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점순시모음 81편
출처 : 시집 《덤이의 모란》중에서 가나다순으로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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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월
이점순
달의 어깨가 춥다.
세상의 시간에서
서슬 실린 삶
남매를 쫓던 호랑이에게
동아줄은 없었듯이
내게도 없는가
노숙에 지쳐 낙엽처럼 가벼운
네 숨소리
내 숨소리
세상엔 없을 소리를 끌어안고
누런 夕刊 밑에서 신음한다.
지구를 열 번은 돌았을 객쩍은 상념들
‘없음’으로 털어 내고
바람도 헛돌고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13월
빈들에 서 있다.
안개 속달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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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이 온 아침
이점순
예순 날을 넘게 어칠 비칠 비가와도
저수지는 목이 말라
내리쏘는 태양열로 고른 숨이 어렵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땀
가만히 있어도 툭 튀어나오는 욕
정유년 올 여름은 유난히 길다.
구름 찬 아침
그 사이로 햇살이 있길래
부지런히 빨래를 너는데
선득선득한 바람 기운이 목에 감긴다.
잘살아 보고자 아등바등
너만 못하랴 우뚝 세운 헛기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을 날려도
가는 시간 보내는 세월
문득 온 가을처럼
문득 갈 인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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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하늘
이점순
티 없이 맑은 아기 살빛처럼
하늘이
가을을 둘러맨 하늘이 참 곱다.
진안의 양 선생께서
‘시인이 보는 하늘빛은 어떤가요 ? 내 눈에 저리 고운데’
선생께서 시 한 수 지어보라 권하니
‘시는 아무나 쓰는 건 간디요 시인이 쓰셔야지’
감성이 가슴에 솔찮허니 충분히 한 편 나오겠습니다.
권주가처럼 권했으나
극구 사양하시고 내게 떠민다.
저 곱고 푸른 가을 하늘을 내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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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만의 여유
이점순
오늘도 밤이 길다.
멜랑콜리 함에 잡혀 있고
하고 많은 일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지만
여느 때처럼 밤이 긴 오늘
차라리 나를 보듬어 보자
긴 밤에 여유를 부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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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우살이
이점순
산 높은 나무의 빈 가지에
꽃으로 피어
저도 살고
늙은 가지에 꽃 피워 청춘을 얹는다.
얹혀살아도
염치없이 굴지 않고
같이 피는 겨우살이
근데
늙은 내 가지에 얹혀사는
내 한숨은
참
염치가 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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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울나무
이점순
지난 시간의 영화를
미련 없이 떨구고
빈 가지로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저 겨울나무를 보면서
쪼아대는 새들의 입방아에
못 견디는 나를 돌아본다.
암것도 아니여
하면서도
상처에 옹이가 깊다.
겨울나무처럼
나를 싼 허망한 것들을 훌훌 떨구고
빈 가지로 서서
바람 몸살에
잠시 도진 아픔이라 여기고
의연히 하늘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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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래의 꿈
이점순
게딱지같은 등걸에
꽃이 피기를
딱, 한 송이만 피어지기를
눈물이 나도
딱, 한 방울만
한쪽 눈에서만
떠남 그 어처구니에
딱, 열흘만 아프고
가슴이 이내 비워지기를
깊은 고요는 귀를 먹게 하고
숨소리도 내겐 없는데
헛헛해진 마음
파도에 쓸려버리고
지느러미 펴고 하늘로 갈까 보다
날아서 갈까 보다
아
이제 그만 바다를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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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궁근 하루
이점순
코끝이 쨍하게 추운
손톱에 봉숭아 끝물 같은 초승달과 발 시린 별 하나
살아 온 날을 되짚어 보는 머리칼 허연 나
기억에도 없는 사랑을
애달픔도 없는 그리움을
어지러운 꿈같은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한다.
김칫국을 끓여놓고
잠시 아침 음악을 듣는다.
공허하고 허전하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아
애써 명사들의 말씀도 새겨 본다.
새겼으면 실천을 해보든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하루가 궁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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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극도의 심리상태
이점순
눈을 꽉 감고 눈썹 새로 쓰디쓴 눈물을 흘리느라
너는 마지막 나를 보지도 못하고 있구나
사랑한다.
사랑했었다.
눈으로라도 보내는 나를
그저 너를 향한 내 속내를 보지 못하네.
미안하다.
미안했었다.
속 말을 못 하고 여태 지내 온 나를
반성하는 눈빛을 못 보네.
우느라…
옅어지는 내 손의 온기를 잡아다오
무뎠던 마음을 다독이지 못하고 가네
내 온 마음을 다해 한 줄 눈물로 보내니
그저 잊고 잘 지내.
