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의 부촌들 / 강남의 첫 번째 부촌, 압구정동
압구정동을 강남의 부촌 중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압구정동이 강남에 생긴
첫 번째 부촌이고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기 때문이다.
압구정동은 잘 알려진 대로 세조부터 성종 때까지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상당군 한명회의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압구정(鴨鷗亭)은 한명회의 호이기도 한데,
명나라 제일의 문인인 예겸(倪兼)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명회는 대국의 문인에게 이름을 받을 정도의 권력자였던 것이다!
당시 아니 1970년 대 초까지만 해도 한강을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이 있었다.
압구정동,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아파트 일대는 장마 때마다 침수되는 배나무
과수원 골이었다.
- 세상에 공개된 1970년 이전의 강남 자료 사진을 보면 압구정 향우회에서 제공한
것이 많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가 고향이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고향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압구정리에서 살던 사람들은 1960년대
말까지도 굽이치던 한강을 바라보면서 배 농사를 짓고 평화롭게 살았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들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 잔류하는 사람으로 나뉘며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대금으로 받은 압구정동의 한강
공유수면(국가 소유의 수면)을 매립해 아파트를 지었다. 압구정리 사람들은 어느 날
불도저의 굉음을 들으며 자신들의 집터가 십여 미터 땅속으로 묻히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압구정 향우회 나종덕(55) 총무는 조상 대대로 압구정동에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배 농사를 지었었다. (···) 그는 지금도 압구정동에 살면서 마음속에 고향을
간직하고 있다. – 내일신문 기사 2011. 2 .14
1970년에 한강 건너 이촌동 단지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많은 재미를 본 현대건설은
1975년 3월 새 아파트 단지 건설에 착수했다. 4,979가구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대단지이니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다.
현대건설은 저자도를 남김없이 파내어 건설용 골재로 사용했고, 한강 수면을 허가 받은
면적보다25퍼센트나 더 매립하여 4만 평을 더 얻었다. 골재도 땅도 공짜였으니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 뺨치는 땅 짚고 헤엄치기,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장사였다.
이곳에서 이렇게 떼돈을 번 회사는 현대만이 아니었다. 현대아파트 인근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한 한양이나 미성 등 많은 건설업체도 이런 ‘봉이 김선달’ 식으로 돈을
벌었다.
어떤 의미이건 기념비적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아파트에 회사 이름을 붙인
첫 번째 단지로도 역사에 남았다. 그 전에는 대개 종암아파트, 마포아파트,
회현시민아파트 등 지역 이름을 붙였는데,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이후 다들 회사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최근 ‘이런 식으로 회사 이름을 홍보해주는 나라는
없다’고 혹독한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아파트 작명법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1978년 6월 말, 특혜 분양 사건이 터졌다. 현대건설이 자사 사원용으로
승인 받은 현대아파트를 대거 사회 고위층에 분양해 주다가 걸린 것이다.
부동산 시장에서 한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던 이 소식은 1978년 6월
한 통신사에 의해 각 언론사에 타전 되고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이 이를 대서특필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 “공직자 220여 명, 아파트 특혜 분양?”이라는 머리기사였는데,
공직자만 특혜 분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언론인도 많았다.
특혜 분양에 관련된 언론인들은 경향신문 6명, 동아일보 5명, 서울경제 4명,
중앙일보 4명, 문화방송 3명, 조선일보 3명 등 모두 37명으로 편집국장이나 정치부장,
경제부장 등 대부분 유력 언론인들이었다. 오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언론인들의
양식이 무너지고 도덕은 마비되었던 것이다. 그 중 6명이 두 채 이상을 분양 받았거나
수사 당시 이미 전매 차액을 남기고 분양권을 팔았다. 하지만 수사는 단 열흘 만에 숱한
의혹만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아파트 분양권을 회수하고 재추첨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철저히 무시되었다. 마지못해 검찰은 한국도시개발 정몽구 사장과
피 분양자인 곽우석 당시 서울시 부시장 등 5명만을 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이들에 대해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는데, 특혜 분양을 통해 엄청난 액수의
프리미엄을 얻었지만 프리미엄은 뇌물이 아니라는 게 판결의 요지였다.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특혜의 주인공들이 장악하고 있던 언론사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실을 뒤로한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현대아파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물론 가격도 계속 오르기만 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특징은 - 사실 한국 아파트의 특징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
거의 모든 동이 전통적인 남향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거실에서는
앞쪽의 아파트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흘러가는 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 한강은 압구정동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너나없이 북쪽에 있는 부엌 쪽
벽을 뜯고 큰 창을 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강변에서 현대아파트를 보면,
누군가의 표현처럼 전체주의자가 만든 아파트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제각기 창이 다르다.
한국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 아파트 남향은 실제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든 건물을 남향으로 만들면 동 간 거리 확보에 문제가 생긴다. 1층까지 볕을 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어야 하고, 특히 아파트 외부 공간은 거의 볕을 받지
못해 기껏 심은 비싼 나무들이 고사 직전에 몰리게 된다. 당연히 외부 공간에서
일어나야 할 공유 행위도 시들어 가고 만다. 그래도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무모한
남향 올인’임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지어진 탓인지 그리 답답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월이 지나 나무들이 많이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아파트 건설에서 가장 큰 문제는 - 정확하게 말하면 건축 전반의 문제라
할 수 있지만 - 습식 건축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데에 있다. 모든 건축은 물을 쓰지 않는
건식과 물을 쓰는 습식으로 나누어진다. 쉽게 말하면 나무건 돌이건 조립하여 세우는
방식이 건식이고 흙이나 콘크리트에 물을 부어 짓는 방식이 습식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우리나라의 건축은 거의 다 습식이다. 습식은 시공이 간편하고 숙련공이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장점 덕분에 습식 건축이
대세가 되고 그 덕분에 많은 아파트를 지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대신 한국인들은 건물의 내구성 저하와 새집 증후군이라는
두 가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습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대다수 건물들은 세월이 지나면
타일이 떨어지고 억지로 붙인 무늬목 같은 외장재가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중후해지기는 커녕 우중충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내장재를
강한 본드로 붙이는 방식이니 새집 증후군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나 한양아파트 역시 외관이 우중충해지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튼튼히 지은 건물이라 안전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현대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독자적으로 리모델링을 한 동을 볼 수 있는데, 아마 입주민들이
우중충해지는 외관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이 아닐까?
