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
“차별의 사각 링에 서려면 네 귀퉁이를 모두 쳐다봐야 해!” |
씨름선수최홍만(25)이 K-1 격투기로 돌아섰다는 소식에 떨떠름해 하는 이가 적지 않다. 민속씨름을 집어치우고 섬나라 격투기판에 돈을 벌러 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일본 현대격투기(프로레슬링)의 효시 역도산(力道山), 역도산의 분신 같은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 K-1의 뿌리인 극진가라테의 창시자 최영의(崔永宜·오야마 마스다쓰), 역도산에게 일발필살의 가라테촙을 가르친 강창수(姜昌秀·나카무라 히데오)…. 혹시 최홍만이 느닷없이 도일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손들이 그를 부르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일본열도를 들끓게 하는 격투기 붐은 바로 한국 핏줄 싸움꾼들이 발휘한 투혼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라가 망한 뒤 한반도의 청년들은 저마다의 꿈을 펴기 위해 뿔뿔이 도일했다. 그러나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 돈도 지식도 연줄도 없이 이민족의 차별과 냉대를 이기고 홀로 살아남는 방법에 주먹이 있었다.
주먹은 폭력이다.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정직하다. 주먹의 세계엔 민족적 우열도, 배타적 감정도, 배우고 못 배운 차이도, 기존의 인격자산과 배경 같은 어드밴티지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일대일의 실력만 통할 뿐. 지느냐 이기느냐! 참으로 원시적이지만 승부가 간灼構? 누가 우위인지 알아보기도 쉽다.
정건영, 이노키, 최영의와 K-1
사무라이 시대가 700년이나 지속된 때문일까. 일본에는 폭력집단에 일정한 사회적 지분을 인정하는 풍토가 있다. 한마디로 칼 한 자루, 주먹 하나만 세도 먹고 살고 존경받을 수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서는 향학의 상징이어야 할 ‘문구(文句)’라는 말이 불평불만의 뜻으로 통한다. 식자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야쿠자의 실력이 일제시대에나 지금에나 정·재계에 깊이 통하는 특이한 선진국이다.
재일동포 중에 왜 격투기나 프로야구, 심지어 폭력단 같은 분야에서 걸출한(?) 실력자들이 배출되는가. 그 원인을 재일사학자인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일본사회가 배척하는 반도출신이기에 일본인이 우대받는 분야에선 희망이 없다. ‘시마구니 곤조(島國根性)’라는 일본 특유의 지독한 편견과 차별이 통하지 않는 세계라야 성공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일대일의 적나라한 체력과 기술만 통하는 격투기 세계에서 반도출신의 실력자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야쿠자 두목 정건영(鄭建永·일본명 마치이 히사스케(町井久之))은 도쿄의 긴자를 중심으로 활동한 최대의 폭력조직 동성회(東聲會·전성기 회원 1500여명) 회장으로 이른바 관동지역의 ‘밤의 제왕’이었다(관서지역은 유명한 야마구치구미 조직이 통치). 180㎝가 넘는 거구에 주먹이 세고 정치력도 대단해서 밤거리의 왕좌에까지 올랐던 그의 별명은 ‘긴자의 호랑이’.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 정건영의 힘을 빌리곤 했고 나중에는 동성회 명예고문을 맡기도 한다. 이 또한 재일동포끼리의 뜨거운(?) 상부상조였다.
일본의 양대 격투기대회인 K-1과 PRIDE에 프로모터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안토니오 이노키는 자이언트 바바와 더불어 역도산 문하의 양대 제자다. 이노키의 주걱턱은 어려서부터 유별나서, 역도산은 그를 늘 ‘주걱턱(아고)!’이라고 불렀다. 역도산이 옆사람에게 ‘아고 요베!(주걱턱 불러)’ 하면 그건 어깨가 쑤시다는 말이었고, 그때마다 이노키가 달려와 스승을 위해 마사지를 해주었다.