겨운 들숨에 날숨을 보내지 못하고
마지막 온기를 놓아버리니
난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고개 떨군 나를 잡아 목놓아 울고 있을
너를 나는 느끼지 못해
안녕
내 모든 진심을 담아
안…ㄴ
생시처럼
나는 나를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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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다림
이점순
지나온 세월에
내 몸이 너무 빨리 달려
마음이 미처 따라오지 못해
그 마음을
그루터기에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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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까치 밥
이점순
까치를 불러놓고
감나무가 옷을 벗는다
부끄럼 없이 스스럼없이
한 삼십 년은 같이 산 것처럼
옷을 벗는다.
늦가을 해 저문 냉기가 코끝에 싸한데
외씨버선 하나만 남겨두고
옷을 벗는다.
엊그제 해산한 닭사리 댁 작은 며느리 젖가슴 같은
잘 익은 홍시 하나 입에 물려주고
파르르 오르가슴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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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가 살아온 시간
이점순
살아오면서 좋든 싫든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사연과 사건들
그 속에서
나를 아프게 했을 것들과
내가 아프게 했을 것들의
그 오만 것들이
오들오들 멍으로 나를 누른다.
나를 버린 순간의 시간
내가 버린 찰나의 기억
구름 뒤에서 자잘하게 부서져 퍼지는 햇살의 영광을
감은 동공으로 인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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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냉정한 열정
이점순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오래 못 본 아들이 보고 싶다고
새벽바람 들척지근한 날에 베개를 적시면서
세상을 감정으로 맞서면 되겠어 ? 엉 ?
그래서
나는 나를 또 감추고 일어서네
냉정하게
열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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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너는
이점순
어느 날
내가 내게 물었어.
너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
엇박의 노래라 답했어.
사뭇 멋지게 들리겠지
또 물었어.
너는 뭘 바라보는지
작은 창으로 보이는 내 푸른 하늘을
가슴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숨 쉬는 의미기도 해
너…
아니 그만!
내가 나일수록
나를 보듬어
나로 사는 것이야.
내 하늘에 진심이듯
나로 진심인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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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늙은 불꽃
이점순
이마에 맺힌 땀이 또르르 뺨을 타고
동당동당
가을 밭고랑 하루가 바빴네.
서산마루에 걸린 늙은 불꽃
구름을 어깨동무하고 화려하게 피우니
그려
세월이 대수롤까
흙 묻은 뒤꿈치 말끔히 씻고
아랫목 솜이불에 피곤을 재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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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늙은 티
이점순
그전에는 층계를
왼발 오른발 따로따로 내렸는데
지금은
왼발 내려 딛고 그 자리에 오른발 내려 딛고
난간 잡고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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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늦가을 단상
이점순
대봉시가 주렁주렁 열려 가을이 익어가는데
길가 낙엽이 뒹굴며 가을이 깊어가는데
유월에 피어야 할 철쭉이 활짝 피었네
계절이 때를 모르고 있으니
지구가 많이 아프다는 증세겠지?
그래도
건강히 잘 지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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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시 봄
이점순
없음에서 있음이 아니고
그저 작은있음이 조용히 저의 때를 기다리다가,
살을 에는 고난이 있어도
그저 조용히 저의 때를 기다리다가,
잠시 비껴간 바람
잠시 비추는 햇살
그 사이로 움틀, 제 숨을 쉰다.
없음에서 있음이 아니고
작은있음이 제 숨을 쉰다.
곱디고운 제 심장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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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상
이점순
외궁으로 이사한 첫해
첫눈이 엄청왔다.
농협 다녀오는 길에 눈발로 우리 집 정경이 흐리다.
눈 덮인 우리 집이 좋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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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담쟁이
이점순
소록도 검시실 서러운 벽을
담쟁이 고운 잎이 바람에 펄럭인다.
조막손이를 하고
떨어진 발가락을 언 땅에 묻고
천형의 섬으로 내동댕이쳐진 육신
열여섯의 작은 마음이 칠순으로 그 고비를 넘어 버렸다.
세상은 바뀌어 사람들이 오고
사람을 구경하고
사람과 말을 하고
사람이라 불려진다.
그래도 서러워 눈빛을 하늘에 단다.
사람과 다른 형질로 맞는 뭇매
우리 밖 사람으로 유성이 된다.
다만
내 안의 나만이 존재할 뿐.
섬에 갇힌 바다를 바라만 볼 뿐
바람은 천형을 두려워 않고 손길을 주고
천형을 함께하는 담쟁이 푸른 잎이
오늘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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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덤
이점순
퍽 예전에
하는 일마다 안되고
생각마다 힘들어
용타는 처녀 점쟁이를 만나러 동트기 전에 갔다.
요것조것 다 뻔한 말에
쉰 아홉이 내 삶이란다
그렇겠거니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웬걸
곧 일흔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십 년이 덤이었다.
두려울 것 없어 다 덤비라고 지냈더니
앞으로도 십 년은 또 거뜬할 것 같다.
자세를 낮추고
다 높이 보고 사니
목숨부지가 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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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덤이의 모란
이점순
어머니의 밥상에서 자란 나의 유년은
비바람에도
까짓 눈보라에도
늘 씩씩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맛으로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으니
든든히 잘 살아간다.
