한게 맞다고 보는게 정확하다고 봅니다, 이자성을 확실히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청나라의 침공으로 시선을 빼앗긴 사이 다시 이자성은 재흥에 성공합니다. 최악으로 이자성이 다른 반란군 세력을 규합하고 조정을 치러 올라오는데, 이 때부터 명나라가 운명을 다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자성을 토벌한다고 해도 제 2, 제 3의 이자성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구조이니.. 원숭환은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지켜야하는 무장으로서의 본문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숭환의 수성 전략도 웅정필의 요동 수성 전략에 기반한 것 아닌가 싶어요. 살이호 전투 이후에도 요동경락 웅정필은 요동에서 계속 버텨냈지만 순무 왕화정이 광녕에서 대규모 상납을 감행하고 요동에서 기동 가능한 부대가 사라지자 웅정필이 대안으로 마련한게 산해관 중심의 방어체계였고 웅정필이 모함으로 죽고나서 독군으로 임명된 원숭환은 산해관보다 앞에있는 영원 금주로 기반으로 방어 전략에 치중할 수 있었으니 순전히 원숭환만의 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웅정필이 최대의 피해자죠, 이미 심양과 장춘이 청나라가 탈주민들 사이에서 첩자들을 숨겨놓고 이들을 이용해 성문을 열고 점령하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웅정필은 만주에서 퇴각은 필수이며 가능한 확실한 요새로 평가되는 산해관에서 버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국엔 청나라를 못 막았다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었지만요. 이걸 기반으로 가는게 현명한 전략이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부터 명나라는 이여송이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는 사이 만주의 감시가 엄청나게 소홀해졌고 이들을 조기에 토벌하지 못했다는 것도 패인의 요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원숭환이 할 수 있었던건 이미 수십만의 요동을 지키는 병력을 잃었지만 그 점을 인지, 곧바로 수습하고 포르투갈제 홍이포를 이용한 수성으로 요새로 청군을 끌어들인뒤 명나라의 장기인 화기로 피해를 주고 섬멸하고자 했던 것이 웅정필의 전략을 계승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웅정필도 최대한 접전은 피하고 청야전술로 나아가면서 요새로 청군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전략을 마련했지만 조정에서의 거부와 왕화정에게 전권이 위임되면서 한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하지만 원숭환은 산해관 방어에 위임받은 상태이니 실행권한의 차이에 있어서는 웅정필과는 너무 다른 배경이였습니다.
모문룡 사후 산해관 방어 체계가 크게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문룡 사후 청이 장성을 넘어 북경성 앞까지 갈 정도니, 그런데도 이자성이 활동하던 때 하남에서 기동 가능한 부대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도 오삼계나 상가희는 산해관에서 10만을 데리고 있었으니 방어체계에 의문이 가긴합니다.
원숭환 재임때는 영원 금주를 이용해서 적은 병력으로 청의 병력을 막아보고자 시도했었고, 원숭환 사후에는 산해관 근처의 지성이 함락되자 위기감을 느낀 명정부가 산해관에 대군을 박아두는 실책을 범했었죠. 이 걸로 이자성을 견제하던 부대들이 산해관으로 흘러가고 자연스럽게 패망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군비는 군비대로 나가고 국내는 허술한 치안에 의존해야 했기때문이죠. 원숭환 시절에는 난이라도 잡을 기반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죠. 물론 원숭환이 모문룡과 협력하고 배후에서 모문룡이 청을 견제했더라면 더 수월한 방어전이 되었겠죠.
추가로 덧붙인다면 영원성과 금주성은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걸 이용해서 원숭환은 적은 병력으로 적들의 병력에게 소모전을 펼칠 생각이였고, 양상은 장기전으로 전개됩니다. 산해관은 이런 지성들이 1차적으로 방어를 해주고 최종에서는 산해관이 방어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산해관이 큰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수의 병력이 항시 대기해 있어야 했고, 지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산해관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으로 추가로 증원해서 좁은 성에 비효율적으로 병력이 많아진게 된 것이죠, 청의 입장에서는 명이 국운을 걸고 산해관을 사수하니 뚫을 방도가 없었지만요..
숭정제의 성격은 어느정도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숭환이 반기를 든다는 행위는 숭정제의 왕권에 위협이 되었고 숭정제는 이런 판단에 있어서 부하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이간책에 속아 명나라 후기 최고의 장군을 자기 손으로 제거한 셈이니까요. 복합적으로 보면 명나라 관리들이 원숭환을 미워한 것과 청의 세객이 이런 소식을 전달하면서 청에서 공작을 펼친 것도 큽니다.
물론 숭정제도 정상적인 사람이니 원숭환의 공을 생각해서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고 했던 흔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이 이럴때 나서서 돈을 풀어서 모문룡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이들을 통해서 명나라 관리에 접근하여 관리들을 매수시켰고 지속적으로 원숭환이 반기를 든다고 처벌해야한다는 의견이 숭정제로써도 판단을 흐리게 한 것에 영향이 있다고 봐야겠죠.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벌할때 부하들은 방면시켰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칼날로 돌아온셈입니다.