또한 K-1 격투기의 원점에는 가라테의 명인 최영의가 개척한 극진회관(極眞會館·국제공수도극진회관)이 우뚝 서있다. 그의 일본명 오야마(大山)는 ‘높을 최(崔)’자에서, 마스다쓰(倍達)는 ‘배달겨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956년 최영의가 맨손으로 소를 쳐서 잡는 시범을 보이며 보급한 극진가라테는 선풍적인 붐을 일으켰고 결국 세계 124개국 12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원래 가라테는 직접 몸을 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가 ‘실전 풀컨택트 가라테’라 하여 잔혹하게 가격하고 쓰러뜨리는 격투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최영의의 문하생 이시이 가즈요시(石井和義)가 정도회관(正道會館)을 만들어 독립한다. 1993년 이시이가 가라테, 권법(拳法), 격투기, 킥복싱을 혼합하고 녹아웃(knock-out)의 머리 글자를 따 좀더 알기 쉽고 잔인한 경기로 업그레이드시킨 격투기가 바로 K-1인 것이다.
1950년대는 역도산이 일본에 프로레슬링을 보급하고 가라테촙으로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제압해 열도를 달아오르게 한 시대다. 최영의의 극진가라테는 역도산의 가라테촙 흥행이 성공한 연장선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다. 그렇다면 K-1에 관여하는 이노키는 역도산의 분신이요, K-1의 격투내용에는 역도산의 가라테촙이 만들어낸 흥행 아이디어가 배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홍만이나 재일동포 유도선수 출신 추성훈(30·秋成勳·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거기에 뛰어드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씨름꾼의 피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셋, 형 둘이 있었다. 아버지 김석태(金錫泰)는 풍수를 잘보는 지관이었다. 매일처럼 산에 올라 풍수를 살피는 아버지는 때로 산삼 같은 약초를 캐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한다.
신락이 열 살무렵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래서 살림은 어머니 전기(田己)와 큰형 항락(恒洛)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여자치고는 체격도 크고 농사일에도 손이 빠른 여장부였다. 하지만 큰형 항락은 평범한 농사꾼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체격과 힘이 빼어난 장사였다. 게다가 산삼을 먹은 덕인지 함경도 일대에 이름을 떨친 씨름꾼이 되었다.
항락은 씨름이 전업이 되어 집안일은 뒷전이었다. 둘째형 공락(公洛)은 공부가 뛰어나 서울에 유학중이었다. 말이 유학이지 돈을 보낼 형편이 못되어 의사가 된 어느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시켰다. 그러므로 집안일과 아버지 병시중은 신락의 몫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10대인 신락은 큰형 못지않은 체구에 씨름도 제법이었다.
1938년 단오절. 예년처럼 풍작을 기원하는 씨름대회가 열렸다. 우승에 황소 두 마리, 준우승에 황소 한 마리, 3위에 광목(옷감)을 내건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형 항락. 그러나 진짜로 주목을 받은 인물은 바로 신락이었다.
큰형이야 30대의 산전수전 다 겪은 유명한 씨름선수이지만 신락은 15세의 무명소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준결승전까지 오른 뒤 3, 4위 결정전에서 이겨 3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때 까까머리 소년 신락을 유심히 지켜본 일본인 둘이 있었다. 오가타 도모카쓰(大方寅一)라는 일본인 형사와 그의 양아버지 모모타 미노키치(百田己之吉)였다.
오가타는 현지 경찰서에 부임해온 형사였고 모모타는 양아들을 만나러 온 김에 씨름구경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사업가인 모모타는 일본씨름 스모의 열광적인 팬으로 동향 출신 스모선수 다마노우미의 후원회 간사를 맡고 있었다.
