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410.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등 )
*** 07:00 김찬선 신부님글 추가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신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죄와 멸망 안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며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는 하느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유일한 방법,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를 따르지 않으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하기 전에 자신이 합니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집니다. 따라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눈 밖에 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요즘 악은 작은 하느님 체험,
작은 기적을 가끔 체험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체험하는 작은 하느님 체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죄를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진심 통회하고 회개해서 하는 하느님 체험이 아닙니다.
저의 요즘 문제는 통회를 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죄를 통해서 작은 하느님 체험을 하니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의 하느님 체험은 뻔뻔함이기도 하고 영적 건강함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지을수록 더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더 하느님 앞에 있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말아야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저는 언제나 하느님의 눈앞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갈수록 간절합니다.
저는 하느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습니다.
늘 하느님 눈앞에 있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고 싶습니다.
‘늘’이 아니라 ‘언제나’?
물론 늘 하느님 앞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니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언제나
죄를 지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언제나,
벌을 받을 때나 복을 때나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하고,
죄지을 때 오히려 더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고 이해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총을 만나야 합니다.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은총을 많이 느끼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언제나 그러니까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 눈 밖에 나지 않고 하느님 눈앞에 있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 ‘인내’의 한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내(忍耐), 우선 ‘인(忍)’은 참을 인을 씁니다. 칼 도(刀) 자에 점 하나가 붙어 있는 칼날 인(刃)이 심장을 뜻하는 심(心) 위에 붙어 있습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입니다. 즉, 심장을 찍히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낸다는 말입니다.
이제 인내(忍耐)의 ‘내(耐)’입니다. 이는 견딜 내(耐) 자로, 길게 늘어진 턱수염을 뜻하는 이(而)와 동작을 나타내는 촌(寸)이 합쳐진 글자로, 수염을 뜯기는 벌을 받더라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언젠가 성당 꼬마 아이가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댑니다. 그리고 한가락만 길게 나와 있는 턱수염 하나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다 났습니다. 수염이 뜯기는 고통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심장을 찍히는 고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견뎌 내는 것이 ‘인내’라고 말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견디어 낸 만큼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루소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분명히 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열매는 매우 답니다. 그래서 거부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문제는 그 단 열매를 그냥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쓴 십자가를 짊어져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열쇠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는 단 열매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외면하고서는 절대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하는 것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조금만 소홀하면 욕만 많이 먹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피땀을 흘리시며 또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의 십자가도 짊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아주 단 열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인색한 부자의 곳간처럼 내 안에 쌓여서 갇히는 사람들, 이 곶간의 자물쇠를 깨고 여는 일, 그곳에서부터 내 사랑은 시작된다(김진영).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7)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몇 번 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의 시작을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함께한다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을 봉독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봉독하는 이 시간에 주님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강복을 주기 전에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열정이 없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두려움이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세상의 일들에 빠져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교회는 두 가지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창조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상반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생명과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이 어떻게 될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론만이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운동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과관계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이며,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것의 기준이며, 하느님은 모든 목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병이 치유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표징일 뿐입니다. 구원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 미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뭘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뭘까요?
구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공간이나 장소에 들어간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태초의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살았듯이 다시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초의 낙원 모습이고, 이를 우리는 천국, 그리고 하늘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은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원죄를 저지르기 전의 인간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우리가 함께 할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겸손과 믿음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구원입니다. 즉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모두 태초의 모습으로 하느님 품에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나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말입니다.
구원. 늘 우리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세요.
------------------------
초능력
어릴 적 저의 영웅
그 이름 후뢰쉬맨
그들은 우주의 기운을 담은 초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타난 초능력자들….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쿠아맨
원더우먼….
그런데 그거 아실까요?
우리에게도 초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확인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그건 바로 ‘공감 능력’입니다.
기쁨에 기뻐하는 능력, 슬픔에 슬퍼하는 능력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초능력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해 주세요.
그럼, 세상이 평화를 이룰 거예요.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주님을 선택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어제 열심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가톨릭교회로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주 피정오는 자매가 제 강론을 선물받고 보낸 짧은 답신의 말마디입니다.
“아멘. 메멘토 모리, 코람데오,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 ‘지금을 살라’는 말은 알겠는데 코람데오는 생전 처음보든 라틴어 말마디였습니다. 검색해보니 개신교에서는 잘 쓰이는 유명한 말마디가 코람데오(Coram Deo), ‘하느님 앞에서’였습니다. 이 좋은 말마디를 몰랐다니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늘 하느님 앞에서 품위있고 고결한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여기에 한말마디를 더해야 완벽하겠습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즉 운명애입니다. 엊그제 강론을 쓴후 저절로 나온 고백에 만족했습니다. “주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듯 강론 역시 내 운명이자 사랑이다.”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 예수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사랑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요, 꼭 기억해야 할 말마디는 다음 순서의 넷이 되겠습니다.
“코람데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오늘 강론 제목은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다-주님을 선택하라, 주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마침 카톡을 열어보니 어제 어느 신부님께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절망은 없다, 힘내세요! 사랑하는 신부님!”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운명이자 사랑인 봄날같은 내 인생입니다. 새벽 집무실에 들어 옛 자작 시집을 펼치는 순간 23년전 “선물”이란 시에 반갑고 기뻤습니다. 언젠가 한 번 인용했지만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폈다 지면 오늘의 꽃폈다 지고...
평생을 그렇게 날마다 죽을 때까지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그리스도의 향기,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2001.4.23.