현대 역사서로 들어오면서 어느정도 과대 포장된 면은 있습니다(한족이다 보니) 하지만 영원성에서 전투는 누르하치를 병사시키게 해줄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고, 원숭환이 건재할때는 부하들의 분전으로 영원성을 사수 할 수 있었습니다.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고나서 부하들이 명조정에 충성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청나라에 귀속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산해관 방어가 허술해지고 당연히 병력이 분해되어 다시 재보충하면 안되는 상황까지 가게됩니다. 원숭환이 있었어도 소모전 양상으로 갔겠지만 명나라가 청나라보다 병력면에서 월등하면 월등했지 적다고 생각들지는 않아서 이런 전략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원숭환이 생각한 영금 방어 체계가 무너졌고 원숭환 부하들은 청나라 군대에 귀속되어 지성을 함락시키는 중요한 정보들을 흘리게 되면서 청나라로써는 별 피해 없이 4개의 지성을 깔끔히 먹어버립니다. 이 지성은 1차적인 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소모전을 극대화 시켜야한다는 전략이였고 이 것이 사라지면서 반대로 명나라에게 다수의 병력을 산해관에 배치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명나라의 방어체계에 의문이 들겠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살이호 이전의 요동을 경시했다는 점이 더 의문스러운 일이였고, 중요한 이유는 왜란이후 전비 문제로 군대를 움직이기 버거운 면도 있었지만 만력제 말년의 일을 생각한다면 혼란스러웠을 시기였습니다, 또 그 이후 암군들이 나타나면서 나라 자체가 망조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고요. 살이호에서 전략은 후금이 좀 컸으니 조기에 진압해야한다는 배경이 깔려 있고 이것은 명나라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청에대한 직접적인 군사적인 행동이 아니였나 생각이 듭니다. 이후에는 별 반항없이 만주가 넘어갔고 곧바로 세력 균형이 산해관으로 넘어가버리죠
저는 영원전투가 원숭환 수성전략의 정점이자 한계가 드러난 전투가 아닌가 싶은데요. 원숭환이 스스로 영원에 들어가 수성전을 자처했을 때 고제만이 영원을 지원하지 않고 산해관을 방어했는데 만약 고제가 산해관을 방어하지 않았다면 원숭환은 꼼짝없이 포위당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그런 지성을 통한 수성전략이 결과적으로 홍승주가 흑산에서 패배한 결과가 됐기 때문에 청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지성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얘기 했듯이 지성은 1차적인 방어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여기서 청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소모전을 펼치므로써 청나라의 군대에 타격을 주고자 하는 계산이였지만 홍타이지 이후 청군은 이러한 전략을 분석하고 화포 도입으로 누르하치 군대에 비해 무장이 더 잘 갖춰진 사실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명나라가 선제 공격을 가자니 살이호의 두려움으로 또 병력을 잃는게 아닌가 하는 배경이 작용했었고, 그렇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었겠죠. 청나라도 도합 30만이상의 병력을 가용할수 있는 시기였고 명군은 그런 청을 견제하려면 최소 60내지는 있어야한다고 봅니다만 이미 만주에서 소모했기때문에 국력에 한계가 있겠죠
물론 원숭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시는 입장인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명나라에서 원숭환을 대체할 사람도 없었다는 점도 있다고 봅니다. 또 제가 얘기 했듯이 명나라의 전략이 웅정필의 지키기 전략으로 가면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산해관의 병력배치는 국고에 부담이 가중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치기에는 너무 나라가 위급했다라고 설명됩니다. 이 것이 기폭제가 되어 국내에서 폭발한 원인이 되었고 원숭환은 본문에 충실한 장수지만 청을 격파하고 만주를 평정하기에는 국가의 역량과 본인의 대의명분으로 실리를 잃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봅니다. 청군도 결코 만만한 병력들이 아니였고요
원숭환의 전략은 너무 위험천만하지 않나요. 홍승주도 흑산에서 포위당한채로 수성전만하다가 결국 식량이 떨어져서 전면전으로 나가자마자 청 기마대에게 인수분해되고 궤멸되지 않았습니까, 원숭환은 그를 싫어하는 엄당의 위충현이 엄당 광고를 위해서 원숭환을 띄어주던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과대가 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야전으로 나와서 청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시에는 명군이 크게 불리한 입장이였죠. 남방군을 이용한 화기를 적재적소에 써야는데 명 말기에는 이 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장수들이 없다시피 했고 왜란시절 장수들은 사망한 다음 세대들이였기 때문이라고 보고요, 또 북방군이 이전에 와해 되면서 청나라에 대적할만한 북방군이 온전하지 않았던 사실도 있겠습니다. 청은 팔기군의 교리가 명과의 전투로 확립되었고 자연스럽게 만주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몽골을 협박할정도로 성장해 버렸죠. 괜히 조선을 단시간에 섬멸한 것을 증명할 정도로 강군이였단 인식입니다. 이 것으로 명나라 장군 누구도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웠을겁니다.