모모타는 씨름이 끝나자 신락의 집으로 찾아가 일본에 데려가 스모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체격도 좋고 힘도 기술도 좋고, 대형 씨름선수인 항락과도 한 피가 아닌가. 그러나 모모타의 열망은 벽에 부딪쳤다. 몸져누운 아버지의 간병문제, 그리고 어머니와 형 항락의 강한 반대에 직면한 것이다.
혹독한 스모 수련
그렇게 모모타만 몸이 단 채 2년 세월이 흐른 뒤, 신락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신락이 어머니와 형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행을 결심한 것. 가족은 “일본에 가고 싶다면 아버지 3년상은 치르고 가라”고 말렸다. 억지 결혼도 시켰다. 인근 마을 물레방앗간 집 딸 박신봉과 전격적으로 혼사를 치렀다. 그러나 신락은 일본행을 단념하지 않았다. 모모타의 권유로 마음 들뜬 신락은 곧바로 현해탄을 건넌다.
1940년 신락은 다마노우미가 이끄는 스모도장에 들어가 89명의 제자 중 한 명이 된다. 당시 신락의 키는 175㎝ 체중은 84㎏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록에는 출신지 조선, 본명 김신락, 선수명(시코나) 역도산으로 남아 있다.
역도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일까. 당시 스모선수 중 경남 함양 출신의 노하우(盧夏于)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선수명이 처음에 함양산이었다가 나중에 지리산으로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당시에는 선수명에 고향의 인연을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역도산이라는 이름에는 출생지와 이어지는 연이 전혀 없다.
수련 1년이 지나면서 그에 관한 서류상의 기록도 바뀐다. 일본의 히젠(肥前·나가사키현 및 사가현의 옛 지명) 출신 역도산 광호(光浩). 이후에는 나가사키 출신 역도산 신락(信洛)이라는 엇갈리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 출신이라는 멸시와 차별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말도 서툴고 스모의 기초도 모르는 그가 가진 것은 오직 튼튼한 몸 하나뿐이었다. 유일한 자산인 몸에 기술과 힘을 붙여 상대를 이기는 것, 그것만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이요 자존심의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이었다. 역도산의 승률은 놀랄 정도로 높았다. 1941년 1월대회 저단급(조노쿠치)에서 5승3패. 5월대회에서는 6승2패. 이듬해 1월에는 전승으로 우승하는 등 첫 시작 이래 승률이 언제나 반타작 이상이었다.
그는 가혹한 스모 수련 중에 ‘아리랑’을 부르며 망향의 슬픔을 달래기도 한다. 역도산은 후원자 스즈키 후쿠마쓰(당시 지바현 야치마타 거주)의 집에 자주 들러 그의 어린 딸 기미에에게 ‘아리랑’을 부르며 가르쳐주었다. 기미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의 ‘넘어간다’를 일본식으로 ‘누오모간다’라고 부르곤 했다. 역도산이 몇 번이나 바로잡아줬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1942년 봄 고향에 들른다. 일제가 만주에 주둔중인 일본군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스모선수 위문단(이른바 황군위문)을 보낼 때 휩쓸려 간 것이다. 물론 함경도에 가는 일정은 없었다. 하지만 톱클래스 선수가 아니라서 위문단의 양해를 얻어 고향을 다녀가게 된다. 이 때의 일시방문으로 처 박신봉과의 사이에 딸(김영숙·62·1990년대 북한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박명철의 처)을 낳게 된다.
스모 연습으로 지고 새는 나날. 역도산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해 1944년 5월 8전 전승으로 우승을 거두고 그해 10월 주료(十兩)급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1945년 역도산은 다시 한번 고향땅을 밟게 된다. 가족들이 전쟁말기의 일본 상황을 걱정해 ‘어머니 사망’이라는 거짓전보를 보내 급거 귀향한 것이라고 한다. 처와 딸을 만나고 큰형 항락에게는 씨름으로 도전해 갈고 닦은 스모 실력을 자랑하려 했다. 역도산은 몇 번이나 나동그라지면서도 “한 번만, 한 번만 더!”하고 덤볐다고 한다.
