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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빚으며
方 花 子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묵상에 잠겨본다.
중학교 시절 친구네 대청마루에서 처음 보았던 도자기의 모양이 떠오른다.
보름달처럼 환하면서도 유연하게 흐르는 선의 우아함과 유유자적한 여유로움, 무엇이든지 다 포용 할 수 있는 큰 도량을 닮았던 도자기.
어떻게 하면 그토록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을 수가 있을까.
무욕(無慾)의 청정한 마음으로 혼을 불어넣어서일까, 지고지순한 정성으로 빚어서일까.
흙을 치대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한곳으로 모은다. 욕심도 버리고, 서두르지도 말고 정성을 다 해야지. 가슴 깊은 곳에서도 마음을 비우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도 순간의 깨우침일 뿐 오래 가지 않는다.
먼저 흙을 두툼하게 밀어 원하는 모양으로 밀판을 만들고 그 위에다 흙을 한 켜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쌓아 올렸다. 흙이 서로 잘 붙도록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번갈아 가며 연결시키고 틈새가 없는가를 살핀 후 사방이 일정한 두께가 되도록 손가락으로 늘려가면서 모양을 만든다. 어떤 문양으로 장식을 넣어야 멋이 있을까. 화려한 색보다는 늘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은은한 카키색이나 담갈색 계열이면 어떨까. 볼수록 정감이 넘치고 그윽한 향기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도자기를 상상해 본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을 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손끝의 감촉으로 두께의 균형을 감지 해가며 갓난아이를 다루듯이 고르고 또 고른다.
신경을 곤두세워 마음을 쏟다보니 호흡 소리만 들릴 뿐 무아경에 빠져 들어갔다. 부드럽고 섬세한 손놀림으루 두께가 어느 정도 가늠 될 즈음 온 몸에는 힘이 빠지고 팔과 손가락마저 저려온다.
아직은 서투른 단계라서 그런지 빚어놓은 모양이 매끈하지도 않고 엉성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힘껏 최선을 다 했는데도......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헐어서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 무거운 침묵과 함께 번민에 빠진다.
나의 인생도 생각대로 안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듯이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신장염으로 온 몸이 부은 채 앓아 누우셨던 할머니를 보면서 간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꿈은 바뀌어 명강연자나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며 살고 있다. 덧없이 흘러가는 삶의 와중에서 또 다른 꿈을 꾸면서......
삶이란 돌아보면 언제나 아쉬움뿐이다. 내가 바라고 원했던 그 길을 가기 위해 반성과 뉘우침으로 삶을 다독이며 살아가듯이 애초에 구상했던 도자기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 고르지못한 표면을 나무칼로 깎아내며 다듬는다. 그리고는 그느르에서 서서히 말린 다음 깨지지 않은 것만 골라 가마 속에 차곡차곡 앉힌다.
끔찍이도 괴롭고 무서운 고통을 고스라니 참아 내야만 하는 초벌구이를 생각하니 나는 벌써부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다.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웅크리고 앉아 800~900도의 뜨거운 불의 세례를 받아야하는 참혹함 앞에 그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활활 타오르는 가마 속의 불빛을 보며 인고하는 초벌구이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내 온 몸과 마음까지도 까맣게 타 들어가는 것처럼 애간장이 녹는다. 마치 불덩이 같은 고열로 혼절하여 경기하는 내 어린 자식을 지켜보던 그때처럼.
끝까지 잘 참아내어 깨지지 않게 하소서.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는 큰 기쁨을 주소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두 손을 모은다.
혹독한 산고를 치루어내고 얻어진 귀한 생명. 나는 가슴에 안아 따듯한 체온으로 품어도 보고 어루만져 보기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뜨거운 애정을 나눈다. 이리 보아도 신기하고 저리 보아도 기특하다.
창작의 신비로움으로 그간의 모든 수고가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초벌구이를 거치면서 기쁨보다는 깨지는 아픔을 더 많이 겪었다. 가슴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듯한 허탈감으로 신음 속에서 쓰라린 아픔을 달래며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깨진 조각을 하나하나 꺼내어 원형대로 맞추어 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 따듯하다. 가슴이 미어지며 울컥 눈물이 복볻친다. 잊어버리자 하면서도 손으로는 연신 쓰다듬고 보듬어 본다. 왜 이렇게 연연해하는 걸까. 내 온 정성과 기대를 몽땅 앗아가 버려서 일까. 애지중지 기른 자식처럼 생각이 들어서 일까. 텅빈 듯한 가슴과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내 탓이란 여운만 감돌뿐 허전함만 가득하다.