밥 굶지 마라.
밥이 보약이다.
가끔 삶이 허청거리면
하얀 쌀밥에 잘 익은 김치 얹어 뚝딱해봐
삶이 또 바로 서진다.
햇살로 바람으로 잘 자라
산으로 들로 지천인
나물을 올리고
한 사발 농주를 들고
어화둥둥 어깨춤 추며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적부터 물림한 손맛으로
작은 솥 걸고
세상에 지친 이들에게
따순 밥상 차려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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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보기
이점순
일흔
서산에 반 걸린 해처럼 편안히
삶의 어깨에 걸쳐 앉을 세월이다
누가 바라보아도 눈부셔하지 않아
잔잔한 따뜻함이다.
구름과 더불어 서쪽 하늘을 아름답게 칠할 시간이다.
내 삶을 반추하여
부끄러웠던 것
미안했던 것
뿌듯했던 것
잘 적어두어
남은 시간엔 좋은 일로만 기억되게
남은 사람에겐 좋은 추억으로 이야기되게
그래도 또 아쉬움이 불쑥 솟아나겠지만
덜 부끄럽게
덜 미안하게
앞을 바라보기
그래 내가 웃는 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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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때를 대하는 자세
이점순
목욕탕엘 갔어.
뭐 매일 샤워를 하지만 찌뿌둥할 땐 이만한 게 없으니까
냉 온탕에서 개구쟁이 놀이를 하고
때를 밀었어.
아~ 근데!
산수를 풀다가 틀리면 지우던 지우개 똥처럼
내게서 지우개 똥이 나왔어.
산수도 아닌데 똥이 술술 나왔어.
엥 ?
처음엔 놀랐는데.
밀다 보니
지우다 보니 신이나데.
안 나오는 답에 지우개 똥을 싸대던 것처럼
때가 나오데
살갗이 벌게져도 때가 나오데
답이 나오면 훌훌 털어 버렸던 지우개 똥처럼
말간 물을 끼얹어 때를 훌훌 털어 버리고
개운하게 목욕탕을 나왔어.
이제 산수 답이 틀려도
지우개 똥을 털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어
때를 훌훌 털어내는 나이가 되었어.
지우개 똥아
내 지우개 똥아
잘 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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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딸
이점순
나 사는 것에
토실한 몽돌만이 있었을까마는
날카론 가시 장미만이 있었을까마는
옳지 않은 것에 연연하며 머리 싸맬 일도 아니고
납네하고 자세는 저 어깨 놀음에
기죽어 파리한 얼굴로 지낼 일도 아니고
그냥
너 생각하면 미소가 저절로 나는 것 맨치로
저절로 웃어지는 날로 살란다.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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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막걸리
이점순
지구 심장에서 끌어올린
성수聖水
여든 여덟의 생애에 국麴 여인을 만나
서로를 탐닉하듯
깨지며 넘어지며 환호하며 울부짖는
이렛날을 보내고
명상에 젖는다.
눈을 감는다.
콧길을 열어 깊은숨을 넘긴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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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먼지잼
이점순
하얀 신작로에
먼지잼 후두둑 떨어지고
어깨에 올렸던 정 깊은 손길을 여적이 기억하는데
그 그리움 위로
먼지잼 후두둑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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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멀미
이점순
비구름 몰던 바람이 앞서
방충망을 뚫고 와
방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어루만져
15층 방바닥은
구름 높이는 아닌데
15층 방바닥에 멀미가 나능만
이게 얼마나 높냐?
갑자기 공포 서린 멀미가 나길래
얼른 땅으로 내려갔어.
그래도 멀미가 나
비틀 땅 멀미가 나서
나는 다시 15층 방바닥으로 가 누웠지.
바람이 또 나를 어루만지 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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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명약
이점순
어둑새벽이 스며드는 산골은
이미 수탉의 회가 한바탕 지나간 뒤여
밤잠을 설친 멍멍개도 마당에서 기지개를 켜고
아내의 된장국에 칼질 소리가 스며들지.
하루를 버텨 줄 명약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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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모란
이점순
더딘 아침을
무쇠솥 뚜껑 여닫으며 연다.
따순 밥 먹여 학교 보내고
일터 보내고
아궁이 속 잔불 모아
감자 굽고
고구마 굽고
구수한 당신 사랑도 굽고
아이들의 출출할 배를 고소하게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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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모습
이점순
갸름하게
눈을 모아
파란 하늘
파란 구름
파란 바람을 본다.
디딤이 높은 토방에서 가끔
어머니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
갸름하게 눈을 모아
세상의 파란 것들을 보시곤 했다.
파란 바람이 겨드랑이를 타고 오는 걸 즐기려
두 팔을 벌리시던
어머니 내 어머니가 보고 싶은
난
거울을 본다.