역도산은 붙잡는 가족의 손을 뿌리치고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이것이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1945년의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당시의 요코즈나(橫繩·스모 챔피언)가 10전 전승으로 우승할 때 역도산은 8승2패를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맞이한 해방. 그는 귀향을 망설이다 잔류를 결심했다. 비좁은 고향보다는 기회의 땅 일본에서 스모의 최고봉이 되고 싶었던 것일게다.
역도산의 스모 연습은 실전 이상이었다. 도장 내의 후배들은 그를 공포의 선배로 여겼다. 훗날 요코즈나로 이름을 떨친 와카노하나(花田勝治·나중에 스모협회 이사장 역임)도 역도산 선배와의 연습은 두려웠다고 증언한다.
“다들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머리부터 부딪치기로 대들어봤지만 목죄기 기술에 당해 거꾸러지고 그에게 밟히고 말았다. 풀어주지도 않고, 너무도 지독해서… 내가 그의 허벅지를 물어뜯은 적도 있다.”
나중에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역도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검은 타이츠(운동복)는 스모 연습중에 물린 흉터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만사에 억척이었다. 그리고 개성파였다. 상투 머리의 그가 전후 일본에선 보기 드물던 빨간색 오토바이(‘인디언’이라는 상표의 미국산)를 타고 다니면 다들 쳐다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장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럽다고 불평하자 인디언 오토바이를 탄 채 도장입구를 부수고 실내로 돌진하는 사고도 쳤다. 전통과 위계질서가 엄중한 스모계의 이단아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차별과 조롱에 대한 울분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1949년 돌연한 일이 벌어진다. 폐 디스토마로 입원하게 된 것이다. 성적은 급전직하. 3승12패라는 치욕적인 결과가 나온다. 40년 데뷔 이래 딱 세 번째의 마케코시(승률 5할 미만)였다. 그러나 단련 또 단련, 강해지겠다는 무서운 집념으로 다음 대회에선 보기좋게 역전해낸다. 8승7패. 한마디로 무서운 세키와케(요코즈나, 오제키에 이은 제3등급)였다.
그러나 역도산의 고민은 쌓여만 갔다. 출신의 벽이 문제였다. 이를테면 1947년 6월 대회에서는 다 이긴 시합이 판정으로 뒤집혔다. 9승1패의 기록으로 우승결정전까지 오른 역도산은 요코즈나와 맞붙어 보기좋게 쓰러뜨렸다. 요코즈나가 고개를 숙이고 퇴장하려는 순간 심판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곧 이사미아시(공격자의 발이 먼저 테두리 밖으로 나가 패함)가 선언되어 승패가 뒤집혔던 것이다. 역도산은 이날의 비통함을 수기에 남겼다.
도장과의 불화도 깊어만 갔다. 그가 디스토마로 입원해 있을 때 문안 다녀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입원비도 홀로 대야 했다. 패전 후 도장을 재건할 때 역도산이 기여한 몫으로 치면 비정한 대우였다.
잘라버린 상투
1950년 역도산은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렸다. 스모 선수의 길을 접은 것이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종착역이 어디인지 모를 방황의 길을 택한다.
역도산이 스스로 상투를 잘라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르포작가 이순일(李舜馹·‘또 한 명의 역도산’의 저자·재일동포3세)씨에게 증언해 준 이는 평양출신의 가라테 스승 강창수(일본 권도회 총수)씨다.
“역도산은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데 좌절감을 느꼈어. 나한테 출신 때문에 승격이 안 된다고 불평을 하길래 내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했더니, 단기(短氣)로 그러는게 아니라고 하더라면서 원래 모모타가 일본으로 가자고 할때 요코즈나 되면 귀국시켜주마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대성의 꿈을 품고 왔는데, 고향도 가족도 등지고 스모 일념으로 살아왔는데, 희망이 없다며 억울해 하더라고.”
