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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Sumer]
메소포타미아 남쪽에 있으며 누리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일군 겨레 또는 나라
지금의 이라크 땅에 든다. 수메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이 흐르는 땅으로 BC 5천년쯤부터 농경민이 붙박아 BC 3000년쯤에는 오리엔트에서, 누리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낳았다. 이들은 두 강의 중·상류 지역 또는 엘람지방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는 소택지(沼澤地)가 많고 두 강에서 생기는 홍수나 페르샤만(灣)의 높은 조수 때문에 일찍부터 간척·배수·관개·축제(築堤) 등의 토목공사가 이뤄져 마을끼리 서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힘있는 씨족은 센 발언권을 가졌다.
이들의 문명은 시기에 따라 알 우바이드기(期), 우루크기, 젬데트나스르기의 3기로 나뉜다. ① 우바이드기는 BC 3300∼BC 3100년경에 해당하는 문명으로 채색토기를 수반한 펴묻기[伸葬]와 니그로풍의 여자 토우(土偶)가 있었으며, 기단 위에 세운 신전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도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非)수메르적인 서아시아 옛 민족의 문명이라는 설도 있다. ② 우루크기는 BC 3100~BC 2900년쯤의 문명으로 쇠붙이를 썼으며, 수메르 문명의 특징인 신전(지구라트) 짓기가 시작되었고 원통인장(圓筒印章)도 발명되었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이 자라서 도시국가를 이루고, 고형(古型)의 설형문자가 쓰이는 등 수메르문명이 이루어졌다. ③ 젬데트나스르기는 BC 2900∼BC 2600년경으로 전기(前期)문명이 발전하여 역사시대로 들어가는 때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민족이나 언어의 귀속, 원주지에 관해서는 밝지 않은 점이 많다. 이 무렵의 정치는 촌락 공동체시대의 평등한 원리가 남아 있어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民會)와 씨족장들의 장로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뽑혔다. 초기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우루크·우르·키시·니푸르 등의 힘있는 도시국가가 우두머리를 다투었다. 이 중 니푸르의 엔릴신(神)은 각 도시의 왕들이 선망하여 수메르의 종교상의 중심적인 신으로 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500년 간 각 도시국가가 같이 서서 다투었고, 각 도시는 신의 소유라고 생각되어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시역(市域)과 주위의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정치·경제·군사·생활 등이 모두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공동체 또는 신전국가라고 할 정도였다.
도시간의 싸움이 잦자 점차 왕권이 자리잡는 한편 세습되었다. 또한 도시신(都市神)을 제사하는 신전은 많은 수입이 있었으므로 사제계급은 세속적으로도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국가는 수리권(水利權)이나 농경지·교역로의 확보를 둘러싼 옆 도시와의 싸움과 안으로 왕과 사제계급의 대립으로 쇠약해졌다. 초기 왕조시대 말기에는 라가시왕 우르카기나의 사회개혁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움마의 왕 루갈자기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움마도 BC 2300년경에 셈계(系)인 아카드의 사르곤왕에게 무너져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는 끝났다. 180년 동안의 사르곤왕조 뒤 수메르는 한때 다시 번영하여 우르 제3왕조를 일으켰으나 5대만에 동방의 엘람에게 무너지니 수메르는 셈족에게 동화되고,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수메르의 문화는 누리의 가장 오랜 문명으로서 오리엔트 역사상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들은 그림문자[繪文字]로부터 독특한 설형문자를 발명하여 고대 오리엔트에서 널리 쓰였다. 또한 12진법과 60진법을 썼으며 태음력을 따랐다. 수메르법이라는 법전도 편찬되었다. 우르 제3왕조시대의 《우르남무 법전》이나 《슐기 법전》은 단편적이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문학·신화·종교에 관한 책도 전해진다.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는 《길가메시서사시》도 잘 알려져 있다. 수메르는 그들의 역사기록은 남기지 못하였으나 《왕명표(王名表)》에는 많은 왕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우르 제1왕조 이전은 전설적인 부분이 많다. 건축·미술·공예에도 뛰어나 신전의 기단에서 발전하였다고 생각되는 지구라트[聖塔]는 평면의 직사각형기단을 계단으로 쌓아 올린 수메르 특유의 것으로 바벨탑의 원형이 되었다.
우르 및 에리두·우루크·라가시·키시·니푸르·움마·알 우바이드 등의 발굴은 고도의 도시생활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우르의 왕묘에서 나온 많은 유품은 이들의 높은 기술 수준과 예술 재능을 나타내고 있다. 두리새김[丸彫]으로 된 조각으로 우루크의 《여성 두상(頭像)》, 텔 아스마르·마리에서 발견된 《사제상(司祭像)》 《예배자상》이 있고, 부조에는 《와르카의 큰 잔》 《독수리의 비(碑)》가 대표적이다. 수메르에서는 점토 말고는 원료가 나오지 않아 석재나 광석·귀금속은 모두 무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먼 거리 무역이 행해져 동쪽은 인더스 유역, 서쪽은 아나톨리아·시리아·이집트까지 미쳤으며, 그 무역을 통하여 수메르문명은 오리엔트 각지로 퍼졌다.
- 두산백과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이다. 수메르 문명은 누리에서 가장 오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기원전 3500년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기원전 2000년쯤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 사람들이 수메르 땅을 빼앗고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 사람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그들을 웅 상 기가(ùĝ saĝ gíg-ga, 음성학적으로 uŋ saŋ giga)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ĝir)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수메르"는 아마도 이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왜, 아카드 사람들이 이 남쪽 땅을 "수메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사투리로 볼 수 있다.