현대아파트를 가보니 오후 2시에도 주차장은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최소한 한 집에
두 대의 차가 있을 테니 주차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불편이 대단할 것이다.
사실 몇 년 전 현대아파트 주민들이 독자적인 재건축 안을 만들어 서울시에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남 부동산 신화의 원조인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재건축은 ‘휘발성’이 워낙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개발로 번 돈을 바탕으로 자동차, 조선 등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켰고, 대북 사업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다른 부동산 재벌들하고는 격이 달랐다. 잠실이 신격호의 왕국이라면, 압구정동은 누가
뭐래도 ‘왕회장’이 만든 도시인데 그는 이곳에 묘한 유산을 하나 남겼다.
현대그룹 하면 사람들은 흔히 ‘중후장대’와 돌파력으로 상징되는 거친 느낌을 받는데,
유독 현대백화점만은 그렇지 않다. 현대백화점은 그와는 결이 다른 세련된 고급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이런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첫 매장이자 본점이 바로 압구정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압구정 본점이 문을 연 때는 1985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바로 ‘삼저 호황’의 절정기와
겹친다. 더구나 동호대교와 지하철 3호선도 같은 해에 완공되었다. 이 호황으로 이곳의
상당수 주부들은 파출부를 고용하여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여유 시간을 부동산
투기와 에어로빅, 골프, 볼링 같은 레저와 쇼핑에 투자하였다.
이런 ‘사모님’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으면 《코카콜라》라는 노래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헬스클럽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코카콜라 한 병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동 몇 호실로 배달되더니
코카콜라 두 병
헬스클럽 우리 사모님 목구멍에 아살살살 넘어가더니
헤야 디야 — 기분이 나네 —
살기 좋은 이 세상에 잘 태어났네
이런 ‘복부인’들의 행태와는 별도로 1980년대 초반부터 현대아파트 건설 당시에는
배 밭이었던 단독주택 필지에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7년 봄, 그 중 한 레스토랑에서 전 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노동운동가 이옥순을
만난다. 이때는 꽤 살벌한 시기였다.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노동자 연대 파업,
미 문화원 점거 농성 등 큰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위기감을 느꼈고
안기부와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치안본부 등 정보기관을 대거 동원해 대학가와 공단
지역의 다방, 식당, 술집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학도
공장도 없어 정보기관의 감시망이 없는 압구정동에서 ‘접선’을 했던 것이다.
금천구 독산동 ‘벌집 동네’에 살던 자취생 유시민은 가리봉동 국밥 한 그릇보다 비싼
압구정동 커피를 마시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쓰렸다고 한다.
얼마 후인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두커피 체인점인 쟈뎅과 맥도날드 1호점이
압구정동에 개점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맥도날드 1호점 가게는 지금 사라지고 없고
모 의류 브랜드가 들어서 있다. 세월은 그만큼 무상한 것이다. 쟈뎅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거리의 커피 향기는 더욱 진해져 갔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끝자락부터
시작되는 ‘신사동 멋샘길’이라는 커피 거리가 생겨 많은 커피집들이 성업 중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명 패션숍, 미용실, 모델 에이전시, 광고 제작사, 이벤트 회사,
사진 스튜디오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압구정동은 단순한 부촌에서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소비 공간으로 진화하였다. 물론 그 선봉에는 현대백화점과, 한화가 리모델링한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었고, 한편에는 로데오거리가 있었다.
로데오 거리는 LA의 베벌리 힐스에 있는 고급 쇼핑가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사실 원조는
압구정동처럼 번잡스럽지는 않다. 어쨌든 로데오 거리와 갤러리아 백화점은
압구정동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방 사람들에게까지 익숙한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2012년에 개통한 신분당선의 역 이름이 ‘압구정 로데오’일 정도이니 거의
공식 정착된 셈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로데오 거리는 급속하게 쇠퇴했다.
지나친 임대료 상승, 도로의 일방통행화, 그리고 자생력 없이 직접 이식된 서구 문화 및
일본 문화에 대한 염증, 마지막으로 목동, 문정동, 신림동, 일산, 건대 앞 등에 들어선
로데오 거리의 ‘난립’ 등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압구정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 ‘욕망의
배설구’가 되어 ‘압구정동 오렌지족’의 무대로 더 유명해졌다.
당시 언론이 보여준 압구정동에 대한 태도는 오늘날 명품족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즉 졸부 취향의 천박한 소비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만족시켜 주는 이중성이 있었다. 어쨌든 세월이 지나자 압구정동 역시
조금 특별하긴 하지만 일상의 공간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유는 간단한데,
압구정동과 강남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압구정동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금융기관이 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대로에서 눈에 띄는 점포만 세어 보니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신사중학교 사이에만 무려
38개의 은행과 증권사, 투자사가 있었다. 압구정동에 백화점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업체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인데 압구정동 주민들의 경제력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강남에 신흥 부촌들이 많이 등장했다지만 압구정동의
힘이 여전함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덧붙여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별도의 경비실을
두고 외부인 통제를 시작한 단지도 압구정동이 처음이었다.
-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
- 상암 월드컵 경기장, 동암 이학년 선생의 사진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