역도산은 강창수씨를 처음 만날 때도 규슈 출신이라고 했다고 한다. 강씨가 이북 억양을 알아채고 스스로 평양 출신임을 밝히자, 그제야 고백하더라는 것이다. 봉건적인 스모의 세계는 민족차별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그 뒤로 역도산은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열 살 위의 동족 스승을 ‘형님’이라고 깍듯이 부르곤 했다.
한국전쟁이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역도산은 전쟁 발발 두 달 후 스모를 포기하고 이듬해인 1951년 2월 일본국적을 얻는다. 일본이 전란기의 무적자(無籍者)를 구제하기 위해 설정한 기간에 모모타의 아들로 입적해 모모타 광호(본적은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296번지)라는 이름으로 근거를 취한다.
이름과 고향, 자신의 정체를 감춘 역도산은 잠시 스모계 복귀를 노렸지만 실패했다. 정계실력자도 거들어줬으나 스모계의 반발로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탕아처럼 버림받은 처지. 낮이면 술, 밤이면 싸움질로 울분을 삭이며 소일하던 시절이다.
레슬링과의 만남
1951년, 도쿄 신바시의 나이트클럽 ‘은마차’에서 진을 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거기서 역도산은 임자를 만난다. 한 덩치 좋은 미국인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웬걸, 몇 번 헛치는 사이에 역도산은 납죽 깔리고 얻어맞았다. 사카다 해럴드라는 프로레슬러였다. 일본계 2세 미국인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 때 미국 역도대표선수로 출전해 은메달을 거머쥔 사나이였다.
운명의 기로였다. 이 일은 그가 프로레슬링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 온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만나고 영어를 익히며 도미(渡美) 수련을 준비했다. 사카다 해럴드는 역도산에게 ‘Fuck you’가 미국인과 첫 인사를 나눌 때 쓰는 말이라고 가르쳤다. 무학에 가까운 역도산은 이를 그대로 옮겼다가 개망신을 당했다. 그가 이를 갈며 영어를 익혀 국제 레슬링 프로모터로서도 손색없는 영어를 구사하게 된 계기였다. 스스로도 쓰는 영어, 읽는 영어는 안 된다고 자백했지만 비즈니스에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했다.
강창수로부터 가라테촙을 전수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역도산은 스모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리가 굵고 짧아서 레슬링에서 발기술은 쓸 수 없었다. 그저 상대의 하반신을 노릴 정도였다. 그래서 스모 선수때 잘 하던 ‘하리테(손바닥으로 얼굴 치기)’를 발전시킨 수도(手刀·가라테촙)를 가르쳤다. ‘정신을 모아서 쳐라! 하루 5000번 쳐라!’고 하면 역도산은 1만번을 연습했다. 지독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보통명사가 된 ‘가라테촙’도 스승이 지어준 이름. 역도산이 도미 직전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가르고 파괴하는 일격을 뜻하는 영어 ‘촙’을 붙여주었다. 대학을 나온 인텔리 스승에게서 영어로도 통하는 이름을 얻어낸 것은 역도산의 흥행사적 재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기무라와 이판사판 5회전
1952년 미국 순회 경기는 대성공이었다. 200여회 출전해 단 5번만 졌다는 소문에 일본인들이 박수를 보냈다. 일본에 원폭을 떨어뜨려 무릎꿇게 한 미국인을 때려눕히는 ‘일본인’에 대한 갈채는 뜨거웠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 반보쿠는 역도산 전기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체격이 큰 외국인 레슬러를 때려눕히고 내던지는 역도산 그는 당시 ‘패전으로 황폐한 국토, 점령당한 나라 국민의 가슴에 쌓인 울적해 있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국민감정을 대변해주었다. 당시의 일본인에게 용기를 안겨주었다는 점을 잊을 수 없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에 명예와 돈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개선장군처럼 일본에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결성한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격투기다. 그리고 미국에서 본대로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확산을 꾀했다.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라는 흥행 프로모터가 “방송 중계를 하면 손님이 돈주고 오겠냐”고 걱정해도 역도산은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역시 역도산은 선견지명이 있는 흥행사였다”고 나가타는 회고했다.
