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美軍
면사무소 광장에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지낸 그들은 다음 날 숙소와 사무실로 쓸 건물 물색을 위해 邑(읍) 중심지에 있는 군청 주변 건물을 보고 다녔습니다. 日政(일정) 때 농산물검사소로 쓰이던 50평 정도의 단층 건물이 마음에 들어, 즉시 이 건물의 접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일제 때부터 근무하던 조선인 소장과 직원을 당일로 내쫓으며 접수하는, 비상식적인 군사행동 같았습니다. 총을 가진 美 점령군의 명령이니 아무도 반대는 못하고, 사이에서 경위를 설명하는 제 입장만 무척 난처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승리로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원수 휘하의 연합군의 일본 本土 점령은, 여러 가지 사전 준비를 많이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점령 초기에 일본 정부 측과 많은 마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조선반도 북위 38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 항복 접수나 軍政(군정) 실시에 있어, 일본의 경우보다 사전 준비가 소홀했던 듯 느껴지는 사항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특수사정을 꼼꼼히 사전 연구하지 않은 듯 생각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에도, 통역 준비 없이 남해 섬에 군정 분견대가 진주하며, 숙사에 대한 아무런 사전 상의도 없이 직원의 怨聲(원성)을 사면서 강압적인 접수를 당일로 하는 등, 그들의 사전준비 부족으로 인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공포 분위기가 주민을 불안케 만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났으니 중간의 제 입장은 매우 딱했습니다.
통역을 하며 겪었던 일
사무실 건물이 결정되자, 대원들은 사무실로 쓸 부분과 숙소로 쓸 부분을 구분하는 改築(개축)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무실을 접수당한 곡물검사소장은 걱정이 되어 매일같이 얼굴을 내밀다가, 분견대장의 부탁으로, 연락할 때 이외엔 일체 나오지 말라고 해 그분은 하는 수 없이 郡守(군수)와 상의해 새 사무실을 물색했습니다. 사무실과 숙소가 결정되자, 상주하는 분견대원 수는 대장을 포함해 약 10명 정도로 축소되고, 숙소 한편에 제가 거처할 방과 軍用 간이침대 하나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무실에는 일반 전화 한 대가 있을 뿐이고, 차량은 군용 지프차 한 대 뿐이었습니다. 인터넷이 없는 시대라 중대본부와의 연락은, 매일 있는 ‘쿠리어 서비스(courier service)’라는 傳令(전령)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남해섬과 뭍에 있는 하동군 사이에는 폭 600m의 좁은 수로가 있어, 1973년에 남해대교가 준공될 때까지 이 험한 물길을 헤쳐, 소형 선박이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戰死한 곳이 바로 이 水路(수로)입니다.
미군의 ‘쿠리어 서비스’는 남해와 하동에 있는 분견대의 지프차가 하루 한번씩 이 露梁(노량)에서 만나, 서류나 물자를 전달받았습니다. 물론 급한 연락은 전화를 이용하였습니다. 무선통신을 하는 것을 못 보았으니, 이 남해 분견대는 진주에 있는 중대본부에서 상당히 고립된 존재였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의 풍습을 이해못한 美軍
분견대장에게는 사법권 등 많은 권한이 주어진 모양으로, 간단한 軍法 직결재판(summary court)도 몇 번 열렸습니다. 서투른 영어로 이런 재판의 통역까지 맡아 했지만, 제가 아는 사람이 피고가 되는 재판의 경우에는 이웃 하동 분견대에서 통역을 데리고 왔습니다. 경범죄의 경우, 경찰서 유치장을 임시 형무소로 사용했습니다. 큰 소송사건은 물론 지방법원 支廳(지청)이 있는 진주까지 가야했지만 제가 근무하는 동안 그런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야간에 얼굴에 피를 흘리는 노인 한 분이 사무실을 찾아와 대장을 만나겠다고 악을 썼습니다. 허름한 농부차림의 이 노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며 단어 위주의 영어를 좀 하였습니다. 사연인 즉, 墳墓(분묘) 이장 문제로 이웃 동네 사람들과 분쟁이 일어나 구타를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노인이 짧은 영어로 ‘그 친구가 나를 죽인다고 했다’고 분견대장에 말해 대장을 긴장시켰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진술을 토대로 경찰을 시켜 이 노인을 구타한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변호사업을 했던 대장은 ‘이것은 살인미수’라고 흥분했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은 ‘죽인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잘 쓰며 꼭 殺意(살의)가 있어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고 짧은 영어로 우리와 미국 사람사이의 언어 습관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풍수설 때문에 선조들 묏자리 선정에 따른 시비가 빈번한 시골 사정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다음날, 경찰에 끌려온 구타사건의 主犯(주범)은, 제가 아는 학교 선배였습니다. 아주 조리있게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이 선배의 신사적 태도와, 어제 밤 저의 조선인 풍습에 관한 설명이 奏效(주효)했는지 ‘살인미수’로 확대될 뻔했던 다툼은 雙方(쌍방) 화해로 원만히 해결되었습니다.