저쪽에서
두 팔을 벌리며 파랗게 웃고 있는 어머니가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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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몽당 시
이점순
내 속을 주저리주저리 엮었더니
너무 길어
싹뚝 잘라
몽당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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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무게
이점순
내 몸은 백 근
천근만근은 내 마음
하늘을 나는 구름은 몇 근일까?
저 바람은 몇 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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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물 잔의 무게
이점순
유리잔에 물을 채웠어.
이 물 잔의 무게는 얼만큼일까 ?
백 그램?
삼백 그램?
아니
물 잔의 무게는 암 것도 아녀
일 분을 들고 있을 때의 무게랑
한 시간을 들고 있을 때의 무게가 다르지
온종일 들고 있다고 한다면?
팔이 저리다 못해 마비가 오겠지
내 삶의 무게는 얼마큼 일까 ?
어떤 생각으로
어떤 모습으로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어
똬리도 없이 머리에 인 무게일지
팔 부만 채워
똬리에 입 끈까지 있어
두 팔을 신나게 흔들며 갈 무게일지
짓눌려 가는 시간으로도
흔들며 가는 저 팔처럼으로도
내가 되어 가고 있겠지.
암만
물 잔의 무게는 암것도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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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미소
이점순
네가 간다니
보내긴 하지만
눈물 젖은 내 미소가 애처로웠네
한여름 대낮에 뻐꾸기 울음처럼 애처로웠네
사랑에 매달린 내 속내가 드러난
그날의 미소가 애처로웠네
버거워 떠나는 뒷모습에
손 흔드는 내 미소가 애처로웠네
그래 잘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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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미안했던 마음
이점순
내일이 오늘로 가까워질 무렵
비가 오네요.
수돗물만으로 키워 안쓰런 커피나무를 내놓고
물끄러미 보네요
파르르 오르가즘을 타는 잎에 미안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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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바람
이점순
이른 햇살이 이마에 앉아 쪼로록 땀으로 내린다.
맨손으로 뽑다 남은 풀뿌리에 떨어진 한 방울 땀에
스치는 한 줄기 바람,
그 시원한 바람이여
삶에 겨운
그대의 흥건한 땀도 식혀 줄
시원한 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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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바람의 노래
이점순
굵은 비를 머금은 낮은 구름이
빨리 지나가는 건,
세월을 휘감은 버드나무 휘추리가
휘휘 씩씩대는 건,
바람의 낮은 휘파람 소리가 있어서이다.
피라미 거슬러 올라가는 강 언덕에
인동 꽃이 멀리서 향으로 오는 건,
해 질 녘 서산을 뒤로하고 휘진 그림자로 오는 당신께
따순 가슴을 내어 주는 건,
바람이 불어주는 위안이 있어서이다.
네게 없는 사랑을 다독여 주고,
내게 없는 인정을 어뤄 주고,
밭고랑 고랑에 풀 한 포기 남겨두고,
그 풀에 꽃이 피도록,
그 풀에 사랑이 피도록,
그 풀에 인정이 피도록,
바람이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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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밥
이점순
인생에 밥이 전부는 아니나,
삶에 밥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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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밥상
이점순
자식은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마력을 가졌나 보다.
월차 끼워 쉬는 날이라고 온 딸내미
뒷산을 더듬이질하고
텃밭을 더듬이질하고
냉장고를 더듬이질해
차린 밥상
맛있다고 배부르게 먹어주니
내 신명은 어깨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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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배가 아픈 날
이점순
생시처럼 배가 아파
울다 잠이 깨었다.
새벽 한기 앉은 마루에서
아직도 아픈 것 같은 배를
끌어안았다.
이럴 땐
껄끄럽던 어머니 따순 손이
참 좋은데
말끔히 배도 낫고
스륵 잠도 드는데
한잠 잘 자고 일어났던
어린 날이 그리워
내 손으로
어머니 흉내를 내 보았다.
껄끄럽지도 따숩지도 않아
아직도 아픈 것 같은 배에
잠든 남편 손이라도 얹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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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변산에서
이점순
변산 수평선에
낙조가 탄다.
모래성을 쌓던 젊은 가족은 집으로 가고
일몰에 젖은 모래를 밟으며
팔각정 계단을 오른다.
다리가 아프면 쉬었다 가든
그냥 내려가도 되는데
땀 흘리며 오른 산도
다시 내려오는데
그립네 울 아버지
보고프네 울 엄마
북망산천 여행길
한 번 가니 못 오네
영영 못 오시네
☆★☆★☆★☆★☆★☆★☆★☆★☆★☆★☆★☆★
《43》
별 하나
이점순
서쪽 하늘
겨울 별 하나가
하도 야물게 보여
안쓰럽지 않아 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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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병상을 채우는 숨결
이점순
떠날 때를 알고
지는 낙엽
사람은
무엇이 그리 애달아
손을 놓지 못하는지
사랑하는 이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 소리인데
숨은 가빠
오히려 안쓰러운데
끈을 놓지 못하는 여읜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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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봄 마중
이점순
아직은 바람에 귓볼이 차다.