전후의 영웅 역도산, 그로 인해 일본열도가 활력을 얻고 텔레비전 판매가 불붙기 시작했다.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고 과연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항세력이 생긴다. 유도의 귀신으로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正彦)가 자기 고향 구마모토에 ‘국제프로레슬링단’을 세우고 역도산에 도전장을 냈다.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은 쇼다! 진검승부라면 내가 이긴다!’
역도산은 격노했다. 무엇보다 기무라가 역도산의 호적상 비밀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는데, 그것이 역도산의 아픈 데를 자극하고 분노를 격발시켰다.
1954년 12월20일, 연말 대회전을 갖기로 했다. 역도산-기무라전(戰) 이외에도 두 사람의 제자 4명씩을 출전시켜 일본 프로레슬링의 주도권을 국민 앞에서 겨루는 이판사판의 5회전. 역도산은 전날 제자에게 “내일 저놈들을 쳐 죽여야 해!”라고 전의를 불태웠다.
스모와 유도로 닦은 격투기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더 셀까.
1억인이 NHK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결전의 서막 제1전은 ‘필살’ 밀명을 받은 역도산측의 승리. 제2, 3전은 무승부. 제4전은 역도산측의 승리. 양 진영간 승부는 이미 갈렸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일전이 펼쳐졌다. 승자에겐 일본 프로레슬링의 정상이라는 명예와 105만엔의 상금이 안겨지고, 패자에게는 45만엔의 대전료가 떨어질 뿐이었다.
대전이 시작되고 15분 동안은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기무라의 왼발이 역도산의 복부를 때리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순간 역도산이 가라테촙으로 기무라를 무차별 난타했고 기무라가 쓰러지자 차고 때리기를 40초 동안 계속했다. 심판의 카운트가 끝나도 기무라는 일어서지 못했다. 15분49초의 결투가 끝나고 기무라는 병원에 실려갔다. 챔피언 벨트는 역도산에게 주어졌다.
역도산의 최대 라이벌은 철인으로 불리던 루 테즈였다. 역도산은 수차례 도전했으나 번번이 지고 말았다. 그러나 1958년 8월27일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 오디토리엄에서 마침내 그를 꺾고 세계챔피언에 오른다. 여세를 몰아 프레드 브라이시, 더 디스트로이어 같은 레슬러와 명승부를 펼쳐 격투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타고난 비즈니스맨
그는 아이디어와 돈벌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돌아오는 일도 있었고, 침실과 차에는 늘 메모 준비를 해두었다. 프로레슬러로서, 또 프로모터로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숱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일본에서 벤처라고 할 만한 맨션 분양, 사교클럽, 프로레슬링전용홀, 볼링장, 사우나, 스포츠짐, 스테이크하우스, 골프장 건설, 심지어 렌터가 사업에도 손을 댔다. 모두 미국을 드나들면서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그는 ‘일본은 반드시 미국처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돈에 관한 감각도 동물적인 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링에 올라 관중에게 한 손만 들어 흔드는 날은 부하들이 오금을 못 폈다. 수입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이면 두 손이 아닌 한 손만으로 답례했고 그런 날이면 종업원들이 박살나는 날이었다.
레슬링 흥행이 잘돼 늘 현금을 뭉텅이로 박스에 싣고 다니므로 담당자가 얼마씩 챙겨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역도산은 못 본 척 내버려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멱살을 잡고 공개리에 절취를 실토케 하곤 했다. 정확한 액수까지 대가며 부정행위를 한 종업원을 응징하는데, 보는 이의 기가 질릴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누군가 “어떻게 액수까지 알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링 위에 서 보면 견적이 다 나오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역도산은 모순투성이의 영웅이었다. 종업원들에게는 지독하게 인색했다. 그 숱한 ‘시종’을 부리면서도 미덥지 못했던지 스스로 차와 금고 열쇠만 10개도 넘게 차고 다녀, 주머니에서 항상 쩔렁쩔렁 소리가 났다. 하지만 정치헌금은 두둑히 베팅하는 스타일이었다.