쌓이고 또 쌓이는 아픔을 감내하며 성급하게 욕심을 낸 것이 원인이란 것도 깨닫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욕의 상태를 말함이리라.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얻기 위해서도 많은 희생과 노력이 따르겠지만 버리는 것 또한 고통과 아픔이 있으므로 더더욱 쉽지 않다.
모두를 얻기 위해서는 다 버리라는 말의 참 의미를 도자기를 빚으며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깨지는 아픔을 통해서 내 안에 쌓여있는 탐욕과 두터운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어떤 빛깔의 삶을 살아야 책임을 지는 것이며 또 값진 인생일까. 다양한 색깔 중에 무슨 색으로 배합을 해야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며 오묘한 도자기의 빛깔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유약에 관한 연구와 고뇌가 시작된다.
도자기를 빚는 일은 자신과의 치열함 싸움이며 마음을 갈고 닦는 구도의 과정이요, 우리 인생에서 자식을 기르는 일과 같다. 얼마만큼 인내하고 깨달으며 또 비워내고 삭혀야 하는지. 진실된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하고 욕심을 내지 않아야 흙은 비로소 도자기의 가능성을 지닌다.
초벌 재벌이라는 뜨거운 인고의 시련을 거쳐야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듯이 그 처절한 고통은 내면의 성숙을 위해 내가 치루어 내야하는 아픔이며 괴로움과 다르지 않다.
도자기를 빚으며 수얿이 깨지는 아픔을 통해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욕심이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 일찍 도자기를 배웠더라면 그 동안의 삶에서 욕심으로 인하여 마음 아팠던 일들이 더러는 줄어들지 않았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갈고 닦아야 친구네 대청마루에서 처음 보았던 그 도자기의 혼을 닮을 수가 있을까. 그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 도자기의 혼과 나의 영혼이 일치하는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겠지.
숲속의 비밀
방화자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는 오월의 숲 속으로 산책을 나섰다.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냄새며 미풍에 춤을 추는 나뭇잎들의 율동이 여유롭다.
오월의 숲은 젊음 그 자체다. 그래서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고 청신하다.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상징하며 희망을 품게 한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오월의 숲을 사랑하고 또 나의 청춘 시절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늘 향해 힘차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은 나의 이십대를 연상하게 한다. 높은 이상을 꿈꾸며 혈기 왕성했던 젊음은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마음껏 자유롭던 시절이며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고로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는가. 짙푸른 녹음의 계절인 여름을 성큼 지나 가을의 문턱에 서있는 중년의 초조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지나온 날보다는 살아갈 날들이 짧아서인지 나는 요즈음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잡으려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망함. 그저 세월에 떠밀려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무엇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마치 쫓기는 듯한 절박감으로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청청하고 생기 넘치는 5월의 숲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젊은 남녀 한 쌍이 다정스런 눈빛으로 밀어를 속삭이며 숲길로 걸어간다. 희망에 부푼 저들의 모습은 마치 봄이면 제일 먼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의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다. 나도 한때 저들처럼 부푼 가슴으로 미래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기억 저편에서 희미한 흔적이 점점 크게 부각되면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이십대 중반에 꿈처럼 스처간 일들이 떠오른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고향 충주에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비료공장이 세워져서 전국 공대 출신 엘리트들이 많이 있었다. 친구 중 누군가가 미팅을 주선하여 여덟 명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남녀 각기 결혼 적령기 였던터라 가볍게 즐기는 만남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매번 여덟 명이 붙어 다녔고 그러는 사이 서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젊음과 낭만이 함께 하던 그 때는 날마다 푸른 꿈이 하나 둘씩 쌓여만 갔다.