양지쪽 둔덕에 쑥
통실하여 한 줌 캐는데
노오란 풀꽃이 배시시 웃으며 먼저 나와 있네
☆★☆★☆★☆★☆★☆★☆★☆★☆★☆★☆★☆★
《46》
붉은 길
이점순
간밤 비바람에
애기손 단풍이,
간밤 천둥 번개에 놀라
붉은 얼굴로 마당 가득 누웠다.
난
맘으로 누워
애기손 단풍을 달래어 주었다
☆★☆★☆★☆★☆★☆★☆★☆★☆★☆★☆★☆★
《47》
비 장애인의 장애
이점순
동생이 아프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늘 동생에게 미안해했다.
당신의 업보라며 다 자란 동생을 업고 다녔다.
아버지는 엄한 눈빛으로
네가 동생을 돌봐야 한다. 양보해야 한다 했다.
좋은 장난감도, 새 옷도, 맛있는 밥상도 늘 동생이 먼저다.
배 아픈 날 어머니의 따순 손으로 배를
만져주면 나을 것 같은데
내 몫의 새 옷을 입어보고 싶은데
가끔은 아버지의 다정한 미소가 나를 바라봐 준다면…
나처럼 뛰어다닐 수 없는 동생이 안쓰럽다.
초점 없이 형아를 바라보는 동생이 불쌍하다.
그런데도 난
가끔은 동생이 부럽다.
TV를 보다가
☆★☆★☆★☆★☆★☆★☆★☆★☆★☆★☆★☆★
《48》
비빌 언덕
이점순
소의 등짝을 긁어 줄 것은 무엇인가.
꼬리로도 긴 혀로도 닿지 않는 가려운 등짝을
그래서 소는 언덕에 대고 시원하게 등을 비빈다.
지게참으로 가득한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고달픈
내 등은 어디에 기대어 볼 일인가.
내 잘 난 멋에 취해
허리 곧추세우고 턱도 빳빳이 들고
너 아니어도 돼 난!
머리칼도 허연
주름도 자글자글
허리가 아프니 저절로 수그러드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가고
외롭다
그립다
버릇처럼 잇새로 새 나가고
경자년 가을 하늘은 작년처럼 푸른데
콩밭 이랑으로 기어다닌 애벌레도 여전한데
내년에 나는 이것들과 별일 없으려나.
쓰륵쓰륵 지나가는 온몸의 통증은,
파리채 끝으로 긁어주던 등짝 가려움은,
새벽도 안 된 시간에 일어나 서성거리는 나를
지청구 줄 이 누구런가.
이런 내가 비빌 언덕은
이럴 네가 비빌 언덕은
나는 네가 되어주리
너는 내가 되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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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사랑
이점순
밤이 무서운 작은 별에게
햇살을 자잘하게 부숴
바람에 실려 보내는 갈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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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산도라지 꽃
이점순
산 중턱
어머니가 뿌려만 두고
내내토록 잊어버린 산도라지
당신 가신 날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또 핀
산 도라지꽃
고운 보랏빛을 귀밑머리에도 꽂고
가슴에도 달아
어머니께 안긴 것처럼
어리광을 부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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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살아보니
이점순
아버지의 근엄한 잔소리가 귀에 못으로 앉아 싫었어.
내 생각
내 삶에 당신의 고집을 하시려는가.
그런데
살아보니 아들아
아버지의 딱지 진 잔소리가
내 뒤안길에 그대로 보석이더구나.
아버지의 염려가 그대로 내 발자국 뒤에서
깊게 찍힌 도장이더구나.
그때는 나도
아버지가 싫었단다.
내 하는 것에 마땅찮아 하심에 그저 서운하기만 했니라
에라 ~ ! 삐뚤어질테다!
옆길로도 가고
진데도 가고
아버지 눈을 보지도 않고
마음에 빗장을 걸어버렸지
살아보니
그 모든 것이
당신이 걸어오면서 체득하신 힘든 일임을
내 사랑하는 자식에겐 그저 꽃길만 걷게 하려니
진심한 염려와 사랑임을
살아보니
검버섯 핀 얼굴까지 꼭 닮은
아버지 그때 나이가 되어보니
주루룩 눈물이 나게 후회가 되는구나.
아들아, 살아보니
아버지의 잔소리는
그대로 당신의 삶이더구나.
힘든 삶이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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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새조개의 환상
이점순
이름 값을 못 하는 슬픈 현실
회삼물灰三物 움막에서-갈매기나 되어 날아 볼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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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석양
이점순
산머리에 걸린 석양도
태양이건만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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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손
이점순
정유년 한 해도
혹독히 보냈더니 몸이 파업이다.
이렛날을 몸서리나게 아프고
탈탈 털고 일어난 아침
손이 이상했다.