북한 출생, 일본 국적, 한국 커넥션
허구와 실체의 이중생활, 양다리를 걸친 삶이어서일까. 일본인들이 박수와 갈채로 환호할수록 그는 출생의 비밀을 감추려 애썼다. 예를 들면 정건영 야쿠자 조직의 명예고문을 하면서도 정건영 어머니의 환갑잔치에는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박치기왕 김일(일본명 오키 긴타로)은 1958년 밀항선을 타고 도일했다가 붙잡혀 수용소에 갇힌다. 그곳에서 유명인인 역도산에게 편지를 써 강제송환을 면하고 그에게 얹혀살게 된다. 그러나 역도산이 김일에게 한국말을 한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역도산 앞에서 레슬링 훈련생들이 ‘기쿄’라는 꽃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김일이 그 단어를 몰라 어리둥절하자, 잠시 후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친 역도산이 “기쿄는 도라지꽃이야”라고 속삭이듯 말했다고 한다.
1961년, 역도산은 일본 니가타 항에 들어온 북한배 안에서 북에서 온 둘째 형 김공락과 친딸 김영숙을 비밀리에 면회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김일성의 환갑 선물로 독일제 벤츠승용차를 보내 지금도 이 차가 북한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1963년 1월에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주선으로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김재춘(金在春) 당시 정보부장과 만나기도 한다. 판문점에 들렀을 때는 북쪽을 향해 포효하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북한 출생, 일본 국적, 한국 커넥션. 그는 줄곧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출생의 비밀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조총련계를 통해 고향의 가족으로부터 편지라도 오면 역도산은 차안에서 접선하는 방식으로 전달받곤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드라이브를 하면서 접객하고 편지를 읽었다. 물론 한글은 죄다 잊어 번역해 읽어줘야 했다. 나름대로 핏줄의 인연을 챙기면서도 인기에 금갈 것을 두려워해 남의 눈을 피했다.
사업과 인기유지에는 일본 정계와 조폭계의 유력자가 필요했다. 집권 자민당의 우익정객 오노 반보쿠를 프로레슬링협회 커미셔너로 앞장세웠다. 오노와 연결되어 있던 우익의 선봉격 고타마 요시오(兒玉譽士雄)를 깍듯이 모시고, 고타마의 측근이자 오른팔이던 야쿠자 보스 정건영을 후견인으로 삼았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흥행에는 정건영을 방패막이로 삼고, 오사카, 교토 등 관서지방의 레슬링 흥행에는 그 지역의 밤을 지배하는 야마구치구미를 포섭해야 했다. 야마구치구미는 역도산의 동업자 나가타 사다오가 책임졌다. 나가타와 야마구치구미 회장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는 형제의 연을 맺은 사이였다. 역도산이 스튜어디스 다나카와 정식결혼을 한 뒤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 사람이 바로 야마구치구미의 두목 다오카였다.
1960년대 초, 물밑에서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된다. 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시절, 남과 북은 서로 역도산을 끌어들여 이용하려 했다. 역도산이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은 그의 바람막이 노릇을 하던 일본의 우익정객 오노 반보쿠와 고타마, 정건영 등이 역도산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역도산은 북측에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면 선수단 체재비를 대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한국 중앙정보부와도 인연을 맺는 줄타기 외교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숙명이었을까.
역도산은 도쿄에서 식당을 하는 어릴 적 친구에게 말했다.
“넌 좋겠다. 마음대로 당당히 걸어다닐 수 있으니. 나는 사각 링에 서니까 네 귀퉁이를 모두 쳐다보고 신경써서 다니지 않으면 안 돼.”
