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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 들여다보기
인간과 현실의 이면에 숨은 빛 찾기
김석환
헬렌켈러 여사는 시각과 청각에 장애를 갖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들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늘 가까이 두고 즐겨 읽었던 것은 동서고금의 훌륭한 시였다고 고백하였다. 시를 통하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우주의 비밀과 인간의 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시인들은 그렇게 보이는 것 너머에 숨은 비밀을 언어의 그물로 포착하여 보여주는 탐험가요 진실을 낚는 어부들이다.
젊은 세 시인의 시를 잘게 부수어 음미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깊이에 숨어 좀처럼 전부를 드러내지 않는 진실의 정수를 맛보는 즐거움에 장맛비와 폭염이 교차하는 한여름의 우울을 물리칠 수 있었다. 상상의 비약과 생략이 주는 낯설음에 긴장하면서 그 미로를 따라가다가 만나는 희미하면서도 밝은 빛들… 어두운 현실의 이면에 도사린 탐욕에 놀라고 그것으로부터 떠나 내면 깊이 밀쳐 두었던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만나려는 몸부림에 함께 떨면서 시의 행간을 살펴보았다.
이해원/비정한 아빠의 권력과 엄마의 부활
「일곱 명의 엄마」 : 아빠는 엄마 손을 잘라 흙에 묻지만 엄마는 남은 한 손으로 여전히 집안일을 했다. 그러자 아빠는 다시 남은 손을 잘라 흙에 묻었는데 “다른 데서 손”이 자라나와 점점 자라서 몸통이 되고 다시 엄마가 되었다. 잘라서 흙에 묻어도 재생하는 엄마의 손, 그리고 엄마로 부활하는 끈질긴 번식력과 재생력… 그런 엄마는 아빠가 관리하는 “선인장 화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화자는 엄마가 병원에 가고 없으면 무서워하며 가는 곳마다 엄마가 네 명, 동생은 세 명씩이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아빠는 잠만 자는 엄마를 산에 묻었고 아저씨들은 엄마를 꺼내가지 못하도록 흙을 밟았다. 화자는 아빠에 의해 살해당하여 매장된 “엄마 싹이 일곱 개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화자와 동생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 강한 모성 지향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화자와 동생은 자신들의 결핍을 다 채워주리라고 믿는 대상의 상징인 ‘엄마’와 2자적 관계를 맺는 상상계, 그리고 현실적 권력의 상징인 ‘아빠’와의 3자적 관계를 맺는 상징계 사이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화자는 ‘아빠’에 의해 억압되고 살해되는 ‘엄마’의 손이 재생되고 다시 엄마로 부활하는 것을 환상한다. 이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단계, 즉 어머니와 2자적 관계를 맺는 상상계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아빠’의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현실, 즉 상징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어 소외된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시인의 무의식적 노력을 암시한다.
「비밀 보관소」 : 은행 입구는 물론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건물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현금 인출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이다. “번호표를 뽑지 않아도” 되는 그 “독방”, “비밀 보관함”속에는 “통장과 귀금속”이 들어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웃들과 마주치거나 서로 얼굴을 알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불안을 보관하는 안전지대”이다. “입구도 출구도 하나”인 그곳은 인간성을 버리는 대신 물질적 탐욕을 가득 채우고 “가면을 쓴” 채 위험한 관계를 이루고 사는 현대인의 내면 또는 삶의 현실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로 얽혀 서로 단절된 채 살아가는 오늘 우리네 삶의 현장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석류나무 미늘」 : 석류나무는 무엇인가를 끝없이 매달아야 하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꽃을 피우고 햇살을 받아 탐스런 석류 열매를 익혀 매달고 있던 가지는 그것을 다 떨구어 버리고 “바람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그 “키 큰 석류나무 낚싯대”는 이제 가지 끝에 가오리연, 구름을 낚고 “빗방울을 매달”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복집 천장에 매달린 박제된 복어처럼” 허풍을 떨던 “검은 비닐봉지”를 낚았다. 헛배를 부풀려 나무를 위협하던 “비닐봉지”는 역으로 그것을 낚던 석류나무의 탐욕스런 내면을 암시한다. 아무튼 “석류나무”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생명력을 다해 맺은 결실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보다는 헛된 것이라도 취하여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탐욕스런 인간의 모습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인은 아빠의 폭력에 의해 손이 잘리고 살해되지만 다시 재생되고 부활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곧 아빠의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현실에 대한 반발이자 엄마를 거울로 삼아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현실이란 탐욕의 비밀 보관소처럼 답답하고, 그곳이 상징하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현실 속에 사는 우리들은 끝없이 헛된 것이라도 낚으려는 관성에 길들여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지형/가족사 뒤에 숨은 비밀