온갖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 선물로 가득한 축제같은 부활시기 4월입니다. 또 오늘 4월10일은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총선거날입니다. 잘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고 할 수 있는 무혈 혁명은 선거혁명 하나뿐입니다. 분별의 요령은 당이든 사람이든 그의 살아온 과거 역사를 면밀히 잘 들여다 보면 답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어느 당이, 어느 인물이 진정 나라를, 국민을 사랑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게 활약하며, 섬기는 마음으로 민생을 챙겨 왔는지 잘 들여다 본후 선택하는 것입니다. 축제와 같은 선거 결과가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온통 주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선물중의 선물, 최고의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대로 증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새삼 구원의 믿음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도 심판의 멸망도 선택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선택 여부에 따라 자초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였다.”
무지의 악을, 무지의 어둠을 사랑하여 선택하는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 문제인 겁니다. 그리하여 악을 선택하여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여 선택,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삶은 구원의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진리를, 불행이 아닌 행복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전쟁이 아닌 평화를, 미움이 아닌 사랑을, 허무가 아닌 충만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구원의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 선택 하나뿐입니다.
삶은 빛과 어둠의,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요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을, 거짓이 진리를 이길수는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어둠의 세력을 대변하는 대사제와 모든 동조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빛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도들과의 대결이요, 사도들을 인도하는 자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사도들이야말로 빛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선택한 분들이 아닙니까?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을 이길 수도, 가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의 승리는 불문가지(不問可知)요, 다음 사도들의 승리를 예견하는, 또 승리의 결과를 알리는 말마디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사도들을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하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소식이 흡사 사도들의 승전보(勝戰譜)처럼 들립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고 사랑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의 사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누구나
빛의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어둠의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빛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어둠을 빛으로
여기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도 여전히
어둠의 사람입니다
오롯이
빛을 빛으로
품는 사람이라야
빛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빛의 사람입니다
----------------------------------------------------
240410.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착한 사람은 드러나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이것들, 곧 우리가 하는 선행입니다. 선한 것은 그것이 참되고 충만하다는 전제하에 어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선은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고 인정을 받을 때면 의기양양합니다. 그래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 역시 그리스도인다운 겸손입니다.
선은 충만하여 마음에서 흘러넘쳐야 하며, 양심에서 터져 나와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평등을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 예컨대, 엑카르트는 한 마리의 개에게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조차도 서로 사랑하는 법을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
“나는 어제 이 수도원에 도착하여 무덤가에 핀 샐비어와 다른 식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곳에는 누군가의 다정한 벗이 있다. 한 뙈기의 땅이 그를 다정하게 맞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벗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벗에게 속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랑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벗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할 것입니다. 한 마리의 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동물이기는 해도, 그 개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그 개는 주인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미워하고, 주인의 벗에게는 빈부를 따지지 않고 호의를 보입니다. 앞을 보지 못핸 한 가난뱅이가 씨의 주인을 좋아한다면, 그 개는 자신의 주인을 싫어하는 왕이나 황제보다 그 가난뱅이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만일 그 개가 자신의 주인에게 자신의 절반만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머지 절반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151)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수도생활의 새 양식:
가) 이탈리아에서는 열정적인 신앙과 고대 그리스도교의 카리스마적 인격을 지난 성 로무알도(951∼1027)가 활약하였다. 그의 전기는 전세계를 자신의 속죄정신으로 사로잡고, 세계를 “하나의 유일한 은수소(隱修所)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의 큰 소원이었다고 전하였다. 한창 열광적인 청춘시절에, 그는 지신의 아버지가 전가한 무거운 살인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972년경 고향인 라벤나 근교의 글라세에 있는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수도원의 정신과 베네딕토 규칙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베네치아 부근의 숲에서 은수하는 마리노의 제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피레네 산중에 있는 클뤼니 개혁 수도원인 쿡사로 자리를 옮겼고, 마침내 자기 고유의 이상을 옛 사막 선조들의 방식을 따라 찾아내기 위히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라벤나 근방의 위험한 늪과 아펜니노 산맥의 협곡에서 기도를 하기 위한 조용한 곳을 찾아냈다. 그후 하느님과 영혼들을 위한 거룩한 열의로 기득차 때때로 속죄설교를 하기 위하여 다시 밖으로 나올 때는, 하느님에 대한 그의 완전한 헌신과 진지한 말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황제 오토 3세,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퀘르푸르트의 브루노는 그에게 매혹되고 감동받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을 위하여 그는 폰테 아벨라나, 카말돌리와 또 다른 곳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이들의 생활은 은수생활과 공주생활의 독특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초입지들만이 베네딕토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였고, 진보자들은 모원 주위의 암자에서 정주하였다. 그후 그의 수도원들에서 교회개혁에 가장 열심한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1057년 이래 추기경이 되었고 로마 개혁파의 우두머리였던 베드로 다미아노(1007∼1072)는 ‘카말돌리회의 수도자’였다.
이 무렵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성 닐로(+1005)가 이에 못지않은 열성을 가지고 활약하였는데, 그는 로마 근방에 바실리오회의 그로타페라타 수도원을 세웠다. 또 토스카나에서는 성 요한 괄베르토(+1073)가 피렌체 근방 발롬브로사에 새로운 영적 쇄신의 중심지를 만들었다.
알프스 북쪽에서도 진지한 개혁가들이 있었다. 아브라셀의 로베르토(+1117), 티르스빌의 비탈리스(+1122), 그밖의 많은 사람들이 순회 설교사로 프랑스와 독일을 다니며 “사도적 생활”의 모범을 생활로 보이고 또한 속죄와 종교적 쇄신을 셜교하였다.(2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