찬물에 더러운 것에 안간데 없어
거무튀튀하고, 쪼글쪼글하고,
더 짧아지고, 굵어지고, 꺼칠하고,
흰 실금이 가뭄 낀 논바닥 같았던
내 손이
새각시 때처럼 뽀오얀하게 눈이 부셨다.
아~
내 손도 쉬면 뽀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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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수첩
이점순
버릴 것 좀 버리자고
책장을 뒤집고, 서랍을 헤집고
묵은 책 먼지가 매콤하다.
소월이며, 영랑이며
박경리며, 최명희며
버리지 못하고 제자리에 넣는데
뽈그름한 작은 수첩
어린 내 필적
소심한 시어
진지한 낙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주소
내 친구들의 주소와 이름과 생일과
지금은 바꼈을 전화번호가 빼곡한
애기 손바닥만 한 빨간 수첩
잊어버린 시간을 옴쓰라기 간직한 수첩을 보니
큰 골 작은 골 넘느라 뒤를 보지 못한 내가 있네.
웃음도 눈물도 많았던
장마 비린내를 즐기던
광한루 층계참에 청춘을 새겼던
내 친구들은 잘 지내시는가 ?
바람이 주는 대숲 소리에
춘향가를 벗 삼아 이 밤 편히 주무시는가 ?
암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채울라
가슴을 가득 채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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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시골 밤
이점순
시골의 밤은
멍멍개도 자고
꼬꼬닭도 자고
아버지 해소 기침도 자는데
별 들만 소란이다.
소리 없이 소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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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시월
이점순
가을은
나락 모가지를 더 수그리게 하고
하늘 가상에 곱상하게 핀 구름으로 맘을 더 달구게 하고
넌들 난들 한 발짝 걸음으로도 피곤할 나이지만
으악새 나부끼는 들판을 쏘다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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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싸라기눈
이점순
첫눈인 듯
첫눈 아닌
첫눈 같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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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애정 표현
이점순
아버지한테 울 엄마 애칭은 “어이”이구요
엄마한테 아버지 애칭은 “예”입니다.
학교 다녀와 가방도 벗기 전
“엄마”부터 찾던 어린 나처럼
출타했다 현관문을 여시기도 전에
“어이”부터 부르시던 울 아버지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때
- “어이” 자넨 나 없으면 어찌 살랑가?
살가움은 부끄러워 평생을 안 쓰시더니
그날따라 당신의 “어이”가 애처로웠나
울 엄마 당신의 “예”가 안쓰러워 한 마디 던지셨다.
- 걱정도 마슈, 난 갈데도 많고 오란데도 많으니
울아버지 걱정에 바란 내심의 대답은
- 그러게나 말이에요. 당신 없이 나는 어찌 살까요 ?
그러니 힘내서 더 사시오.
툭 던진 당신 “어이”의 대답은 참 어이가 없어
병상 모서리로 돌아 누시곤
- 자넨 참 좋겄네 오란데도 많고 갈데도 많아서!
서운해서 삐진 등엔 안도의 기운.
옛날 옛날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옛날에 울아버지 울엄마의
옴살진 애정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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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어느 오후
이점순
매지구름 한 떼가 갸웃거리는 오후,
나잇값으로도 일어서기 귀찮은 청이도
제집에서 고개만 갸웃거리는 오후,
한 다리 건너 안면 튼 시인의 글을 읽다가
그대로 한 다리 올리고 낮잠 든 오후,
설핏 잠에 다녀간 그대는
육십과 칠십의 가운데에서 앙감질하는 내 마음에
화르륵 불을 지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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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어머니와 다람쥐
이점순
가을이면 도토리가 지천인 것은
부지럼쟁이 다람쥐가
지난가을 애써 묻은 도토리를 찾질 못해
비로 바람으로 햇빛으로 새로 태어난 덕분이지.
잠을 떨군 밤이면 더
어머니 아버지가
가슴에 지천으로 살아 계신 것은
말 안 듣는다 종아리에 매질을 하시곤
호호 입김으로, 까칠한 손으로 달래주신
손길이
그 손길이 있었던 덕분이지.
다람쥐야 올해도
도토리야 올해도 산등성이 가득 넘쳐다오
어머니 오늘밤에도
아버지 내일 밤에도 제 가슴에 또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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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엄마
이점순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땐 낯설었다.
- 아가 내가 엄마야. 라고 말하기가 좀 쑥스러웠다.
조금 더 자란 엄마가 되니 힘이 들었다.
아기는 어느덧 아이가 되고
나도 그리했으리.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어머니께 죄송했다.
백발까지 닮은 엄마가 되니
내 귀에 들린 내 목소리도 엄마 목소리
주름진 손등도 엄마 손
거울 속에 엄마 미소가 스며
삶의 연륜에
농익은 엄마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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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욕심
이점순
아이구 엄니
비가 많이 와서 고추랑 어쩐대요.- 어찌가니
괜찮여
암시랑토 안혀
비 와서 어쩔 수 없는 놈 빼고
벌레 먹어 어쩔 수 없는 놈 빼고
그러고도 남은 놈은 내가 먹잔여.