「뱀」 : ‘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써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원죄의 상징이다. 그러한 ‘뱀’이 아직도 화자의 집 장롱 속에 살고 있다니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그 “뱀의 유혹에 넘어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것이다. 화자는 어느 날 아버지가 “허물을 벗는 밤을 훔쳐본 적은 없”는데 어느 날 “뱀이 허물을 벗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달 넘어 가듯 큰방으로 달아났”는데 “아버지가 파자마를 내리고 코를 골며 낮잠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아버지는 바로 ‘뱀’이 되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파자마를 내리고 잘 수 있는 ‘큰방’은 곧 ‘에덴동산’이 된다. 그런데 화자는 “아버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복숭아뼈에 붙어있는 굳은살을 떼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를 했다. 그 ‘복숭아뼈’는 아버지의 내면에 잠재된 사랑의 욕망을, ‘굳은살’은 그것을 불태우며 살아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어머니는 하루에 한잔씩 뱀이 들어앉은 술을 마셨다”고 하니 그 ‘뱀술’은 아버지의 생명력을 어머니에게 전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러한 ‘뱀’은 가끔 화자의 “꿈속으로 찾아오곤 했”지만 “병뚜껑을 열고 그를 맞이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뱀이 대신하는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과 그리움의 역설적인 표현일 것이다. 원죄의 원형적 상징인 ‘뱀’은 이 시에서 화자의 가정을 지키는 기초요 낙원으로 만드는 아버지의 내면에 숨은 사랑의 욕망이요 생명력이다.
「오동꽃」 : “삭신이 허물어진 명태”는 병이 깊어져, “막내에게 물린 젖꼭지가 갈라 터진” 채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 가던 어머니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 “명태 대가리”를 삶은 국물로 어머니 젖을 대신하여 어린 막내를 키우고, 언니는 열 살에 병수발을 하였다. 그리고 강가에서 빨래한 옷감을 이고 오다 자갈길에 발톱에 상처를 입은 어린 시절의 아픈 가족사의 중심에서 “보랏빛 오동꽃”이 피었다 떨어진다. 그 오동꽃은 어린 자녀들을 두고 떠나간 어머니의 모습이자 꽃을 엮어 목걸이를 하던 화자를 비롯한 어린 자매들의 모습이다. 감당하기 어렵던 아픈 추억도 세월의 물살에 씻기고 곰삭으면 가장 신비한 빛깔인 “보랏빛 오동꽃”으로 피어나는 것일까.
「쪽지편지」 : “모니터에 뜨는 쪽지” 편지를 보고 화자는 “내용도 읽지 않고 웃고”만 있다가 “수련을 피워내듯 쪽지를 펼치며” 상상의 길을 열고 들판으로 달려가 ‘당신’을 만나고자 한다. “모니터 글씨체는 같겠지만” 그것을 “눈에 익은 당신의 필체”로 여기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당신’이 들판을 걸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오란 마음이 배어있는 쪽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보관함을 삐져나”온 “산 냄새, 들 냄새”를 맡기까지 한다. 이처럼 모니터라는 사이버 공간과 현실적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은 모니터에 뜬 ‘쪽지편지’를 진흙탕에서 피는 “수련 몽우리”로 전이시킨다. 그러나 화자는 당신에게로 가는 문을 열 열쇠를 잃어버린 채 아직도 찾아다니다가, “혹시! 비워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아무튼 이 시는 사이버 세계가 자연 또는 현실보다 더 가까운 현실이 되어버린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사이버 공간 속에 나타나는 ‘실재’는 마우스를 작동하여 쉽게 만나고 지울 수도 있는 ‘과실재(hyper reality)’일 뿐이지 ‘진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대신하면서 주체와 대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차단시키는 벽이 될 수도 있다. 화자는 벽이 되어버린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열쇠를 찾다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황지형 시인은 가족사를 서사적 필치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미메시스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삶을 유지하는 근원적 힘이 무엇인가를 은밀히 보여 주기 위한 미적 전략으로 작용한다. 제시한 이미지가 상징성을 더해가며 읽는 이에게 긴장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조금씩 보여준다는 데 시적 미학이 있다.
