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칠호 일행이 장호의 시신을 확인한 것은 거의 시신 수습 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장호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밖으로 꺼내어진 1호차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장호는
몸에 신분을 확인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신원 미확인자를
모아놓은 천막에 누워있었다. 칠호 일행은 사고 현장 부근에서 사나흘을 묵으면서 수시로 시신은 확인하러 드나들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장호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장호씨가 확실합니까?"
경찰이 칠호에게 물었다.
"네, 확실합니다."
"시신 처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경찰의 물음에 칠호가 치수를 쳐다보며 망설였다. 치수는 장호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차안에서도 수시로 코카인을 해대는 치수가 못내 꺼림칙해서
경찰들이 득실대는 이 곳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칠호의 말에 그래도 굳이 자신의
눈으로 시신을 확인하겠다며 따라온 치수였다. 치수의 표정이 굳은 것을 봐서는 치수
역시 혹시나 장호가 기적적으로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화장을 하는 것이 좋겠군요."
말이 없는 치수를 보며 칠호는 알아서 화장을 결정했다. 치수는 별 달리 이견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장호가 숨긴 물건을 찾아낼 수 있는 묘수를 고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치수는 아까부터 천막 바깥의 비가 내리는 모습만을 초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화장을 하는 걸로 하기로 하죠."
"잠깐."
경찰의 말에 치수가 갑자기 제지를 하고 나섰다. 치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냉동 보관이 언제까지 가능합니까?"
"글쎄요. 인근 병원의 시체 보관실에 빈자리가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군요. 워낙에
먼저 발견된 희생자가 많아서요. 시체가 많이 부패되기도 하고 그랬으니 화장을 하시던가 매장을 하시던가 얼른 처리를 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뇨. 일단 병원의 시체 보관실에서 냉동 보관을 시키고 싶은데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대책 본부 측에서 좀 알아봐 주십시오. 정 안 된다면 경찰 측의 시체 보관소를 돈을 주고 이용할 용의도 있습니다."
"뭐 굳이 그러시다면야 저희가 알아보겠습니다만,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이유는 묻지 마시고,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칠호는 치수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치수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장호 녀석
역시 치수의 밑에서 충성을 바쳤던 놈이니 치수가 잘 알아서 처리를 하겠지.
칠호와 치수는 다시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경찰을 뒤로하고 천막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계속 내리고 있었다. 천막 앞에 서 있던 기사 녀석과 현수가 각자 칠호와 치수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바쳐들었다. 칠호와 치수는 비를 맡지 않았지만 기사와 현수는 짧게
깍은 머리와 검은 실크 양복 어깨 선 위로 빗물이 들쳐 온통 번들거렸다.
넷은 그렇게 차로 향했다. 반짝반짝 잘 닦여져 있던 구두에는 벌써 흙탕물이 튀어버렸다. 칠호는 이놈의 진흙길에 넌덜머리가 났다. 한번 왔다갔다할 때마다 바지자락에
흙물이 묻어 온통 스타일을 구기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제 아스팔트 잘 닦여진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겠군.
"잠깐!"
치수가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일행은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칠호가 물었다. 치수는 대답없이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칠호는 치수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어림잡아 함께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 두 명에 남자 하나. 그리고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과 또 한 명의 사내가 그들 일행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대충 보기로 세 명 중 한 명이 희생자 유가족인 것 같았고, 방송국에서
그들을 취재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며칠간 사고 현장을 오가며 수도 없이 보아온 장면이었다.
그들이 취재를 거부했는지 카메라를 든 사람은 카메라를 내렸고, 함께 온 사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 명의 젊은이들은 먼저 제갈길을 갔다.
"왜? 뭐 아는 기자야?"
칠호가 치수에게 물었다. 치수의 알 수 없는 전력을 생각해볼 때 방송국 사람과 안면이 있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칠호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수의 시선이 따라가는 곳은 아까 그 세 명의 젊은이들이었다.
"현수야. 저 애들 좀 따라가 봐라."
치수가 낮은 목소리로 현수를 향해 말을 했다. 현수는 손에 든 우산을 쳐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치수는 말없이 우산을 빼앗아 쥐었다. 현수는 우산을 치수에게 넘겨주고는
세 명이 걸어간 쪽으로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현수가 멀리 뛰어가 버리고 칠호와 치수는 차로 돌아왔다. 칠호와 치수가 뒷좌석에
타고, 기사는 시동을 걸어 히터를 켰다. 비 때문에 날씨가 여간 쌀쌀한 것이 아니었다.
칠호는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물었다. 젠장, 이젠 정말로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에 사라져버린 물건에 대한 독촉이 들어올 것이었다. 50만 달러. 이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직의 신용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는 셈이었다. 물론 현금이나 대체물로
결재를 해야만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호는 다시 한 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치수를 쳐다보았다. 치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치수는 태평스럽게도 다시 안주머니에서 코카인을 꺼내고 있었다. 사방에
경찰이 깔린 곳에서 또다시 마약이라니. 칠호는 치수가 실제적인 자신의 아랫사람이었다면 이번 일은 죽음으로 책임을 지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라 생각했다. 칠호가 치수에게 적극적으로 책임을 묻지 못하는 까닭은 치수가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가고
있는 까닭이었다. 50만 달러가 사라져버렸다 하여도 그 50만 달러 역시 치수가 벌어들인 돈이니까.
현수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20분이 지난 뒤였다. 현수는 비를 잔뜩 맞아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서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래 어떻게 됐어?" 치수가 현수에게 물었다.
"지금 차를 타고 가는 걸 봤습니다."
"어느 쪽으로?"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 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차 출발시켜. 따라가자."
칠호와 치수가 탄 검은 승용차는 양쪽으로 흙물을 튀기면서 출발했다.
"저 차야?" 치수가 앞에 보이는 차를 보며 물었다.
"네."
"계속 따라가."
"왜 그래? 누구길래?" 궁금해진 칠호가 치수에게 물었다.
"나중에 설명할게." 치수는 칠호의 질문을 간단하게 묵살해버렸다. 칠호는 잔뜩 자존심이 상했다.
"녀석들 뭔가 이상한 점 없었어?" 치수가 현수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고, 다만 갑자기 여자 애 하나가 뛰어가더니 사고 현장에서 나오는 찌그러진 카트 쪽으로 달려가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것만 한 번 보고서는 다시 돌아와서 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 카트를 손으로 만졌나?"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현수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치수는 현수의 대답을 듣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앞서 가던 차가 외곽의 허름한 여관 쪽으로 들어가더니 여관 앞에 차를 세웠다.
"그냥 지나쳐." 치수가 기사를 보며 말했다.
차는 그대로 여관을 지나쳐 달렸다.
"저기서 묵는 모양이군." 치수가 혼잣말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현수를 보며 다시
말했다.
"현수 네가 여기 남아서 저 애들 좀 감시해. 어디 이동하면 차 한 대 렌트해서 따라가.
그리고 나한테 보고하고. 알겠지?"
"네. 형님."
"여기 차 세워서 현수 내려라."
차는 여관은 지나쳐 한참을 내려온 상태였다. 기사는 차를 멈추고 현수를 내렸다. 현수는 다시 우산도 없이 비 내리는 밖으로 나와 섰다.
"우린 서울에 먼저 올라가 있을 테니까. 조금만 수고해. 좀 있다가 다른 애 한 명 보낼
테니까, 그 때 교대하고 서울로 올라와." 치수가 창문을 내리고 현수에게 말했다.
"네, 형님."
현수를 남기고 차는 다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