제 생각은 원숭환이 명장 수준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명나라때의 띄워주기나 청대에서는 모문룡을 까면서까지 띄워주고 현대에 와서는 소수민족 출신이기도 해서 띄워주기도 하니 과대화된 능력을 어느 정도 벗으면 명장 수준이라고 볼수는 없다는 의견입니다. 실제로 영금전투나 영원전투가 대단한 혈전도 아니었고 싱겁게 끝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원숭환의 대체로 숭정제가 이미 오삼계를 내정하지 않았었나요. 오삼계나 상가희가 10년간 계료 지역을 맡으면서 벌인 전과가 원숭환보다는 훌륭한것으로 압니다
오삼계와 상가희는 무인 출신이니 전투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명 조정상으로는 문인이 무인을 다스리는 형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원숭환의 서열이 높다고 보는 것도 있습니다만, 원숭환을 정성공급의 명장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 그 전의 만주 총병과 비교해보면 유능한 사람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말에 원숭환이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보여지지 않았나 생각하네요. 개인적으로 명말의 멸망에 대해서 관심있게 보는 사람으로써 토의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원숭환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오나 청나라의 입장으로 원숭환을 볼때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삼계와 상가희는 원숭환 밑에서 군공을 세웟기 때문에 공훈을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삼계는 삼번에서 청군을 상대로 선전했습니다만 강희제가 재정비를 마치고 나서는 급격히 패주하게 된 배경으로 있어서, 청군이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전술적인 방법에서는 원숭환은 문인 출신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명나라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고 숙지하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명나라가 전략적으로 수성만 할수밖에 없는 상황인건 잘 알고있지요. 하남과 호북이 이자성과 장헌충에게 유린당하고 있는데 원숭환은 5년안에 요동 진군을 한다면서 계속 병력을 증강시켰으니까요 . 그 영금 수성 전략이 원숭환이 감옥에 있을 때 홍승주가 14만을 이끌고 금주에서 포위당한채 대패하면서 깨졌다고해서 원숭환의 능력이 독보적으로 빛나지는 않습니다. 원숭환이 이끌어낸 전과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지성 전략은 실패고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금주가 깨진 후 산해관 위주로 재편한 오삼계의 전략이 하남에 병력을 확충할 수도 있어서 더 주효했죠.
말씀대로 명나라 상황을 제대로 숙지해보도력 노력하겠습니다. 원숭환이 지성을 통한 방어는 산해관에 앞서 1차적인 방어를 하자는 의미보다 사실상 원숭환의 '5년 뒤 요동 정벌' 슬로건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과 금주가 그 대표적인 예였지만 그런 지성은 포위당하면 끝장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효과있는 전략이라고는 생각안합니다. 오히려 병력도 더 많이쓰고요. '원숭환의 대체자가 없는' 상태에서 대체된 오삼계는 흑산에서의 패배를 교훈삼아 원숭환보다 더 최대한의 수성 전략을 펼칩니다. 흑산에서의 패배와 금주의 함락은 원숭환의 주된 전략인 영금방어전략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게 아닐까요
지성 전략이 주효했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 아닌가요 중요한건 지성이 함락 위기라고 해도 위기를 버터냈다고 보고 결과론적으로는 산해관을 방어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산해관 방어를 목적으로 지성으로 편 원숭환의 전략이 위험해 보이지만 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화기의 활용으로 청군을 수성전에서 격퇴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원숭환으로서 최선이였고 앞서 말했듯이 홍승주가 나선 야전또한 명군이 이길 공산이 크다고 보지 않기에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지성은 원숭환 부하들의 투항으로 청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이 것을 과정으로 오삼계가 산해관으로 방어선을 재편했지만
말씀대로 '명나라 상황'에 최대한 맞추려면 야전은 안되고 수성을 해야하는데 산해관에서 200리 떨어진 영원성, 그것도 영원전투에서 1만이었던 원숭환 부대는 10만 청군을 상대로 2일간 버티고 청에게 5백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그런데 그정도 병력을 데리고 있다가 청이 포위라도 가했으면 원숭환도 끝장이지만 모문룡이 배후를 급습해 이틀만에 물러납니다. 제대로 포위했으면 당연히 금주 꼴 나지 않겠습니까. 야전에서는 당연히 인수분해되는 명군이 포위당한 영원을 무슨수로 구원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성 전략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이 넘어간 이후 산해관의 견고함에 대해서는 원숭환이 산해관 방어를 정비한 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삼계가 그 것을 이어 받아서 전개 해 나가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원숭환의 죽음으로 심복들은 모두 청군에 투항하고 이 것이 화살로 돌아오는 것이 명군의 실책으로 보입니다만.. 그 전에 원숭환이 전술적인 면에서 실수를 해나갔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문인출신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군인이 아니라고 평가를 내린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전략적으로는 청군을 소모전을 시킨게 주효했고 적어도 멸망하기 전까지는 전선이 유지되었기도 하고요, 오삼계의 공훈을 가린 평가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29년도에 모문룡이 죽은 이후에 지성 전략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동안 지성이 공격당하면 모문룡이 배후를 급습하는 식이었는데 모문룡이 죽은 이후에 금주가 바로 함락당하지 않습니까. 지성 전략은 순전히 모문룡의 견제 전략에 의해서 주효했을 뿐이지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에는 제기능 하지도 못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누르하치의 군대를 격파한것과 홍타이지의 군대를 상대한 것과는 별개로 분류해야 할 것 같네요, 물론 전술적인 패착도 있겠지만 산해관의 지성 전략이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간건 원숭환의 공이 아니라 원숭환 사후 책임으로 볼 수 있는 숭정제의 공이 맞을 듯 합니다. 물론 모문룡을 처형 시킨것은 원숭환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것임이 맞다고 제가 누차 얘기했습니다만..
