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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의 꽃 2 / 나기철
머리 위에
화관처럼 나타난
꽃
며칠의 적막 끝에
화요일에 온
꽃
며칠이면 지고
다시 며칠
적막할
젤라의 꽃
노루발풀꽃 / 나태주
착한 노루가 제 맨발을
벗어주고 갔구나
노루발풀꽃
둥그스름 초록색 잎사귀에
조롱조롱 새하얀 꽃
흔들면 노루 발자국 소리
들릴까
새하얀 방울 소리
들릴까
젊은 노루가 바라보던
흰 구름만 몇 송이
남겨놓고 갔구나.
담배꽃을 본 것은 / 나희덕(1966~ )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을 보았다
분홍 화관처럼 핀 그 꽃을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려진 꽃대들
잎그늘 아래 시들어가던
비명소리 이제껏 듣지 못하고 살았다
툭, 툭, 목을 칠 때마다 흰 피가 흘러
담뱃잎은 그리도 쓰고 매운가
담배꽃 한줌 비벼서 말아 피우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족두리도 풀지 않은 꽃을 바라만 보았다
주인이 버리고 간 어느 밭고랑에서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夏至도 지난 여름날
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피어있는,
버려지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을
음지의 꽃 / 나희덕
우리는 썩어 가는 참나무 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 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
우리는 서서히 썩어 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나
그 고통을 순간에 멈추게 하는구나
오, 버섯이여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길 없는 우리의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
꽃구경 가다 / 남진우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엔 으레 저승사자가 하나씩 붙어 있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 다가가면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 꽃그늘에 앉아 잠시 숨 고르고 꽃들이 내뿜는 열기 식히노라면
저무는 하늘에 이제 마악 별이 돋아나고
내가 가야 할 길 끝에 환히 열린 꽃마당이 보인다
저승 대문 닫히기 전
저 꽃 마저 보지 않으련, 은근히 속삭이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아무리 걸어도 꽃대궐 가까워지지 않고
으슬으슬 추위가 내 몸을 감싼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서 한 시절 놀다 풀려나오면
현기증처럼 아득하게 졸음 쏟아지고, 마악 잠 속으로 몸을 처박을 찰나
저승사자가 스윽 웃으며 나타나 저승꽃 한 송이 건네고 간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듯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꽃들이 꺼지는 순간 / 려 원
툭 하고 꺼졌다
아버지는 캄캄한 방을 흔들어 촬촬 소리가 나면
불꽃이 수명이 다한 거라 했다
할머니에게 주려고 동백을 돌려 땄다
그때 퍽, 봄이 꺼졌다
알을 빻은 동백을 삼베주머니에 넣고
쥐어짜던 두 손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렀다
거센 물줄기만 끌어 올리던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길게 아래로 흘렀다
꽃은 전류를 타고 온다
돌려 딴 동백을 받은 적이 있다고
돌려 끼우면, 백열등은
공중에 매달린 꽃이 된다고 지금도 믿는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백열등을 돌려
방을 끈 적이 있다
떨어질 때 꽃술이 끊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풀렸다
꽃가지 하나를 꺾으면
몇 송이의 꽃들이 툭 하고 꺼지는 순간이 있다
사과꽃 / 류 근 (1966~ )
비 맞는 꽃잎들 바라보면
맨몸으로 비를 견디며 알 품고 있는
어미 새 같다
안간힘도
고달픈 집념도 아닌 것으로
그저 살아서 거두어야 할 안팎이라는 듯
아득하게 빗물에 머리를 묻고
부리를 쉬는
흰 새
저 몸이 다 아파서 죽고 나야
무덤처럼 둥근 열매가
허공에 집을 얻는다
아내의 꽃 / 마종기
어떤 나무는
크고 탐스러운 꽃을 만들고,
어떤 꽃나무는
꽃잎의 색깔에 관심이 많아
힘찬 기운의 원색이나
드문 색깔의 조화를 수놓아
한 개의 꽃만으로도 눈이 부신데,
어떤 꽃나무는
간직할 향기에만 전념해
지나가는 길목에서도 언뜻
황홀하게 만나는 꽃 향.
