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여름 / 최형만
바나나 꼭지를 은박지로 감쌌다 은빛이 물고 있는 건 열대의 계절 계속 싱싱해지라는 주문을 걸어 본다
개수대에서 물기도 없이 탑을 쌓은 그릇들은 기단부터 말라갔다 TV에서는 선거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한낮의 기온은 슬그머니 꼭대기로 치달았다
비키니를 입은 마네킹의 구릿빛 피부들 올해가 가장 더울거라는 예보에 여름 가맹점은 여름을 파느라 골몰하고 있다
아직은 참을만한 여름. 바람이 불면 그럭저럭 한여름.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해서 충분하다는 여름. 여름은, 진짜라는 말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다
감싼 은박지를 벗길 때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여름을 불러댔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거나 지난 장마에 언덕에서 죽어간 킬힐을 추모하거나
여름아? 넌 너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을 생각해 본 적 있니?
은박지를 만드는 공장이 쉴새없이 돌아가는 동안 하나둘은 빛 모자를 쓰는 사람들 모두가 얼굴을 가린 채 낄낄거렸다 명찰에 새긴 이름이 썩지 않아서 쨍쨍해진, 진짜여름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아버지처럼 저마다 킬힐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오늘도 싱싱하기 위해 날마다 언덕을 오르고
- 웹진《시인광장》 2025년 6월호 -----------------------------
* 최형만 시인 1969년 경남 진해 출생.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졸업 2020 《동리목월》소설 등단. 2024《전북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제8회 원주생명문학상, 2020 중봉조헌문학상, 2020 동리목월 신인상(소설), 2023 천강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