또한 영원성이 함락되기 쉽지 않은 이유는 홍이포의 사용인데, 이것이 청나라에 정보가 넘어간건 원숭환이 처형된 사후입니다. 그 전 까지는 청군이 500명이 죽었지만 쉽게 접근을 못한 이유도 누르하치가 큰 부상을 당해 죽은 이유도 홍이포의 사용에 있어서 청군의 화력열세로 분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원숭환이 있을때는 공격을 시도하지면 결국에는 원숭환이 있을때는 금주성에서의 우위는 가져가지만 결국엔 전략의 주 포인트라 할 수있는 영원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주안점으로 들고 싶네요
제가 얘기 했듯이 원숭환을 높게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모문룡을 죽인 실책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합니다만 결국엔 누르하치의 침공을 저지하였고 홍타이지의 조기 침공의 전략을 무산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 보기에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결국 전략적으로 이 방법이 주효하다는 것은 웅정필이 입안한 전술이였고 이것을 개량시키고 원숭환이 지성을 쌓아서 전선을 분산시킨다는 전력을 썼습니다. 이 것이 실패 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산해관에서 수성을 들어갔고 결국에는 청군은 산해관에서 막는다 전술로 귀결되기 때문에 원숭환을 높게 평가할 이유도 없지만 거품있다고 과장되게 깎을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본문을다했다고봅니다
원숭환이 이런 평가를 받은 이유는 중국의 재평가로 높게 후하게 평가 되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거품끼가 있다는 것에는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패인이 있었고 저도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고 정보를 찾아가며 본 결과 리진총병님의 의견또한 원숭환의 재평가로써 일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참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원숭환이 청군의 기병을 상대로 평지에서 전술을 벌이기에는 쉽지 않다고 판단한바 미끼를 이용한 수성전략을 도입했고 포위될 여지가 있는 성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실천했다는 이유에는 과장과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도 있다는 사실또한 있다고 봅니다 어쨋든 좋은 토론에 감사합니다
사실 원숭환에 대한 의견은 민족영웅인가 과장된 영웅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중국의 동북공정도 그렇고 원숭환의 역사서가 청대에 편찬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청이 개입했을 여지도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무공은 여과해서 봅니다. 음 덕분에 원숭환의 다른 이면에 대해서 조사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네요^^
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http://angelhalowiki.com/r1/wiki.php/%EC%9B%90%EC%88%AD%ED%99%98 엔하위키 원숭환 파트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여기 있네요 - 단 중요한건 이 시스템으로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입성을 끝끝내 막은 점으로 보아 반론의 의견을 제기하겠습니다. 전술적인 과정에서 헛점이 노출되어도 전략적으로는 청군을 산해관에서 저지 시켰다는 공훈입니다. 전략가 밑에는 전술가가 있는 것이고 원숭환은 전략적인 느낌이 강한 사람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이죠, 오삼계는 지성이 넘어갔으니 산해관으로 방어를 재정비 해야했고 원숭환은 산해관의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지성으로 파고 들어갔으니까요, 손승중 웅정필대의 전략이 기반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원숭환이 절대적으로 했다라는 공로라고 아니라고 제가 얘기 했는데요, 물론 입안자의 공이 있지만 실행한 사람은 원숭환이 했으니 상대적으로 덜해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공격력을 분산시킨다는 원숭환의 생각과는 달리 청은 빨리 산해관을 함락시키려는 마음이 없었나보군요. 원숭환 재직 당시에는 전면적인 공격보다는 소모전을 취하면서 영원성과 금주성 밖을 초토화 시키는 작전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원숭환의 분산 및 소모 작전이 맞을까요 아니면 청의 소모전략일까요
당시 청의 군세로는 명을 상대로 소모전을 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만주의 패권으로 강자가 되었지만 명의 물량이 고갈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정면으로 공격할시에는 명의 장점이 극대화 되어 청의 군대에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명은 화기를 이용한 작전에 우위라고 본다면 청은 기마를 동원한 야전에서 우위라고 평가 되기 때문에 상성에 따른 전략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네요
청과 명의 전쟁이 길어지면. 양쪽에서도 청의 타격이 큽니다. 몽골까지먹게되면서 부양할식구들은 늘어나고. 이들에게 비단과 차를 지급해야 하는데 명나라의 경제봉쇄로 구입할수가 없어서 결국 조선을 공격하게 된 원인이 된거거든요. 명의경우도 산해관방어하면서 내부의 반군들을 어캐좀 처리했어야하는데. 화북은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죽어가는데. 화남지방은 자본주의 맹아라는 소리를 들을정도로 호황을 누리던게 당시 명나라의 상황이지요
첫댓글 저도 한 번 다뤄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게시글 지원 사격 리플!
원숭환이 명장인건 사실인데, 독단적으로 행동한게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모문룡을 직권으로 처형시킨 사건인데, 물론 썩은 물은 퍼낸다고 그 말이 정답이긴 하지만 이 것을 통해서 모문룡 계열의 군대가 와해되었고(이들을 이용해도 좋았을텐데요) 돈을 받아먹던 고위관료들의 삐짐으로 숭정제에게 고자질 테크로 간 것이 화를 자초한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사실 명나라가 청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기에는 살이호 대전의 대패이후엔 승산이 없다고 보기에(특이하게도 명나라 장기인 화포가 청나라 기마테크에 밟힌 사례니까요, 사실 지휘관의 실책도 컸지만) 원숭환의 영금방어책은 이 패배이후 고안책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원숭환이 청을 잘 막아내는 동안에도 청은 산해관을 감히 넘을 생각을 못했으며, 원숭환 사후에도 산해관을 못넘었지요, 명나라는 내부로 망한게 맞다고 보는게 정확하다고 봅니다, 이자성을 확실히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청나라의 침공으로 시선을 빼앗긴 사이 다시 이자성은 재흥에 성공합니다. 최악으로 이자성이 다른 반란군 세력을 규합하고 조정을 치러 올라오는데, 이 때부터 명나라가 운명을 다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자성을 토벌한다고 해도 제 2, 제 3의 이자성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구조이니.. 원숭환은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지켜야하는 무장으로서의 본문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은 총사령관이고 다 같이 상방보검 들고있는데 황제 허락도 안받고 죽이는건, 거기다대고 모문룡이 왕화정의 엄당계열이니 .
