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 이정연
오늘 아침 마지막 한 조각 남은 미역을 찬물에 담갔다.
딱딱하게 마른 잎 끝이 곰실곰실 피어나며 파랗게 살아났다. 너무 어린 미역은 씹는 맛도 덜하고 비릿한데 이 미역은 도톰한 잎이 살아날수록
알싸하고 깊은 향이 진하다. 지난 여름 중학교 때 자취하던 집 오빠가 시이소 만한 걸로 한 오리 보내준 것이다. 어느 해 여름엔 말없이 포도
상자를 일터의 경비실에 두고는 만나보지도 않고 가더니 작년 연초엔 오징어 두 축을 골판지 박스에다 꼼꼼하게 포장해서 또 일터로 보냈다.
처음 그 소포를 받았을 때 김0숙 이라는 처음 보는 보낸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받는이 란은 분명히 병원의 주소와 내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그 오징어를 다 먹어갈 즈음에야 한 통의 전화로 김0숙씨가 그 오빠의 아내임을 알았다.
지금이야 달리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으니 오빠라고 하지만 두 살 위인 그 때는 절대로 오빠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빠 소리만 못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정면으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지금 만난다면 실수 없이 기억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오직 기억나는 것이라곤 교복에 맞춰 쓰고 다니던 까만 학생모자와 겅중 올라간
대문 아래로 보였던 바짓부리뿐이다.
처음 자취하겠다고 집을 알아보러 갔을 때 기억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간직하고 있다. 사과꽃이
필 무렵이었다. 퇴비를 주어 부드러워진 사과밭은 온통 끝이 보이지 않았고 벌들이 잉잉거리는 그 환한 꽃 그늘 아래에서 꽃보다 더 고운 웃음의
아주머니가 나를 맞아주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 비어있는 방이고 조용한 여학생이 혼자 있게 돼서 우리가 더 좋다' 면서 방세도 시세보다 덜
받으셨다. 사과 상자 하나를 얻어 비닐을 깔고 그것을 그릇장으로 사용했다. 그릇이래야 국그릇 밥그릇 수저 한 벌뿐이었다. 혹시라도 친구가
놀러오면 한 사람은 숟가락을 쓰고 한 사람은 젓가락을 이용했다.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나 양말 등을 빨고 그래도 시간이 나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장독대를 닦았다. 우물가로 한참 익어 가는 포도송이가 하도 탐스러워 이담에 커서 내집을 갖게 된다면 난 마당가에 꼭
포도나무 한 그루를 심을 거라고 볼 때마다 마음먹곤 하였다. 등에 느껴지는 주인집 아저씨의 흐뭇한 시선을 생각하면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등이 따뜻하다.
봄이면 사과꽃에 온통 파묻히던 그 집엔 나보다 네 살이 위인 J라는 언니와 두 살 위인 M오빠, 그리고
한 살 아래 S 또 그 아래로 아침마다 자고 일어나면 우선 한 시간은 울어야 그치곤 해서 짠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초등학교 일 학년 H가
있었다. 다 친하게 지냈지만 유독 J언니와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사과밭 깊숙이 들어가서 내가 받은 연애편지를 꺼내 함께
보며 키득거리다가 그도 시들해지면 '리칭의 스잔나'같은 노랠 부르곤 했다. 들판 건너 미루나무 사이로 보이는 동네에선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오르고 학교 건물 뒤로 고운 황혼이지면 오목천변으로 난 자갈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싸늘한 바람 부네....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우린 마치 불치병에 걸린 소녀처럼 슬퍼서 노래의 끝 소절을 자신도 모르게 울먹이곤 하였다.
돌돌 소리를 내며 오목천은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쉼 없이 흐르고 그 물빛에 고운 석양이 비쳤다. 차차로 어둠이 차 오르는 냇둑 길을
공연한 슬픔에 빠진 소녀들이 천천히 걸으면 발아래 자갈돌은 정말로 자갈자갈 소리를 내며 울고 오목천 냇물도 낮게 흐느꼈다. 간혹 해질 무렵이면
그 시절 자갈돌 밟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아무 여행지를 지나다가도 들판건너 저녁연기만 보면 그때처럼 슬퍼진다. 생각해보면 심각할 거
하나 없었는데 이유 없이 울고싶은 게 우리의 소녀시절이 아니었는지....
국이 끓을수록 깊고 풍부한 해조류의 시원한 맛이 집안
가득하다. 그 오빠는 포항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 산소에 가는 길에 한 번 들렀는데 모두 들에 가시고 아무도
없어 박카스 한 통에 명함을 꽂아두고 왔더니 그것을 보고 보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오빠하고 비밀스런 추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번 잠시 어딜 나갔다 들어와 보니 내 방 문틈에 작은 쪽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는데 풀어보니 내가 저녁에 청천만리로 나오면 친구가 복숭아 한
박스를 내기로 하고 나오지 않으면 자신이 복숭아 한 박스를 내기로 했으니 꼭 좀 나와 달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나는 그런 장난에 끼어
들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마치 내가 복숭아 한 상자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 같아 조용히 그 쪽지를 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후 복숭아를 냈는지 안
냈는지는 모른다.
열면 너무 탈까 막으면 꺼질까 노심초사 연탄아궁이를 들여다보며 마음졸이는 동안 채 2년 남짓한 자취생활도 아쉽게
끝났다. 연탄 가스 중독이 되어 거의 죽을 뻔한 새벽, 아주머니가 된장찌개가 맛있게 되었다고 한 그릇 주셨는데 나는 막 콩잎과 찬밥으로 한 끼를
때웠던 저녁, 이른 아침 이슬에 젖은 고운 홍옥이 이마에 부딪힐 정도로 많이 달렸던 내 방 앞의 사과나무를 뒤로하고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큰언니가 다니는 공장에 견습사원으로 취직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동안 등록금이라도 벌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참
아득한 세월이 흐를 동안 단 한 번도 그 오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징어에 대한 답례로 커피를 몇 통 보냈더니 오빠 대신 아내가 전화를
주었다. 온화한 목소리로 '포항 오시면 꼭 연락주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해안으로 여행 갔다 오는 길에 포항
죽도시장엘 들렀다. 습관적으로 핸드백을 열어봐도 휴대전화는 없고 저 만치 공중전화가 그 어느 때보다 다감해 보였다. '걸어볼까, 아니야 연초
가족끼리 휴가를 즐기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차의 시동을 걸었다. 명멸하는 불빛사이를 헤쳐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잘 한 것 같기도 하였다. 지금 그 오빠의 눈빛과 미소가 청운의 꿈을 간직한 소년의 까만 모자와 바짓부리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추억은 오래된 과거 속에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생들깨를 갈아 베보자기에 걸러 끓인 미역국이 구수하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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