그런데 어떤 꽃은
듬직한 나무도 거느리지 못한 채
살아있는 것만도 기쁜 듯
크기도 색깔도 향기도 별로 없이
맨날 혼자 웃으며 흔들거리네.
그런 꽃들을 보면
편안해지고 만만해지고
따뜻해지고 느긋해져서
어깨가 다 가벼워지는데, 그래서
아마도 아내의 꽃이 아닐까 하니
그 힘든 순명이 자기 민얼굴이라며
은근한 꽃의 손으로 나를 안아주네.
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갈대꽃이 피었다 / 문성해
갈대꽃이 피었다
억새꽃도 피고 있다
혼자 마당을 비질하고 기대 놓은 사미승의 빗자루 같은 것들이
꽃이었다니!
나는 오늘 비로소 미안해졌다
풍매화라고 했다
나비나 꿀벌을 유인하기 위해 화려함을 다투는 충매화들과 달리
건들건들 건달 같은 바람에게만 이쁘게 보이면 된다고
바람 같은 머리
바람 같은 냄새
바람 같은 언어를 갈고 닦은 이들이
갈라터진 입술과
굴신이 자유로운 허리와
귀신을 부르는 호곡 소리로
머리와 심장의 무게도 다 없애고
발 뒤꿈치까지 살짝 든 기마 자세로 해종일 기다린다
아무도 그리 불러주진 않았어도
처음부터 꽃이었던 사람이 있다
우물에 비친 까칠한 사미승의 얼굴에
파르라니 바람이 인다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 문성해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꽃들의 이별법 / 문정영
네 앞에서 꽃잎 위 물방울처럼 있는다
새벽이 지나간 자리가 빨갛다
작은 무게를 버티는 것이 꽃들의 이별법
한 발로 나를 짚지 못하고 너를 짚으면 계절 하나 건너기 어렵다
너를 다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버티기가 쉽지 않다
한 발 내밀 때마다 하늘이 수없이 파랬다 검어진다
꽃술 내려놓고 그 향기 따라 건넜다, 어두웠다
수평으로 걷지 못한 날들이
물가의 신발처럼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해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 벌들은 일찍 떠난다
네 숨소리가 꽃잎 떨리듯
높아졌다 가라앉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늙은 꽃 / 문정희(1947~ )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꽃 1 / 문효치
그대는 온다.
어느 평범한 오후의 한적(閑寂)을 골라
아스라한 향기를 몰고
진붉은 빛깔을 거느리고
지하로부터, 하늘로부터 그대는 온다.
뇌수(腦髓)에서 자아내는
더운 눈물을 만나기 위해 온다.
와서 살을 헤집고
내 머리통 속에 뚫린
까아만 허공에 들어가
잠시 한 초롱 불을 켜고
신접(新接)의 이삿짐도 들이고
뚝딱거리며 집도 짓다가
그대여, 갑자기
불을 끄고
집도 헐고
다시 향기와 빛깔을 거두어
가버리는 그대여.
꽃 / 문태준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작약꽃 피면 / 문태준
작약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밝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듯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각날 듯이
모레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봉숭아꽃 / 민영(1934∼ )
내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내 새끼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셨다.
꽃보다 붉은 그 노을이
아들 몸에 지필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을 물리쳐준다고
봉숭아물을 들여주셨다.
봉숭아야 봉숭아야,
장마 그치고 울타리 밑에
초롱불 밝힌 봉숭아야!
무덤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에
마른 풀이 자라는
어머니는 지금 용인에 계시단다.