그런데 원숭환의 수성 전략도 웅정필의 요동 수성 전략에 기반한 것 아닌가 싶어요. 살이호 전투 이후에도 요동경락 웅정필은 요동에서 계속 버텨냈지만 순무 왕화정이 광녕에서 대규모 상납을 감행하고 요동에서 기동 가능한 부대가 사라지자 웅정필이 대안으로 마련한게 산해관 중심의 방어체계였고 웅정필이 모함으로 죽고나서 독군으로 임명된 원숭환은 산해관보다 앞에있는 영원 금주로 기반으로 방어 전략에 치중할 수 있었으니 순전히 원숭환만의 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웅정필이 최대의 피해자죠, 이미 심양과 장춘이 청나라가 탈주민들 사이에서 첩자들을 숨겨놓고 이들을 이용해 성문을 열고 점령하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웅정필은 만주에서 퇴각은 필수이며 가능한 확실한 요새로 평가되는 산해관에서 버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국엔 청나라를 못 막았다는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었지만요. 이걸 기반으로 가는게 현명한 전략이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부터 명나라는 이여송이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는 사이 만주의 감시가 엄청나게 소홀해졌고 이들을 조기에 토벌하지 못했다는 것도 패인의 요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원숭환이 할 수 있었던건 이미 수십만의 요동을 지키는 병력을 잃었지만 그 점을 인지, 곧바로 수습하고 포르투갈제 홍이포를 이용한 수성으로 요새로 청군을 끌어들인뒤 명나라의 장기인 화기로 피해를 주고 섬멸하고자 했던 것이 웅정필의 전략을 계승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웅정필도 최대한 접전은 피하고 청야전술로 나아가면서 요새로 청군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전략을 마련했지만 조정에서의 거부와 왕화정에게 전권이 위임되면서 한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하지만 원숭환은 산해관 방어에 위임받은 상태이니 실행권한의 차이에 있어서는 웅정필과는 너무 다른 배경이였습니다.
모문룡 사후 산해관 방어 체계가 크게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문룡 사후 청이 장성을 넘어 북경성 앞까지 갈 정도니, 그런데도 이자성이 활동하던 때 하남에서 기동 가능한 부대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도 오삼계나 상가희는 산해관에서 10만을 데리고 있었으니 방어체계에 의문이 가긴합니다.
원숭환 재임때는 영원 금주를 이용해서 적은 병력으로 청의 병력을 막아보고자 시도했었고, 원숭환 사후에는 산해관 근처의 지성이 함락되자 위기감을 느낀 명정부가 산해관에 대군을 박아두는 실책을 범했었죠. 이 걸로 이자성을 견제하던 부대들이 산해관으로 흘러가고 자연스럽게 패망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군비는 군비대로 나가고 국내는 허술한 치안에 의존해야 했기때문이죠. 원숭환 시절에는 난이라도 잡을 기반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죠. 물론 원숭환이 모문룡과 협력하고 배후에서 모문룡이 청을 견제했더라면 더 수월한 방어전이 되었겠죠.
추가로 덧붙인다면 영원성과 금주성은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걸 이용해서 원숭환은 적은 병력으로 적들의 병력에게 소모전을 펼칠 생각이였고, 양상은 장기전으로 전개됩니다. 산해관은 이런 지성들이 1차적으로 방어를 해주고 최종에서는 산해관이 방어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산해관이 큰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수의 병력이 항시 대기해 있어야 했고, 지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산해관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으로 추가로 증원해서 좁은 성에 비효율적으로 병력이 많아진게 된 것이죠, 청의 입장에서는 명이 국운을 걸고 산해관을 사수하니 뚫을 방도가 없었지만요..
그런데 경황을 보면 원숭환은 숭정제도 꽤 생각을 하고 죽인 것 같은데 원숭환의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판단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정도 천혜의 요새라면 오삼계라던지 충분히 대체자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숭정제의 성격은 어느정도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숭환이 반기를 든다는 행위는 숭정제의 왕권에 위협이 되었고 숭정제는 이런 판단에 있어서 부하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이간책에 속아 명나라 후기 최고의 장군을 자기 손으로 제거한 셈이니까요. 복합적으로 보면 명나라 관리들이 원숭환을 미워한 것과 청의 세객이 이런 소식을 전달하면서 청에서 공작을 펼친 것도 큽니다.
그래도 옥에 가두고 8개월이나 있다가 죽인 것은 의심많은 숭정제도 꽤나 깊이 고민 한 모양입니다.
물론 숭정제도 정상적인 사람이니 원숭환의 공을 생각해서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고 했던 흔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이 이럴때 나서서 돈을 풀어서 모문룡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이들을 통해서 명나라 관리에 접근하여 관리들을 매수시켰고 지속적으로 원숭환이 반기를 든다고 처벌해야한다는 의견이 숭정제로써도 판단을 흐리게 한 것에 영향이 있다고 봐야겠죠.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벌할때 부하들은 방면시켰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칼날로 돌아온셈입니다.