천향미/선경과 신화의 뿌리 찾기
「뒤꼍의 시간」: 화자는 숙취에서 깨어나 곁을 더듬으며 지난밤 잠속에서 벌어진 일을 되돌아본다. “술기운”에 잠이 들자 의식이 정지되는 대신 무의식이 활성화되어 현실과 꿈의 경계인 수평선 너머까지 파도를 헤치고 욕망의 바다를 유영해갔다 온 것이다. “날마다 몸 바꾸어 나타나는 통점”은 현실 속에서 늘 타자로부터 억압을 받았다는 징후이다. 그 아픔에 눈물이 어린 눈동자로 폭우에 깊게 패인 웅덩이에 고인 물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면 수면에 “꽃잎”이 떨어진다. 자신의 얼굴과 같은 그 “꽃잎”은 또한 “폐허를 견디고 발굴된 유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밤”은 수평적으로 흐르는 일상적 시간이 무화된 “뒤곁의 시간”으로서 “수십 세기를 건너온 꽃씨”, 즉 자신의 존재의 기원 또는 현실을 사는 동안 소외되어 있던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는 때이다. 화자는 흐린 안경을 벗고 창 밖을 내다보는데 거리엔 “자꾸만 뜨거워지는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시간인 밤을 벗어나 현실 속으로 진입한 자신의 모습을 대신 보여준다. 그것이 목을 매달고 싶은 까닭은 무의식의 웅덩이 속에 유폐되어 있던 진정한 자아를 만난 지난밤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뒤곁의 시간”, 그 무의식 속에서 욕망하는 자아와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는, 즉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아이러니적 존재가 아닌가.
「선경(仙境)에 들다」: “갈등”이 무거운 짐이 되어 마음을 억누르지만 그것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한 화자는 잠시 시름을 잊기 위해 “등나무숲에 들어”간다. ‘갈등(葛藤)’이란 칡 ‘갈(葛)’ 자와 등나무 ‘등(藤)’ 자의 합성어이고 보면 그곳에서 “갈등의 진수”를 본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외줄기 박새울음이 꽉 막힌 내 귀”를 열어주니 숲 속에서 “말풍선처럼 부푼 표적이 칡넝쿨로 자라는” 게 보인다. 그 “꽃그늘에 앉아 잎맥을 들출 때/빛바랜 고대의 문장”이 갈등하는 마음에 “매운 채찍 휘두른다”. 그 채찍에 놀라 “오래전 내가 무심코 뱉었던 고삐 풀린 말”이 “꽁무니를 감추고 있다”. 화자는 그렇게 숲 그늘에서 말이 갈등의 씨앗이요 풍선처럼 부풀어 더 큰 갈등을 키우는 “죽음보다 분명한 길”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박새소리”, 그 자연의 맑은 언어가 “푸른 등꽃을 피우는” 숲의 “선경(仙境)”에 “잎맥마다 새로운 길”, 즉 화합과 생명의 길이 환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면지」 : 신에 대한 “믿음이 견고한 사람들”은 새로운 무수한 신화를 “낳고, 낳고, 낳고” 그것을 종이 앞면에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면지”는 백지로 남은 채 앞면에 적힌 신화를 낳는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앞면’은 뒷면, 즉 ‘이면’과의 대립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편 화자는 “한 계절이 무심하게 지나고 난 뒤 손바닥을 쓸어보”는데 그것은 금생의 뿌리요 이면인 “전생을 바라보”는 일이다. 어쩌면 화자는 전생에 하늘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내려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화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커튼처럼 드리워진 플라타너스 나뭇잎”에 신이 형상인 양 “카시오페아 별자리를 그려넣”는다. 그러면 그곳에 이르리라는 믿음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듯 나뭇잎은 “흰 손”이 되어 펄럭인다. 그러자 전생에 날마다 손가락을 걸며 맹세한 사랑의 추억이 “어둠 속에서 재생되”지만 그것은 이미 “유성우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꿈 밖에서 전생에 사랑을 나누던 별들이 “폐허를 밝히”며 창문에 입술을 찍는다. 별과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어 왔으나 끝내 실패하고 그 아픈 “파문을 운명이라 명명해보는 유적의 시간”, 그 “이면의 이야기”가 아직도 폐허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의 나이테로 기록되고 있었다.” “이면지”는 끝내 닿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끝없이 별의 세계를 꿈꾸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하얀 ‘여백’, 곧 ‘결핍’이자 ‘욕망’을 암시한다. 종이의 ‘이면’이 앞면을 떠받치듯이, 그 ‘여백’은 현실의 신화를 낳는 뿌리일 것이다.
말, 즉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언어기호는 욕망의 실재를 다 보여주지 못하여 때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가 늘 어긋날 수밖에 없는 언어기호로 유지되는 현실의 이면에는 다 드러내지 못한 여분의 욕망이 남아있다. 천향미 시인은 현실의 시간이 멈춘, 여백으로 남아있는 이면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곧 현실에서 행동하면서도 늘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간 『시에』 2013년 가을호
김석환
충북 영동 출생. 1981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1986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심천에서』, 『서울 민들레』, 『어느 클라리넷 주자의 오후』, 『어둠의 얼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