꽃이 방전된다 / 박남희
세상의 꽃이 너무 아름다울 때 나는 졸립다
눈부터 피곤해져 오고
이내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름다운 꽃은 번개처럼 위험하다
수만 볼트의 전압을 가지고 있다
내 안의 꽃은 수만 볼트의 전압에 눌려서
점점 무거워진다
아름다운 꽃 속에 숨어있던 전류는
졸음을 몰고와 나를 혼수상태에 빠뜨린다
이럴 땐 성냥개비를 눈꺼풀에 끼워도 소용이 없다
최상의 방법은 아름다운 꽃이 내 안의 꽃과 만나
즐겁게 방전되는 일이다
나는 나를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순간 깜박 존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이 만나 방전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신이 점점 맑아져 온다
희미하던 것들이 맑게 보이기 시작한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의 주소가 같다는 것을
내 안의 졸음은 이미 알고 있다
꽃이 방전되는 것이 하루이고 역사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노을 앞에서 꽃들은 어두워진다 / 박노식
노을 앞에서 둥글고 환한 꽃들은 어두워진다
바람이 불고
문득 한 꽃잎이 지고
쌓인 꽃들이 서로 물들며 한 생을 이루는 동안
저녁이 오고
한 계절이 흘러간다
울면서 걸어가는 낯익은 젊은 여자를 보던 그날은 내가 아팠지만 이웃집 목련꽃이 왜 서글픈 표정을 지었는지 그때 알게 되었다
인연은 그림자처럼 서툰 포옹도 없이 사라지는 것
해질녘에 바삐 한 그루 미루나무에게로 가서 나를 놓아버렸다
비로소 꽃 / 박무웅(1944~ )
그 꽃이 보이지 않는다
봉황천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흰 불꽃
나는 그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한
흰 꽃 무리의 지주(地主)가 좋았다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마음껏 꽃 세상을 만들어내던 개망초꽃
있어도 보이지 않고 보여도 다가오지 않던
그 꽃, 개망초꽃
땅을 가리지 않는 그
백의(白衣)의 흔들림이 좋았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멈춤’을 생각하니
내가 가진 마음속 땅을 모두 내려놓으니
거기 시간도 없고 경계도 없는 곳에
비로소
보이는 그 꽃
내 안을 밝히는 그 꽃
보여야 꽃이라지만
보아야 꽃이다
숨은 꽃 / Allergy
박미라
늙은 손 하나가 이미 아문 상처를 후벼 파더니
지워진 바늘땀을 헤아리더니
내 팔로 나를 껴안고 흐느끼다 깨어나게 하더니
붉은 꽃잎이 무리지어 온몸으로 번진다
어둠을 헤치는 기척에 잠들 수 없다
가렵다는 건 그립다는 것인데
줄기를 들추고 이파리 뒤집지만 아무 단서도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내 몸을 지나간 꽃자리이겠지
그런데 내 몸에 꽃 핀 게 언제였더라
몸과 마음을 한자리에 불러 묻지만
기억도 진화하면 멀리 가는지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몸이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믿었는데
몸은 또 몸의 사정이 있었던 것
마음을 엎지른 채 텅 빈 그릇처럼 혼자 견디다가
기억의 구석에서 찾아낸 숨은 꽃
그러니까 이것은 응어리 져 있던 몸의 각혈
망가진 꽃밭 앞에서 숨죽이던 그때처럼
오래 짓씹은 포도 껍질처럼
자줏빛 피멍이 온몸에 만발했다
꽃들의 발소리
⸺모래마을 8
박미산
아타카마 사막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지
어느 날 풍만한 비가 내렸어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생명의 흔적이 없는 몸에서
꽃 두 송이가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어
넝쿨손이 한 바퀴
또 한 바퀴
숨바꼭질처럼
태양을 꿰뚫었지
여린 것들이
내일이란 바다를 헤엄쳐 가는 게 보이네
바다에 뜬 달을 올라타고
달의 계곡을 걷는 소리도 들리네
발소리가 경쾌하네
나 없이 종일 걸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별이 떨어지고 있어
등에 진 소금보따리를 내려놓고 나는
이제 피 묻은 별을 타고 올라갈 거네
자네, 나를 허공에 부려주게
죽음의 계곡이 바로 저길세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어
이 또한 꽃들의 발소리라네
꽃의 슬하 / 박성희
하동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길
벚나무는 늙고 늙어서 환한 봄이다 백년을 살아도 오는 봄은 늘 유년이다 저 속에 길을 내고 집을 지을 수 있다면, 꽃의 슬하에 머물 수 있다면, 나도 저물고 저물어서 벚나무 꽃길 속이다 꽃잎 한 잎 한 잎에 어두웠던 순간들을 들어 올리며 간다
체기를 내리는 바늘처럼 한 땀 한 땀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
가시꽃 / 박성희
혀에서 가시가 돋는다
가시 속에서 꽃이 핀다
입은 커다란 정원
꽃들이 길을 연다
연탄꽃 / 박우담
1
연탄불은 영혼의 꽃
폭은 두 꺼풀, 길이는 다섯 꺼풀
붉은 흑백 사진
핏빛 천 조각
북두칠성으로 가는 먼 여행길
2
보내는 자의 슬픔
상두꾼의 상여소리
무덤의 일부가 된 검은 글귀들
너는 왜 어두운 별을 향해 가려고 하는가?