원숭환 최대의 전적인 영원전투, 영금전투에서 사망자는 500이 채안되고 그나마 이틀버틴 전투였는데 거기다가 청이 물러나면서 근처 군사시설 다 인수분해 시켜놓고 가지 않았습니까. 원숭환의 능력이 너무 과대 포장된것은 아닌지
현대 역사서로 들어오면서 어느정도 과대 포장된 면은 있습니다(한족이다 보니) 하지만 영원성에서 전투는 누르하치를 병사시키게 해줄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고, 원숭환이 건재할때는 부하들의 분전으로 영원성을 사수 할 수 있었습니다.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고나서 부하들이 명조정에 충성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청나라에 귀속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산해관 방어가 허술해지고 당연히 병력이 분해되어 다시 재보충하면 안되는 상황까지 가게됩니다. 원숭환이 있었어도 소모전 양상으로 갔겠지만 명나라가 청나라보다 병력면에서 월등하면 월등했지 적다고 생각들지는 않아서 이런 전략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원숭환이 생각한 영금 방어 체계가 무너졌고 원숭환 부하들은 청나라 군대에 귀속되어 지성을 함락시키는 중요한 정보들을 흘리게 되면서 청나라로써는 별 피해 없이 4개의 지성을 깔끔히 먹어버립니다. 이 지성은 1차적인 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소모전을 극대화 시켜야한다는 전략이였고 이 것이 사라지면서 반대로 명나라에게 다수의 병력을 산해관에 배치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명나라의 방어체계에 의문이 들겠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살이호 이전의 요동을 경시했다는 점이 더 의문스러운 일이였고, 중요한 이유는 왜란이후 전비 문제로 군대를 움직이기 버거운 면도 있었지만 만력제 말년의 일을 생각한다면 혼란스러웠을 시기였습니다, 또 그 이후 암군들이 나타나면서 나라 자체가 망조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고요. 살이호에서 전략은 후금이 좀 컸으니 조기에 진압해야한다는 배경이 깔려 있고 이것은 명나라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청에대한 직접적인 군사적인 행동이 아니였나 생각이 듭니다. 이후에는 별 반항없이 만주가 넘어갔고 곧바로 세력 균형이 산해관으로 넘어가버리죠
저는 영원전투가 원숭환 수성전략의 정점이자 한계가 드러난 전투가 아닌가 싶은데요. 원숭환이 스스로 영원에 들어가 수성전을 자처했을 때 고제만이 영원을 지원하지 않고 산해관을 방어했는데 만약 고제가 산해관을 방어하지 않았다면 원숭환은 꼼짝없이 포위당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그런 지성을 통한 수성전략이 결과적으로 홍승주가 흑산에서 패배한 결과가 됐기 때문에 청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지성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다대고 영금전투 때는 한번 나왔다가 시원하게 인수분해 당했으니 문인 출신 장군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가 얘기 했듯이 지성은 1차적인 방어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여기서 청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소모전을 펼치므로써 청나라의 군대에 타격을 주고자 하는 계산이였지만 홍타이지 이후 청군은 이러한 전략을 분석하고 화포 도입으로 누르하치 군대에 비해 무장이 더 잘 갖춰진 사실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명나라가 선제 공격을 가자니 살이호의 두려움으로 또 병력을 잃는게 아닌가 하는 배경이 작용했었고, 그렇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었겠죠. 청나라도 도합 30만이상의 병력을 가용할수 있는 시기였고 명군은 그런 청을 견제하려면 최소 60내지는 있어야한다고 봅니다만 이미 만주에서 소모했기때문에 국력에 한계가 있겠죠
물론 원숭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시는 입장인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명나라에서 원숭환을 대체할 사람도 없었다는 점도 있다고 봅니다. 또 제가 얘기 했듯이 명나라의 전략이 웅정필의 지키기 전략으로 가면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산해관의 병력배치는 국고에 부담이 가중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치기에는 너무 나라가 위급했다라고 설명됩니다. 이 것이 기폭제가 되어 국내에서 폭발한 원인이 되었고 원숭환은 본문에 충실한 장수지만 청을 격파하고 만주를 평정하기에는 국가의 역량과 본인의 대의명분으로 실리를 잃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봅니다. 청군도 결코 만만한 병력들이 아니였고요
원숭환의 전략은 너무 위험천만하지 않나요. 홍승주도 흑산에서 포위당한채로 수성전만하다가 결국 식량이 떨어져서 전면전으로 나가자마자 청 기마대에게 인수분해되고 궤멸되지 않았습니까, 원숭환은 그를 싫어하는 엄당의 위충현이 엄당 광고를 위해서 원숭환을 띄어주던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과대가 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야전으로 나와서 청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시에는 명군이 크게 불리한 입장이였죠. 남방군을 이용한 화기를 적재적소에 써야는데 명 말기에는 이 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장수들이 없다시피 했고 왜란시절 장수들은 사망한 다음 세대들이였기 때문이라고 보고요, 또 북방군이 이전에 와해 되면서 청나라에 대적할만한 북방군이 온전하지 않았던 사실도 있겠습니다. 청은 팔기군의 교리가 명과의 전투로 확립되었고 자연스럽게 만주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몽골을 협박할정도로 성장해 버렸죠. 괜히 조선을 단시간에 섬멸한 것을 증명할 정도로 강군이였단 인식입니다. 이 것으로 명나라 장군 누구도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웠을겁니다.