어느 따듯한 봄날 토요일 오후에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호암지에서 뱃놀이하자는 제안에 합의를 했다. 한배에 네명씩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보니 서로 호감을 갖는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행히 내 관심을 끌던 사람은 나와 같은 배를 탔었다.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연못 위에 가득히 울려 퍼지고 가슴 가슴엔 뜨거운 열정이 솟아올랐다
개나리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짝이 지어졌고 오붓한 둘만의 대화로 가슴이 뜨거워 졌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양 포만감에 휩싸였고 새소리 바람소리까지도 축복의 속삭임으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의 합동미팅은 끝이 나고 그날 맺어진 짝꿍끼리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학교일 보다도 정신은 온통 충주에 가있었고 그 친구 만날 생각에 가슴은 설레곤 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한때의 내 인생을 장식했던 인연들.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들 가고있을까. 그들도 그때의 추억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꾀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울려 퍼진다. 깃털처럼 일렁이는 바람 결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뭇잎들은 어쩌면 저리도 질서 정연할까. 어느 것 하나라도 뒤틀리거나 뒤바뀐 것이 없다. 위치의 높고 낮음을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 잘도 자란다.
이 푸른 오월의 숲도 이 모습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불도저에 밀려서 원치도 않는 변화 속으로 밀리고 또 밀려 갈 것이다. 우리 인생이 세월에 밀려 변해가듯이 그렇게 소리도 없이......
계절에 따라 깊은 의미를 던져주는 숲은 나에게 선견지명의 일러준다. 겨울의 긴 침묵에서 깨어나 새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봄의 신록은 모든 이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폭염과 갈증에 시달려도 의연하게 자라 산소를 공급하고 그늘을 만들어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여름의 숲. 떠날 때를 알아 마지막 남은 정열을 화려하게 불태운 후 조락의 늪으로 잠기는 가을 숲은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아가라는 순명의 지혜를 일러준다. 나목으로 긴 겨울을 북풍과 싸우며 도를 닦는 정신으로 인고하는 겨울 숲은 새로운 삶을 위한 예비자의 고뇌하는 모습이다. 는 오늘 이 맑고 푸른 오월의 숲속에 묻혀 나의 의지가 아닌 숲이 전해주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싶다. 내 영혼까지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그런 소리를......
숲은 나더러 나무의 살아가는 법과 덕을 배우라고 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말없이 온몸으로 감내를 하는 아량과 인내의 의연함을 본받으라고 한다. 오월의 숲, 그대는 나의 스승이요, 지혜와 위안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큰 힘의 소유자다. 번뇌와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내게 평화를 안겨준다.
오월의 푸르름이 오래 가지 않듯이 청춘 또한 잠깐 머물다 가는 인생 과정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는 그리움으로 가슴깊이 간직했다가 오늘처럼 살짝 꺼내어 음미해 보는 맛 또한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까. 이미 가버린 젊음을 더는 슬퍼하거나 탓하지 않으리라.
숲속의 맑은 향기로 목욕을 한 몸과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초록색 드레스로 치장한 숲속의 요정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오늘부터 꿈을 꿀 것이다. 찬란한 오월의 숲처럼 향기로운 나의 미래를 위한 꿈을......
연등을 그리며
方 花 子
곱디고운 꽃잎으로 사붓이 오시는 분. 님이라 부를까.
온 세상 밝히려고 연등으로 오시는 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그저 바라만 보았다.
연등사진을 보는 순간 번개같은 섬광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커다란 화폭에 연등의 물결은 일렁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어릴 때 처음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야. 연등을 화폭에 가득 그려 넣어야지.
마음은 이미 아득한 세월의 그림자를 따라 어느새 산중턱에 있는 절 마당에 머물렀다. 꽃 분홍 연등의 물결이 바람에 너울대고 법당 안에선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어른들의 모습이 비쳤다.
어느 해 사월 초파일 어머니는 목욕재계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서두르셨다. 평소 아껴 모았던 돈으로 초와 향을 준비하고 공양할 쌀을 머리에 인 채 반나절을 걸어 절로 가셨다. 호기심에 끓던 나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종종 걸음으로 따라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연등을 보았다. 그리고 칠성당에 촛불을 밝혀 아들을 점지해 달라면서 절을 올리던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도 보았다. 칠성당 벽에 그려진 탱화가 너무도 낯설어 얼마나 무서웠던지 어머니 뒤에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해질 무렵에야 연등을 밝힌 어머니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합장한 채 더 없이 극진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셨다. 거의 어둑해질 때 쯤 절을 내려오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소스라쳐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환하게 빛을 발하는 연등의 물결, 얼마나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눈감으면 선연이 떠오른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이 연등처럼 환하게 웃음으로 가득 찼던 모습이었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맘껏 기도하고 치성을 드려서일까. 그 후부터 내 뇌리 속에 연등이란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살아있다.