갸들이 어쩌고도 남은 놈 갖고 나는 먹응께.
인자
갈 날 잡은 것 멘치로 욕심이 없네.
그저 저녁에 잘 자다가 아침 해 뜨기 전에 가기를
그것만 욕심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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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용담호
이점순
심연에 용담산을 두고
하늘과 나란히 마음을 나눴다.
녹음이어든 녹음으로
나붓나붓 나리는 눈송이어든 또 그것으로
마음을 열어 한껏 안아주며 또 하나 산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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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울음
이점순
재를 넘어 들어 온 마을에는
재를 넘어 나간 흥정이 있다.
맑은 눈동자만큼이나 맑은 젖비린내를 폴폴 풍기며
덤프트럭에 덜렁 올려 진 저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어미가 멀어진다.
멀뚱한 눈동자가 통곡을 한다.
가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이 반짝인다.
등이 높은 산에 막힌 어미의 통곡은 동네로 내려온다.
밤을 지새우고
낮을 보낸다.
사흘이 가고 나흘이 간다.
자식을 떨군 어미는 떰치를 들썩이며 여물을 씹는다.
석별을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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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위엄
이점순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가장은
가족을 보살핌에 자기를 희생한다.
울 집 대장 수탉
제 위용으로 다른 수탉을 제압하며
암탉과 병아리들을 보호한다.
먹을 것을 줘도 제 가족을 먼저 먹게 하고,
밥 주러 들어가는 내 주위를 배회하며 견제한다.
생김도 젤인데 맘 씀도 젤이다
요즘 뉴스를 달구는 사건 하나
가장으로
자신도 가족도 건사하지 못하고 납치하고 살해하는
못난 가장에게
울 집 수탉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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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인사
이점순
인도의 인사
“나마스떼”는
내 안의 성스러운 신성이
당신의 성스러운 신성에 경배합니다
라는 뜻이랍니다.
세상 모두에게 나도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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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인생
이점순
덜어내고
채우고
또 덜어내고
또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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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인생삼락
이점순
사는 중에
시고 달고 떫은 시간이 한두 번이었을까 ?
옛 성현이
좋은 친구가 오고
좋은 책을 읽고
좋아하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음을
인생삼락이라 했는데
시고 달고 떫은 삶의 사이에
내 人生三樂을 찾아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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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자리
이점순
반짝이던 별 땅으로 내려와 반짝하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대가 헤아리다 간 그간의 시간과 노고가 녹진하게
스며든 낯익은 공방에는
휭하니 바람이 이네요.
오랜 시간 그대를 견딘 의자는 당신의 땀내가 그리워
수그려 웁니다.
그래도
혼을 바쳐 빚은 항아리는 여직 곱습니다.
갈라진 손끝으로 지피던 불꽃도 가슴에서 황홀하게
타오릅니다.
도공보다 더 가슴에서 하고 싶었던 음악을 등뒤에 두고
부모님을 형제들을 바라만 봐도 좋은 아내와 아이들을
어깨에 지고 마음에 안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내 식구
바보인 그대를 늘 자랑한 내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내 친구가 이젠 당신이 비운 자리를 가득히 채우며
당신이 진 내 식구 바보를 이어 갈 겁니다.
든 자리는 표시가 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표시가 난답니다.
난 자리에 당신의 영혼이 채워져 있음을 믿고
만날 때를 기다립니다.
- 벗 계임의 망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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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작별
이점순
어찌 만났다가 어찌 헤어지겠지.
이걸 인연이라 가장하고 싶진 않어.
우연이라고 착각하지도 않겠어.
그래 우리가 만나 사는 동안 어우렁더우렁 거리다가
너 가는데 나 가는데 발망발망 하다가 예까지 왔네만,
산날망에 봄기운이 솟구치니 내 사는 세상이 좋으네.
먼지잼으로 소나기 지나고
나면 구름 새로 방실 웃는 저 하늘색으로
옷이나 한 벌 해 입고, 지천을 물들일 단풍이 피면
상그레 웃을 그대를 뒤로하고,
나 그대를 사랑했노라 말하지 않으리.
나 그대를 사랑치 않았노라 말하지 않으리
☆★☆★☆★☆★☆★☆★☆★☆★☆★☆★☆★☆★
《72》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이점숙
육십을 면전에 두고
서리꽃 핀 머리칼을 쓰다듬고
동냥 귀에
참지 못한 말 말께나 흘리면서
이 사람 저 사람 홀리며 나불거려
그대 행여 내 말에 반분이 나면
소맷자락 긴 옷으로 나를 숨기소
나폴나폴 떨어지는 꽃잎으로 어깨춤을 추리니
산을 넘는 두루미는
말을 좋아해
자갈자갈 허공에 입을 벌리면
멀리서 산 독수리 날아와 냉큼 잡아 배를 채운다지.