제 생각은 원숭환이 명장 수준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명나라때의 띄워주기나 청대에서는 모문룡을 까면서까지 띄워주고 현대에 와서는 소수민족 출신이기도 해서 띄워주기도 하니 과대화된 능력을 어느 정도 벗으면 명장 수준이라고 볼수는 없다는 의견입니다. 실제로 영금전투나 영원전투가 대단한 혈전도 아니었고 싱겁게 끝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원숭환의 대체로 숭정제가 이미 오삼계를 내정하지 않았었나요. 오삼계나 상가희가 10년간 계료 지역을 맡으면서 벌인 전과가 원숭환보다는 훌륭한것으로 압니다
오삼계와 상가희는 무인 출신이니 전투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명 조정상으로는 문인이 무인을 다스리는 형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원숭환의 서열이 높다고 보는 것도 있습니다만, 원숭환을 정성공급의 명장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 그 전의 만주 총병과 비교해보면 유능한 사람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말에 원숭환이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보여지지 않았나 생각하네요. 개인적으로 명말의 멸망에 대해서 관심있게 보는 사람으로써 토의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원숭환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오나 청나라의 입장으로 원숭환을 볼때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삼계와 상가희는 원숭환 밑에서 군공을 세웟기 때문에 공훈을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삼계는 삼번에서 청군을 상대로 선전했습니다만 강희제가 재정비를 마치고 나서는 급격히 패주하게 된 배경으로 있어서, 청군이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전술적인 방법에서는 원숭환은 문인 출신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명나라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고 숙지하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명나라가 전략적으로 수성만 할수밖에 없는 상황인건 잘 알고있지요. 하남과 호북이 이자성과 장헌충에게 유린당하고 있는데 원숭환은 5년안에 요동 진군을 한다면서 계속 병력을 증강시켰으니까요 . 그 영금 수성 전략이 원숭환이 감옥에 있을 때 홍승주가 14만을 이끌고 금주에서 포위당한채 대패하면서 깨졌다고해서 원숭환의 능력이 독보적으로 빛나지는 않습니다. 원숭환이 이끌어낸 전과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지성 전략은 실패고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금주가 깨진 후 산해관 위주로 재편한 오삼계의 전략이 하남에 병력을 확충할 수도 있어서 더 주효했죠.
말씀대로 명나라 상황을 제대로 숙지해보도력 노력하겠습니다. 원숭환이 지성을 통한 방어는 산해관에 앞서 1차적인 방어를 하자는 의미보다 사실상 원숭환의 '5년 뒤 요동 정벌' 슬로건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과 금주가 그 대표적인 예였지만 그런 지성은 포위당하면 끝장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효과있는 전략이라고는 생각안합니다. 오히려 병력도 더 많이쓰고요. '원숭환의 대체자가 없는' 상태에서 대체된 오삼계는 흑산에서의 패배를 교훈삼아 원숭환보다 더 최대한의 수성 전략을 펼칩니다. 흑산에서의 패배와 금주의 함락은 원숭환의 주된 전략인 영금방어전략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게 아닐까요
지성 전략이 주효했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 아닌가요 중요한건 지성이 함락 위기라고 해도 위기를 버터냈다고 보고 결과론적으로는 산해관을 방어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산해관 방어를 목적으로 지성으로 편 원숭환의 전략이 위험해 보이지만 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화기의 활용으로 청군을 수성전에서 격퇴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원숭환으로서 최선이였고 앞서 말했듯이 홍승주가 나선 야전또한 명군이 이길 공산이 크다고 보지 않기에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지성은 원숭환 부하들의 투항으로 청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이 것을 과정으로 오삼계가 산해관으로 방어선을 재편했지만
말씀대로 '명나라 상황'에 최대한 맞추려면 야전은 안되고 수성을 해야하는데 산해관에서 200리 떨어진 영원성, 그것도 영원전투에서 1만이었던 원숭환 부대는 10만 청군을 상대로 2일간 버티고 청에게 5백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그런데 그정도 병력을 데리고 있다가 청이 포위라도 가했으면 원숭환도 끝장이지만 모문룡이 배후를 급습해 이틀만에 물러납니다. 제대로 포위했으면 당연히 금주 꼴 나지 않겠습니까. 야전에서는 당연히 인수분해되는 명군이 포위당한 영원을 무슨수로 구원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성 전략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이 넘어간 이후 산해관의 견고함에 대해서는 원숭환이 산해관 방어를 정비한 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삼계가 그 것을 이어 받아서 전개 해 나가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원숭환의 죽음으로 심복들은 모두 청군에 투항하고 이 것이 화살로 돌아오는 것이 명군의 실책으로 보입니다만.. 그 전에 원숭환이 전술적인 면에서 실수를 해나갔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문인출신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군인이 아니라고 평가를 내린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전략적으로는 청군을 소모전을 시킨게 주효했고 적어도 멸망하기 전까지는 전선이 유지되었기도 하고요, 오삼계의 공훈을 가린 평가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29년도에 모문룡이 죽은 이후에 지성 전략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동안 지성이 공격당하면 모문룡이 배후를 급습하는 식이었는데 모문룡이 죽은 이후에 금주가 바로 함락당하지 않습니까. 지성 전략은 순전히 모문룡의 견제 전략에 의해서 주효했을 뿐이지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에는 제기능 하지도 못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누르하치의 군대를 격파한것과 홍타이지의 군대를 상대한 것과는 별개로 분류해야 할 것 같네요, 물론 전술적인 패착도 있겠지만 산해관의 지성 전략이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간건 원숭환의 공이 아니라 원숭환 사후 책임으로 볼 수 있는 숭정제의 공이 맞을 듯 합니다. 물론 모문룡을 처형 시킨것은 원숭환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것임이 맞다고 제가 누차 얘기했습니다만..