가슴 아팠던 쌀 供出
제 개인의 설득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쌀 供出(공출)’이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만성적인 식량난이 계속되어 군정당국은 일제가 해오던 ‘米穀(미곡) 공출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습니다. 물론 無償(무상)으로 뺏어가는 게 아니고, 시장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각 부락별로 미곡을 수매하는 제도였습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계속된 이 제도는 불안한 시국으로 식량을 몰래 비축하려는 농가와, 공출제도를 반대하는 좌익들의 선동으로 제대로 운용될 수 없었습니다. 郡에 할당된 공출 수량을 마감 기일 내에 달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비관적 보고를 군수로부터 받은 분견대장은 하루는 부대 내 사병을 총동원하여 供出 독려에 내보냈습니다.
저도 대장이 이끄는 5명의 공출독려반을 따라, 노량리가 있는 雪川面(설천면) 한 부락에 갔습니다. 사병들은 전부 카빈총으로 무장한 채 농가 하나하나를 방문하며 곡간이나 농기구 창고 등을 수색하였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농민들은 집총한 미군의 침입에 질겁하는 듯 했습니다. ‘쌀 공출 독려 차’ 나왔다는 面직원 설명에, 할아버지·할머니들은 부들부들 떨며 감춰둔 쌀가마가 있는 곳으로 이들을 안내했습니다. 이를 보는 제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面직원들을 향하여 ‘이렇게 쌀이 많은데 왜 공출량을 채우지 못 했느냐’고 의기양양 말하는 대장 말을 통역해야 하는 제 입장도 난감했습니다. 이런 일로 제 자신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만, 그보다는 저를 통해 대장의 환심을 사려는 군청이나 경찰서 간부가 많아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첨하는 사람, 그걸 통역한 나
과거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큰 여관 두 곳이 음식점으로 탈바꿈해 술자리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기관장들이 대장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자리로 쓰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의 아부성 발언을 대장에게 통역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 신세가 한심스러워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그 기관장들 중에는 선친의 知人도 섞여 있어 통역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객지에서 온 어느 관리의 경우, 젊은 저에게 ‘영감’이라는 아부하는 호칭까지 쓰며 미군 대장에게 아첨을 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남해군에는 木炭(목탄)을 연료로 움직이는 여객버스 두 대가 있었습니다.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씩 있는 부산과 여수를 잇는 여객선 시간에 맞추어 섬 북단에 있는 노량 마을과 군청 소재지인 남해읍을 왕래하였습니다. 이 버스 하나가 군정청 지프차와 딱 한 번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인구 10만의 섬에 대중교통 수단으로는 이 버스 두 대뿐이고 군청인가 면사무소에 화물차가 두 대 있을 때였으니 길 가는 사람들은 가끔 움직이는 이 차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멀리부터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그 먼지 나는 좁은 신작로를, 마을 가까이 있는 건조 중인 농작물 이외 별 장애물 없는 길을 차들은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 버스 하나가 미군 지프차와 충돌 직전에, 기동력 있는 지프차가 오른쪽으로 피하여 논으로 떨어져 층돌을 면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제 때의 오랜 습관인 차량의 좌측통행이, 미군의 진주로 우측통행으로 교통법규가 바뀌면서 벌어진 사고였습니다. 게다가 남해 길은 꼬불꼬불한 험한 길이 많아, 습관적으로 좌측통행을 하던 버스가 우측통행을 하는 미군 지프차와 정면충돌 직전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초래한 것입니다. 다행히 이 사고로 인명 피해는 없었고, 1m정도 얕은 논바닥으로 떨어진 지프차만이 車體에 가벼운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무단결근한 이유
남해 분견대 대원 중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의 아주 젊은 병사도 있어, 이들의 장난이 심해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한 번은 살아 있는 뱀을 지프 뒷좌석에 감추었다가, 뱀을 싫어하는 제 몸에 이를 던져 거의 기절할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에 항의, 처음으로 무단결근을 하고 사무실에서 약 2km 떨어진 저의 집에 숨어버렸습니다. 설날을 제외하고 제가 집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없어 군정청의 對外(대외) 사무는 일시 중지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졌고, 사태의 원인을 알게된 대장이 해당 사병을 징계하겠다며 그만 두겠다는 저를 달래 직장으로 복귀시켰습니다.
당시 남해읍에는 이들 젊은 병사들이 근무시간 후에 시간을 보낼 위락 시설이 없었습니다. 뱃길로 두 시간 걸리는 어항 三千浦(삼천포)에 여자 종업원이 있는 술집과, 일제 때부터 어부 등을 상대로 영업하던 당시 靑樓(청루)라고 불리던 유흥업소가 한 곳 있었습니다.
주말이 되면, 교대로 젊은 대원들이 삼천포까지 순항선을 타고 가서 휴가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군이 완전 철수한 1946년 6월 말경까지 8개월이 넘는 미군 체류 동안, 이들 젊은 병사가 관련된 풍속사범 등 犯法(범범)행위가 한 건도 없었던 게 제게 큰 자랑거리입니다. 만일 이들의 심각한 범죄행위가 일어났었더라면, 고향 출신의 저 입장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하고 생각하.
