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0904)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같이 탔음이니이다…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시 102:1~11).
고난 속에 갇혔다 느낄 때~~~~~고난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더군다나 고난 없는 크리스천의 인생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고난의 정도가 심하고 힘겨울수록 우리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을 의심할 때가 많다. 또한 어떤 이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 고난에 쓰러지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수 시대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민족적 수난을 개인적인 아픔으로 표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곤고함을 탄식하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열망한다.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영육간의 고난 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고난을 먼저 여호와 앞으로 가지고 간다. 그는 호소의 대상이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고난을 가까이 있는 사람과 나누게 된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며, 그 고난을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 물론 때로는 얼마간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고난을 호소할 궁극적인 대상이 될 수 없고 그 진정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눅 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심을 잊을 때가 많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선지자가 자신뿐이라는 생각으로 절망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 외에도 하나님 편에 선 자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9-18).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크고 적음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다 알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욥의 경우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더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욥에게 고난이 닥친 후에 더욱 큰 하나님의 복이 임했듯이 고난 속에서 소망을 바라보는 지혜를 소유해야 한다.
발명왕 에디슨은 “우리의 진짜 축복은 고통, 손실, 혹은 절망 속에서 우리에게 생긴다. 그러므로 인내하라. 진실로 인내할 때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 구분되듯이 성숙한 신앙인과 미성숙한 신앙인의 차이는 고난이 닥쳤을 때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미성숙한 신앙인은 고난 앞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절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고난에 쓰러집니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고난이 닥쳤을 때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고,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고난은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이며,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보배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러기 때문에 고난 속에 갇혀 있다고 여겨질 때 결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도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소망을 갖길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고난 자체에 얽매여 좌절하고 실망하고 심지어 믿음조차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고난 앞에서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성숙한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