또한 영원성이 함락되기 쉽지 않은 이유는 홍이포의 사용인데, 이것이 청나라에 정보가 넘어간건 원숭환이 처형된 사후입니다. 그 전 까지는 청군이 500명이 죽었지만 쉽게 접근을 못한 이유도 누르하치가 큰 부상을 당해 죽은 이유도 홍이포의 사용에 있어서 청군의 화력열세로 분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원숭환이 있을때는 공격을 시도하지면 결국에는 원숭환이 있을때는 금주성에서의 우위는 가져가지만 결국엔 전략의 주 포인트라 할 수있는 영원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주안점으로 들고 싶네요
모문룡을 죽인게 절대적인 패착이고 국경에 지대한 피해를 줬음에도 전략적으로 원숭환을 인정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전술적으로도 청의 북경진공때 청나라 부대와 맞닥뜨리고도 수성 전략의 대가답게 계주성에 들어가버리는 원숭환인데 말이죠
홍이포 정보는 원숭환이 죽기도 3년전엔 29년도에 모문룡이 죽을때 휘하의 경중명 공유덕이 피도에 있던 병력 다 끌고 투항하면서 청에게 알려준것으로 압니다
제가 얘기 했듯이 원숭환을 높게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모문룡을 죽인 실책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합니다만 결국엔 누르하치의 침공을 저지하였고 홍타이지의 조기 침공의 전략을 무산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 보기에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결국 전략적으로 이 방법이 주효하다는 것은 웅정필이 입안한 전술이였고 이것을 개량시키고 원숭환이 지성을 쌓아서 전선을 분산시킨다는 전력을 썼습니다. 이 것이 실패 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산해관에서 수성을 들어갔고 결국에는 청군은 산해관에서 막는다 전술로 귀결되기 때문에 원숭환을 높게 평가할 이유도 없지만 거품있다고 과장되게 깎을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본문을다했다고봅니다
원숭환이 이런 평가를 받은 이유는 중국의 재평가로 높게 후하게 평가 되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거품끼가 있다는 것에는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패인이 있었고 저도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고 정보를 찾아가며 본 결과 리진총병님의 의견또한 원숭환의 재평가로써 일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참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원숭환이 청군의 기병을 상대로 평지에서 전술을 벌이기에는 쉽지 않다고 판단한바 미끼를 이용한 수성전략을 도입했고 포위될 여지가 있는 성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실천했다는 이유에는 과장과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도 있다는 사실또한 있다고 봅니다 어쨋든 좋은 토론에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의견이 나와야하는데 야심한 시각이라 두명이서 백분토론했네요
사실 원숭환에 대한 의견은 민족영웅인가 과장된 영웅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중국의 동북공정도 그렇고 원숭환의 역사서가 청대에 편찬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청이 개입했을 여지도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무공은 여과해서 봅니다. 음 덕분에 원숭환의 다른 이면에 대해서 조사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네요^^
몽키마루!
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http://angelhalowiki.com/r1/wiki.php/%EC%9B%90%EC%88%AD%ED%99%98 엔하위키 원숭환 파트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여기 있네요 - 단 중요한건 이 시스템으로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입성을 끝끝내 막은 점으로 보아 반론의 의견을 제기하겠습니다. 전술적인 과정에서 헛점이 노출되어도 전략적으로는 청군을 산해관에서 저지 시켰다는 공훈입니다. 전략가 밑에는 전술가가 있는 것이고 원숭환은 전략적인 느낌이 강한 사람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엔하위키는 어투가 진지하지 못해서 잘 보지는 않습니다만 산해관 중심의 전략은 손승종, 웅정필대에 이미 짜여져 있었고 원숭환은 님이 말씀하신대로 화기를 이용해 지성 방어에 몰두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원숭환대에 추가된거는 방어라인이 영원 금주로 늘어났었던 것이고 그나마도 오삼계대에는 산해관 위주 방어 전략으로 대체되지 않습니까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이죠, 오삼계는 지성이 넘어갔으니 산해관으로 방어를 재정비 해야했고 원숭환은 산해관의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지성으로 파고 들어갔으니까요, 손승중 웅정필대의 전략이 기반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원숭환이 절대적으로 했다라는 공로라고 아니라고 제가 얘기 했는데요, 물론 입안자의 공이 있지만 실행한 사람은 원숭환이 했으니 상대적으로 덜해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공격력을 분산시킨다는 원숭환의 생각과는 달리 청은 빨리 산해관을 함락시키려는 마음이 없었나보군요. 원숭환 재직 당시에는 전면적인 공격보다는 소모전을 취하면서 영원성과 금주성 밖을 초토화 시키는 작전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원숭환의 분산 및 소모 작전이 맞을까요 아니면 청의 소모전략일까요
당시 청의 군세로는 명을 상대로 소모전을 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만주의 패권으로 강자가 되었지만 명의 물량이 고갈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정면으로 공격할시에는 명의 장점이 극대화 되어 청의 군대에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명은 화기를 이용한 작전에 우위라고 본다면 청은 기마를 동원한 야전에서 우위라고 평가 되기 때문에 상성에 따른 전략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네요
청과 명의 전쟁이 길어지면. 양쪽에서도 청의 타격이 큽니다. 몽골까지먹게되면서 부양할식구들은 늘어나고. 이들에게 비단과 차를 지급해야 하는데 명나라의 경제봉쇄로 구입할수가 없어서 결국 조선을 공격하게 된 원인이 된거거든요. 명의경우도 산해관방어하면서 내부의 반군들을 어캐좀 처리했어야하는데. 화북은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죽어가는데. 화남지방은 자본주의 맹아라는 소리를 들을정도로 호황을 누리던게 당시 명나라의 상황이지요
그건 자본주의의 맹아라기 보다는 명나라 조정의 부패와 무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화북과 화남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는 점을 말씀드리려 했던것인데 이해를 잘못하신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