남해는 섬이기 때문에, 뭍으로 나가려면 이 순항선을 이용하거나 개인어선 등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천포와 연결되는 이 동쪽 순항선 외에, 서쪽에 있는 전라남도 여수로 가는 순항선도 있어, 상인들이나 장보러 가는 주민들이 이용하였습니다. 이밖에, 부산과 여수를 왕래하는 큰 여객선이 하루 두 차례 섬 북쪽 노량 항구에 기착해 부산이나 여수 등 도시에 가는 상인이나 학생들, 공무원들이 주로 이용하였습니다.
지금은 연육교가 남해-하동을 연결하고, 동쪽에 있는 창선섬과 삼천포 간, 그리고 남해 본도와 창선 사이의 좁은 수로에 있는 연륙교로 뭍에서 남해로 오는 교통은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육로교통이 편리해 지면서, 부산과 여수를 왕래하던 여객선 편은 없어졌습니다. 현재는, 서울이나 부산을 직결하는 정기 버스편이 있습니다.
美軍機의 추락
남해는 또 태평양 전쟁에서 조선반도에서 미군이 희생한 유일한 곳입니다. 남해에서 가장 높은 해발 786m의 望雲山(망운산)에 일본 패전 직전인 1945년 8월6일 밤, 美 공군 B-29 폭격기가 추락하여 11명의 승무원이 전사한 것입니다.
저는 당시 일본군 복무로 남해에 없었지만, 이 미군기 추락 장소는 우리집에서 지근거리로 1km 가량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사고 당시의 굉음은 굉장하여 읍내면 주민 다수는 무슨 일인가 하고, 밤새 전전긍긍였다고, 제 선친을 위시한 많은 사람이 당시의 공포를 두고두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날은 깊은 안개와 얕은 구름으로 비행에는 아주 나쁜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놀란 주민들이 이튿날 아침, 현장을 보고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며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여, 희생자 시체 등의 정리를 하기 전에, 수십 명의 주민이 추락한 불탄 미군기 殘骸(잔해) 속에서 당시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물품들을 약탈해 갔다고 합니다. 그 귀중한 물건 중에는 낙하산에 사용된 나일론줄이나 천이었다고 합니다.
미군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경찰이 곧 이 주변을 출입금지 지역으로 만들고, 일본군 헌병대의 조사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남해 남쪽 해안, 현재 다랑이 마을로 유명한 가천마을 뒷산 꼭대기에 일본군 해안포 초소가 있어 수명의 일본 군인이 있었지만, 헌병 조사대는 아마 진주나 여수 같은 도시에서 왔을 것입니다.
약 10일 후에, 일본군이 패전으로 모두 귀국하자 남해읍 유지들이 이 미군 비행기 조난지를 다시 찾아, 美 공군 비행사 유해 11구를 假매장하고 위령패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 美 공군 희생자가 조선반도에서의 유일한 전사자라는 것은, 제가 美 군정청에 근무하면서 대장에게 들어 알게된 사실입니다.
이 美 공군 희생자의 유해는, 하와이에서 온 미군 전사자확인부대(Graves Registration Corps) 조사원에 의해 회수되어 미국 본토로 후송되었습니다. 이 假(가)매장 및 현장 보존을 추진한 남해읍 유지들은 ‘美空軍戰功事業協會(미공군전공기념서업협회)’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매년 이 휘생자들을 위한 추모식를 매년 8월6일에 열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에 몇 번 이 추모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美 공군기는 여수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폭격한 뒤, 짙은 안개나 혹은 일본군 고사포 사격으로 망운산 중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망운산 등산길이 이 추락 현장을 거쳐 잘 개설되어 있어, 누구나 당시의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남해 분견대의 철수
남해 분견대가 완전 철수한 것은 1946년 6월 하순으로 기억합니다. 6월에 들어서면서, 일부 인원과 시설이 진주에 있던 중대 본부로 철수하고, 저에게 같이 진주로 가겠느냐고 타진해 왔습니다. 저는 서울로 가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길 원했지만 좌우 대립으로 치안이 불안하단 이유로 선친의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통역 일을 계속할 수도 없어, 임시로 영어 교사를 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이를 대장에게 통고하였습니다.
반년 이상, 寢食(침식)을 같이 하며 軍政 분견대에 근무하는 동안, 제 영어 실력이 많이 늘고 특히 회화에 자신이 생겼습니다. 사병 가운데 사회에서 교사를 했다는 온순한 하사관이 한 사람 있어, 개인적으로 제게 많은 지도를 했습니다. 대장과 대화할 때엔 ‘Sir'라는 존대 말을 꼭 붙이라는 등, 화법과 예의에도 많은 신경을 써주었습니다. 젊은 사병들이 쓰는 卑俗語(비속어)는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도 해주었습니다. 사실 젊은 병사들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갓 댐(God Damn)' 등 욕설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