너는 왜 상여의 길을 가려고 하는가?
3
안개 자욱한 연옥의 밑바닥에서 죄를 씻은 듯 타오르는 불꽃
두려움에 간이 서늘한 나는
울음도 애수도 괴로움도 없는
시간의 검은 구멍
딸기꽃 / 박상순
흰 딸기꽃, 새하얀 딸기꽃, 나는 또 간다.
노을을 건너간다. 노을을 밟고 간다. 내 그림자는
긴 강의 삼각주에서 태어났다. 가슴을 파고드는
강물에 쓸리고 밀리다가 누적된 삼각주처럼 태어났다.
하지만 나는 간다. 내 그림자는 눕는다. 강물 속에 가라앉는다.
불빛이 환한 오래된 골목, 바닥에서부터
백조를 닮은 큰 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래도 나는 간다. 멀리서 내 그림자가 내게 노을을 던진다.
쏟아지는 노을, 노을을 건너간다. 노을을 밟고 간다.
백조를 닮은 큰 새들의 더미가 내 등 뒤에서
무너져 내린다.
흰 딸기꽃, 새하얀 딸기꽃, 그래서 나는 간다.
그림자를 두고 간다. 내 그림자는
늘씬한 걸음걸이로 나를 뒤쫓을 수 있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강물에 쓸리고 밀리다가 불빛 속에 눕는다.
노을만을 던진다. 눈물처럼 노을이 흘러내린다.
백조를 닮은 큰 새들의 더미가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간다.
노을을 건너간다. 노을을 밟고 간다.
흰 딸기꽃, 새하얀 딸기꽃, 나는 또 간다.
단단한 꽃 / 박소원
마음이 먹먹할 때마다
돌들의 무늬를 더듬어 보던
내 손 끝에서
들숨일까 날숨일까
파르르 어떤 숨소리가 떨려 옵니다
무늬에 따라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꽃에 물을 주듯이
내 책장 위에 놓인 돌에게도
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치곤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돌에게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돌이 피우는 꽃을
나는 황홀히 보곤 합니다
먹빛의 몸이 더 먹빛이 되어
베란다 한 귀퉁이에서
이윽고 숨 터지는 저 꽃들
오늘 다시 환하게 만개합니다
당신 안에 살고 있는 돌 한 그루가
기어이 만개하는, 그날이 봄날입니다.