나는 서둘러 베란다에 두었던 캔버스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고 이젤에 세웠다. 점 하나 없는 하얀 캔버스. 텅 빈 여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 것인가 고심했다. 시선을 캔버스 위에 고정시킨 채 나는 몇 시간을 궁리해 보았다. 좋은 구도와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처마 밑에 매달린 대형연등과 법당 안의 천장에 가득한 작은 연등을 대조적으로 그리기로 하였다. 위치를 정하고 밑그림을 그린 다음 그림의 주제인 큰 연등부터 그려 나갔다.
캔버스에 그려진 연등의 크기는 사진보다 몇 십 배나 더 컸다. 꽃잎의 크기도 늘려야 함은 물론 크기만큼의 기울기며 색깔의 명암, 그리고 모양도 그 비례를 맞추어야 사진과 똑같은 느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꽃잎을 하나하나 그려나가면서 붓을 든 손의 위치와 사진을 보는 눈의 각도가 달라 착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또렷이 보이지 않아 그릴 수가 없게 되면 붓을 놓고 나는 창문을 연 다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시력이 조금 회복되면 다시 그리기를 시작했다. 세밀한 묘사를 요하는 정밀 작업이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온 나는 그림 앞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햇빛을 담뿍 받아 빛을 발하는 큰 등은 해탈한 부처님의 현란한 모습이요, 법당 안 천장에 가득 매달린 칙칙한 연등은 사바세계의 무명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의 군상 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초라한 나의 모습도 점점 크게 다가섰다.
하찮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나의 민감한 성격, 보고도 못 본 척 하지 못하는 곧이곧대로의 내 성품. 그렇다고 잘못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고 털어 버리지도 못하는 옹졸함. 그런 아픔과 상처가 먹물처럼 배어들어 흐린 날이 많은 나날들. 언제까지 나는 이런 모습이어야 할까.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고유의 덕성으로 불성을 지닌 연꽃, 진흙탕 속에 있어도 맑은 심성을 잃지 않는다 하여 부처님은 청정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연꽃에 비유했다 하지 않던가. 연등에 불을 밝히는 뜻 또한 무명에 덮인 어두움을 밝히고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뜻이라고 한다.
문득 빈자(貧者)의 등이 생각난다.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구걸을 하여 얻은 돈으로 기름을 사서 한 개의 등을 밝혔는데, 다른 등은 다 꺼졌어도 여인의 등불만이 밝은 빛을 계속 내어 어둠을 몰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한다. 그 여인은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오랜 옛부터 정성껏 공양을 해왔고 기복 적인 마음과는 달리 오로지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어찌 해탈의 광명을 쉽게 꿈꿀 수 있으리오만 연등을 그리면서 나는 연꽃의 불성(佛性)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 마음을 닦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하나하나 꽃잎을 그릴 때마다 기도와 참회로 새로운 마음을 다짐했다. 정성을 다해 꽃잎에 혼을 불어 넣으며 생명을 깃들게 하였고, 마음속에 혼탁함이 비춰질 수 있는 거울이 되게 하여, 오욕으로 얼룩진 심신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샘물이길 바랬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지혜와 슬기를 얻는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고자 했다.
연등 밑에는 창호지 문이 있어 하얀 여백인 채로 열려 있다. 활짝 열린 법당 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의 화폭에도 얼마쯤은 여백을 남겨두고 싶다. 거기서 한없는 고요와 평화 그리고 휴식을 만끽하며 투명한 영혼을 간직한 채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고 싶다. 그리하면 모든 걸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생길 것이며 그 사랑이 싹트는 순간에는 참 자아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듭나는 삶, 그것은 부활의 의미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밖은 지금 봄바람의 입김으로 나무들이 연녹색 잎을 틔어 새 삶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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