젊은 두루미 또 자갈 거리지만
경험 많은 늙은 두루미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산을 넘어
침묵으로 한세상을 또 산다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말을 하는 중생의 업이여
작은 돌 하나 입에 물고
훨훨 하늘을 날세
☆★☆★☆★☆★☆★☆★☆★☆★☆★☆★☆★☆★
《73》
잠시 떠남
이점순
등으로 내려앉는 햇살이 따가운 구월
하늘색만큼이나 파란
파란 들뜸으로 길을 나선다.
젊은 나와
늙은 나는
한 길을 간다.
깍지 낀 여린 손가락과 굵은 손가락이 꼬물거리면서
가늘게 웃고 굵직하게 웃는다.
너만큼 어렸던 과거의 나
나만큼 되어질 미래의 너
길을 간다.
구불지고 비탈지고 잔돌에 우둘투둘 한 길임에도
두 손 잡아 힘이 되어주는 우리는
위로가 되어 간다.
상처를 잠시
그곳에 두고 떠난다.
젊은 나와
나이 든 나와.
☆★☆★☆★☆★☆★☆★☆★☆★☆★☆★☆★☆★
《74》
잠시 쉼
이점순
봄비라기엔 이르고
겨울비라기엔 사뭇 늦은
비가 제법 내리는 오후
막걸리 배달을 일찍 끝내고
작은 찻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소원했던 벗에게 안부를 묻고
너무 진하지 않은 커피에 입술을 주고
눈이 없어
오지게 춥덜안해
덜 겨울 같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잔잔히 울리는 음악과 푹신한 의자에
깊이 앉아 슬며시 자오른다.
잠시,
쉬었다.
☆★☆★☆★☆★☆★☆★☆★☆★☆★☆★☆★☆★
《75》
잡담
이점순
박쥐에서 송광호는 빨대로 마셨다.
울 엄니는
백만 대군의 피를 자배기째 마신다.
백만대군은 선비 춤, 학다리 춤 너울대다가
하나씩 되살아 살갗을 뚫는다.
퐁 퐁 퐁
새벽의 샘물처럼
맑은 눈빛으로 뚫고 나온다.
병실 창밖의 어둠은 초침마저 뒤로 잡아끄는 것만 같다.
- 똥이 마련데…
- 눠야지요
- 안나와
- 갸들은 왜 엄마를 좋아한다.
- 갸들이 쑥쓰런갑다.
아 쑥쓰런 울 엄마 똥
둬 달 전에 날은 안 새고
하루가
한 시간이 너무 멀다는 엄마와
잡담을 했다.
이제 잡담을 잡담으로 말 나눌 엄마가 안 계신다
☆★☆★☆★☆★☆★☆★☆★☆★☆★☆★☆★☆★
《76》
젊음
이점순
주머니가 조금 찼는데
사고 자운 것,
먹고 자운 것,
암것도 없네.
욕심도 젊어서나 있는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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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정리
이점순
이제
바쁨을 내려 놀란다.
동당 거린 마음도
바람처럼 손에 쥘 수 없는 욕심도
지나온 시간은
내 것이 아니고
기억 속에서 잠깐 멈출 뿐,
다가올 시간에도 안달하지 않길
내 손에 없는 것임을 얼른 알자
☆★☆★☆★☆★☆★☆★☆★☆★☆★☆★☆★☆★
《78》
폭식
이점순
어제부터 왼 종일 굶고
오늘 저녁
허겁지겁 두 그릇 밥을 먹는다.
몇 날을 무심으로 지내다가
오늘 밤
허겁지겁 글줄을 날린다.
☆★☆★☆★☆★☆★☆★☆★☆★☆★☆★☆★☆★
《79》
하이랜더 증후
이점순
일흔 살이 된 내 몸은 늙어가는데
일흔 살인 내 불면은 늙지도 않는다.
☆★☆★☆★☆★☆★☆★☆★☆★☆★☆★☆★☆★
《80》
호기심
이점순
눈을 감아도
새벽인 듯 아득히 보이는 빛
귀를 닫아도
바람인 듯 아득한 소리
움츠리고 움츠려 숨어든 너도
단번에 찾아내는 건
나이만 먹은 내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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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환생
- 꽃이 피다
이점순
이른 저녁부터 되게 아프다.
등에 오른 한기가 깊은 밤에 일어나 다시 아프다.
어제 삶이 바람이듯
그 바람에 흩어진 구름 같은 삶이듯
지난 것은 지난 대로
오지 않은 것은 오지 않은 대로
바라보면 되는 것을
허공에 내민 손짓으로 겨눈 맘을 거두지 못해
스스로 더 아프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까.
말린 꽃잎 두어 개 띄우고 물을 부었다.
죽은 듯 죽지 않은 꽃이 피어난다.
열기 진눈으로 고요히 바라본 꽃잎이
활짝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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