꽃, 양귀비 / 박승미
부채춤을 추고 있는 듯
바람결에 하늘하늘
입술을 대면 녹아버릴까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다가
오방색 물감을 엷게 풀다
그리는 대로 색이 번지면서
꽃인가 하면 나비이고
나비인가 하면 꽃이고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매 끝이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려
꽃술을 진하게 그리다
양귀비꽃을 그리다 보니
마음 비우는 일이
꽃잎 불어 날리듯 가벼워져
하얗게 비워놓은 마음속에
다 그린 양귀비꽃을
손수건을 접듯이 고이 접어 품다
귀인을 품다
저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상치꽃 아욱꽃 /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적도의 꽃 / 박윤배
빗줄기가 건기의 정오를 긁고 갈 때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소녀, 쪼그리고 앉아
발을 씻다가 훌쩍훌쩍 울고 있다
성 노예가 될 줄 모르고 끌려온
적도의 땅 인도네시아 암바라와
조선 위안부 숙소 앞, 더는 붉어질 수 없는
꽃의 눈길이 내 눈을 찔러온다
타는 온몸, 안으로 삼킨 비명
두고 온 하늘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소녀는 새가 되어 날지 못한 꿈을
넘보는 허공에 까진 무릎으로 걸어둔 걸까
오랜 시간 지난 지금까지, 벽을 타고 지붕까지 올라
시퍼런 통증 지우려 피워낸 꽃
쑥쑥 자라는 곰팡이를 손톱 밑에 무너진 절망으로 가두고
우두커니 문밖 바라보고 선 소녀는
돌아가라고, 더는 아프지 말자고……
소나기에도 젖지 않는 눈빛 보내온다
돌아갈 길을 알고 있는 내게,
어쩌다 부는 바람결로 타이르듯
부겐베리아는 붉게 흔들리는 눈시울
애써 떠미는 등이 뜨겁다
맨드라미꽃이 있는 풍경 / 박정남
며느리는 또 집을 나갔다
무당을 따라 다닌다고 했다
돌담 앞에 키 큰 맨드라미가 대낮인데도 벌겋게
꽃을 피워 찢어진 혀를 내밀고 있었다
집 나간 며느리는 잠시 동생 집에 들렀다가
가야면 면사무소 옆 미용실 앞 뜰
거기서도 상처처럼 들키고 마는 맨드라미꽃들
자욱하게 떼 지어 서 있고
마침, 미용사가 문을 열고 나와 욕지거리 하듯
맨드라미 꽃 대궁들을 꺾어 허공으로 던졌다
자르르 맨드라미 씨앗들이 쏟아져 내렸다
여자는 주춤하다가 화가 난 것처럼 또, 돌아섰다
처마 밑으로 종종 닭들이 쪼고
맑은 하늘에는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대낮의 후끈거리는 땅을 식히면서 비가 뿌려댔다
오래 찾았기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피난처 십승지가
어디에 있는지 이번에는 꼭 찾고 싶었지만
뚫고 나갈 길들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내 맨드라미꽃들은 붉고 거칠게, 또 비에 저항했지만
피 묻은 칼을 닮기도 한 꽃의 목들은 이내 꺾이고
골목 안 녹슨 대문 앞, 색 바랜 헝겊들 후줄근히 젖고 있는
대나무장대가 야윈 채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날자, 날자, 오색 헝겊 고깔 쓰고 뛰며 귀신 부르는 여자가
장대비 속에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발바닥꽃 / 박정남
햇빛 밝은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껴안고 게를 실에 꿰고
천도복숭아를 따며
나무 위를 오르는 아이들은
발바닥이 땅에 있지 않고
허공중에 피어 있습니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놀다
넘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다리는 초록 꽃대이고
동글납작한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핀
다섯 개의 꽃잎 단 꽃입니다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는
발가락꽃잎을 열 개나 달고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것이 동글동글 피어 있습니다
* 이중섭의 그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며느리도 봤응께 욕 좀 그만 해야
정히 거시기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이런 꽃 같은!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너의 반은 꽃이다 / 박지웅