불안과 번민을 그는 그렇게 토로했다. 역도산은 죽마고우의 집도 늘 폐점하는 새벽 2시에 남의 이목을 피해 찾아오곤 했다. 재일교포와 어울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본인에게 불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도록 혼자 술을 마시며 외로운 사자처럼 ‘도라지’와 ‘아리랑’을 불러댔다.
1963년엔 미모의 JAL(일본항공) 스튜어디스 다나카 게이코와 결혼식을 올린다. 정·재계, 체육계, 조직폭력계, 연예계 등 하객만 3000명이 넘는 요란한 결혼식이었다.
그녀가 몇 번째 여자였는지는 역도산만이 안다. 첫아내는 고향의 박심봉, 두 번째는 교토의 여인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장녀 천영자(千榮子)와 아들 의호(義浩), 광웅(光雄) 셋을 낳고 헤어졌다. 세 번째는 한때 동거한 오자와 후미코라는 기생, 그리고 김정희라는 조총련계 여성과 동거하다 다나카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망한 최후
핏줄과 조국과 여인과 사업과 인기 사이에서 번민하는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꿈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죽기 얼마 전, 역도산은 밤중에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쳤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 다나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새하얀 백발의 노파가 바로 앞에서 칼 달린 죽창으로 날 찌르는 거야. 그래서 무슨 짓이냐고, 집어치우라고 소리를 질렀지.”
그리고 운명의 1963년 12월8일을 맞는다. 밤10시, 역도산 일행은 도쿄 아카사카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로 갔다. 그 전에 이미 몇 집을 돌고 돌아 술이 거나해져 있었다. 전날에 한해를 결산하는 시합을 성공리에 마친 터라 역도산은 하늘을 날 듯 유쾌한 상태였다.
화장실에서 한 20대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발을 밟았느니 안 밟았느니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역도산의 힘에 밀려 밑에 깔린 청년이 품속의 칼을 꺼내 역도산의 배를 찔렀다. 청년은 야쿠자 집단 스미요시연합회 소속 무라타 가쓰시(寸田勝志)였다.
중상은 아니었다. 전치3주의 경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처치가 나빴다. 역도산은 인근 병원에서 응급조처만 받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혹시 매스컴이라도 타게 되면 이미지에 타격을 입어 사업에 지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역도산 집 주변은 아연 긴장상태였다. 역도산의 보디가드를 맡은 정건영의 동성회 부하들이 가해측인 스미요시계에 보복을 별러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새벽에 무라타의 보스가 역도산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해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제야 역도산은 응급차를 불러 재입원해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닷새 뒤 복막염으로 재수술을 받게 된다. 역도산은 수술실에 들어가며 아내 다나카에게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무슨 약을 써서라도 살고 싶어. 죽기는 싫어. 부탁이야”라고 매달렸다. 이미 사신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일까. 그것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오무라에 묻힌 시신
사인은 마취과정의 실수로 추정되고 있다. 수술을 위해 근육이완제를 주사한 뒤 호흡을 시키지 못해 생긴 일인 것으로 전해진다. 가해자 무라타는 그 일로 7년 징역을 살고 나와 다시 현업(?)에 복귀해 간부가 된다.
도쿄의 오타구 이케가미역 부근 사찰 혼몬지(本門寺)에 역도산의 묘지가 있다. 절에는 역도산의 동상도 서있다.
역도산의 시신은 나가사키현의 오무라시에 묻혔다. 그를 데려온 모모타의 고향이요, 역도산의 허구의 출생지. 1970년대까지 기회의 땅 일본을 찾아 밀항한 한국인들을 수용했던, 그 유명한 오무라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역도산은 공교롭게도 거기에 영면의 터를 잡았다. 마치 그토록 감추고 싶어하던 출생의 비밀, 그 거짓 호적을 시신으로라도 입증하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