수메르인은 셈어족이 아니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의 바탕이 된 기저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때 침입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옛 글은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4500 또는 6090~5429)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붙박은 뒤 문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 지방에 붙박은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충적된 기름진 땅을 부쳤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오늘보다 적어서,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살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먹는 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메르말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 등에 얽힌 낱말이 많이 보인다. 수메르 인들은 북부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익힌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을 보인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비로소 원시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비슷함은 라르샤 근처의 텔 아웨이리 (1980년에 프랑스 발굴단에 의해 발굴됨)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북부 지방의 농부들은, 신전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고, 물을 잘 써먹는 기술을 얻으면서,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자 남쪽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후반 까지, 수메르는 여남은 낱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도시는 엔시라고 불리는 성직자나 루갈이라고 불리는 임금이 다스렸다. 다음은 수메르의 주요 도시들 위치순서대로(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늘여놓은 것이다. 괄호 안은 현재의 도시 이름이다.
마리
아가데
키시 (Tell Uheimir & Ingharra)
중소 도시:
짐비르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선사시대의 우바이드기와 우루크기에 자라기 비롯하였다. 기원전 29세기쯤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경 라가시기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고대 수메르는 기원전 24세기에 아카드 제국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구티인 지배 시기를 지나, 기원전 22세기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가, 20세기경에 아모리인이 침입한다. 아모리인의 이신 왕조는 기원전 1730년, 메소포타미아가 바빌로니아에게 다스려질 때까지 이어다.
우바이드기(期)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직의 도기류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영역에 퍼져 있다.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중심지는 에리두였으나,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뛰어넘게 된다. 고고학적으로 우바이드기에서 우루크기로의 이동은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제4우바이드기에서 초기우루크기로의 이러한 변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루크기 (기원전 4500년~3100년)에 이르러, 대량의 물품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운하와 물길을 따라 거래되면서, 커다란 신전중심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많은 공예품과 우루크의 식민지들이, 터키의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 서안,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이민자들에 의해서 우루크기의 문명은 모든 주변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세력들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자랐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우루크기의 끝은 기원전 3200년~2900년쯤의 기후 변화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 (Holocene climatic optimum)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이어졌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적혀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얽혀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다스렸다.
고대 수메르의 왕들의 목록이 초기 왕조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왕명표와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이름도 들어 있을 수 있다. 목록에서 다른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왕은 에타나(Etana)로, 키시의 첫번째 왕조의 13번째 왕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번째 왕은 키시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로 왕조의 22번째 왕이자, 끝에서 두번째 왕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나온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움마의 제사장-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는 솀어족의 아카드왕 사르곤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라가시 왕조는 많은 유적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중 기록상 최초의 제국은 에안나툼의 제국으로, 그는 수메르의 키시,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 모든 도시들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경쟁 도시였던 움마로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그는 통치를 위하여 공포(terror)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수리석비
솀어족의 아카드어는 기원전 2800년쯤부터 쓰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500년쯤부터는 완전히 고대 아카드어로만 씌어진 책을 찾을 수도 있다. 고대 아카드어가 가장 널리 쓰인 기간은 사르곤왕 때(기원전 2350년~2330년)쯤이지만, 그 기간에도 대부분의 행정관련 서판은 서기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져 있다. 겔브(Gelb)와 베스텐홀츠(Westenholz)는 세 가지 고대아카드어 방언--사르곤이전, 사르곤시대와 아가데지방, 우르 제3 왕조기--을 구별해 냈다.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대략 1000년 정도 (기원전 2800년~1800년) 같이 쓰이다가 수메르어는 끝내 쓰이지 않게 된다. 소르킬드 야콥슨(Thorkild Jacobsen)은 사르곤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역사가 끊어짐이 거의 없다고 보고, 솀어족과 수메르어의 충돌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어도 사르곤이 엘람을 정복했을 때 엘람인들에게 아카드어를 잠시 동안이나마 강요했던 것은 맞다.
아카드 제국이 구티족에게 무너진 뒤, 새로운 수메르의 지도자, 라가시의 구데아(Gudea)가 부흥하기 시작하였고, 예술이 발달하고, 사르곤을 따라 신권 정치를 표방하였다.
그 뒤, 우르-남무 왕, 슐기 왕 등의 우르 제3 왕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지막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수메르 지역은 아모리족이 많이 들어오면서 솀어족의 성격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아모리족은 뒤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운다. 중세에 라틴어가 이어 쓰였던 것처럼, 설형문자가 이어 쓰이는 동안에는 수메르어도 여전히 학교에서 종교적 언어로 가르쳐졌다.
생태학적으로는, 수메르 땅에는 소금기가 많아져서 농업 생산력이 줄었다. 농업 용수의 증발량이 많아지면서 땅에 녹아있는 소금기가 많아진 것이 농업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규모가 작은 도시부터 서서히 수메르 문화가 무너져 간다.
우르의
군기에 그려진 초기 전차 기원전 2600
엘람인의 침략과, 이비-신 지배 하(기원전 2004년)에서의 약탈 이후, 수메르는 다시 아모리 족의 다스림을 받는다.(이 때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기원전 20세기~18세기의 아모리족 도시국가는 수메르의 왕명 목록에 "이신 왕조"로 적혀 있고, 기원전 1730년 함무라비임금의 바빌로니아로 넘어간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토양의 염분 증가로 인한, 남부 이라크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의 인구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방에서 토양 염분 증가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작된 토지에 배수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한 수분의 증발은 토양 속에 소금 결정을 축적시키고, 결국은 수확량을 결정적으로 줄어들게 만들었다. 아카드 왕조와 우르 제3 왕조 동안, 밀보다 염분에 더 강한 보리를 많이 경작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100년~1700년 사이 인구는 거의 3/5로 줄어들었다
수메르인은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탐무즈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믿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들이 제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사내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연인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임신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