몸이 북쪽을 보고 잠든다
저 북쪽은 예부터 귀신 다니는 길
가위눌림이었다 벽에 얼굴 넣고
내내 깨어 있었다, 그때
반은 묻혔고 반은 꿈틀거렸다
반은 누워 있고 반은 쓰러져 있었다
벽에 갇힌 저 몸이 궁금하다
몸에 세운 저 벽이 난감하다
벽에 손을 넣어본다
쓰러져 있는 그 손을 잡는다
맞쥔 저 두 손의 반은 안개였고
반은 허방을 짚는 수척한 뿌리였다
깨어나 익숙한 쪽으로 돌아눕는다
편하다, 몸이 풀밭처럼 편하다
허나 반쪽의 안착은 어딘가 불안하다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가위눌림보다 독한 눌림, 몸의 편차
몸이 벽 너머 몸에게 말을 건다
너의 반은 꽃이다
너의 반은 귀신이다
그러면 편히 잠들라, 그리운 쪽이여
부추꽃 / 박 철
실잠자리 한쌍이
부추잎에 겨우 자리를 잡고
남몰래 위아래로 몸서리치는 모양을
부석처럼 쭈그리고 앉아 보네
누군가 뒤통수를 쳐 돌아보니 인적은 없고
다시 돌아보는 사이 어쩌나 어머나
부추꽃은 피었네 하얀 꽃은 피었네
부추꽃만 피겠는가 우리 어머니
쑥국새 울 무렵 수줍은 해거름 안에
달고 붉은 부추김치도 피겠지
부추김치만 피겠나
자작자작 항아리 주둥이의 고춧물을 모두며
우리 철이 뽀얀 항아리엉덩이에 피던
고추 생각도 나겠지
고추 생각만 피겠나
멀건 앉은뱅이 하얀 포탄소리에 놀라
황해도 연백 어디라는 고향 생각도 피겠지
맵기도 하다
오뉴월 포탄연기만 피겠나 장독가를 맴돌던
실잠자리 꽁대에서 실낱처럼 흐르는
부추향도 피겠지 코끝도 붉어지겠지
때는 어느덧 흘러간 청춘이라네
그래도 좋아 잠자리 날개 같은 실웃음이 더위에 일고
하루는 즐겁게 몸을 떨기도 하겠지
천지간에 너울거리다 돌아앉는 것이
이 더위만이 아니라서 오늘은 저 위에서
누군가 또 어여쁜 듯 쇠눈을 껌뻑이다가
그려 그려 부추잎처럼 잠자리 허리처럼
연한 마음 입가에도 꽃은 피고 지겠지
그려 그려 출렁거리며 여름 한철은 가겠지
석산꽃 / 박형준(1966~ )
한몸 속에서 피어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무덤가에 군락을 이룬다
당신이 죽고 난 뒤
핏줄이 푸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초가을
당신의 무덤가에 석산꽃이 가득 피어 있다
―나는 핏줄처럼
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
죽어서도 당신은
붉디 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
석산꽃 하염없이 꺾는다
꽃다발을 만들어주려고
꽃이 된 당신을 만나려고
꽃 택배 / 박후기
택배회사 울타리
벚꽃 피고 진다
어떤 꽃잎 피어날 때
어떤 꽃잎 지고 있다
늙은 왕벚나무가
꽃들의 물류창고 같다
사랑은 언제나 착불로 온다
꽃들은 갑자기
왕벚나무를 찾아와
빈손을 벌리고,
집 없는 나는 꽃피는
당신을 만나야 한다
꽃잎은 끊임없이
억겁의 물류창고를 빠져나가고,
사월의 허공이
태초의 발송지로
반송되는 꽃잎들로 인해
부산하다
꽃 진 자리 / 박후기
사과나무에겐 꽃 핀 자리가 똥구멍이다
꽃 필 무렵
사과나무는 온몸이 항문이다
꽃잎을 버림으로써
몸을 여는 항문의 개화기를 지나면
똥 덩어리 같은 사과 한 알
비로소 가지 끝에 매달린다
흉부에 꽂힌 가느다란 꼭지.
식도 뚫은 튜브 통해 養分 받으며
여름내 있는 힘 다해 괄약근을 조인다
늘어진 살가죽 몸 안으로 끌어당기느라
얼굴 점점 붉어지고,
사과에겐 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
꽃 진 자리에 유난히
주름이 많은 것은
全生이 한꺼번에 쏟아질까봐
항문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사과밭 노인 병상,
어머니 관장하신다
꽃기침 / 박후기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 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 지는 꽃들이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예쁜 꽃 / 박찬(1948~2007)
이제 더 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외국꽃 / 반칠환
서양금혼초가 봄볕에
앉은걸음으로 노역하고 있다
마이크를 든 정치가가 말한다
외국꽃은 기여한 바가 없다
최저임금을 깎아야 한다
울 밑에 선 봉숭아와
담장 옆 맨드라미와 공원길 코스모스가
깔깔깔 웃고 있다
알고 보면 인도 봉씨,
인도네시아 맨씨,
멕시코 코씨 들이다
꽃에 대하여 / 배창환 (1955~ )
열살 때 나는
너를 꺾어 들로 산으로
벌아 벌아 똥쳐라 부르면서
신이 났다.
그때 나는 어린 산적이었다.
내 나이 스물에
꽃밭에서 댕댕 터져오르는 너는
죽도록 슬프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에 너의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민중의 상징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도 네 속에 살고 싶었다.
마흔 고개 불혹이 되어서도
나는 아직 너를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러면서 흩어지는 까아만 네 씨앗을 보고 있다.
나는 알 수 없다.
쉰이 되고 예순을 넘겨
천지 인간이 제대로 보일 때가 되면
나는 너를 어떻게 사랑하게 될까.
필요 없는 놈은 골라내고
고운 놈만 수북이 옮겨 화분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너를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그냥 잡초밭에 두고
못 본 체 지나가며 사랑하게 될까.
꽃이 지는 일 / 배홍배
살구꽃이 졌다
떨어진 꽃잎은 잊혀졌지만 꽃이 있던 자리는 점점 자라서
아이 울음만큼 자라서
직박구리가 목이 쉬어 떠났다, 가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새가 앉았다 간 자리를 쳐다보아도
아무리 쳐다보아도
꽃잎을 쉬이 잊은 일에 대한 치밀한 반성이나 가책 말고는 달리
설렐만한 일은 없었으므로
살구꽃 사진을 침실에 걸어놓고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새가 떠나지 않았다면
침실의 어두운 불빛 아래가 아니었다면
꽃잎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무릎 바짝 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는 줄이나 알았겠나
살구 알이 자라서 드리우는 동그란 그림자 안이 그
처럼 환한 줄 생각이나 했겠나
꽃의 시간 / 복효근
대빗자루 들고 서서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숫눈 위에 꽃으로 찍힌 고양이 발자국
망설이는 동안
얼른 알고
송이송이 덮어주고 있다
꽃의 기억 / 복효근
어시장 꽃게들이 트럭에 실려 떠난 자리
꽃게들의 다리가 널려있다
몸통은 어디론가 다 떠났는데
남은 집게다리는 아직도
지켜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꼭 아물려 있다 더러는
이쯤이면 됐다는 듯
무엇을 기꺼이 놓아준 표정이다
제 몸을 먹여 살렸던 연장이며
제 몸을 지키던 무기였던 것
종내는 제 몸을 살리기 위해
제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냈을 터
몸통이 두고 갔거나
다리가 몸통을 떠나보냈거나
한 쪽 손을 두고 떠난 이주 노동자처럼
꽃게에게 마음이 있다면
집게발에 들어있을 것이다
끝까지 버틴 흔적,
그래서 남겨진 꽃게의 집게다리엔
슬픈 꽃무늬가 있다
나무는 꽃을 비운다 / 복효근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은 오해다
정작 저를 비우는 것이다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근본이 있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운 이후로
무슨 저주가 이리 질길까
한 자리에 박혀
종내는 제가 판 무덤에 저를 묻어야 하다니
짐승처럼 포효하고 내달리고 싶어
얼마나 제 속을 끓였을까 곪았을까 썩었을까
언제고 부러져 몽둥이가 되고 싶은 소갈머리 왜 없을까
확 꺾여 불 질러 버리고 싶은 화기로 뭉친 몸
그래서 꽃은 나무의 토사물이거나 욕지거리다
하도 어이없어서 웃는 웃음처럼
곪아 터진 화농에서 피어나는 오색 곰팡이 같은 것
그러니까
못해먹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시발
저 육두문자를 꽃 비운다 할 수는 없겠니
저를 피운다 할 수는 없겠니
활활 불피우고 싶은 마음 같은 거
후련히 확 비워버리고 싶은 마음 같은 거
그 정도는 돼야 꽃이라 하지 않겠니
어때 그래도 꽃 피우고 싶어?
꽃 아닌 것 없다 / 복효근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